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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4-15장(1)

by 예다준 2022. 8. 11.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4-15장(1)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중심지는 갈릴리이다(참고. 4:12). 제자들을 부르신 곳도 (4:18-22), 대중적인 치유와 전도 사역을 시작한 곳도(4:23-25),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곳도 갈릴리였다. 마태복음 14장은 이제 주님의 사역이 갈릴리를 넘어 베뢰아 지역에 까지 확장되었다는 소식을 보고하므로 말씀을 시작한다. 그것은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던 분봉왕 헤롯에게 예수의 소문이 전해진 이야기이다(14:1). 예수님에게서 권능이 운동한다는 사실을 분봉왕이 알정도로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확장은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충돌이 가까웠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와 같은 어두운 예감을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을 오버랩하여 넌지시 암시하면서 마태복음 14-15장의 포커스를 한곳에 집중시켜 새로운 믿음의 눈을 뜨는 계기가 되도록 안내해주었다. 그것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배불리 먹이는 "목자-메시야" 예수이시다.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의 죽음에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메시야"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림과도 같다. 

  하지만 마태가 그려주는 이 그림은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논리로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현대인들은 A라는 주제를 말하고 그것이 다 끝나면 B라는 주제를 생각하고 말한다. 곧 한 가지 주제 중심의 직선적 사고이다. 한 가지 이상의 주제를 직선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어느 때는 A를 또 어느 때는 B를 사고하면 논리가 뒤죽박죽되어 문맥이 정리되지 않고, 청자나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아마 이것이 더 심해지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담을 받으라 권면받게 될 것이다). 이 논리로 마태복음 14-15장을 읽으면 이것이 문제다라고 꼭 집어 말하지는 어렵지만 무언가 이상하고 잘 맞지 않은 숨어있는 장벽을 만나게 된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히브리인이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인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문제는 히브리인의 사고와 표현 방법이 현대 우리들과 달리 병렬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연관된 두 개 이상의 주제를 한꺼번에 말했다. 그들은 그 주제들로 짝을 만들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논리를 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뭐 그런 것이 있나?”라 할 정도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논리 방식은 무엇보다도 화자와 청자(독자)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목적을 위해 발달했다 한다. 오늘날과 같이 표현과 기억(저장)을 위한 도구들이 거의 없었던 고대인들은 기억과 전달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하기 위해서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사고하고 표현하는 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이 무언가 이상하고 어렵다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마태가 우리와 다른 생각과 표현의 틀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4-15장에도 이 틀이 있다. 그래서 복음서를 현대의 직선적 사고로 보면 글자나 문단 또는 문장 속에 있는 의미는 알 수 있지만 평행법 속에 숨어있는 의미는 발견하기 어렵고 문맥이 자꾸 끊기거나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인 다른 문맥이 보여서 성경이 중구난방이라는 의혹이 사라지질 않아 짜증이 난다. 마태복음 14-15장은 이런 증세가 생기는 전형적인 성경이다.

 


1. 마태복음 14-15장 기사들의 특징 분석

  마태복음 14-15장의 이야기들(기사들)을 보면 아래 목록과 같이 기적과 치유들이 연신 나온다.

오병이어(대중 급식 기사)
물 위를 걸어오심
대중 치유
논쟁(비유 1개)
가나안 여인 딸 치유
대중 치유
칠병이어(대중 급식 기사)

  마태복음 14-15장에 담긴 이야기들의  목록들을 보면 어떻게 이 성경이 예수님을 그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하고 배불리 먹이시는 목자-메시야로 그리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석을 진행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일단 각 기사들을 장르별로 보면 2개의 기적 기사 + 1개의 치유 기사 + 1개의 논쟁(1개의 비유) + 2개의 치유 기사 + 1개의 기적 기사로 구분된다. 이를 보다 관찰이 용이하게 하향식으로 배열하면 대략 이렇다. 

기적 기사- 2개
  + 오병이어(대중 급식 기사)
  + 물 위를 걸어오심
치유 기사 - 1개
  + 대중 치유
논쟁(비유 1개) - 1개
치유 기사 - 2개
  + 가나안 여인 딸 치유
  + 대중 치유
기적 기사 - 1개
  + 칠병이어(대중 급식 기사)

  참고로, 예수의 소문을 들은 분봉왕 헤롯이야기(14:1-12)는 앞 장인 13:53-58을 위한 추가 말씀이기에 14-15장 분석에서 제외된다. 이 부분의 메인 메세지는 1-2절에 예수의 소문(권능)이 헤롯에게 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앞 장인 13장에서 예수의 고향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의 지혜와 능력에 놀랬다는 말씀(13:54)과 문맥이 직결되어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신적 권세는 예수의 고향 사람들 소수만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이 알 정도로 굉장했음을 헤롯왕에게 있었던 일을 통해 알려주려 했다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이 부분을 13:53-58을 위한 추가 말씀으로 본다. 
  이 부분은 앞의 기사는 물론 뒤에 이어지는 기사와도 이어진다. 이 부분에는 예수의 소문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죽음이 전체 12절에서 무려 10절을 차지하는 많은 분량으로 할애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본문 말씀 이전에 있었던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옛 이야기인데 마태는 이 이야기를 삽입했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 기적을 연결하는 문맥이라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오병이어 기적은 세례 요한의 죽음과 같이 예수의 죽음을 전망하여 행해진 기적이라 보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위 도표가 현대적 분석으로 알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성경 본문의 내용과 주제들을 중심으로 상호관계를 상세하게 살펴보면 마태복음 14-15장의 기사들에는 주의해야할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1-1. 두 개의 대중 급식 기사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처음과 마지막이 대중 급식 기적(오병이어와 칠병이어)으로 같다는 점이다. 두 기사는 미세한 몇몇 부분에 차이가 있지만 기적의 전체적인 세팅과 내용이 같다. 
  두 기적을 비교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소의 차이이다. 오병이어 기적은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행한 기적이지만 칠병이어는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들을 위해 나타난 기적이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 부터 교회는 두 급식 기적을 통해서 메시야의 잔치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이해했다. 이 해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두 급식 기적이 서로 문맥으로 상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 정도로 두 급식 기사의 상응관계를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태는 두 대중 급식 기사를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과 연결시켜 무리를 먹인 기적 이상의 종말론적 의미를 바라보기를 원했다. 이는 두 급식 기사에는 26:26의 최후의 만찬 말씀과 같은 예수님의 네 가지 행동이 순서 그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마 26:26은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네 개의 행동을 하셨다 기록했다.

  "떡을 a들고(취하다, 람바노 λαμβάνω) b축복기도를 드리신(칭찬하다, 유로게오 εὐλογέω) 후에 c쪼개어(자르다, 크라오 κλάω) 제자들에게 d주셨다(주다, 디도미 δίδωμι)

  이 표현은 두 개의 급식 기사에 표현과 순서가 그대로 나온다. 단지 달라진 것은 이방 지역에서 행한 칠병이어 급식 기사에서 26:26의 "축복기도를 드리다"(유로게오 εὐλογέω)가 "축사하다"(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로 달리 표현된 것뿐이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a가지사(람바노 λαμβάνω) 하늘을 우러러 b축사하시고(유로게오 εὐλογέω) 떡을 c떼어(크라오 κλάω) 제자들에게 d주시매(디도미 δίδωμι)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5: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a가지사(람바노 λαμβάνω) b축사하시고(감사하다, 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 c떼어(크라오 κλάω제자들에게 d주시니(디도미 δίδωμι)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이것은 두 대중 급식 기사인 오병이어와 칠병이어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성만찬을 그대로 복사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의 잔치를 내다보는 종말론적 잔치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14:19의 "앉히시고"(아나클리떼나이 ἀνακλιθῆναι)는 단순히 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게 하다", "눕게 하다"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으로 예수님의 오병이어는 잔치 자리에 기대어 앉는 장면을 연상케 하여 오병이어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잔치임을 암시한다. 
  마태의 표현에 담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그리고 두 급식 기사와 마지막 만찬 사이의 특별한 상관관계는 두 급식 기사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분명히 두 급식 기사는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졌고, 문학적 구조에서 대칭되는 짝으로 기능하도록 배치된 것이다. 

  그런데 두개의두 개의 대중 급식 기적은 서로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4-15장 기사들의 중앙에 위치한 논쟁 기사와 상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이어지는 1-4에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면 마태복음 14-15장은 처음과 마지막인 두 개의 대중 급식 기사가 알려주는 예수님의 모습과 구조의 가운데인 논쟁 기사가 알려주는 거짓 교사 바리새인의 모습이 정반대로 대조되는 구조를 독자들의 마음에 그려주는 일을 감당한다. 

 


  1-2. 두 개의 최상의 믿음이 강조된 기사

  두번째, 최상의 믿음이 강조된 기적과 치유 기사가 14-15장의 전면부와 후면부에 1개씩 나온다. 먼저는 14:22-33인데, 여기에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다 실패하는 믿음에 대한 기사가 합쳐져 있다. 이 기사의 주제는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고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핵심 문구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정체(기적이 아니라)를 강조하는 14:33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이고, 믿음을 강조하는 14:31의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가 된다. 


  이것을 기억하고 15:21-28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비록 다른 내용이지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도 예수의 정체를 강조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15:22)과 여인이 스스로를 개와 같다 낮추는 믿음(15:27)이 강조되어 있다.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명칭과 이에 대한 믿음이 두 기사의 공통적인 구조이다. 


  그런데 두 기사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마태복음이 그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대표하는 칭호로 서로 연관된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은 마태복음이 나타내려는 예수님의 정체의 정답으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를 잘알 수 있다(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예수님에 대한 일상적인 호칭(예로 "주님"처럼)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에 사용된 제한적인 호칭이다. 2번은 사단이 예수님에게(4:3,6) 한 번은 귀신이 예수님에게(8:29) 한 번은 십자가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27;54) 세 번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대적자들이(26:63; 27:40; 43) 사용했다. 대적자들은 이 칭호를 비아냥거리는 상황에서 사용했기에 의미가 없지만 다른 사용 예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의미심장한 사건에서 중심 역할을 맡은 존재가 사용한 경우로 예수님의 정체를 나타내는 극적인 사례들이다. 그중 제자들이 이 칭호를 사용한 두 경우 중 하나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최상의 깨달음에 이른 최초 경우가 된다.


  가나안 여인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도 비슷하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이 유대인들의 메시야적 칭호를 사용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명칭은 마태가 마태복음의 시작에 표제로 사용할 만큼 마태복음 전체를 주도하는 중요 명칭이다(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런데 이 명칭을 마태복음에서 이방인이 사용한 사례는 오직 가나안 여인이 유일하다. 이는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저 자기 딸을 고치겠다는 수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1이 요구하는 바로 그 수준에 까지 이른 최상의 믿음임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 두 칭호가 두 기사에서 증언되었고, 그것이 동일한 구조를 가진 기사를 통해서 평행법의 짝이 될만한 자리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두 부분을 예수님에 대한 최상의 믿음을 강조하는 기사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3. 두 개의 대중 치유 기사

  세번째는 대중 치유 기사가 전반부와 후반부에 비슷한 양상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도 주목할만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치료받는 무리들이 눈에 띄게 능동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다. 


  첫번째 대중 치유 기사인 14:35을 보면,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이와 같이 두 번째 대중 치유 기사에서도 무리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왔다(15:30).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치료받는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적극적이고 이전 기사들과 비교해보면 긍정적인 믿음의 반응이 눈에 띄게 진전되어 있다. 14:36을 보면 병자들은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얻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또 두번째 대중 치유 기사인 15:31에는 병자들이 온전해지는 것을 보고 이방인들인 무리가 기이히 여겨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파격적인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치료받으려 온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전의 반응에서는 볼 수 없는 대단히 믿음이 진전된 놀라운 반응들이다. 
  유대인들의 이전 반응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치유 능력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 혹평을 했고(12:22-24), 11:28에는 주님께서 가장 많은 능력을 베푼 고라신과 벳세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소돔보다 더 참혹한 심판을 받으리라 주님의 비판을 받았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에 대해 비슷한 불신앙의 반응을 보였다. 8장을 보면 가다라 지방의 이방인들은 주님께서 귀신 들린 광인을 치유할 때 돼지 떼가 몰살하는 것으로 인해 주님을 그 지방에서 나가게 했다(8:28-34). 이러한 이전 사례들과 비교해 보명 두 기사에 나오는 무리들의 반응은 대단히 호응적이다. 그래서 두 부분을 보면 마치 같은 분위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이 들릴 정도다. 

 


  1-4. 한 개의 논쟁 기사

  마지막 네번째는 논쟁이 1개 있는데, 논쟁의 위치가 의미심장하다. 이 기사는 앞과 뒤에 기적과 치유 기사가 각 3개씩 있다. 그래서 논쟁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 앞과 뒤의 기사들은 모두가 서로 대조되는 모양을 만든다.

• 오병이어
•• 물 위를 걸어오심 - 믿음 강조
••• 대중 치유
•••• 논쟁과 비유
•• 가나안 여인 딸 치유 - 믿음 강조
••• 대중 치유
• 칠병이어

  이 모양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평행법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쨌든, 마태복음 14-15장의 기사들이 나타내는 모양은 우연히 된 것으로 보기 아주 어렵다. 의도적인 배치로 보이고 저자인 마태는 히브리적 평행법을 아주 잘 사용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구사된 문학적 구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부분의 특징은 마태복음 14-15에 실린 다른 기사들과 내용이 전혀 다른 논쟁기사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기적과 치유와 관련성이 있는 표적 주제가 나오지만 실제로 기적은 나오지 않고 표적을 구하는 태도에 대한 주님의 비판과 교훈이 나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 모음 한가운데에 논쟁 기사가 있고, 이 위치에서 기적 기사들을 대조할 수 있는 접지 부분으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용은 어떤가? 여기에서 주님의 비판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누룩이라 표현된 것)과 그 가르침의 기초인 마음자세인데,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람의 계명으로 헛되이 경배하고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외식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이들의 사람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관찰 사항이 된다. 이는 이것이 마태복음 14-15장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중 급식 기사가 그려주는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정반대로 비교되기 때문이다. 마태는 두 급식 기사에서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두번 반복해서 강조했다(14:14과 15:32). 주님께서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치료해 주시고 하늘의 양식을 먹이셨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핑계 삼아 희롱하고 결국에는 사람을 무시해서 멸망의 구덩이로 인도했다. 마태복음 14-15장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이것이 마태가 대중 급식 기사 사이에 바리새인과의 논쟁을 위치한 전략이라 판단할 수 있다. 즉 마태는 전체 구조의 시작과 마지막을 중심과 대조하려 했다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히브리적 평행법인 교차대조법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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