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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8-9장(1)

by 예다준 2022. 8. 4.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8-9장(1)

 
  마태복음 8-9장은 병아리 신자 때 처음 읽었던 성경이다. 그때 나는 마치 무협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놀랍고 신기한 기적을 행하는 것을 무협지의 도인 같다 생각한 것이다. 성경을 처음 읽은 햇병아리 중학생이 느꼈던 것과 같이 마태복음 8-9장은 놀라운 기적의 성경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복음서를 공부하다가 이 성경은 산상수훈과 짝이 되는 성경임을 알게 되었다. 마태가 산상수훈을 시작하기 전 사용한 4:23의 문구를 9:35에도 동일하게 사용한 것 때문인데, 이 기법은 5-7장의 산상수훈과 8-9장의 10가지 기적들을 의미상 한 묶음으로 연결하는 "수미쌍관법"(inclusio)이라는 것이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마 5-7장의 산상수훈을 "말씀으로 선포된 천국"으로, 마 8-9장의 10가지 기적들을 "기적으로 선포된 천국"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8-9장은 예수의 천국이 무엇인지를 실재 사건으로 보여주는 성경이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으로 성경을 더 올바르고 의미있게 알려면 오늘 우리는 잘 모르는 성경 저자들의 표현 기법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에 성경 저자들에게는 자신만의 문체가 있고, 이 문체들은 히브리인들의 논리 방식인 병렬적 사고를 근거로 다양한 평행법을 사용해서 문학적 구조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전문적인 성경 학자들의 연구대상이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이것에 흥미가 생겨 그 이후로 계속 연구하고 성경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성경 저자의 문체를 파악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성경을 보는 결과는 많이 다르다.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논리 방식과 논리가 연계되어 만드는 구조가 성경 저자들의 것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눈으로는 성경 저자들의 문체-구조를 이해하기도 찾아내기도 어렵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성경 저자의 고유 문체와 논리의 연계로 구성된 문학적 구조를 살피는데에 집중하여 성경을 보다 저자의 의도대로 보려고 시도해 본다. 

 

1. 마태복음 8-9장 기사들의 특징

  우선 전체 본문의 기사들을 이해가 쉽도록 하향식으로 정리해 본다. 하향식 정리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인 직선적 논리에 알맞은 정리 방법이다. 이것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보여주어 전체를 한 눈으로 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우선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조감도를 그리듯이 정리해본다.

치유 1 - 악성 피부병자 치유 8:2-4
치유 2 - 백부장 하인 치유 8:5-13
치유 3 - 베드로의 장모 및 아픈 자들 치유 8:14-15
기적 4 - 바다에서 제자 구출 8:23-27
치유 5 - 귀신 들린 두 사람 치유 8:28-34
치유 6 - 중풍병자 치유 9:1-8
치유 7,8 - 관원의 딸과 혈루병 여인 치유 9:18-26
치유 9 - 두 시각 장애인 치유 9:27-31
치유 10 - 언어 장애인 치유 9:32-34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8-9장을 주도하는 것은 치유, 축사, 기적 등을 포함한 10가지 이적 기사들이다. 치유 7,8은 두 기사가 합쳐져 있다. 7번 치유 기사가 일어나는 중간에 8번 치유 기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두 기사를 하나로 보아 전체 기사를 9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마태복음 8-9장은 단순히 기적 기사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만약에 마태복음 8-9장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만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엄청난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료해주셨음을 교훈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들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의 천국의 특징을 가르치길 원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마태복음 8-9장은 산상수훈과 짝을 이룬다. 산상수훈은 예수 천국의 특징을 설명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짝이 되는 마태복음 8-9장은 예수 천국의 특징을 보여주는 기사들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8-9장 안에는 온전히 기적 기사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사건화 된 가르침들"이 있다.
 
  본 연구는 그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진행된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마태복음에 사용된 마태의 문체와 마태복음 안에 조직된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여 문체와 구조가 조합되어 드러내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이것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이런 사실을 기초로 마태복음 8-9장의 문체와 문학적 구조의 특성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1-1. 8장의 주제들이 9장에서 논쟁화되어 의미가 더 깊어 진다.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8장과 9장의 관계이다. 마태복음 8-9장 기사들의 특징은 8장에 나오는 주요 주제가 9장에도 그대로 등장하는데,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주제들이 논쟁이 되어 8장의 의미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기사로 진전되는 것이다. 

  8장과 9장에는 동일하게 치유, 축사와 예수를 따름이라는 세 가지 주제와 이에 대한 반응이 나와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쉽게 두 성경이 서로 문맥이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8장의 주제들 대부분은 9장에 가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으로 8장의 이적들에 담겨있는 의미가 심화된 제2의 의미가 드러난다. 의미의 업그레이드라 말할 수 있다. 
 
  긴말 필요 없이 서로 관계있는 8장과 9장의 사건들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 마태는 8:16-17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의 치유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이 9장에서 서기관에 의해 논쟁거리가 되고, 논쟁 결과 치유는 인자의 죄 사하는 권세로 확대된다(9:6). 이로서 마태는 우리에게 치유를 죄사함과 연결하도록 안내해주고, 우리는 죄사함에서 치유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의 치유는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죄 사함의 전주곡이 된다. 십자가 고난과 부활로 이루어질 죄사함이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치유의 능력으로 나타나 죄 사함의 은혜를 부분적이지만 현재적인 은혜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 8장에서 "예수를 좇음"은 세상의 일들을 완전히 버리고 어떤 고난에서도 감내해야만 하는 제자도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9장에 가면 예수를 좇음이 논쟁거리가 되고, 이 논쟁을 통해서 예수를 좇음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라 설명되고(9:9-13),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처럼 새 시대의 도래로 야기된 삶으로 설명된다(9:14-17). 
 
 
  예수를 좇음에 대한 설명이 8장과 9장에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장의 설명은 제자 중심의 설명이라면 9장의 설명은 하나님 중심의 설명이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를 좇음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갖게 되어 예수를 좇음을 보다 풍부하게 볼 수 있게 된다.


  • 믿음과 반대되는 "거부"의 주제도 논쟁을 통해서 진 일보한다. 마태는 불신앙과 거부 주제를 축사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다. 8장에는 주님께서 이방 지역에서 귀신을 쫓았지만 거부되어 그 지방에서 쫓겨났다. 
 
 
  9장에 가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이 선두가 된 유대인들에게 축사 후 거부를 당한다. 마태는 주님께서 이방 지역에서 거부를 당하는 이유에 대해 명시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거부에서는 예수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축사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이 원인이다. 메시야의 축사가 논쟁거리가 된 것이다.
 
  8장의 이방인들의 거부는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을 보면 "두려움"때문이라 나온다. 이방인들이 귀신을 내좇은 예수님이 두려워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다. 이런 8장의 거부가 9장에 가서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는 논쟁화된 누명으로 극대화되었다. 8장의 거부는 이방인 무리들의 것이고 9장의 거부는 유대인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는 바리새인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8장의 거부는 9장에서 아주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다. 

  • 8장의 주제가 9장에 와서 더 깊고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양상은 "믿음" 주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주제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결국 믿음이 확대되는 결과를 만든다. 

  먼저, 마태복음 8장이 시작되면서 세 개의 치유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의 특징은 예수의 권위가 강조된 "치유-믿음 기사"이다(8:2-15). 여기에서 치유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치유의 권세를 가진 예수를 최상을 다해 극진히 우대한다(8:2,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8:7-8,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8:15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치유를 실행할 때 "내가(예수님) 원하노니'라는 문구가 특히 강조하여 사용하셨다(8:3, 7).
 
 
  하지만 9장의 믿음은 양상이 다르다. 여기에는 치유를 원하는 사람의 적극적인 믿음이 강조되어 있다. 예수님의 치유 선포 문구도 8장의 예수님 중심에서 치유자 중심으로 옮겨간다(9:2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9:28-29,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와 같은 믿음의 중심의 전환은 놀라운 일을 일으킨다 마태는 말했다. 8장의 믿음(백부장의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믿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9장에서는 '다윗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든다. 8장의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드문 믿음은 9장에서는 두 맹인이 고백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는 진전을 이룬다.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9:26)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명했지만)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9:30-31) 
 
  앞의 거부 주제와 연결해서 보면 예수님에 대한 거부가 8장에서 9장으로 가면서 극대화되는 반면에 이스라엘에는 없는 믿음도 9장에 가서는 온 누리에 소문이 자자하게 된다. 

  이로서 우리는 마태가 8장의 메세지를 9장에서는 논쟁을 통해서 더 심화하려 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마태는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했는지 묻게 된다.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생각된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천국의 기적들을 보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차원에서 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기적들을 논쟁화시켜 기적들 배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바라보도록 사역하셨다 생각된다.
  

  1-2. 8장의 논쟁화의 결과 : 9장 새로운 시대(메시야 시대)의 도래 

  8장의 주제들이 9장에서 논쟁을 통해서 더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마태복음의 경향은 결국 하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치유는 메시야 시대에 경험할 회복의 나타남으로 새 시대의 일, 새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논쟁화가 주된 기능인 마태복음 9장은 새 시대의 새것(일)으로 기사들의 주제가 통합되어 있다. 즉 마태복음 9장에 있는 모든 기사들은 예수로 인해 도래한 새 나라를 기본적인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이를 마태복음에 기록된 순서대로 살펴보면 이렇다.

  • 가장 먼저 인자가 치유를 통해서 죄사하는 권세를 발휘한 기사(9:1-8)는 치유의 범위를 육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이른바 영육 간의 전인 치유가 된다. 
 
 
  주님께서는 전인 치유를 위해 두 가지를 무시하셨다. 죄를 사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는 일이고, 표면적으로 보면 성전의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이 죄를 사한다 선언하는 것은 성전과 제사장은 물론 하나님을 무시하는 망령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치유를 위해 망령스러운 행동을 과감하게 결행하셨다(9:5-6)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이와 같은 행동은 예수의 치유의 의미를 모르는 서기관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참람하다 펄쩍 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이고 참된 성전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12:6). 
 
  유대인들의 눈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과 성전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태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단순히 카리스마적 치유자가 아니라 죄를 사하는 하나님이고, 그의 사역은 죄를 사하는 새 방법을 실제로 보여준 일로 보인 것이다. 
 
  마태의 눈에 보인 예수의 치유-죄 사함 기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새 시대의 도래이다. 이전 구원 방법은 폐기되고 새로운 구원 방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기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새 구원, 새 구원이 일어나는 새 시대, 새 시대를 일으키는 새로운 나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마태의 메세지이다. 

  • 9:9-13에서 바리새인들이 질타한 예수님과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미 잘알듯이 유대인들에게는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단순한 친교의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 율법을 준수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힐난의 포커스가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이 있는 것이다(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유대인들은 더러운 것과 함께하면 더러워지고 죄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된다 믿었다. 하지만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진 일이다. 
 
  마태는 예수의 세리와 죄인과 함께하는 식사는 병자에게 의원이 온 것과 같은 것이라 설명했다(9:12). 9:13을 보면 의원은 호세아 선지자가 호 6:6에서 예언한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죄인들과 식탁 교제는 죄인들을 치료하고 온전케 하는 구원의 식탁 교제를 의미한다.
 
  구원의 식탁 교제는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이미지로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신랑 메시아의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나누는 잔치이고 동시에 메시아가 다스리는 새 시대가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징표(sign)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과 나누는 예수의 식탁 교제를 반대하는 자는 메시야와 그의 새 시대가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옛 것들이 된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9:14-17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의 식탁 교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건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했다. 이것으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새 시대가 이미 왔으므로 세례 요한의 일들은 더 이상 지속될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일이다.
 
  아쉽게도 세례 요한은 이를 몰랐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두렵게 들린다.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예수의 새 일을 반대하면서 이전 일들을 고집하는 자는 옷이 찢어지고 낡은 부대가 떠지는 것과 같은 파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9:16-17).

  • 두 소경이 "다윗의 아들"에게 치유를 받아 눈을 뜨는 기적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소경의 치유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새로운 일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기적이다(9:27-31). 이를 쉽게 알 수 있는 성경이 요 9:32-33이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한 예수의 기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일을 통해 그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아니했다면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고, 더 나아가 창세 이후 처음 듣는 일이라 말했다. 이는 소경의 개안이 메시야 시대의 일, 곧 메시야 시대, 새 시대의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경의 치유에도 앞의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 시대의 새 일이라는 모티브가 내재되어 있다.

  9:32-34의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치유한 기적은 어떤가? 마태는 이 기적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간증을 제시해주었다. 
 
  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불신앙의 어두움으로 주님의 기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무리의 입에서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일이 나타났다 탄성이 터졌다(9:33).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도 예수가 행한 일이 새로운 일로 확연하게 보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9장의 기사들의 내용은 모두 다른,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그 사건들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로 같다. 이것이 마태가 마태복음 9장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이다. 그는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의 이적을 통해 새 시대가 와서 역사했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 시대의 회복을 예수의 치유와 축사를 통해 사람들이 경험했다 말했다.


  1-3. 설교 3(9:36-38)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8-9장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9:36-38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문맥과 문학적 구조로 볼 때 이 부분은 이어지는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와 8-9장을 연결해주는 브릿지 역할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부분은 마태복음 8-9장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서 분리하여 보아야 한다.

  • 마태는 9:35에서 4:23에 사용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 문구를 다시 사용하므로 5-9장 전체를 하나로 묶는 inclusio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지는 9:36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로 예수님의 사역 요약의 심적인 동기를 알려주고, 9:37-38에 추수할 일군을 청하는 예수님의 부름을 연결했다. 
 
 
  마태의 설명은 주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사역들을 감당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역의 현실은 열악했다.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군이 적어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심정에는 민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9:37-38에 나오는 주님의 요청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추수 사역에 그를 돕는 일군인 제자들이 필요하다는 요청 하셨다. 이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아 세우시고, 이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것이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제자 파송 강화 앞부분인 10:1-4은 9:36-38과 함께 아래와 같은 평행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짝(A와 A', B와 B')이 A-B-A'-B'로 번갈아가며 나온다. 현대인의 직선적 논리로 보면 A를 이야기하다 B를 말하고, 또 A'를 말한 후에 B'를 말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생각도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 저자들인 1세기 유대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논리를 진전시켰다. 다수의 짝을 번갈아가면서 진전하는 논리를 "병렬적 논리"라고 부른다. 어쨌든 이것이 있다는 말은 이 부분이 문학적으로 구분되는 하나의 단위라는 의미가 된다.

A. 예수의 사역 요약(9:35)
  B. 추수할 일군에 대한 요청(9:36-38)
A'. 제자들의 사역 요약(10:1)
  B'. 12제자(10:2-4)

  • 이 구조는 마 8-9장에 세 개의 설교가 있다는 해석을 재고하게 만든다. 후에 자세히 보겠지만 많은 성경 연구가들은 마 8-9의 10가지(또는 9가지) 기적들은 3개의 이적 기사들을 한 묶음으로 삼등분되고, 삼등분된 이적 기사들 사이에 3개의 설교가 삽입되었다고 본다. 즉 "이적 기사 묶음 1-설교 1-이적 기사 묶음2-설교 2-이적 기사 묶음3-설교3"의 모양이다. 
 
 
  그중 9:36-38은 설교3이 된다. 현대인의 직선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이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마태가 사용한 히브리인들의 병렬적 문학적 구조로 보면 설교3은 앞절들과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이어지는 10:1-4과 한 단위를 만든다.
 
  달리 말해 설교1,2와 구분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설교1과 설교2의 구조와 기능은 설교3의 구조와 기능과 달라서 무작정 설교 1,2,3으로 나누는 것은 마태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충분히 살리는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1-4. 설교1과 설교2 : 치유자 예수의 정체와 예수를 따름의 의미 확장

  앞에서 마 9:36-38은 마태복음 8-9장 안에 있는 세 번째 설교이지만, 문학적 구조에서 볼 때 앞 단락에 있는 설교 1,2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젠 곧이어 설교 1,2는 어떤 특색을 가지고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살펴본다.

  • 마태복음 8-9장은 10(9) 가지 기적으로 유명하지만 이적 기사들 중간중간에 예수님의 정체(치유자 예수 vs 제자를 부르는 자 예수)를 밝혀주는 부분(8:16-17 vs 9:13)과 예수를 따름의 특징을 알려주는 제자도에 대한 부분(8:18-22 또는 27 vs 9:9-12, 14-17)이 끼어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설교 1은 8:16-22(또는 27)과 설교 2는 9:9-17로 아래 도표의 진한 글씨 부분이다. 

치유 1 - 악성 피부병자 치유 8:2-4
치유 2 - 백부장 하인 치유 8:5-13
치유 3 - 베드로의 장모 및 아픈 자들 치유 8:14-15

설교 1
a. 기독론 - 치유자 예수의 정체와 치유 사역의 의미 : 사 53:4의 고난 받는 종의 치유 (8:16-17)
  b. 제자도 - 예수 따름의 의미 (8:18-23)

기적 4 - 바다에서 제자 구출 8:24-27
치유 5 - 귀신 들린 두 사람 치유, 부정적 반응 8:28-34
치유 6 - 중풍병자 치유 9:1-8

설교 2
a. 기독론 - 제자를 부르는 예수의 정체와 제자를 부름의 의미 : 호 6:6의 긍휼을 행하는 의원 (9:9-13)
  b. 제자도 - 예수 따름의 의미 논쟁 : 새 시대의 도래 (9:14-17)
 
치유 7,8 - 관원의 딸과 혈루병 여인 치유 9:18-26
치유 9 - 두 명의 시각 장애인 치유 9:27-31
치유 10 - 언어 장애인 치유, 부정적 반응 9:32-34

  특히 이 부분은 마태복음 8-9장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단서로 연구되고 있다. 앞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두 부분으로 인해 마태복음 8-9장의 기적들(샌드위치 구조를 가진 9:18-26을 한 사건으로 보면 9개의 기적이 된다)이 세 개의 이적 기사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는 3+1+3+1+3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을 많은 학자들이 구조 분석에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삼등분을 지지하는 학자들마다 설명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등분 나눔 법이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는 해석은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분법은 애매모호하고 빠진 부분이 많이 있어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분석과 이를 토대로 보다 본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해석이 나와야 한다. 



  • 구조 분석에 대한 상세한 견해 차이는 어쨌든지 간에 이 부분은 본문 이해에서 보면 의미가 아주 크다. 그것은 이 부분이 마태복음 8-9장을 주도하는 핵심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마태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두 본문에는 예수님의 정체를 구약 성경을 통해 설명하는 기독론적 가르침이 제자도와 함께 결합되어 마태복음 8-9장의 다른 기사에는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설교 1
a. 기독론 - 치유자 예수의 정체와 치유 사역의 의미 : 사 53:4의 고난 받는 종의 치유 (8:16-17)
  b. 제자도 - 예수 따름의 의미 (8:18-22)

설교 2
a. 기독론 - 제자를 부르는 예수의 정체와 제자를 부름의 의미 : 호 6:6의 긍휼을 행하는 의원 (9:9-13)
  b. 제자도 - 예수 따름의 의미 논쟁 : 새 시대의 도래 (9:14-17)

  설교 1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16-17, 18-22절). 16-17절은 치유자 예수의 정체를 사 53:4을 배경으로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그리고 18-22절은 제자도의 관점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다음에 나오는 기적들의 주제를 예고한다.
 

  설교 2도 첫 번째 설교와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9-13, 14-17절). 첫번째 부분은 제자들을 불러 따르게 하는 예수의 정체를 호 6:6을 배경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를 따름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과 관련되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를 한 번 더 명시해준다. 이때 마태는 설교 1과 설교 2에 "나를 따르라"는 제자로 부름의 명령을 집어넣어(8:22, 9:9) 두 설교를 같은 문학적인 키워드로 묶어버렸다. 이것이 설교 1,2가 설교 3과 구분되는 문학적 특징이고 마태복음 8-9장에서 가지는 의미의 차이점이다.

  마태가 설교 1,2를 통해서 주인공인 예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했다는 것은 마태복음 8-9장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마태복음 8-9장을 통해 마태가 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 예수의 정체가 두 가지 측면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바 마태복음 8-9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재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까지 마태복음 8-9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기적의 성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마태가 예수의 정체를 치유자로 정의하고 구약성경을 근거로 설명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예수를 제자들을 불러 따르게 하는 자로 보고 구약성경을 근거로 해설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달리 말해서 성경을 한쪽으로 치우쳐 보았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8-9장에는 처음부터 예수의 기적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과 태도가 섞여있다. 8,9 장의 치유에는 믿음이 동반되어 있고, 기적에 제자들의 믿음이나 예수를 따름이 나오는 제자도가 같이 있다. 또 9장의 논쟁 기사에도 제자도가 같이 있다. 
 
  이와 같이 마태는 설교 1에서는 치유자 예수를 설교 2에서는 제자들을 부르는 자 예수를 서로 다른 구약성경을 근거로 설명했다. 이것은 마태에게는 치유자 예수의 이미지와 제자를 부르는 자 예수의 이미지는 메시야 예수를 설명하는 서로 보완되는 두 가지 모습으로 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8-9장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적의 성경이 아니라 기적과 제자도의 성경이다. 이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설교 1,2의 치유자 예수와 제자를 불러 따르게 하는 자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과 제자도의 결합 구조이다. 
 
  마태가 만약에 예수의 치유와 기적에만 관심을 두었다면 설교2의 필요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마태는 설교1에서 치유자 예수의 정체를 설명하고 설교2에서는 제자를 불러 따르게 하는 자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이것은 마태의 전망에서 볼 때 예수로 인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특징에는 메시야적 치유만이 아니라 제자에 대한 메시야적 부름도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치유와 예수를 따름은 예수로 인해 나타난 두 가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특징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치유로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역사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으로 현재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예수를 통해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1-5.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기적에 대한 전략적인 이해(8:23-28) : 기적과 예수를 따름이 공존하는 예수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8-9장이 기적과 예수를 따름의 성경이라는 주장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기적(8:23-28)을 중심으로 연이어 나오는 8:18-28의 세 개의 이야기로 증명될 수 있다. 8:18-20절은 한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는 요청 이야기이고, 8:21-22절은 한 제자가 예수를 따르겠다 요청한 이야기이고, 8:23-27은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한 이야기이다. 
 
  한 눈에 봐도 세번째 이적 기사는 앞의 두 이야기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이 이적 기사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아주 유명하다. 꾸짖음으로 바람과 바다를 제어한 기적은 놀랍고 신비하다. 하지만 이것은 마태의 의도를 불충분하게 이해한 것이다.
 
  마태는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를 따름을 강조하고 싶었고, 특히 예수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초를 강조하려 했다. 먼저는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예수의 정체에 대한 명확한 앎이고 두번째는 예수를 따르는 일에는 상식을 초월한 고난이 있음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세 기사에는 모두 예수를 "좇다"(따르다, 아코류세오 ἀκολουθέω)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이다(19, 22, 23). 특히 마태는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한 기적을 행하기 전 배에 오르실 때 제자들이 배에 탔다 말하지 않고 "제자들이 (예수를) 좇았더니'(8:23)라고 앞의 두 기사와 동일한 "좇다"(따르다, 아코류세오)를 사용한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마태의 표현으로 본다면 이때 제자들은 그냥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 제자의 길을 간 것이다. 마태는 세 개의 기사 모두는 예수를 좇음을 공통 주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말한 것이다. 

  이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이렇다. 
 
  앞의 두 기사에는 예수를 좇음으로 경험하게 될 대가 지불, 즉 곤란(쉴 곳이 없이 순회하는 삶을 사는 것과 불경건 자로 욕먹을 일(부모의 뼈를 모아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오고 마지막 기사에는 예수를 좇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예수의 정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이 나온다.
 
  앞의 두 기사는 예수를 따름이 주제이고 세 번째 기사는 예수를 따름과 함께 예수의 정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주제이다. 그렇다면 세 개의 기사는 예수를 따름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기독론과 함께 제자도가 공동 주제가 되는 하나의 문단이 된다.

  이것을 8:18-9:17이라는 더 큰 단위의 문학적 구조에서 관찰하면 의미가 더 확대된다. 

예수를 따름에 대한 부분
• 8:18-20 한 서기관 :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vs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8:21-22 제자 중 하나 :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옵소서 vs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22 너는 나를 따르라
  ◇ 8:23-27 바람과 바다 제압 : 제자들이 좇았더니... //

예수의 정체에 대한 부분
   "그는 구누인가?"
  ◇ 8:28-34 귀신 제압
  ◇ 9:1-8 죄를 제압 : 죄 용서 권세
• 9:9 나를 따르라

  예수를 따름에 대한 부분은 앞에서 살펴본 8:18-28의 세 개의 이야기이다. 8:18-27까지는 주제가 예수를 따름이다. 그러다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한 기적 마지막 멘트인 8:27에서 주제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한 기적은 예수를 따름과 예수의 정체 두 개의 주제를 가진 것이다. 
 
  그 후 이어지는 8:28-9:8의 두 개의 기사들을 보면 모두가 예수의 정체를 알려주는 이적 기사들이 연달아 나온다. 이를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직선적 논리로 보면 예수를 따름 주제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한 기적에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주제로 바뀌어서 이어져가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마 8:23-28이 전략적인 위치 해 있고 전략적인 문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부분은 앞의 이야기들과 뒤에 이어지는 기사들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앞 이야기들의 주제와 뒤에 나오는 기사들의 주제도 모두 가지고 있어 문맥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부분의 앞에는 예수를 따름으로 발생하는 어려움이 강조된 2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 부분의 뒤에는 예수의 신적인 정체를 보여주는 두 개의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 중간에 있으면서 예수를 따름과 예수의 정체 모두를 커버하는 질문(8:27)으로 문맥의 전이를 만든다. 

  마 8:27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얼핏 보기에는 그저 기적을 기록한 것 같이 보이지만 주제의 흐름을 보면 예수를 따름과 예수의 정체 두 주제가 서로 이어져 있다. 여기에 설교 1과 설교 2에 나오는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설명이 치유자 예수와 제자를 부르는 자 예수라는 것이 딱 들어맞는다. 

  마태가 마태복음 8-9장에 만들어놓은 이 구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마태는 우리에게 치유자 예수와 제자로 부르는 자 예수를 정확하게 알려주길 원했다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의 오심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천국의 현재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천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오직 믿음으로만 생각해왔다. 마태복음 8-9장에서 예수의 치유를 받기 위해 믿음이 필요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마태는 예수의 천국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믿음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제자도도 동일하게 강조했다는 것을 무시해왔다. 마태복음 8-9장은 믿음으로 예수의 천국에 반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예수의 천국에 대해 제자도로 반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고 있다. 제자도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와 같고, 믿음의 실패는 예수 천국의 실패와 같다고 마태는 보는 것이다.

  치유와 제자를 부름은 예수로 인해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두 양상이라 하면 그 두 일을 행하는 예수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마태복음 8-9장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마태는 설교 1,2를 통해 치유자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을 불러 따르게 하는 자 예수를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설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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