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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2)

by 예다준 2022. 8. 27.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2)

 

 

  1-4.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공격 단락(22:15-40)의 주제와 세 가지 비유와의 관계

  이 단락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서 예수님의 허점을 공격하는 세 개의 기사들이 모여있다. 

1.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15-22)
2. 사두개인 : 부활과 부부관계에 대한 논쟁(23-33)
3. 율법사 :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시험(34-40)

  이들의 공격은 공격의 성격(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정치적 공격, 부활과 부부관계-실생활적 공격, 가장 큰 계명-율법적 공격)은 달라도 모두 예수님의 권세를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위해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주님의 지혜로운 대답과 허를 찌르는 역공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와 비정상적 상태를 드러내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1.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
2. 사두개인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9).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33)
3. 율법사 : 반응 없음(찍 소리도 못하고 사라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공격은 21:28-22:14의 세 가지 비유 단락과 어울려 원인과 결과라는 연관관계를 보여준다. 앞에서 세 가지 비유는 기대되었거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불순종(반역, 거절)때문에 제외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아버지, 포도원 주인, 임금으로 부터 인정을 받는 내용임을 살펴보았다.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구조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공격과 대조를 이루는 자리에 있게 된다.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공격은 원인이 되고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은 결과가 된다. 

  이제까지 관찰한 마태복음 21-23장의 문체와 구조의 특징들을 토대로 문학적 구조를 완성하면 아래와 같다.

21:1-11 - 인클루지오
  21:12-27 - 주님의 이스라엘 공격
    21:28-22:14 - 결과 :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
    22:15-40 - 원인 : 이스라엘의 예수님 공격
  22:41-23:36 - 주님의 이스라엘 공격
23:37-39 - 인클루지오

 


  1-5. 해결해야할 문제 :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에 대해

  마태복음 21-23장을 분석하는 데에 마지막까지 가장 큰 곤란을 주는 것이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이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기사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특히 첫 번째 예수님의 유대교에 대한 공격 단락 안에서 다른 두 기사들과 같이 이 기사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기사로 볼 수 있는가가 분명치 않은 것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혼합하는 방법이다. 문자적 해석은 기사 내용 그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나무가 죽은 기적을 행한 것(21:18-19)과 이어지는 의심치 않는 믿음(21:20-21)과 기도에 대한 교훈(21:22)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인 해석은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무화과나무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에는 잘 어울리지만 마태복음의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성경 본문에 마가복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단서들이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 저주기사 사이에 성전 정결 기사가 나온다. 
 
  11:12-14 : 무화과나무를 저주
  11:15-19 :  성전정결기사
  11:20-25 : 다음날 무화과 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확인하고 믿음과 기도, 용서에 대한 교훈

  이런 모양은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샌드위치 기법"으로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와 성전 정결 기사를 서로 연동시키는 방법이다(참고. 야이로의 딸 소생 기사와 혈루증을 고친 여인 기사의 샌드위치 구조(막 3:19-21, 22-30, 31-35). 마가가 그린 구조를 보면 무화과나무와 이스라엘은 서로 연관된 이미지일 개연성이 크다. 그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로 이해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를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공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는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는 그냥 순차적으로 성전 정결 기사 뒤에 나오지 두 기사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마가복음의 해석을 무작정 가지고 오는 것은 주저하게 만든다.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기록은 마가복음의 기록과 관련되어 비교할 수 있다. 두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에는 21:14의 성전에서 치유하신 일과 21:15-16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논쟁하신 일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마태만의 특수 자료이다. 마태가 자기만의 특수 자료를 삽입한 것은 마가와는 다른 마태의 의도가 강하게 담긴 단서이다. 
  마가는 성전정결사건을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연관시키려는 저작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마태는 성전 정결 사건을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보다 예루살렘 입성과 연결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주님과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논쟁에서 볼 수 있다. 15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성전 정결 사건)과 또 "아이들이 성전에서 예수님에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한 일"을 분노하여 문제 삼아 비난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태는 예수님의 성전 정결과 예루살렘 입성 환호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은 분리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또 21:14의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신 일은 예수님께서 메시야 시대의 구원을 보여주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된 성전에서 올바른 성전의 기능을 수행하신 것이 된다. 
  게다가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에는 구약 시대 다윗 왕과 연관된 배경적 사건이 있다. 삼하 5:6-8을 보면 다윗 왕이 여부스족과 싸울 때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주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다윗의 명령에서 비롯되었다는 속담이 나온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인 예수가 그들을 치유함으로 성전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그렇다면 "다윗 왕"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그리고 "성전"이라는 세 주제는 다윗의 자손 예수로 인해 다윗 왕 시대를 능가하는 새로운 상황이 왔음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결국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기사가 아니라 성전과 새 시대의 도래를 연결해주는 기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태가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를 마가처럼 성전정결기사와 연결하려 한 직접적인 단서를 아직 찾지 못했다.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에 예루살렘 성전이나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이나 멸망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어야 본 연구의 구조 분석과 어울린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현재의 상황에서는 상징적인 해석을 자제한다면 마태복음 본문에 기록된 대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기적 기사로 그리고 의심치 않는 믿음과 기도를 말하는 기사로 보아야 한다. 이는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무화과나무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해석하는 상징적 해석은 무리한 해석이라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단락의 한 부분으로 보기도 어렵다 판단된다. 하지만 전체 구조를 본다면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단락의 한 기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전체 문학적 구조에서는 잠정적으로 괄호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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