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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6-17장(2)

by 예다준 2022. 8. 13.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6-17장(2)

 

 

2. 레이아웃별 연관관계 해설

  히브리적 평행법에서는 레이아웃보다 레이아웃들이 대조되어 만들어내는 의미, 그리고 각 레이아웃들의 의미들이 모여 나타내는 전체 의미가 중요하다. 이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은 평행법과 평행법을 구성하는 레이아웃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히브리인들의 평행법은 궁극적으로 최상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고안된 실천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굳이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법으로 저자의 문체와 구조적 특징들을 살펴보는 이유도 평행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2-1. A와 A'

  A와 A'는 공통적으로 예수에게 합당하지 않은 세대에 대한 비판이 중심 주제이다. A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사자라는 표적(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 요구했다. 이 요구에 대해 주님께서는 16:4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 응답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A'에는 귀신을 내좇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17:17에서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셨다.  


  여기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말은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이스라엘에게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었고 제자들에게는 귀신을 좇아내는 가르침과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늘의 표적을 보고도 (새) 시대의 표적이라 분별하지 못했고(16:3), 제자들 또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축사를 할 수 없었다(17:19-20). 아주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대적자로 악역을 담당하는 바리새인(사두개인도 포함)과 주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진 제자들 모두가 옛 시대의 잔재를 가지고 있어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는 고난의 메시야의 길은 물론 예수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하는 제자도에도 치명적인 문젯거리가 된다.

 

  또 두 문단이 서로 연관된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의 해결책이 공히 제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해 제시된 해결책은 "요나의 표적"이고(16:4),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게 주어진 해결책은 "겨자 씨 한 알 같은 믿음"(17:20)이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를 통해 전달되는 예수님의 구원론의 핵심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이라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A와 A'  짝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들에게 말하는 메세지이다.

 


  2-2. B와 B'

  B와 B'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인의 문학적 구조와 그 구조를 이루는 짝이 있음을 염두한다면 금새 두 문단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문단은 예수의 정체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서로 상응한다.


  B에서는 베드로가 예수께 신앙고백을 한다. 이 신앙고백의 내용은 예수의 정체인데, 주님께서 원하는 바로 그 정답이다. B'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의 정체를 선포하신다. 그런데 이 두 기사가 말하는 예수의 정체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 동일하다(16:16 vs 17:5).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여기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두 번이나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문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문맥인 A를 보면 당시 유대 사회의 최상층이고 선생인 바리새인이 예수의 정체를 분별하지 못했다. 이를 더 확대해서 앞의 14-15장을 보면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지혜와 능력을 보았지만 육신적인 지식으로 예수님의 신적인 정체를 무시했다(13:53-58). 또 예수님 무리의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정결법(사람의 유전)을 핑계로 부정하다 시비를 걸었다(15:1-6).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서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앞 기사인 A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불신앙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라 비판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16:5-12).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지적하셨다(17:9-10). 이는 제자들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이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새 시대의 표적을 나타내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고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B에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던지신 것이고(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친히 예수의 정체를 명확하게 선언하신 것이다. 

 


  2-3. C와 C'

  이 부분의 연관성은 동일하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한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명백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보면 두 문단은 모두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고지 + 제자들의 부정적 반응의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더 커진다. 
  마태는 C'에서는 제자의 부정적인 반응을 간단하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17:23)로 간단히 표현했지만 C'에서는 (신앙고백을 정확하게 고백했던)베드로가 사단의 역할을 담당하는 황당한 실수로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지만 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야라는 것은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그것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잘못이었다(16:23). 
  예수님의 불과 같은 지적은 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각성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각성은 온전한 믿음으로는 모자라 보인다. 그래서 마태는 C'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부정적이지만 간단하게 "심히 근심하더라"라고 묘사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사단의 일이 되는 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해답이 다음 레이아웃인 D와 D'에 나온다. 

 


  2-4. D와 D'

  앞에서 해결과제로 삼았던 D'를 실족을 염려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승인으로 보면 "자기 부인"이라는 주제로 D와 대조되는 짝이 만들어진다. D에는 자기 부인이 문자적으로 나타나지만 D'에는 자기 부인이 문자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아들인 예수님이 임금의 타인처럼 성전세를 납부하는 것은 자기 부인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자기 부인이 어떤 사람의 실족을 염려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목자-메시야의 불쌍히 여김과 일치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제자들의 자기 부인은 구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필요충분 조건이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실현되고 제자들의 자기 부인은 제자도로 실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6-17장에서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제자들의 자기 부인을 대조하는 짝은 의미가 아주 크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선포하는 공적 사역이 끝나고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서서히 고난 받는 메시야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주기 시작하는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16-17장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제자들이 직면한 믿음의 도전은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제자들은 새로운 믿음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다. 이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믿음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해를 하지도 못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마태복음 16-17장에 실린 기사들이다. 이것들이 사람의 눈에는 그저 시간이 지나가면서 생긴 일들로 보이지만 성경 저자인 마태의 눈에는 거룩한 메세지를 가진 짝들의 연속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D와 D'는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고난 받는 메시야로서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승인되는 가장 최상의 삶이고 하늘의 기적이 허락되는 삶이다. 

 

3. 결론과 함의

  다른 장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곳의 구조분석은 미흡한 점이 많다 생각되어 씁쓸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전체 구조를 분석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주는 금보다 귀한 함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3-1. 십자가 중심의 믿음과 제자도의 중요성

  아마도 마태복음 16-17장에서 가장 유명한 성경이 말 한마디로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갔던 베드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감탄할 정도로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16:13-20). 그런데 그는 금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리다가 사탄의 졸개로 욕을 먹었다(16:21-23). 이것은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두려운 교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 중심의 믿음과 제자도의 결정적인 중요성과 그것의 구원론적 가치이다.


  마태복음 16-17장 이전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들어가도록 해주는 메시야라는 믿음이 주요 메세지였다. 그래서 제자도의 핵심은 예수를 참 하나님의 아들-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에 와서 구원받는 믿음과 제자도의 성격이 달라진다. 보다 더 구체화된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분으로 믿는 십자가 중심의 믿음과 예수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는 자가 참 제자라는 십자가 중심의 제자도이다. 

 

  혹자는 믿음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물을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마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과 같이 두 단계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두 단계의 믿음을 하나로 묶어서 고백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구받은 두 단계의 믿음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 예수를 얼굴로 보고 있는 제자들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두 가지 믿음은 예수를 따르는 현재에 계시되고 있는 예수님의 실존적 요구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믿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순서에 따라 두 단계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 중심의 믿음은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어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되물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십자가 중심의 믿음에서 십자가 중심의 제자도가 나오는 것은 사도들이나 우리나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십자가 중심의 믿음을 십자가 중심의 제자도로 확인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 중심의 제자도로 십자가 중심의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실천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로 반드시 확인되어야만 한다. 

 

  마태는 해당 주제들을 규칙적인 구조 안에 배치하여 독자들이 이 가르침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마태는 B와 B'에서 예수님에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배치하고 C와 C'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고지 다음에 제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배치하는 동일한 패턴을 만들어 놓았다. 십자가 중심의 믿음과 제자도, 그리고 두 가지 모두이 대한 제자의 실패와 부정적인 반응을 대칭이 되는 자리에 위치시켜서 두 번 반복한 것이다. 이 구조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B와 B')과 함께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C와 C')이 일치되지 않으면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반응하게 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안다고 해도 그의 십자가에 무지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 올바른 제자도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강조하는 바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같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중요성이다.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표현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십자가라 표현하지 않고 단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 표현하셨다(16:21). 제자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도에 십자가를 사용하셨다. 그러면 제자들이 듣기에는 예수와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 위해 제자들만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제자도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두렵고 가혹한 주문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중심의 제자도를 얼마나 심각하게 제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의 삶을 단 한마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것이라 단정하셨다(16:24).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삶은 자기 목숨을 얻는 삶이고(16:26) 동시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실 때 일어날 행위 심판에서 결정 사항이 될 것이다(16:27). 그러므로 예수의 참 제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야 하고(B와 B'),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도 믿어야 한다(C와 C').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십자가 중심 제자도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D).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멋드러진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교회에 다닌 사람에게 이 일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거부하고 말렸던 것과 같이 우리도 얼마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을 거부하고 피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지 않고 우리는 온전한 예수의 제자도 아닌 것이다. 그저 마태복음 16장에 머물고 있는 애매모호한 믿음을 가진 자, 언제든지 사단의 꽁무니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일 지도 모른다. 

 


  3-2. 보다 낳은 문학적 구조 분석의 필요성

  미흡하지만 문학적 구조 분석을 통해서 단어나 구절에서 파악할 수 있는 메세지가 아니라 성경 본문의 구조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구조적인 메세지를 살펴보았다. 이 방법의 장점은 성경 본문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워주고 성경 본문에 존재하는 주제와 모티브의 흐름과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도록 도와준다. 이를 조금 더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저자인 마태의 기록 의도와 그가 사용한 문체와 구조에 집중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이 분야에 탁월한 연구 결과들이 성경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절실하다 생각된다. 보다 상세하고 보다 전문적 분석이 풍부하게 담긴 연구 결과들이 한국 교회에 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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