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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1)

by 예다준 2022. 8. 27.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1)

 

 

  마태복음 21-23장의 배경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보낸 마지막 일주일, 우리가 "고난주간"이라 부르는 때의 전반부이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셨다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 처형되었다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한 것이 아니라 옛 이스라엘의 중심인 성전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공격한 후(21-23장) 십자가를 지기 전 제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24-25장)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종말론적 왕으로 등극하셨다(26-28장). 
  마태복음 21-23장은 "예루살렘 공격"이 기록되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왕-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선언하고 유대교는 물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실체를 드러내는 기습작전을 감행하셨다. 이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은 마치 총집결한 것 마냥 방어진을 치고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 역공격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보여주는 실패로 끝난다. 결국 주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 판단하시고 멸망을 선언하시고 탄식하시는 것으로 23장이 끝난다. 

  마태복음 21-23장을 문체와 구조에 따라 분석하는 일의 난이도는 상급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모델들을 설정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점검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어려운 말씀이다. 이 어려움 중 특히 몇 가지가 기억난다. 
  1) 우선 유명한 말씀들이 많다. 유명 본문의 문제는 해석의 전제가 확고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달리 보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기도 한다. 또 유명한 말씀은 사실은 메세지를 잘 모르지만 안다고 여기는 말씀일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용은 알지만 메세지는 모르는 것이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사건(21:18-22)이 한 예이다. 이 말씀의 메세지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신비한 기적 능력인가? 아니면 21절에 나오는 믿음인가? 그런데 22절에는 기도가 나온다. 그러면 기도가 핵심 메세지인가? 본문을 읽어보면 21-22절이 결론이다. 그러면 믿음과 기도가 핵심 메시지인가? 이렇게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단서를 찾기 어렵다.
  2) 또 이곳의 기사들을 현대의 직선적 논리에 따른 문단나누기로 보면 아무리 여러 번 읽어봐도 평행법의 짝이 될만한 단서들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단락과 단락이 문학적인 짝으로 서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트리플 묶음"(triple bundle)이 대조되는 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세 개의 기사들이 하나의 묶음 단락"이 되어 문학적인 짝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단락들이 대조의 짝이 되는 것보다 발견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구조이다. 
  3) 그리고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난해 단락이 있다. 그래서 물음표로 남겨 놓아야 했다. 이것이 끝까지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거리였다.
  4) 마지막으로 참고할 자료가 별로없다. 성경 저자의 문체와 문학적 구조를 따라 성경을 분석하는 데에는 특히 성서신학자들의 연구에 많이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개별 기사들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21-23장 전체의 문학적 특성에 대한 연구물은 보이질 않아 시작부터 난감한 마음이 충만했다. 어찌 되었든 시작을 하니 문학적 구조의 특징들이 보였고 결과물도 나올 수 있었다. 

 

1. 문학적 특성과 구조를 찾아서

  마태복음 21-23장에는 무려 14개의 기사들이 모여있다. 현대인의 직선적 논리로 보면 14개의 기사는 14개의 문단으로 이해된다. 

예루살렘 입성(21:1-11)
성전파괴(정결)사건(21:12-17)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21:18-22)
예수님 권위에 대한 질문(21:23-27)
두 아들 비유(21:28-32)
악한 일꾼들 비유(21:33-47)
혼인잔치 비유(22:1-14)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22:15-22)
부활과 부부관계에 대한 논쟁(22:23-33)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22:34-40)
예수님의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반박(22:41-46)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교훈(23:1-12)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화 선언(23:13-36)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23:37-39)

  문제는 히브리인의 병렬적 논리 구조로 볼 때 14개의 기사가 마태의 저작 의도에 따라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이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문맥의 흐름에 따라 문단을 나누고 관계를 살펴본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병렬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문단들은 서로 간에 상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짝을 이루고, 짝들이 모여서 전체 구조를 만든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잘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우리가 찾아야 할 해석의 목표이다. 

 


  1-1. 21:9과 23:39의 inclusio와 의미

  본문을 여러 차례 읽는 동안 가장 먼저 눈에 띈 마태의 문체와 구조의 특징은 인클루지오(inclusio)이다. 
  어디선가 언급한 바 있지만 신약 성경의 장절 구분은 원문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인쇄업자(파리의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가 최초로  "그리스어 신약"에 사용)가 성경을 출판할 때 편리를 위해 정해놓은 것이다. 많은 장절 구분이 문맥에 의한 구분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인쇄된 장절 구분에 의지하지 않고 저자의 문체와 구조가 만든 문맥에 따른 단락 구분을 해야 한다. 이를 언급하는 것은 본문을 아무리 읽어도 문학적 구조를 탐색할 수 있는 문학적 단서들이 보이질 않아 21-23장을 한 단락으로 보는 것이 잘못된 분석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21:9과 23:39에서 발견되는 찬송시의 inclusio이다. 마태복음 21장의 첫 번째 기사와 23장의 마지막 기사에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ευλογημενος ο ερχομενος εν ονοματι κυριου)라는 동일한 문구의 찬송시가 있어 inclusio를 만든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ευλογημενος ο ερχομενος εν ονοματι κυριου)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ευλογημενος ο ερχομενος εν ονοματι κυριου)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21장과 23장이 inclusio로 한 묶음이라는 말이다. 21장과 23장은 전체가 하나의 문학적 단위이다. 두 번째는 인클루지오를 담고 있는 단락인 21장의 첫 번째 단락과 23장의 마지막 단락은 서로 평행법의 대조가 되는 짝이 될 수 있다. 


  실재로 두 단락을 비교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첫 번째 찬송시는 예수님께서 어린 숫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께 드린 찬송시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시 118:26a을 반영하는 것으로 승리와 종말론적 구원을 찬양하고 왕적 행렬을 위한 감사의 시편이다. 시편에서 찬송을 받는 왕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예수님에게 이 찬송시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메시야적 왕으로 높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 찬송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 선언과 탄식에 나오는 심판 선언문의 조건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파송한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여 하나님의 은혜를 노골적으로 거부했고, 이로 인해 결국 황폐하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23:37-38).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다시 환영하기 전에는 멸망의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 탄식하셨는데, 이때 사용한 문구가 시 118:26a의 찬송시이다. 이 말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왕으로 다시 환영하는 것만이 심판이 사라지고 구원받는 길이라 선언한 것이다. 


  여기에서 마태가 inclusio로 의도한 대조점이 보인다. 동일한 문구의 찬송시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적 왕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사용되느냐 여부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잣대로 사용된다. 이를 단락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찬송시를 배경으로 예루살렘의 왕으로 시온에 입성하시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찬송시로 선언하고 탄식하신다. 찬송시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이 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결정하는 마무리의 배경으로도 사용되어 아이러니한 절정감을 준다. 
  그러므로 21-23장을 문학적 구조 분석의 한 단락으로 삼는 것은 물론 찬송시를 포함한 단락이 서로 평행법의 짝으로 대조되는 것은 합리적인 해석이라 결정 내릴 수 있다. 

 


  1-2. 21:28-22:14의 세 가지 비유

  마태복음 21-23장에서 두번째로 눈에 띄는 부분이 21:28-22:14의 세 가지 비유이다. 여기에는 "두 아들 비유"(21:28-32)와 "악한 일꾼들 비유"(21:33-47) 그리고 "혼인잔치 비유"(22:1-14)가 연속해서 나온다. 이 연속은 순서상의 연속보다 문맥적인 연속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세 비유는 대적자들의 표현으로 "이상한 짖"(21:15)으로 보이는 성전 정결(21:12-17)을 예수가 무슨 권세를 가지고 했냐 따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질의에 대한 대답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되물어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를 부인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폭로하셨다(21:25).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거부했다. 이로서 이들은 예수님에게 하늘에서 받은 신적인 권세가 있음을 알고도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 두려워 진실을 묵살하는 악한 자들이 된 것이다. 이 완악함이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인지 알리기 위해 주님께서는 연달아 세 개의 비유를 주셨다. 그래서 세 비유는 강조점은 약간 다르지만 비유의 배경과 대상자가 같고 결론적 메세지가 비슷하다. 이것은 세 비유의 결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마 21:3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세 비유는 모두가 기대되었거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불순종(반역, 거절)때문에 제외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하나님(아버지, 포도원 주인, 임금)으로 부터 인정을 받는 내용으로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특권이 박탈되고 죄인이나 이방인과 같은 상상외의 인물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트리플 묶음"(triple bundle)이다. 그러므로 세 비유를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에 단서가 있지 않는 한 구조 분석에서는 합당한 방법이 아니다. 세 비유를 하나로 묶어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를 따르는 분석이다. 그래서 세 비유를 하나의 단락으로 묶어 본다.

 


  1-3.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두(세)  공격 : 21:12-27과 22:41-23:36

  또 마태복음 21-23장 기사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으로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기사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공격 기사가 있다. 먼저는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주제인 기사들과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기사들이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기사는 가운데에 다른 주제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두 개로 나누어진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기사들은 문학적 짝의 위치에 배치되어 하나의 레이아웃을 만든다는 점이다. 

  첫번째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21:12-27로 세(두)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22:41-23:36로 세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 예수님의 이스라엘(유대교)에 대한 공격(21:12-27)
  1. 성전 파괴(정결) 사건(21:12-17)
  2. 열매없는 무화과나무 저주(21:18-22)
  3.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불순종(21:23-27)

  두번째 예수님의 이스라엘(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공격(22:41-23:36)
  1. 바리새인의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에 대한 이해(22:41-46)
  2.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실상 폭로(23:1-12)
  3.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한 화 선언(23:13-36)

  이 모양은 두 단락이 주제로 같은 것은 물론 "3개의 기사 묶음"(triple bundle)이라는 문학적 구조에서도 서로 상응한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다가 두 단락이 평행법에서 대조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마태가 치밀하게 구성한 구조 속에서 두 단락을 사용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마태의 문체적 특징 중 하나로 3에 대한 선호 경향을 든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트리플 묶음"(triple bundle)이다. 마태는 자신의 논지를 아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연관된 세 개의 기사를 연달아 한 묶음으로 소개하는 경향을 가졌다는 이론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21:28-22:14의 세 가지 비유 묶음이 있다. 또 마태복음 8장을 보면 3개의 치유 기사(8:1-4, 5-13, 14-15)와 3개의 이적 기사(8:13-27, 28-34, 9:1-8) 그리고 3개의 치유 기사(9:18-26, 9:27-31, 32-24)가 연달아 나온다. 그리고 마 22:15-40에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기사가 3개로 연달아 등장한다.
  학자들은 마태가 3을 선호하는 경향은 신명기의 "증인 규정"과 연관된 것이라 설명한다. 신 19:15-21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판결에서는 최소 2명 이상의 증인이 요구된다 규정하고 있다. 이를 신명기 율법은 "두 세 증인"이 필요하다 언급했다. 이는 증거의 공정함과 완전함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마태의 표현 방법에 스며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연관된 주제의 기사 3개를 연달아 제시함으로 마태는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말씀이 완전히 진실되다 증명한 것이다. 

 

  어쨋든 이로서 우리는 마태복음 21-23장에는 마태의 3에 대한 문학적 경향이 예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격 단락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태의 문체와 구조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두 단락을 문학적 단락으로 구분하도록 해준다.

  1-1과 1-2, 1-3의 관찰 결과를 모아 보면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1) 우선 마태복음 21-23장의 처음(21:1-11)과 마지막 단락(23:37-39)이 inclusio로 최외곽 레이아웃을 만든다. 
  2) 21:28-22:14의 세 가지 비유가 하나의 단락이 된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공격이 담긴 21:12-27과 22:41-23:36이 서로 대조되는 자리에 있다.
 4) 그러면 결국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공격한 단락인 22:15-40절의 성격 규정이 남고, 이 단락은 세 개의 비유 단락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이상의 결과를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굵은 글씨는 자리가 확정된 것이고 보통 글씨는 위치가 확정되지 않는 것이다. 최외곽에 인클루지오로 하나의 레이아웃이 있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레이아웃이 있다. 

21:1-11 - 인클루지오
  21:12-27 - 주님의 이스라엘 공격
    21:28-22:14 - 예수의 권세에 대적하는 자의 결말(세 가지 비유)
    22:15-40 - 이스라엘의 예수님 공격
  22:41-23:36 - 주님의 이스라엘 공격
23:37-39 - 인클루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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