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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6-17장(1)

by 예다준 2022. 8. 13.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6-17장(1)

 

 

  마태복음 16-17장에 와서 예수님의 사역에는 대전환이 일어난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기적과 가르침으로 전파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는 일에 주력하셨다. 이제 마태복음 16-17장에 와서 주님께서는 대중 전도를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인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매진하신다.
  메인 메시지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16-17장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먼저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사례와 부정적인 사례를 연달아 소개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대하는 제자들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강조되어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 같지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야기가 나오면 불신앙적 반응을 보여 여러 번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고 제자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들을 고려해서 전체 구조와 메세지 그리고 함의를 찾아본다.

 


1. 전체 구조 연구

  마태복음 16-17장을 저자인 마태의 문체와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일은 묵상에 묵상을 더 해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작업이다. 먼저는 해석에 논란이 많은 난해 기사가 있다. 성경이 기록된 지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난해 성경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행법을 이루는 병렬적 논리의 대응 짝들이 변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논리적인 확신을 주는 구조를 확정하기 어렵다. 대조를 이루는 짝들을 파악하는 데에 신학적 상상력이 제법 요구된다. 대응되는 짝이 단어나 문구에서 발견되지 않고 단락별 키워드를 잘 잡아야 볼 수 있다. 거기에다가 기술된 주제와 연관된 부가적인 말씀들이 첨가되어 있어서 복잡하게 보인다. 어쨌든 본문의 문체와 구조의 특징들을 따라서 전체 문학적 구조를 한 걸음씩 탐구해 본다. 

 

  1-1. 해결해야할 문제 :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17:24-27) 이해

  마태복음 16-17장의 문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가장 큰 곤란 거리는 17:24-27을 어떻게 이해하고 키워드를 무엇으로 잡느냐 하는 문제이다. 구조 분석에서 중요한 사항은 성경 본문의 핵심 주제나 키 워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이 이해에 따라 구조를 분석하는 방향이 달라지고 그러면 결과가 천차만별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구조 분석은 설명을 첨부하지 않고 구조 분석 결과만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는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마태가 이 내용을 전달하므로 우리에게 무슨 메세지를 주려했는지를 대답하려면 난점이 입을 막는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베드로의 집에 계셨다. 하루는 성전세를 걷는 자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예수)은 성전세를 내지않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낸다고 대답하고 집에 갔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17:25) 자기 아들에게 세금을 내라 말하는 임금은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타인에게 세금을 걷는다 대답했다.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17:26).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대답과 같은 말이다. 얼핏 보면 이 대화는 세금을 내는 자의 신분에 대한 말로 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시작한 대화는 사실 예수님과 베드로 본인에 대한 대화이다. 이는 곧 이어지는 27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그러나 우리(예수님과 베드로)가"로 이어지는 문장은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베드로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저희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 마치 동화같은 기적으로 돈을 얻게 될 것이니 그 돈을 주라" 말씀한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마태는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고 마무리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어디에 핵심주제가 있는지 방점을 찍기 어렵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기적(낚시해서 잡은 물고기 입에 돈이 있는 것)이 핵심 주제인지? 아니면 세금을 내지 않는 아들이 핵심 주제인지? 반대로 세금을 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임금, 즉 하나님의 타인이라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또한 성전세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갈려있다. 어떤 이는 성전세가 구약에서 부터 유대 남성이라면 누구나 감당했던 성전세라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로마가 자신들의 (우상의) 신전을 짓기 위해 거두었던 성전세라 주장한다. 그러면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성전세를 낸 주님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다르게 되어 본문 해석은 미궁에서 미궁으로 빠져버리게 된다. 

  그러면 어디에 해석의 중심을 삼아야 할 것인가? 본문을 통해 몇 가지 필터가 될만한 주의사항들을 살펴본다.
  첫째로, 임금의 아들됨으로 예수의 정체를 강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태복음 16-17장에는 예수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강조하는 기사가 두 개(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선언)가 있다. 그래서 이 부분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무려 세 번이나 증거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 만을 아들이라 묘사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포함해서 "아들들"이라 묘사했다. 그러니까 이곳의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의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임금의 자녀들"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두번째로 성전세(성전 문제)는 이 기사의 핵심 주제가 아닌 것 같다. 

  즉 이 기사는 성전세로 야기된 문제나 성전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관복음을 보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 지도자였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극단적으로 대치되었었고(요 2:19을 보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부정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형의 피고소 내용이 된다.) 성전 청결 기사를 보면 성전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상황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행사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과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성전세를 내는 문제에 대해 별 반응이나 가르침이 없고 오히려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평소 태도와 정반대 모습이 나와 다소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것은 성전세에 대해서 대화를 시작한 주님의 심중에는 성전이나 성전세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님을 강하게 반증하는 것이 된다. 

 

  세번째로 낚시로 잡은 물고기가 입 속에 물고 있던 동전을 사용하는 기적도 메세지의 핵심이 아닌 것 같다. 

  본문을 보면 마태는 기적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기적 자체에 대한 의미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보고도 없다. 기적이 가르침의 핵심이라면 주님께서 예언한 대로 기적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고 그 의미나 효력을 언급해야 하는데 그것들이 실려있지 않다. 이는 기적은 이야기를 위한 보조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주의사항들이 설득력이 있다면 우리의 관심은 한 곳으로 몰리게 된다. 그것은 본문에서 가장 엉뚱하게 보이는 문구인 27절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오해하다"는 "실족하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스칸달리조"이다. 즉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내지 않음으로 누군지 특정하기 어렵지만 성전세에 관련된 인물인 "저희"가 실족하여 망하는 것을 말한다. 마태는 이것이 성전세를 낼 필요가 전혀 없는 임금의 아들인 주님께서 임금의 타인처럼 성전세를 내는 이유라 이야기해준다. 이야기의 발단은 분명히 성전세이지만 결국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는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성전세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넘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성전세를 내는 결단, 자기 부인을 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결단은 성전에 대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뛰어넘어 어떤 누군가의 실족을 염려한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이라 놀랍다.


  논리를 연이어서 기적을 보면, 기적은 예수님의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 또는 응답이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임금의 타인처럼 성전세를 납부했다. 그런데 납부한 돈의 출처가 가지고 있었던 돈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 획득한 것이라는 점이 특이한 것이다. 이는 성전세를 하나님께서 물고기가 동전을 입속에 물고 있도록 역사하시는 방법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예수님의 결심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 허락을 의미하게 된다.

 

  또 실족을 염려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이 본문의 해석 포인트임을 암시하는 단서가 18장에 있다. 18장은 전체가 제자 공동체 안에서 소자의 실족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실족하다"로 본 기사에서 주님께서 성전세에 관련된 인물인 "저희"가 실족하여 망하는 것을 염려해서 사용한 용어와 같다.  그러니까 본 기사는 18장 전체를 이끄는 서론이고 18장 전체는 본 기사의 본론으로 연결된 것이다.
  거기에 다가 마태는 본 기사와 18장 전체를 시간적 간격이 없는 밀접한 사건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추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태는 17장이 끝나고 18장이 시작되는 첫절을 "그 때에"로 시작해서 17장과 18장 사이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하도록 표현했다. 여기에서 "그때에"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에 대해 이야기한 바로 직후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의 정황으로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가지고 성전세를 걷는 자의 실족을 염려해서 나눈 이야기를 18장에서 곧 이어서 제자들에게 소자의 실족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다. 
  이상의 관찰 사항들을 종합해 보면 이 부분의 핵심 메세지를 실족을 염려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승인이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이 강조하는 바와 강조하지 않는 바를 모두 살리는 해석 방법이라 생각한다.

 


  1-2. 발견할 수 있는 구조적인 짝과 전체 구조

  17:24-27의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를 위와 같이 이해하면 본문 전체에는 대조가 되는 4개의 짝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결과를 얻게 되는 과정이 쉬운 것이 아니고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지도 않아 아쉽다. 추후에 보다 더 세밀한 분석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므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마태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열심을 집중해본다. 

  가장 우선 마태복음 16-17장의 이야기들을 순차적 방식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16:1-12)
2. 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
3.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첫번째 예고, 베드로의 꾸짖음, 제자도의 대가(16:21-28)
4. 하나님의 아들의 변모와 인자의 수난(17:1-13)
5. 제자들의 치유 실패와 한 겨자 씨 만한 믿음의 능력(17:14-21) 
6.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두 번째 예고(17:22-23)
7. 성전세와 물고기 반 세겔 기적(17:24-27)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순차적 하향식으로 정리를 하면 대략 7개의 이야기들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해석의 키워드를 잡은 것이 7번 이야기이다. 이 구분은 정답이 아니다. 분석자의 눈으로 단락들이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이라 판단한 결과, 곧 분석자의 해석의 결과이다. 우리의 관심은 분석자인 나의 해석 결과가 아니라 저자인 마태의 분석 결과이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마태의 문체와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나의 분석을 점검하는 것이다. 
  마태는 1세기 히브리인의 논리인 병렬적 사고를 사용했으므로 그의 저서인 마태복음에 병렬적 사고의 흔적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흔적을 찾는 일이 성경 저자 중심의 문체-구조적 해석 방법이다. 

  마태의 병렬적 사고에서 나온 흔적들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본문을 여러 번 충분히 읽어 핵심 키워드로 문학적 구조를 구성하는 방법과 신약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문학적 도구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본문에는 중요한 문학적 도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단락을 구분하고 단락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병렬법의 짝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때 어떤 단락이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중요 주제들을 빠짐없이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 하나만의 주제를 확정하는 것은 전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구조 분석에 어려움을 줄 가능성이 커진다. 

 


  1-2-1. 16:22-28과 17:24-27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에서 분석한 17:24-27의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기사는 핵심 키워드를 콕집어내기 어려운 본문이면서 동시에 아주 많은 키워드를 제시할 수 있는 본문이다. "기적"을 키워드로 볼 수 있고, "성전세"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본문의 특징을 살펴본 결과 "자기 부인"으로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 판단했다. 이 결과는 의외의 결과라 채택할지 망설였었다. 
  어쨋든 그 결과를 가지고 다른 단락들을 살펴보니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가 있는 16:22-28이다. 
  두 단락은 "자기 부인"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의 자기 부인은 제자들의 자기 부인이고 뒤의 자기 부인은 예수님의 자기 부인으로 짝이 된다. 이것은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의 키워드를 "자기 부인"으로 보지 않았다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1-2-2. 16:21-28과 17:22-23

  동일한 방식으로 두번째 대조의 짝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예고"인 16:21-28과 17:22-23이다. 마태복음 16-17장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는 누가 보더라도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그것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평행법에서 짝의 자리에 배치된 것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16:21-28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첫번째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고지인 16:21이고, 그다음에는 베드로의 실수와 제 목숨을 미워하는 제자도에 대한 말씀인 16:22-28이다. 두 부분을 하나로 보아야 할지 나누어야 할지는 대응되는 짝을 찾으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무조건 한 단락이라거나 두 단락이라거나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현대적 하향식으로 분류할 때 필자는 16:21-28은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때는 하나의 단락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16:21-28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생각했고, 마침 17:24-27의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와 16:22-28이 "자기 부인"으로 공통점을 가진 것을 발견했을 때 성경 해석에서 전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세인가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중간 결과를 보면 16:22-28과 17:24-27의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사가 "자기 부인"으로 대조가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예고"인 16:21과 17:22-23가 대조의 짝이 되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3a.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첫번째 예고
  3b. 베드로의 꾸짖음과 자기 부인의 제자도
6.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두 번째 예고
  7. 성전세와 물고기 반 세겔 기적

 


  1-2-3. 16:13-20과 17:1-9

  그 다음으로 대조의 짝이 되는 단락은 예수님의 정체가 선언되는 16:13-20과 17:1-9이다. 두 단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명하는 것으로 동일하다.  앞의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고백되고 뒤의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자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인간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다(16:17).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주신 신앙고백이다. 그러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두 단락은 서로 대조되는 짝을 이루어 신적인 증명으로 예수의 정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말할 수 있다. 

  나중에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인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역설적인 고백을 하고(27:4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다(27:54). 즉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핵심적인 기독론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태는 이런 식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2와 4가 짝이 되어 아래와 같은 모양이 된다.

2. 베드로의 신앙고백
  3a.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첫번째 예고
     3b. 베드로의 꾸짖음과 자기 부인의 제자도
4. 하나님의 아들의 변모
  6.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두 번째 예고
    7. 성전세와 물고기 반 세겔 기적

  이 모양은 동의적 평행법이다. 나머지 레이아웃의 모양이 어떤지 모르지만 이 모양만 보아도 마태복음 16-17장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태의 병렬적 논리에 따라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1-2-4. 16:1-12과 17:14-21

  이제 1과 5가 남았다. 두 이야기에서 대조가 되는 주제가 무리 없이 발견되면 이제까지 분석한 결과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체 과정을 되돌아 확인해야만 한다. 

 

  16:1-12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이 키워드로 보이고 17:14-21은 제자들의 없는 "믿음"이 키워드로 보인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을 불신앙이라 보면 제자들의 불신앙과 관련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스톱하면 마태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찾아냈다 할 수 없다 생각한다. 주목할 것은 마태는 믿음(불신앙) 주제보다 다른 것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이 세대의 패역함"이라는 다소 엉뚱한 표현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17:17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 들린 여자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했다 말하지 않고 "패역한 세대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했다 말한다. 제자들의 불신을 불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말하는 예수님의 논리는 상당한 비약으로 보여 지나치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마태의 의도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것은 16:1-12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에 대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과 상응하기 때문이다(16:4).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γενεα)"(17:17)와 "악하고 음란한 세대(γενεα)"(16:4)는 대조는 예수님의 의도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마태는 두 표현을 평행법에서 대조되는 자리에 배치해서 표현한 것이다. 
  앞에서 작성된 도식에 1번과 5번 단락을 첨가하면 마태복음 16-17장 전체에 대한  그림이 된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
  2. 베드로의 신앙고백
    3a.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첫번째 예고
       3b. 베드로의 꾸짖음과 자기 부인의 제자도
  4. 하나님의 아들의 변모
5. 제자들의 치유 실패와 한 겨자 씨 만한 믿음의 능력
    6.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두 번째 예고
      7. 성전세와 물고기 반 세겔 기적

 


  1-2-5. 마태복음 16-17장 전체 구조

  위의 관찰 결과를 평행법으로 도식화하기 위해 기호를 사용하고 주제를 수정해서 보다 보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하면 전체 구조가 만들어진다.

A.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위한 표적
  B. 베드로의 신앙고백 :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C. 죽음과 부활 고지
       D. 예수를 따르는 방법 : 자기 부인
  B'. 하나님의 예수 정체 선언 : 하나님의 아들
A'.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위한 해답
   C'. 죽음과 부활 고지
      D'. 실족을 염려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

  마태복음 16-17장의 구조는 변형된 동의적 평행법이 된다. 변형되었다는 말은 평행법 하단부의 A'와 B'의 위치가 바뀐 것 때문이다. 이것은 평행법을 사용하는 저자의 선택에 좌우되는 결과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현대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일 수는 있다. 하지만 평행법의 모양이 중요한 것은 각 기사나 말씀들이 기록된 순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조를 이루는 짝들이 만든 레이아웃과 레이아웃 안에 담긴 짝들의 역학 관계를 알아내는 것이다. 구조적 메세지를 말한다. 
  사실 기사나 말씀들의 순서는 사건이 실재로 일어난 순서일 수도 있고, 성경 저자의 마음에 있는 메세지를 돋보이기 위해서 편집된 순서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혁주의적 해석학을 따르는 해석자는 모두가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단락이나 구절, 단어 등으로 나타나는 메세지와 함께 마태의 문체와 구조를 통해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메세지도 함께 존중해야만 한다.  

  C와 D를 구분하는 것도 논의사항이 될 수 있다. C와 C'를 비교하면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곧 바로 제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C'에는 제자도에 관한 말씀이 없고, 제자도(D)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C와 C')과 구분되는 새로운 주제이다. 또 D는 말씀의 분량이 죽음과 부활 고지(C)에 비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무조건 C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에는 비중이 너무 크다. 이런 이유로 D를 C와 구분하여 새로운 레이아웃으로 본다. 
  동의적 평행법은 대조되는 짝(pair)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서로 상응하는 평행법이다. 이에 비해 평행법의 짝이 교차해서 열거되는 것을 교차대조법(키아즘, Chiasm)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교차지점, 즉 중심이 있다. 이것이 평행법이 구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세지가 된다. 하지만 동의적 평행법은 중심이 없이 대조되는 짝들이 메세지를 가지고 있고, 짝들이 나타내는 메세지들을 모아서 연결해보면 구조적인 메세지가 손에 잡힌다. 

  앞에 제시된 전체 구조는 한 눈에 보기 쉽도록 단락의 내용들을 생략한 그림이다. 연구를 위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표기된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설명이 첨가된 그림을 첨부한다.

A.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위한 표적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주의
  B. 베드로의 신앙고백 :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 베드로에 대한 말씀
    C. 죽음과 부활 고지
       + 베드로의 방해
      D. 예수를 따르는 방법 : 자기를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짐
  B'. 하나님의 예수 정체 선언 : 하나님의 아들
    + 임의로 대우받은 세례요한 말씀
A'.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위한 해답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말씀
      C'. 죽음과 부활 고지
         + 제자들의 근심
        D'. 실족을 염려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승인
          + 물고기의 한 세겔로 성전세를 낸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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