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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4)

by 예다준 2022. 8. 27.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1-23장(4)

 

 

3. 마무리와 함의

  마태복음 21-23장은 왜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야 하고,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위선과 외식에 찌든 거짓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이것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을 기습 침투로 완전히 폭파시킨 전반부 사역이다. 이러한 마태의 설명을 보면 지을 수 없는 몇 가지 깨달음이 있다. 

 


  3-1. 비성경적인 종교적 감상주의에 대한 경고

  마태복음 21-23장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라한 진짜 왕이 왕좌에 앉아 백성들의 목숨을 사지로 모는 가짜 왕의 성에 잠입하여 비호세력들의 비리를 드러내고 왕좌를 박살 내버리는 그런 영화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한국 교회는 기습 침투 작전으로 적진을 박살내는 승리의 왕 예수가 고난 주간의 주인공임을 잘 모른다. 마태의 묘사를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슬픔과 연민의 고난 주간이 아니라 인천 상륙작전과 같이 옛 이스라엘의 허리를 꺾어버린 승리의 주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에서 마지막 생애를 고난 주간으로만 보는 시각은 절제되어야 한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애도하고 슬퍼했다는 설명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제자들이 하지 않은 것을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것으로 물려받는 것은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성경 저자가 감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을 감상적으로 대하는 우리의 신앙적 편견을 문제 삼아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는 경건한 것도 신실한 것도 아니다. 피해야 할 종교적 행위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위선과 거짓으로 쌓아올린 거짓 종교의 첨탑에 침입하여 본부를 박살 낸 왕 예수님의 진노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누렸던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지금 차지한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애가로 탄식했던 예루살렘을 우리가 다시 만든다면 겸손하게 나귀를 타신 왕 예수께서 또다시 우리의 예루살렘을 박살 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주간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근신의 주간이 되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든다. 

 


  3-2.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해석 제안

  사람은 한계를 만나면 겸손해진다. 무지가 보이고 무능력이 실감된다. 마태복음 21-23장이 그런 성경이다. 더 깊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특히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를 통해서 말이다. 

 

  문학적 구조로 보면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습격하는 단락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성경 본문에는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들이 보이지 않아 결국 숙제로 남겨 놓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잘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성경 해석의 자세일 것이다. 
  어쨋든 개인적으로 이 기사는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다. 전체 구조와 문맥으로 볼 때도 이해가 안 되고, 기사 자체만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단 성경에 이 기사를 상징적으로 해석할 단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징적 해석을 배제하면 더 이상 본문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지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고려할 이상한 점(?)이 있다. 더 많은 연구를 위해 해결의 실마리를 모르더라도 문제만 제기해 본다.

  1)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을 본 제자들이 물은 질문이 엉뚱하여 주목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 물었다 마태는 묘사했다(21:20). 여기에서 "어찌하여"라는 의문사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어찌하여"는 "πως"(포스)로 "어떻게" 또는 "어떤 방법으로"(in what manner, by what means)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저주 행동의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묻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저주 행위로 인해 무화과나무가 금세 말라죽은 것을 보고, 제자들은 주님께 "왜"(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느냐 묻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본문의 해석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기 때문이다. 상징적 해석은 무화과 나무와 이스라엘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의미하고 무화과나무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예수님의 저주의 결과로 본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한 이유를 묻는 "왜"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태가 기록한 제자들의 질문은 핀트는 다르다. 그들은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한 이유에 무관심하거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에 대해 묻지 않고 무화과나무를 죽게 만든 방법에 관심을 집중하여 "어떻게"(πως)라 물었다. 이 부분을 마가의 병행 본문과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같은데 "어떻게"(πως)로 묻는 제자의 질문은 마가복음에는 없다(참고, 막 11:20-22). 마태복음에만 "어떻게"(πως)가 있다. 그러면 마치 물 길을 만들어 물이 흐르는 방향을 설정해놓듯이 마태는 문맥의 흐름을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죽게 한 이유가 아니라 방법(수단)으로 보도록 "어떻게"를 집어넣어 이야기의 흐름을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적이 올바른 것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21-22절 예수님의 대답이 무화과 나무를 말라죽게 한 수단인 믿음과 기도인 것으로 확인된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라 가정하고, 제자들의 질문을 원인인 "왜"(어찌하여)로 이해하면 예수님의 대답은 응당 이스라엘과 무화과나무가 서로 연관된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태의 설명처럼 예수님의 대답이 믿음과 기도의 능력(또는 중요성)이면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과 연결하는 상징적 해석과 예수님의 대답을 "왜"에 대한 대답으로 보아 믿음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부자연스럽다.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을 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엉뚱한 대답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징적 해석과 주님의 대답을 "왜"에 대한 대답으로 보는 것은 억지로 꿰어맞추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제자들이 "어떻게"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죽일 수 있느냐 물었다 보고, 이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의 믿음과 기도라는 해석은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 해석은 모두 완벽하게 이해가 안된다. 내가 제자라면 가장 먼저 주님께 왜 그런 일을 하셨냐고 물었을 거라 생각하기에 "어떻게"에 주목한 제자들의 질문이 엉뚱해 보인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했는가 물었다 하면 주님의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멀쩡한 나무를 죽인 것이라는 대답도 엉뚱하게 보인다. 

  2)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예수님의 저주 선언의 수단에 초점이 있다면, 21:20-21의 "기도"와 "이 산"의 조합이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기도 주제는 주님께서 성전파괴 선언을 하실 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정의한 성전의 변질 선언과 연관된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행위를 하시고(21:12-13),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료하는 성전의 일을 친히 담당하셨다(21:14). 그리고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에서 주님께서는 믿음과 기도를 수단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고, 더 나아가 믿음과 기도로 이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다 선언하셨다(21:18-22). 
  이러한 마태복음의 21장에서의 기도 주제의 흐름은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기도의 집인 성전의 기능을 친히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는 마가복음과 같이 "무화과나무 = 이스라엘"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거짓 성전 = 기도의 집이 아닌 강도의 굴혈" vs "예수 성전 = 믿음과 기도"라는 프레임으로 기록되었다 볼 수 있다. 이 이해에서 무화과나무는 마가복음의 경우와 같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로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것에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전통적인 해석은 21:21의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를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 말씀으로 본다. 하지만 기도 주제가 성전 주제와 관련된다고 보면 "이 산"은 비유적 산이 아니라 실재 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지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산이 들려 바다에 던지우는 것"은 시온 산의 심판, 다시 말해 예루살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참고, 마 8:32, 돼지 떼의 바다에 빠져 몰살됨). 



  이상의 가설은 마태복음 문맥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1. 예루살렘 성전 파괴 선언 : 성전-기도의 집의 변질과 심판(21:12-13)
  2.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 치유 : 예수-성전의 회복(21:14)
3. 무화과 나무 저주 : 예수-성전의 기도 회복과 "이 산"의 심판(21:18-22)

  모양이 마치 예수님의 성전 회복을 중심으로 "성전-기도"와 "심판"이 앞과 뒤를 아우르는 교차대조법 같이 보인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가 성전 파괴 기사와 대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설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의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안을 제시했다.
  2) 상징적 해석의 맹점을 해결했다. 상징적 해석의 맹점은 왜 무화과나무를 죽게 만들었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믿음과 기도가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엉뚱한 대답이다. 상징적 해석에 어울리는 가장 좋은 예수님의 대답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대답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질문과 동떨어진 너무나 엉뚱한 것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질문을 "수단"에 대한 질문으로 보고, 예수님의 대답을 수단인 "믿음과 기도"로 보는 해석은 성경 본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해석법이라 할 수 있다.
  3) 이 해석법은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에서 거의 무시되어온 "기도"와 연관된 "이 산" 주제를 부각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기도 + 이 산" 프레임은 예루살렘 파괴 기사의 "기도" 주제와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신 기사의 "성전" 주제가 결합되어 대비되는 구도를 만든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는 "참 성전"인 예수님의 "믿음과 기도"가 "이 산"의 심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4)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분석한 전체 문학적 구조의 B 단락 해석을 지지해준다. 
  필자는 전체 구조를 분석하고, 그 중 B 단락을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B. 예수님의 유대교에 대한 공격(21:12-27)
    b1. 성전정결사건(12-17)
    (b2. 열매없는 무화과나무 저주(18-22))
    b3.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불순종(23-27)  

 

  이 분석은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는 21:12-27의 "예수님의 유대교에 대한 공격" 단락의 세 개의 하부 단락 중 하나로 분류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그렇게 이해되지만 본문 상의 증거 구절들이 보이질 않아 잠정적으로 괄호 처리를 했었다. 하지만 함의에서 제시된 해석 제안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무화과나무 저주 기사를 예수님의 유대교 공격 중 하나로 보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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