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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9-20장(2)

by 예다준 2022. 8. 22.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9-20장(2)

 

 

 

2. 마태복음 19-20장의 문학적 구조와 문체를 찾아서

  성경 본문에 담겨져 있는 문체와 문학적 구조를 찾는 일은 해당 본문의 전체 구조를 찾고 이를 해설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성경 본문의 전체 구조는 각 단락 안의 문학적 구조인 "미시적 구조"와 각 단락이 모여 이루어지는 "전체 구조", 즉 "거시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구조를 확정하고 해석자는 문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각 레이아웃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각 레이아웃이 모여서 나타나는 전체 문학적 메세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성경 저자가 해당 본문에서 말하려 하는 "원 의미"를 추론했다 말할 수 있다.  
  그후 해석자는 전체 구조와 문학적 메세지를 가지고 각 단락과 구절, 단어 등을 분석할 수 있다. 성경의 전체 구조와 문맥을 알고 있으면 각 단락과 구절, 단어 등을 전체 메세지를 감안해서 추정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난해구나 난해 단락 또는 난해 단어의 의미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난해 성경들에 대한 개인적인 해결책과 설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획득한 결과물들을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성경 해석법들을 연동해서 종합적으로 성경 연구를 이어가면 성경 본문에 정통한 더 수준높은 성경 해석과 현대 사회에 밀접한 성경 적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성경 저자 중심의 해석법의 첫 발걸음을 시작한다.

 


  2-1.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받을 상속 교훈(19:25-30)과 포도원 주인 비유(20:1-16)

  이 부분이 구조 분석의 실마리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가장 쉬운 부분이다. 그것은 두 기사는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 되어 있는 inclusio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inclusio는 현대에도 사용되는 문학적 방법이다. 주로 시나 소설 수필 영화 음악에서 활용된다. 우리말로 "수미상관법"이라 부르는데, 여기에서 수미는 머리와 꼬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머리와 꼬리가 서로(상) 관련되었다(관)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치환 시인의 "바위"라는 시가 좋은 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처음에 "내가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라고 말하고 마지막에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마쳐 자신의 다짐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니까 inclusio는 처음과 끝을 서로 연관 짓는 구조를 만들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는 기법이다. 


  마태가 사용한 inclusio의 강조 기능은 한 단계 수준이 높다. 마태는 inclusio에 도치법을 추가했다. 19:30절의 "먼저-나중-나중-먼저"의 순서가 20:16절에서는 "나중-먼저-먼저-나중"으로 뒤바뀌어 의미의 강조가 더해졌다. 마태는 이러한 방법으로 inclusio를 사용해서 두 기사가 문학적인 구조 안에서 하나이고, 같은 결론으로 더 이상 의심할 필요없이 두 기사의 관계는 직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19:25-30은 실재 기사이고 20:1-16은 비유이다. 그런 두 본문이 inclusio로 묶여서 서로 대조되는 사건-(비유적) 해설의 짝이 된다. 주님께서는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받을 상속을 교훈하고, 이를 그림과 같이 제자들의 마음에 그려주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혹시 제자들이 이것을 간파하지 못할 수 있다 주님께서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동일한 문구를 교훈과 비유적 설명의 앞과 뒤에 배치해서 누구든지 명백하게 알아듣도록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두 단락을 주님께서 병렬적 논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대조되는 짝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2-2. 천국을 소유하는 어린 아이 같은 자에 대한 교훈(19:13-15)과 크고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에 대한 교훈(20:20-28)의 관계

  두번째로 19:13-15과 20:20-28이 서로 밀접하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19:13-15의 주제는 "천국을 소유하는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이고, 20:20-28의 주제는 "주의 나라에서 큰 자(으뜸인 자)는 종과 노예처럼 섬기는 자"이다. 그래서 두 기사는 "천국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서로 대조가 된다. 
  그런데 두 단락의 메세지는 핀트가 다르다. 19:13-15은 "천국을 소유할 자의 태도"에 방점이 있고, 20:20-28에는 "천국에 합당한 제자도"에 방점이 있다. "천국을 소유함"과 "천국에서 큰 자가 됨"에 대한 해석에 따라 두 주제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두 단락의 메세지가 같은 것이라면 두 단락은 예수님의 교훈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두 단락의 메세지가 같은 것이 아니라면 두 단락은 서로를 보충해주는 수식 관계에 있다 해석할 수 있다. 
  어쨋든 임의로 정한 3(19:13-15)과 3'(20:20-28)가 대조되고, 1(19:25-30)과 1'(20:1-16)이 대조가 되어 사이에 빠진 2와 2'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본문으로 남는다. 이를 보기 쉽도록 그리면 아래와 같다. 

3. 19:13-15
  2. 19:16-24
     1. 19:25-30
     1'. 20:1-16
  2'. 20:17-19
3'. 20:20-28

  이 모양을 통해서 우리는 2와 2'를 잠재적인 평행법의 짝으로 설정할 수 있다. 문제는 2와 2'가 대조되는 짝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다음 문제는 나머지 본문으로 처음인 19:3-12과 마지막인 20:29-34이다. 

 


  2-3. 전통적 해석에 대한 재고 : 예수님의 이혼과 독신에 대한 시험(19:3-12)

  마태복음 19-20장의 문학적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혼과 독신에 대한 시험 기사(19:3-12)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전통적인 해석으로 보면 마태복음 19-20장에서 의미상 대조를 이루는 짝을 찾기 어렵기에 그런 것이다. 마태복음 19-20장에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고, 더 나아가 독신주의에 대한 부분도 없다. 

  본문 해석에서 결정적인 논쟁점은 11절과 12절에 나오는 "이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이 말"은 10절에서 제자들이 말한 결혼하지 않는 것, 즉 독신주의라 이해한다. 그래서 11-12절의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를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1) 먼저 제자들의 제안은 예수님의 결혼에 대한 메시야적 율법의 배경이 되는 "창조 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부분은 산상수훈에서 소개된 주님의 메시야적 율법과 연관이 깊다. 관련 본문은 마 5:27-32으로 간음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야적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릴 수 없다 하셨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지옥의 심판에 처해지는 악이라 말씀하셨다. 본문의 4-6, 9절은 5장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내용이 일치한다. 7-8절은 바리새인들의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추가적 언급이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는 결혼을 창조 원리에 비추어 가르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조 원리를 깨는 음행 외에는 이혼의 가능성마저 인정하지 않으셨고 이에 반하는 유대인들의 이혼 관행은 악이라 선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창조 원리로 결혼의 본질적인 의미는 물론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를 정의하셨고(19:8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래도 이혼을 강행하는 경우에 대한 평가(5:32 간음)와 이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5:27-30 지옥 불에 던지어짐)을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보면 10절의 제자들의 제안은 주님의 메시야적 가르침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하려면(할찐대)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 제안했다(마 19:10). 제자들이 말한 "아내에게 이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먼저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처럼 아내를 대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아내를 대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언급한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제자들의 주장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따라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율법에 순응하지 않는 주장이다. 제자들의 제안은 인간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아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예수님이나 바리새인처럼 하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결혼기피주의나 결혼무가치론으로 이혼을 남발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는 반대일지라도 창조 원리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다를 바가 없다.



  2) 제자들의 제안은 전통적인 이해와 같이 독신의 은사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제자들의 제안은 독신의 은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주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마음에서 나온 결혼기피주의나 결혼포기주의이다. 제자들의 제안을 독신의 은사로 보는 것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7장의 독신의 은사를 본문에 집어넣은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본문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반대인 "억해"이다.
  만약에 주님께서 독신의 은사를 옹호하셨다면 스토리가 이상하게 결말을 맺는다. 결혼의 숭고함과 이혼의 불가능성을 가르치다가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희석시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독신의 은사로 결론짖는 문맥은 결혼의 숭고함은 물론 예수님의 논리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은 엉뚱한 곳으로 메세지의 핀트가 빗겨나가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이 말"을 4-9절의 주님께서 바리새인에게 한 결혼에 대한 가르침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1-12절의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는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메시야적 가르침을 받아 바리새인의 이혼에 대한 주장에 대해 스스로를 고자로 만든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한다고 보게 된다.

  이상의 관찰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본문은 예수의 메시야적 율법과 이에 상응하는 제자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참 제자는 마태복음 5장에 이미 제시된 바와 같이 예수의 메시야적 가르침, 메시야적 율법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죽은 자(고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인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는 자로서 옛 시대의 사람의 율법을 거부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옛 시대와 옛 시대의 율법에 대해 "스스로를 고자로 만든 자", 곧 세상적인 결혼관에 대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다. 

  본문은 마태복음 5장의 이혼과 간음에 대한 가르침이 논쟁화된 실재 사건이다. 바리새인들은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았을 것이고, 헛점을 찾으려고 시험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당시 가장 엄격한 그룹으로 유명했던 샴마이 학파(Schammai)의 가르침보다 더 엄격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의 교훈을 거스리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괘씸하게 여겨 문젯거리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예수로 인해 도래한 새 시대와 근본이 다른 옛 시대의 법칙, 옛 시대의 율법에 근거한 악행들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더 이상 옛 시대를 따르는 삶이 아니라 새 시대의 법칙, 새 율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참 제자의 삶, 진짜 제자도이다.  

 


 2-4. 예수님의 이혼과 독신에 대한 시험기사(19:3-12)와 두 소경 치유 기사(20:29-34)의 관계

  예수님의 이혼과 독신 시험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대조되는 "두 소경 치유 기사"(20:29-34)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두 소경 치유 기사를 해석하기 위해 기억해야할 중요사항 중 하나는 9:27-31의 "두 맹인 치유 기사"와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두 기사에는 두 명의 소경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하는 문구가 같은 것은 물론 문학적인 도치를 이룬다. 20장 본문에서 소경이 예수를 부르는 문구와 9장에서 소경이 예수를 부르는 문구는 이렇다.

  마 9:27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20:30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문구는 "다윗의 자손"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서로 바뀌어 도치되어있다. 이는 두 기사에 의도적인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치유받는 기사는 마태복음에서  두 기사가 전부이다.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받은 기사가 여러 번 나온다. 마태는 그중에 주님에 대한 호칭이 같은 두 기사를 그의 복음서에 보고했다. 이것은 소경의 치유를 다윗의 아들과 연관 지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마태의 저작 경향의 결과라 보인다. 
  마태복음 20장의 두 소경 치유 기사가 9장의 두 소경 치유 기사와 연결된 것은 20장의 치유 기사가 나타내려는 메세지가 9장의 치유 기사를 통해 나타내려는 메세지와 일맥상통한다는 의미도 된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두 소경이 "다윗의 아들"에게 치유를 받아 눈을 뜨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마태는 물론 유대인들에게 소경의 치유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구원 사건으로 옛 시대의 종말을 알려주는 새로운 일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기적이다(참조, 사 42:7). 그리고 "다윗의 자손"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메시야적 칭호로 마태복음의 시작에 표제로 사용될 만큼 마태복음 전체를 주도하는 중요 명칭이다(1:1). 그래서 다윗의 자손의 소경 치유는 새 시대의 문을 여는 메시야가 새 시대의 구원 사역을 시작했다는 메세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기사가 "이혼과 독신에 대한 시험기사"와 가지고 있는 연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두 기사는 예수로 인해 도래한 새 시대, 즉 메시야의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기사로 같다. "이혼과 독신에 대한 시험기사"는 메시야의 새 율법을 강조하고, "두 소경 치유 기사"는 메시야 시대의 구원을 강조하는 치유 사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메시야의 새 율법과 메시야의 구원 사건의 대조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과 마태복음 8-9장의 결합과 같은 모양이다. 어찌말 하면 두 기사의 대조는 마태복음 5-9장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두 기사는 마태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대조 조합이다. 예수 천국의 특징을 압축 요약한 기사들이다. 

  이상의 관찰로 19:3-12과 20:29-34 사이의 관계를 확인했다. 그 결과 19:16-24과 20:17-19을 남겨놓은 문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다. 두 부분(C와 C')을 대조되는 짝으로 가상하고 전체 구조를 그리면 아래와 같다.
  
4. 19:3-12
  3. 19:13-15
    2. 19:16-24
       1. 19:25-30
       1'. 20:1-16
    2'. 20:17-19
  3'. 20:20-28
4'. 20:29-34

 


  2-5. 재물 포기(19:16-24)와 예수의 죽음 부활(20:17-19)의 관계

  두 부분은 내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응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조건의 제시"라는 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16-24은 "영생에 들어가는 조건'을 제시해주고, 20:17-19은 "영생을 완성하는 조건"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준다. 달리 표현하자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과 천국을 완성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두 기사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 두 기사에는 "포기" 또는 "죽음" 이라는 주제로 같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재산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를 것을 종용했다(19:21). 그리고 주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인자는 죽음에로 넘겨질 것이라 알려주셨다(20:18-19). 부자 청년은 재산을 포기하는 물질적인 죽음을 거부했기에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십자가 죽음으로 넘겨줌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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