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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3)

by 예다준 2022. 8. 27.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3)

 

 

 

2. 마태복음 21-23장의 전체 문학적 구조의 이해

  마태복음 21-23장의 문학적 구조는 세 개의 레이아웃으로 구성된 교차대조법적 성격의 내향적 평행법이다. 이 모양은 단락들이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에 명칭이 교차대조법적 내향적 평행법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채용했다. 본문의 경우 C 레이아웃이 다른 레이아웃들의 내용을 모아 결론을 내리는 문맥이다. 그럴 경우 교차대조법으로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내향적 평행법으로 볼 수 있다.

A. 시온의 왕의 예루살렘 입성(21:1-11)
  
  B. 예수님의 유대교에 대한 공격(21:12-27)
    b1. 성전정결사건(12-17)
    (b2. 열매없는 무화과나무 저주(18-22))
    b3.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불순종(23-27)

    C.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21:28-22:14)
      c1. 두 아들 비유(21:28-32)
      c2. 악한 일꾼들 비유(21:33-47)
      c3. 혼인잔치 비유(22:1-14)

    C'.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공격(22:15-40)
      c1'.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15-22)
      c2'. 부활과 부부관계에 대한 논쟁(23-33)
      c3'.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시험(34-40)

  B'. 예수님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공격(22:41-23:36)
    b1'. 예수님의 반박 : 바리새인의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에 대한 이해(22:41-46)
    b2'.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실상 폭로(23:1-12)
    b3'.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한 화 선언(23:13-36)

A'. 예루살렘을 향한 시온의 왕의 애가(23:37-39)
  
  가장 안쪽의 레이아웃(C)이 교차대조법의 중심과 같은 기능을 하고 다른 레이아웃들은 안쪽 레이아웃들을 보충 설명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A) 예루살렘에 대해 애가를 부르는 것(A')으로 단락이 마무리된다. 이로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특권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두 차례의 공격(B와 B')이 있고, 이에 대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반격이 실패로 나타난다(C'). 결국 주님께서는 새 나라의 왕의 권세를 거부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에서 내치고 이방인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C). 이것이 마태복음 21-23장의 전체 내용이다. 이제 각 레이아웃별 설명을 본다.

 


  2-1. A 레이아웃

  A 레이아웃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21:9과 23:39의 inclusio이다. 이것은 문학적인 장치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이해하는 해석적 단서로도 의미가 있다. 인클루지오로 사용된 문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ευλογημενος ο ερχομενος εν ονοματι κυριου)는 "나귀"와 함께 스가랴 9:9을 연상케 하는 일을 한다. 스가랴 9:9은 이런 문구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모티브가 "시온의 딸(예루살렘의 딸)의 크게 기뻐함과 즐거이 부르는 함성"과 왕이 타는 "나귀"이다. 두 모티브는 합쳐서 시온의 왕으로 임하시는 겸손한 메시야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앞뒤로 따라다니면서 온 성이 소동하도록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묘사했다(21:7-10). 마태의 설명은 스가랴 9장에 나오는 나귀를 탄 겸손한 시온의 왕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슥 9:9 말씀이 실제로 실현된 것이다. 이를 아는 마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고 주석한 것이다(21:4).
  마태는 스가랴서의 겸손한 시온의 왕을 의미하는 "사람들의 환호의 외침"을 A와 A'에 사용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가 겸손한 시온의 왕이라 천명하고(A), A'에서는 시온의 왕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안타깝게 애가를 부르는 것으로 21-23장을 마무리 한 것이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의 또 다른 명칭이다. 그러므로 시온의 왕은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의미이고, 이것이 확대되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예수가 선지자가 예언한 시온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메시야-왕으로서 합당하고 올바른 행위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21-23장에서 주님이 행하실 모든 행위에 정통성을 부여해주고, 이에 대한 거부와 공격은 메시야-왕에 대한 반역으로 심판을 자처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시온의 왕이라는 마태의 선언은 마태복음 21-23장의 기사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본 개념으로 작용한다.

  시온의 딸을 찾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왕-예수는 성전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왕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대결을 한 후 이스라엘의 종말을 탄식하셨다(A'). 주님의 탄식에서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다(23:37). 이 표현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21:9),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21:11)라고 부른 것과 연결된다. 이 명칭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이 핍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의미하지만 종국에는 하나님이 파송한 선지자 중의 선지자 예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를 핍박하여 죽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은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라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23:38). 언제 이 끔찍한 멸망이 끝나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이 진심으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ευλογημενος ο ερχομενος εν ονοματι κυριου)라 고백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볼 때이다(23:39).

 


  2-2. B 레이아웃

  B 레이아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시온의 왕의 공격 기사들이 모여있다. B는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다. 성전정결 사건(b1)과 성전 정결 사건에 대해 불만을 가진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이 주님의 역질문으로 묵살되는 기사(b3)가 이어진다. 두 기사 사이에는 주님께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있다(b2). 
  B'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격은 유대교의 최상위 하이라키에 앉아서 유대사회를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먼저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비성경적인 편향임을 증명하셨다(b1').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선생이라 자부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기만 하지 행함은 전혀 없는 파렴치한 가짜라는 실상을 폭로하고(b2'), 결론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한 화를 선언하셨다(b3'). 이로써 예수님의 공격은 이스라엘 종교 체계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는 물론 모든 삶의 중심이 되고, 이스라엘은 성전과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계급과 신분이 나누어졌다.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인 등이 모두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권세를 누리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성전을 공격하고, 그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의 체계 전체를 공격한 것이 된다. 

  가장 먼저 B의 세 가지 기사들을 본다. b1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루살렘(시온)의 왕은 제일 먼저 타락한 성전을 공격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사 56;7 인용). 하지만 시온의 왕의 눈에 성전은 "강도의 소굴"(21:13)로 보였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전정결이라 부르는 행위, 순례객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고 제사에 쓸 비둘기를 파는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상인들을 내좇아 내셨다(21:12). 


  여기에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주님께서 두 가지 행동을 더 하셨다는 사실을 전한다. 첫째가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신 것이다(21:14). 두번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논쟁을 하신 것이다(21:15-16). 다른 복음서에 없는 것을 추가한 것은 마태의 저작 의도를 아주 잘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성전에서 치유를 행하신 것은 주님께서 성전의 일을 친히 감당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타락한 성전을 대신해서 정상적인 성전의 기능을 행하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치유는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마 9:5을 보면 예수의 치유는 메시야적 죄사함이다. 
  특히 소경과 저는 자(절름발이)의 치유는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야가 행하는 새 시대의 구원역사를 상징하는 표적으로 의미가 깊다. 소경의 치유가 마태복음에서 메시야 시대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은 이미 다른 장에서 살펴보았다. 14절의 "저는 자"(코로이, χωλοι)는 마 11:5에서 예수로 인해 실현되는 천국의 치유 중에 나오는 "앉은뱅이"와 같은 단어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코로이의 치유를 메시야 도래의 표적이라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마태가 주님께서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를 치유하신 것을 특히 명시해서 기록한 것은 메시야적 죄 사함 사역을 행하셨음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됨을 선포하고 성전에서 메시야적 치유-죄 사함 사역을 감당하는 주님의 행위는 결국 성전 정결을 성전 파괴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도의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질되어서 더 이상 치유-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시고 정상적인 성전으로 치유-죄 사함을 행하신 것이다. 이로서 예루살렘 성전의 유통기한은 지나갔고 돌로 만들지 않은 참 성전인 예수 성전이 기능을 시작한 것이다.



  성전을 모독한 예수에게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분노하여 대항을 했다. 이들의 분노는 두 가지 때문이다. 먼저는 예수가 성전에서 "이상한 일"을 한 것이다. 이상한 일은 성전정결(파괴)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아이들이 성전에서 예수를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21:15).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가 주님을 환호했다. 아이들이 이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따라한 듯하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의 시작에 한 두 사건은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다. 의도적이고 의미를 드러내려는 메시야적 "사인 행위"(sign action)이다.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할 때 짐승을 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 까지 거의 200km를 도보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2-3km밖에 남지 않은 거리를, 게다가 대부분이 보도로 이동하는 순례의 길을 짐승을 타고 움직이는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다. 또 어미 나귀를 동반해야만 하는 어린 숫 나귀를 타는 것도 비상식적인 행동이다(21:5-7).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길에 옷을 드리는 사람들의 행동은 구약에서 새로 등극한 예후에게 이스라엘이 했던 행동을 연상시키고(왕하 9:13),  무리들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송가는 시 118:26a의 하나님의 승리와 종말론적 구원을 찬양하는 시로 왕적 행렬을 위한 감사의 시편이다. 
  그리고 또한 제사장이 아닌 평민이 성전 일들을 모독하고 방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아이들이 나귀를 탄 예수를 향해 질렀던 환호가 스가랴서의 겸손한 왕에 대한 말씀과 연관된다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적 왕을 흉내 내었다 판단하고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일들이 모여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눈에는 예수의 행동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겸손한 시온의 왕-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과 그의 성전에 대한 공격으로 보이기에 이들은 분노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분노는 이들의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을 반증하는 역설적 증거들이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어린아이들의 노래는 시 8:3 말씀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21:16).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일이 있은 후(b2) b3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성전을 공격한 예수님에게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시비를 걸었다(21:23). 주님께서는 답 대신 세례 요한의 권세에 대해 반문하여 예수님의 권세를 부정하는 자들의 실체를 드러내셨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로 온 자라는 것은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례 요한의 권세를 믿지 않았고, 백성들이 무서워 믿지 않는다 말하기를 꺼려했었다. 불신과 비겁함이 이들의 실재 정체였던 것이다(21:25-27).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 두 개를 첨가한 성전파괴기사와 예수님의 권세 논쟁을 통해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메세지는 두 가지이다. 성전의 변질과 성전 종사자들의 완악함과 비겁함을 폭로하고 예수가 성전을 대치 회복했다는 것이다. 기도의 집인 성전은 강도의 소굴로 변질되었고 성전의 지도자들은 백성들도 다 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를 믿지 않았고 증거 하기를 꺼려하는 무능력자들이었다. 그래서 시온의 왕은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의 치유-죄 사함의 기능과 메시야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찬송을 회복시킨 것이다. 

  B'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격은 유대교의 최상위 하이라키에서 유대사회를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실체를 폭로하는 기사들이다. 특히 여기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b1'에서 예수님의 공격의 포인트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보느냐 아니면 주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에서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해방을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배척하셨다. 그리스도는 다윗이 주라고 부르는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논증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질문을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반박하셨다(22:45). 마태는 바리새인들중에 대답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그날 이후로 감히 주님께 질문하는 자도 없게 되었다 말했다(22:46). 완전히 녹다운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믿음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임이 단 한 구절의 성경으로 드러났다.

   그후 주님의 가르침은 b2'로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실상이 낱낱이 폭로된다. 주님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23:2). 모세의 자리는 랍비가 율법을 해설하고 가르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모세의 이름으로 낭독되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누구나 지켜야 한다 믿었다. 예수님의 공격 포인트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이들의 언행불일치의 삶에 있다.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행치 않는다(23:3).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23:4). 또 자기를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23:5), 상석에 앉아 문안받는 것과 칭찬받는 것을 즐긴다(23:6-7). 이러한 자세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도 강조한 큰 자가 되는 방법과 완전히 대치되는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이다(마 23:11-12, 참고.  마 20:26-28).

  마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랍비도 선생도 아니고(23:8), 아비도(23:9), 지도자도(23:10) 아니다. b1'에서는 바리새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식함이 공격 포인트였고, b2'에서는 언행이 다르면서 선생과 지도자가 되려는 외식이 공격 포인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b3'에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일곱번의 "화 있을 찐 저" 문구로 심판하셨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화를 선언하신 것의 원인은 외식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지옥 심판이다. 


  특히 이 부분에는 기억해야하는 구조적 문체적 특징이 있다. 먼저는 본 단락은 아래와 같은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교차대조법의 각 짝들은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 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화의 선포문으로 각기 두 개의 사례를 반복해서 논지를 강조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a. 사람들을 지옥에 들어가게 함(×2)
  a1.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a2. 사람들을 배나 더 지옥에 들어가도록 한다

  b. 하나님보다 황금을 더 귀하게 여기게 만듦(× 2)
    b1.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키라 한다
    b2.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키라 한다

    x. 율법의 정신은 버리고 껍데기를 취함(× 2)
      x1.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
      x2.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킨다

  b'. 표리부동(× 2)
    b1'.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
    b2'.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a'.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고 의인과 선지자들을 죽인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가도록 함(× 2)
  a1'.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 한다 -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a2'. 예수가 보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구박할 것이다

  a와 a'에는 모두 "지옥"이 나온 것으로 같다(23:15, 23:33). 하지만 a에서는 천국 문을 닫아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a'.에서는 바리새인에게 내려질 지옥 판결이 강조된 것이 다르다. 그러니까 a와 a'는 반의 적으로 서로 상응한다. 이 대조에서 주목할 것은 지도자들의 외식과 위선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이되어 이스라엘이 외식과 위선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주님의 선언이다. 그리고 a1'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이며 종국에는 예수를 죽임으로 조상들이 남겨놓은 분량을 채울 것이라 예언하신 것이다(23:32).

  b와 b'는 "하나님보다 황금", "겉의 청결 안의 부패"라는 대조법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에 쪄들린 이중적 실체를 꼬집고 있다. 
  교차대조법의 핵심 메세지는 x로 율법의 정신을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허접하고 허무한 모습이 강조되었다. 
  b2'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언행불일치가 집중적인 공격 지점이 되었다. 하지만 b3'에서는 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위험성(이스라엘에게 천국 문을 막고 지옥에 들어가게 만듬과 의인과 선지자들을 죽인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가도록 함)과 함께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불경건이 결국 메시야 예수를 죽임으로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에 집중적인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래서 마지막 화의 선포문에서는 주님의 어조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극단적인 지경에 이른다(23:33). 

 


  2-3. C 레이아웃

  C 레이아웃은 메시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과 반역이(C') 종국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 이방인에게로 전이될 것(C)을 알려준다. 그래서 문학적 구조로 보면 C'가 원인이고 C가 결과로 서로 상응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현대적인 논리 구조가 이해에 아주 쉽기 때문에 C'를 먼저 살펴보고 C를 대조해 살펴본다.

  C'에는 이스라엘이 곤란한 질문으로 예수님의 권세를 무너뜨리려는 세 개의 공격이 있다. 첫 번째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은 예수를 정치적으로 곤란케 하려는 질문이고, 두 번째 사두개인의 질문은 세속에 물들어 하나님과 성경을 오해하는 세속화된 믿음이 성경적인 참 믿음을 공격하는 부활과 부부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시험으로 예수가 율법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책잡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은 주님의 말씀 하나로 박살 나고 만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일 번 타자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으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질문이었다(c1'). 헤롯 당원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에게 부역하는 자들로 유대인들에게 지탄을 받던 자들이다. 이들은 땅의 제사장으로 자부하는 바리새인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이었다. 그런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하나가 되어 예수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이고 치밀한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말할 수 있다. 
  이들의 공격은 예수님을 어찌하지 못하고 올무에 빠지게 하는 양비론적 함정이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 말하면 유대 율법에 의해 선지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바리새인의 고소 거리가 된다. 이와 반대로 세금을 바쳐서는 안 된다 말하면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 되어 헤롯 당원에게 고소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낼 때 사용되는 동전(22:19의 셋 돈)을 달라하셨다. 거기에는 가이사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주님께서는 이 동전을 보이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시므로 위기를 모면하셨다(22:21).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험하려는 악한 마음을 아셨다. 그리고 이 마음은 외식이었다(22:18). 메시야의 신적인 지혜가 인간의 추악한 외식을 박살 내버렸다. 



  두 번째로 공격의 주자는 세속화된 현실주의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 생각했던 사두개인의 부활과 부부관계에 질문이다(c2'). 이들은 오랫동안 유대사회를 지배했던 헬라와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협력하여 정치적 기득권은 물론 유대인의 최고 행정, 정치, 종교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믿었지만 부활, 영생, 영적 존재를 부인하는 물질주의였다. 그런 자가 예수를 공격하는 대열이 가담했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종교적인 진영을 넘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산헤드린의 공격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공격의 소재는 형의 가계를 잇기 위해서 동생이 사별한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는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이다. 이들은 이것을 부활과 연결해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공격한 것이다. 부활은 구약의 믿음이며 예수의 십자가 구원 사역을 위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부활이 부인되면 고난 받는 메시야의 구원사역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들은 계대 결혼을 한 일곱 형제를 예로 들면서 부활하게 되면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물었다. 이들의 주장은 부활이 있다면 이렇게 곤란한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부활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괘변으로 판별된다(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사람이 장가도 시집도 아니 가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된다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22:30-32). 마태는 무리가 이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전했다(22:33). 사두개인의 괘변이 간단명료한 말씀 하나로 박살난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c3'의 세 번째 예수님에 대한 공격은 율법사의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의이다. 마태는 35절에 율법사의 의도가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는 잘 모르는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니라 시험하여 곤란에 빠지게 하려 한 것이다. 율법사의 시험은 율법을 큰 계명과 그렇지 않은 계명으로 구분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있다. 오늘날 교회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율법을 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 어떤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이로 보면 22:36의 율법사의 질문은 예수님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말씀 하나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압축하는 명답으로 유명하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사랑"으로 요약하시고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 말씀하셨다.  

  C'의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세력들이 종교와 정치적 차이를 무시하고 합심한 총공세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공격은 전체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반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C의 세 가지 비유의 주제인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이 이방인에게로 옮겨가는 비극을 맞게 된다.  

  C'와 대조되는 짝인 C에는 세 개의 비유들이 연이어 나오는 단락이다. C는 C'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공격의 결과를 알려주는 단락으로 평행법의 짝이 된다. 
  세 비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을 분노케 한 성전 파괴 행위(21:12-17)와 이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박에 대한 주님의 답변(21:23-27)에 이어서 주어진 비유적인 답변이다. 이 비유적 답변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평가하시고, 그래서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려주는 비유적인 가르침이자 예언이라 말할 수 있다. 세 비유의 대상은 같다. 그리고 결론은 약간씩 강조점의 차이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 백성의 특권의 전이라는 점에서 같다. 

  첫 번째 비유인 두 아들 비유(c1)는 종교 지도자들의 실패와 그 결과로 죄인이라 정죄받았던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적 경고가 메세지이다. 두 번째 비유인 악한 일꾼 비유(c2)는 강조점이 확대되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그 결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 이스라엘의 출현이 다루어졌다(21:41, 43). 세번째 결혼 잔치 비유(c3)는 두번째 비유의 결론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상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민족적인 심판이 된다(22:7). 게다가 이스라엘의 특권은 새로운 백성에게 주어지고(22:9-10),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어울리는 조건인 결혼 예복을 준비해야 함이 강조된다(2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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