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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8장(1)

by 예다준 2022. 8. 16.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8장(1)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예수님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타당한 것이 복음서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을 보게 된다. 복음서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제자들의 헌신과 좋은 믿음도 보여주지만 실수, 어리석음, 그리고 마지막엔 제자들의 배신도 보여준다. 마태는 이 모든 것을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이 사건들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보고해 주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보다보면 문득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예수님과도 때로는 오해와 불신앙으로 갈등을 겪은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천사처럼 아무 문제없이 잘 지냈다 보기는 어렵다. 혹시 주님 보시기에 믿음에 악영향을 끼치는 제자들 사이의 갈등은 없었을까? 아니면 이와 반대로 주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미담은 없었을까?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였던 일은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 즉 "예수-제자" 제자도는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는 윤리적인 측면만이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름으로 구원에 이르는 구원론적 측면도 있다고 마태는 설명했다. 그러면 제자와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마태는 설명할까? 이 질문에 집중된 성경이 마태복음 18-20장이다. 긴 설명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마태는 "예수-제자"의 관계를 제자도로 설명하는 것처럼 "제자-제자"의 관계도 동일하게 제자도로 설명했다. 마태는 제자와 제자 사이의 관계(제자-제자 제자도)를 단순히 공동체적 윤리 또는 에티켓 정도로 말하지 않고 예수를 따름의 또 다른 측면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제자 사이의 관계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느냐에 따라 윤리적인 측면은 물론 구원론적인 측면도 있다 설명했다. 
  마태복음의 진행을 보면 5-17장 까지는 "예수-제자" 중심의 제자도가 주로 나오다가 18장에서 제자도에 대한 관점이 "제자-제자" 중심의 제자도로 바뀐다. 이점을 염두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관찰해본다.

 


1. 마태복음 18장의 문체와 구조를 찾아서

  본 연구는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이에 대한 자료들은 책이나 인터넷 공간 안에 정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다. 여기에서는 성경 저자인 마태의 문체와 구조를 찾아서 현대인의 논리 구조로는 찾기 어려운 성경의 메세지를 찾아보는 작업에 집중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태가 사용한 병렬적 논리에서 나오는 문체와 문학적 구조들을 식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작업의 첫 단계는 우선 현대인의 논리 방식대로 18장 전체를 문단나누기 하는 것이다. 이 문단 나누기 결과로 전체 내용과 그 흐름을 보고, 각 문단 사이에 있는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18장 본문에 대한 문단 나누기는 5개 문단으로 대부분 일치한다. 

  1. 1-4절  
  2. 5-10절 
  (11절은 사본 문제로 없다.)
  3. 12-14절 
  4. 15-20절 
  5. 21-35절 

  국민학교 때 선생님은 문단나누기를 하면 반드시 요약해서 주제를 적어보라 하셨다. 주제를 정하지 못하는 것은 문단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단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단을 해석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내가 정한 문단의 주제는 성경 본문을 해석한 결과물이고, 이 해석이 성경 저자인 마태의 것에 얼마나 근접하느냐가 성공적인 성경 해석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각 문단의 주제를 결정해 본다. 이것은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지만 상관없이 실행해본다. 

  그런 다음 5개 문단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어떤 단락들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상관관계란 문단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 서로를 연결해 보면 새로운 의미가 나타는 것을 말한다. 단어, 문구, 아니면 긴 문장, 더 나아가서는 문장의 문법적인 구조, 또는 개념, 모티브, 어떤 것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 등이 비슷하거나 반대이거나 서로를 보완해주고 수식하는 등의 일련의 연관성을 말한다. 또 불필요한 반복, 엉뚱한 끼어듬도 연관성을 살필 때 주의해야 할 팁이다. 

  이런 것들에 주의해서 나누어 본 단락들을 살펴보다 연관성이 보이면 그 단락들을 하나의 짝으로 묶어 기억(또는 기록)한다. 이 짝들을 성경 저자가 기록한 순서대로 나열하면 일단 전체적인 문학적 구조의 틀이 생겨난 것이다. 딱히 어느 문단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일단 눈에 가장 쉽게 보이는 단락을 살펴보는 것이 팁 아닌 팁이다. 

  본문이 난해 구절이라 의미를 확정할 수 없을 때는 그 부분은 생략하고 이해되는 부분을 먼저 공략한다. 작업을 다 마치고 난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의 구조가 잡히면 난해 부분이 어떤 주제를 가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1-1. 2번과 4번 단락

  문단의 연관성이 가장 쉽게 보이는 곳은 2번과 4번 단락이다. 2번 단락의 주제는 "형제를 실족케하면 안 된다" 또는 "형제를 실족케 하면 화가 있다"이다. 
  4번 단락은 어떤 주제인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실족하지 않기 위해) 합력하여 권고하고 기도하고 징계하라"이다. 여기에서 "실족하지 않기 위해"는 문자로 없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태의 표현을 보면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합력하여 권고하고 기도하고 징계해야 하는 이유가 15절의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이기에 실족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마태는 형제가 범죄로 실족하지 않고 얻기 위해 노력을 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2번 단락과 4번 단락은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번 단락은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의 위험성을 각성시키는 경고에 방점이 있고, 4번 단락은 형제가 범죄로 실족할 위기에 있을 때 해야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데에 방점이 있다는 것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1-2. 3번 단락

  그 다음으로 주제와 문단의 상관관계를 결정하기 쉬운 단락이 3번 단락이다. 이 단락의 주제는 아주 선명하다. 그것은 "길 잃은 소자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기쁨)이다"이다. 다른 단락들을 살펴보면 3번 단락과 같은 주제를 가진 단락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3번 단락의 위치를 앞에서 살펴본 2, 4번 단락과 비교를 해보면 아래와 같이 3번 단락이 2, 4번 단락의 중간에 끼어 있는 모양임을 알 수 있다. 

  1. 1-4절  
  2. 5-10절 :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한 가르침
    3. 12-14절 : 길 잃은 소자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기쁨)이다
  4. 15-20절 :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한 가르침
  5. 21-35절 

  이 정도면 대략적인 전체 구조가 잡혔다 볼 수 있다. 물론 단락 1과 5가 다른 단락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문학적 구조의 모양은 달라진다. 하지만 가능한 모양을 설정하면 나머지 단락의 관계를 살피는 데에 집중하게 되어 효율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1-3. 해결해야할 문제 : 5번 단락 해석

  이제 단락 1과 5가 남았다. 두 단락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락 5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특히 5번 단락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의 결론인 35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관건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성경 해석가들에게 이 비유의 해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본문 자체가 난해한 것 때문이 아니라 교리적인 전제 때문이다. 비유를 보면 주인의 용서를 받은 종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므로 받은 바 용서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마태는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경고의 말로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교리적으로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 해석적 논쟁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는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어서 사람이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용서가 취소된다 보는 견해이고, 두 번째는 사람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보는 견해이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주인이 취소한 종에 대한 용서는 구원의 용서는 아니라 명확하게 말하지만 취소된 용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말을 마친다.  

  거두절미하고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정직하게 생각한다면 이 논란은 성경 본문으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비유를 보면 용서할줄 모르는 종은 받은 용서가 취소되고 옥에 갇히게 된다. 그의 비참한 신세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받은 바 용서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받은 바 용서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유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사항은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비유를 포함하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으로 시야를 넓히기만 해도 애매모호했던 것들이 선명해진다. 
  1) 먼저, 비유 본문에서 용서는 "빚의 탕감"이지만 비유의 서론인 베드로의 질문을 보면 용서의 진짜 의미는 "죄의 용서"임을 알 수 있다(18:21-22). 그러므로 비유의 결론인 "하나님의 용서의 취소"는 "죄의 용서 취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2) 또한 마태가 마태복음 18장에서 언급하는 죄는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구원을 좌우하는 죄이다. 이는 바로 앞 단락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마태는 형제가 죄를 범할 경우를 상상하면서 그가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말했다(18:17). '이방인과 세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숙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죄는 구원에 직결된 죄이다. 베드로는 이 죄를 이어받아 죄 용서를 몇 번이나 해주어야 하는가를 물었고(18:21-22), 주님께서는 대답으로 용서를 받았지만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참한 결말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런 문맥으로 보아 비유의 하나님의 용서의 취소는 구원론적 의미가 있다 결론 내리는 것은 마태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3) 실재로 형제 용서를 구원론적 전망에서 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전반부에 퍼져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산상수훈의 핵심이라 불리는 주기도문의 용서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선행하는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죄의 용서와 과실의 용서가 명백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6:14-15를 보면 "사람의 과실 용서"와 "하나님의 과실 용서"가 동의적 평행법으로 나온다.

a.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6:14a) 
  b.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6:14b)
a'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6:15a)
  b'.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5b)

  a 레이아웃은 사람의 일로 조건이고 b 레이아웃은 하나님의 일로 조건에 따른 결론이다. 주님께서는 같은 말을 긍정적 표현과 부정적 표현으로 바꾸어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용서가 조건이고 하나님의 용서의 결과가 되는 관계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명확하다. 중요한 것은 14-15절의 용서에 대한 조건과 결과가 12절의 죄사함에 대한 청원을 설명하기 위한 보충 주석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과실 용서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용서는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한 자에게 적용된다. 사람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의 메세지가 명확한 6장의 메시지는 불명확한 18장의 용서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더 이상 긴 설명없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생각한다. 마태복음에서 사람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임은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 용서에는 죄의 용서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용서의 취소에는 죄의 용서의 취소, 구원의 취소도 포함된다. 비록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나오는 용서의 취소가 죄의 용서의 취소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지만 직접적으로 연관된 본문이고 비유의 서론인 베드로의 질문과 간접적으로는 용서 주제가 있는 마태복음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용서의 취소를 죄의 용서의 취소로 보는 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해석이라 말할 수 있다. 비유의 첫 절인 마 18:23을 보면 이 비유는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그래서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 천국에 합당한 조건으로 형제 용서를 제시하는 것이라 결론 내린다.

 

  용서할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대해 더 자세한 분석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확인할 수 있다.

 

 


  1-4. 단락 1의 해석과 단락 5와의 관계

  단락 5를 앞의 결론으로 이해하면 단락 1과의 관계가 눈에 보인다. 단락 1과 단락 5와의 상관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는 "~와 같이"(ως)이다. 단락 1의 18:3에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가 나오고 단락 5의 18:33에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가 동일하게 나온다. 하지만  "~와 같이"(ως)는 단어 하나의 공통점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단락 1과 5에 공통으로 나온다. 


  단락 1의 주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이다. 이것을 줄여 표현하면 "~와 같이 천국 입성의 자격"이라 표현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어린이를 미완 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어린이들은 판단이 성숙하지 못하고 의존적이라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매를 들지 않는 것은 어른으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말할 정도였다. 이는 잠 13:24에 잘 나타나는데,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이고 더 나아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주님의 선언은 비상식적인 실언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주님이 제시한 "~와 같이 천국 입성의 자격"의 비상식적인 파괴력은 엄청난 강도였을 것이다. 

  단락 5의 "~와 같이"의 충격도 단락 1의 충격 못지않다. 단락 5는 천국의 주인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미완성적인 존재인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과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완전히 극단적인 대조이지만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 조건으로는 같다. 이것이 A 레이아웃의 파격적이고 놀라운 가르침이다. 

  단락 5의 주제는 주인과 같이 형제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마태의 신학적 경향을 고려해서 비유의 하나님의 용서를 죄의 용서로 보면 단락 5의 용서는 "~와 같이 천국 입성의 조건"이 된다. 단락 1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고, 단락 5에서는 주인과 같이 형제를 용서하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자가 된다.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단락1의 어린아이 같은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18:4). 그러면 용서하지 못한 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주인과 같이 다른 종에 대해 자기를 낮추기는커녕 자신을 주장했다. 그는 주인이 베푼 불쌍히 여김의 은혜를 무시하고 주인처럼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순간에 주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거부해서 주인을 민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천국의 용서가 취소된 이유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단락 1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고, 단락 5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주인의 용서를 묵살한 종은 천국에서 용서받지 못한다 하셨다. 두 이야기는 긍정적인 표현과 부정적인 표현이 틀릴 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조건을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같은 말이다. 

  용서할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가치는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마태는 "예수-제자 제자도"뿐만 아니라 "제자-제자 제자도"도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기술했다는 점이다. 예수-제자 제자도가 구원의 온전한 성취에 결정적이듯 제자-제자 제자도도 구원의 온전한 성취에 결정적이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혁명적인 가르침이다. 이로서 단락 1과 단락 5가 서로 연관되어 마태복음 19장 전체 구조의 최외곽 레이아웃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태복음 18장의 5개 단락의 상호 관계를 모두 살펴보았다. 이상의 내용들을 문학적 구조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이 교차대조법이 나온다.

1. 1-4절 : 천국 입성의 조건-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2. 5-10절 :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한 가르침
    3. 12-14절 : 길 잃은 소자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기쁨)이다
  4. 15-20절 : 형제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한 가르침
5. 21-35절 : 천국 입성의 실패의 조건-용서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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