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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8-9장(2)

by 예다준 2022. 8. 4.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8-9장(2)

 

 

  1-6. 해결해야 할 문제 : 두 개의 축사와 거부 기사(8:28-34, 9:32-34)의 메세지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8-9장 전체의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는 문제거리 중 하나는 축사와 거부로 주제가 같은 두 개의 이적 기사이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해석을 위한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얼핏 보면 그냥 일어났던 사건을 보고하고 끝나는 것처럼 보여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정으로 열리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사들을 연구한 논문들을 보면 솔직하게 어렵고 복잡하다. 학자들은 특정 단어나 문구들이 마태복음에서 신학적으로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다 원어는 이런 의미다 주장하면서 몇 가지 주장들을 모아 결론은 이런 의미라고 해석하는 방법이 많다. 문제는 낱개의 설명들을 보면 그렇겠다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들을 종합한 결론을 보면 그들의 신학적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 기사의 구조는 너무나 간단하다. 먼저는 축사에 대한 상황 묘사가 있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거부로 끝난다. 그래서 두 기사의 핵심 주제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과 불신앙으로 예수의 은혜를 거부하는 태도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설교되곤 했다. 과연 이 두 기사가 우리들에게 말하려는 메세지는 이것이 전부일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fact)을 기록한 부분이 있고, 이 사실을 근거로 교훈을 말하려는 저자의 해설 부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설 부분이 해석의 열쇠가 담겨져 있는 메세지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지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뉴스처럼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 해석은 저자가 의도하는 메세지를 따라서 이해해야지 성경에 기록된 사건 그 자체만 아는 것은 불충분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해석을 위하면 저자가 첨가한 해설을 찾아야만 한다.



  먼저 8:28-34의 거라사 지방의 두 광인 치유 기사 분문의 특징을 살펴본다. 이 기사를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이적 기사들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1)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으로 이 기사에는 귀신을 좇아내는 장면 묘사가 없다는 점이다. 28절에는 귀신 들린 자와 주님께서 길에서 만난 것과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아주 간략한 설명이 나오고, 곧 이어지는 29-32a을 보면 축사하는 방법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가 중점적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 32b-34절에는 축사의 결과는 암시적일 뿐 본문은 축사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더 무게감 있게 묘사했다.


  실재로 병행 본문인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축사 방법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막 5:8을 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셨다. 그러자 귀신 들린 자는 예수께 달려와 굴복(절)을 했다(막 5:6). 또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 귀신의 정체를 실토하도록 만드는 장면이 있고(눅 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치유받은 광인의 변화된 모습이 자세하게 나온다(눅 8:35-39).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들은 마태복음의 내용보다 자세하여 현장감이 있고 말씀만으로 귀신을 굴복시키는 주님의 영적 위력이 아주 돋보여 재미있다. 그런데 마태는 이것들을 모두 생략했다. 이와 반면에 마태는 재미보다는 의문을 일으키는 귀신과 주님과의 대화에 3절 반(29-32a)을 할애했다. 전체가 7절이니 기사의 반을 대화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것은 금방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마태의 저술 의도를 짐작하게 해주는 아주 좋은 단서가 분명하다. 

  2) 두번째로 스토리의 전개와 결말이 엉성하다는 특징이 있다. 두 부분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예수님의 축사가 귀신과 타협하는 것으로 보여 예수님의 사역이 말끔하게 완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귀신의 부탁을 허락했더니 돼지 떼가 몰살당하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 일행이 그 지방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만들어서 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우리 맘에는 귀신과 대화 없이 축사를 해서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해피엔딩이면 제일 좋은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의 대응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무엇 때문에 마태는 이렇게 결말을 맺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축사 사역을 이런 식으로 행하셨을까? 그 이유가 더욱더 궁금해진다. 이로서 귀신과 예수님의 대화는 현대인들이 이 본문을 묵상할 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의 본문이 된다.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귀신과 대화를 나눈 사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귀신의 말을 비판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주었던 경우도 유일하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을 때 주님께서는 마귀의 말이 옳지 않고 교묘하게 성경을 악용하는 것에 대해 곧바로 반박하고 거부했던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귀신의 말이 대화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생각했다는 의미가 되고, 이것이 이 기사의 메세지가 담긴 중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두번째는 이 기사의 결론을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부정적인 불신으로 보아야 할지 판정하기 쉽지 않다. 누가는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통제하려 했지만 귀신의 능력을 이기지 못하고 곤란을 겪었다 말했다(눅 8:29). 그런데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한 예수님을 환대하고 감사하지 않고 떠나기를 원했다. 공관복음에는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라 요청한 이유로 "두려워하여"라고 설명한 누가의 기록만 있다(눅 8:37).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언급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성경 저자가 언급한 것을 중심으로 본분을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법이라 믿으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은 돼지 떼의 몰살로 향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거라사인들의 두려움이 예수의 축사로 인해 돼지 떼가 몰살한 것에 있다면, 그들은 예수가 더 머물러서 발생할 경제적인 손해가 두려워 예수님을 내보낸 것이 된다. 예수님의 축사는 사람은 치료했지만 귀신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경제적인 거부감을 만들었고, 결국 이방인들의 불신과 거부로 막이 내려진 것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도 성경 해석자들에게는 예수님과 귀신의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설명해야 하는 숙제를 가진 셈이 된다. 이상의 사실들을 볼 때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는 축사 그 자체보다 귀신과의 대화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예수님과 귀신의 대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과 귀신의 대화를 여는 귀신의 불평인 8:29이다. 귀신의 불평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을 괴롭히는 것"과 "때"에 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들을 괴롭힌다 불평했다. 주님께서는 이 불평을 듣고 귀신을 사람에게서 돼지 떼 에로 가도록 허락하셨다. 
  귀신의 불평의 핵심은 때의 문제였다. 귀신이 언급한 때는 병행본문인 눅 8:30을 보면 귀신이 무저갱에 들어가는 때이다. 이 때는 마 25:41에 최후의 심판이 결말지어지는 때로 마귀가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는 때이다. 이때 종말론적인 심판을 집행하는 자의 행위를 상징하는 단어가 "괴롭히다"로 번역된 "바사니조(βασανίζω)"이다. 이 단어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다" 또는 "고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즉 종말론적 심판에서 극심한 고통(고문)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 묵시문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 묵시 문학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종말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문헌들이다. 유대 묵시 문학을 보면 종말론적 심판에서 악인들과 귀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을 천사들이 담당한다고 유대인들은 믿었다. 에녹의 비유를 보면 천사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악인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고 결박하고 형벌을 가한다. 제3 에녹서에는 이들을 "파멸의 천사"로 불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종말의 심판에서 귀신들을 괴롭히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이야기였다. 유대 전승과 귀신이 주님께 한 불평을 종합해 보면 유대인들은 물론 귀신들도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종말 즉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 때가 아니라 초림 때에 심판자로 와서 귀신들에게 심판의 고통을 주는 것은 전혀 예측도 알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아직 종말이 오기도 전에 와서 귀신들을 괴롭히니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8:29)라고 불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무저갱이 아니라 돼지 때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귀신의 불평으로 예수의 치유와 축사는 사람은 물론 귀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귀신의 뒤통수를 강타한 하나님의 아들의 급습임을 알게 된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급습은 미래의 천국이 현재 안에 들어와 종말의 심판을 점점 확장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돌격이다. 

  예수는 종말론적 심판을 현재에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급습으로 시작된 심판의 시작임을 귀신들이 모르고 오해한 것은 그들이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바다에 빠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이 주님께 돼지 떼에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몰살한 것은 예수님의 축사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아주 엉뚱한 결론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이다.
  마 12:43을 보면 귀신은 물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마태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다" 말했다. 영적인 존재인 귀신이 물질적인 물 때문에서 쉼을 얻지 못하여 물을 피해다닌다는 말은 현대인들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이해 가능하다. 평행 본문인 눅 8:31을 보면 귀신은 예수님께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의 무저갱은 "바다의 깊은 곳', "바다 아래 심연"을 의미하는 "아뷔소스(ἄβυσσος)"이다. 이것은 물의 이미지로 최후의 심판 전까지 악인과 귀신들이 갇히는 곳이고, "하데스"는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으로 불의 이미지가 강한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개념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귀신들이 들어간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몰살한 일은 바다의 감옥인 무저갱에 던져져 갇혀버린 것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 무저갱 즉 바다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아 유대인들이 부정한 동물로 여기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기를 청했던 귀신들의 소망은 돼지들이 바다에 빠짐으로 완전히 박살 나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황당하게 보이는 결말은 예수를 통해 세상에 침투한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 즉 귀신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처박히는 종말론적 심판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 

  8장의 축사 기사와 같이 귀신 축출-거부 구조를 가진 9:32-34의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 치유 기사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기록 의도에 맞는 것인지 본문의 특징들을 살펴본다. 
  1) 먼저, 이 기사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축사의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32-33a는 축사에 대한 묘사이고 33b-34은 주님의 축사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다. 그런데 32-33a 절을 보면 32절에는 사람들이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데려온 것이 나오고, 33a절에는 귀신이 좇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된 결과가 아주 간단하게 나오지만 축사 방법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다. 이것은 예수가 행한 놀라운 기적을 알려야 하는 성경 저자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자세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을 말하지만 그 사건 자체 에로 독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에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마태가 만들어 놓은 두 개의 축사 기적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여기에는 마태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 분명하다 판단된다. 

  2) 두번째 이 기사는 축사를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분량으로 보면 총 3절 중에 축사에 관한 것이 한 절반이고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것이 나머지 한 절반이다. 하지만 축사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것은 엄청나게 분량이 많은 것이라 보게 된다. 


  축사 사역에 대한 반응을 분석하면 33b에는 이스라엘의 반응으로 긍정적인 것이고 34절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으로 대단히 부정적인 것이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앞의 축사 기사에는 없는 새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8장의 축사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9장 축사 기사의 긍정적인 반응을 특히 주목하게 된다.  
  주님의 축사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돋보이는 것은 단순히 분량 배정만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9장 전체는 예수로 인해 도래한 새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 주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마태복음 9장에 흐르는 마태의 저작 의도는 예수로 인해 도래한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9장의 축사 기사도 9장의 다른 기사들과 핵심 주제가 동일하게 기록되었다 보는 것이다. 

  실제로 9장을 전체 기사들을 살펴보면 주제가 일맥상통한다. 먼저 인자가 치유를 통해서 죄 사하는 권세를 발휘하는 것은 새 구원이 일어나는 새로운 나라와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9:2-8). 세리와 죄인이 메시야 시대의 신랑과 함께 기쁨의 잔치를 하는 것도 새 시대의 새로운 일이다(9:9-17). 두 소경이 다윗의 아들에게 치유를 받는 기적도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새로운 일이다(9:27-31). 그러면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치유한 기적은 어떤가? 여기에도 메시야 시대의 새 일이라는 주제가 있는가? 그렇다. 마태는 예수의 축사를 목격한 무리들이 탄성을 질렀다 말했다. 이 탄성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가운데에 이런 일을 본 때가 없었던"(9:33) 새 시대가 열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새 시대와 새 일 주제는 9장에 있는 모든 기사들의 중심 뼈대가 되고, 낱개 기사들의 메세지를 통합하는 구조적 메세지가 된다. 그러면 이 기사에 나오는 예수의 축사에 대한 두 개의 반응 가운데에 어느 것이 마태가 돋보이고자 했던 것인지 능히 추측할 수 있게 된다. 



  3) 세번째로 기억할 것은 9장의 축사 기사는 8장의 축사 기사와 연관점이 많다는 점이다. 앞의 두 가지 관찰 사항은 9장의 축사 기사와 8장의 축사 기사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9장에서 발견한 본문의 특징은 8장의 축사 기사에 모두 동일하게 존재한다. 마태는 두 축사 기사에서 모두 축사 자체에 대해 다른 공관복음 저자들의 보고 내용들을 많이 생략했다. 그는 축사받은 자의 치유된 이후 변화된 모습도 언급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불신앙적 반응을 보고한 것도 같다. 이는 8장의 축사 기사와 9장의 축사 기사를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했기에 그런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8장의 축사 기사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예수의 축사 사역의 특징을 돋보이게 하는 것과 같이 9장의 축사 기사의 부정적인 반응도 무리들의 믿음의 반응과 대조되어 주님의 축사 사역의 특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양념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축사를 통해 나타난 부정적인 결과는 무시할 수는 없는 주제이다.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비난을 한 인물은 바리새인으로 이스라엘의 믿음을 좌우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비난은 8장의 이방인들의 불신앙보다 더 심각한 것 하다. 그리고 그들의 비난은 예수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쇼를 한다는 최악의 공격이다. 하지만 이들의 불신과 거부는 마태복음 8-9장에 있는 기사의 특징으로 볼 때, 무리들의 깨달음인 새 일과 비교되어 무리들의 믿음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8-9장에 나오는 두 개의 축사 기사는 모두 메시야 시대의 도래로 인해 나타난 새 일을 강조한다. 8장의 축사 기사에서는 귀신을 당혹게 하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예수를 통해 임했음을 보여준다. 9장의 축사 기사에서는 이제껏 이스라엘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이 빛났다(우리말 성경에는 "본 때가 없다"라 번역했지만 원어는 "보지 못했던 빛이 빛나다"이다). 새 일이 예수로 인해 나타났음을 말해준다. 

  1-7. 난제 해결 : 관원의 딸과 혈루병 여인 치유 기사(9:18-26)를 마태복음 9-11장 관점에서 보기 

  마태복음 8-9장에서 문학적 구조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을 들라면 관원의 딸과 혈루병 여인 치유 기사를 들겠다. 예를 들어 가다라 지방 광인 치유 기사는 내용 파악은 어렵지만 문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측면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관원의 딸과 혈루병 여인 치유 기사는 내용 파악은 아주 쉽지만 문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는 다소 난해하다.


  1) 이 기사가 난해한 이유는 마태의 저작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설명들이 부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사들은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와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설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해설 부분이 저자의 기록 의도가 담긴 부분으로 성경 해석자에게는 탐구해야할 타깃이 된다. 마태복음 8-9장에 나오는 예를 들자면 8:16-17을 들 수 있다. 16절은 예수의 활동하신 바에 대한 요약 설명이다. 여기에 마태는 구약 성경을 근거로 설명을 덧붙인 것이 17절이다. 이 설명에 의해서 우리는 예수의 치유가 고난 받는 종의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 8:23에는 아주 간단한 동사 하나이지만 본문의 의미를 좌우하는 저자의 해석이 첨가되어 있다. 여기에서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탔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라 묘사했다. 배를 타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표현이다. 앞의 표현은 사실적이다. 이에 반해  뒤의 표현은 사실에 의미를 부여한 표현이다. 마태는 이 동사 하나로 본문을 사실 보고에서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바꾸었다. 

  단어나 문장으로 저자의 해설을 찾을 수 없을 때 저자의 저작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복음서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병행문구 대조" 작업이다. 마태의 사건 묘사를 마가의 묘사와 비교하면 마태는 치유 사건의 여러 정황들을 생략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직원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권고한 사실이나 직원의 이름이나 그가 회당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설명들은 스토리에 흥미를 더해주기 때문에 저자의 입장에서는 생략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것들을 생략하고 혈루병 여인의 믿음에 관한 말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는 말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것으로 마태는 독자들이 관원보다는 여인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생각할 수 있다. 만약에 마태복음 본문을 마가복음과 비교하지 않았다면 마태의 기록이 여인의 믿음을 유독 강조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쨋든 이 기사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여인의 믿음이다. 여인의 믿음은 마태복음 8-9장에서 치유를 구했던 사람들과 비교하면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내적인 믿음으로 구별된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님께 치유를 요구하지 않았고 자신의 믿음이 치료받기에 알맞다는 식의 어필도 하지도 않았다. 20절의 예수의 뒤로 가서 겉옷만 만지려 했다는 설명은 이 여인은 주님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부지불식간에 믿음을 사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눈치챈 이는 오직 예수님 뿐이었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이 눈에 뜨이는 또 다른 이유는 죽어버린 소녀에 대해 주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언한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비웃었다는 보고(9:24)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한 여인의 믿음과 주님의 공식적인 선언을 비웃었던 무리의 불신앙이 극적으로 대조된다. 

  2) 두번째로 이 기사의 특징은 치유를 위해 관원의 믿음보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행동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관원은 죽은 딸을 살려달라 주님께 요청했다. 그에게는 죽은 딸이 예수로 인해 다시 살 줄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9:18). 하지만 마태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의 믿음에 대한 설명에 비하면 관원의 믿음을 드러내는 언급을 생략해버렸다. 막 5:36과 눅 8:50을 보면 주님께서 관원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촉구하는 말씀이 나오지만 마태는 이것을 생략했다. 죽은 소녀를 살릴 때도 관원의 존재는 미지수이다. 
  오히려 죽은 소녀를 살릴 때 눈에 띄는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병행본문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관원이 치유를 청할 때 소녀는 살아있었다(막 5:23, 눅 8:42). 하지만 마태는 소녀가 금방 죽은 것으로 설명하여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치유의 시작에서부터 가능성이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설명했다(마 9:18).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과 비웃음에 굴하지 않고 소녀의 다시 살아남을 선언 하셨고 죽은 소녀를 잡고 일으켜 살렸다. 이런 묘사는 죽은 소녀의 되살아남이 관원의 믿음보다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신과 비웃음을 이기고 소녀를 살리려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지에 크게 좌우되었다 느끼게 해 준다. 이상의 두 가지 특징을 보면 이 기사는 여인의 치유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죽은 소녀를 살리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핵심 주제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결론을 맺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이 결론의 문제는 두 가지라 지적할 수 있다. 먼저는 마태가 9-11장에 모티브의 연관관계로 만들어놓은 더 큰 의미상 본문에서 기적을 보지 못하고 협소하게 9장 안에서만 보는 것과 두 번째는 이로 말미암아 본문이 위치한 마태복음 9장 전체 안에서 소녀가 다시 살아난 기사의 기능을 올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다. 
  1) 마태복음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특히 9-11장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모티브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성경이다. 마태는 9-11장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모티브를 각 장마다 연계해서 구조적 메세지를 남겨두었다. 이것을 보면 무엇 때문에 마태가 죽은 소녀를 살리는 기적을 설명할 때 예수님의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새 시대 도래의 표지(mark)이다. 그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이는 새 시대를 가져온 자인 메시야가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메시야의 제자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메시야의 표지이자 제자의 표지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제자의 표지(10:7-8)와 예수를 통해 도래한 새 시대의 표지(11:2-5)라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10:7-8에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이 천국을 전파하고 드러내라 명하셨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명령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제자들이 행해야 할 사역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제자들이 주님과 동일한 맥락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참 제자임을 알게 해 주는 표지(mark)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예수의 참 제자라는 표지가 되는 것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천국 사건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죽은 자를 살림으로 예수처럼 행하기 때문에 이 기적이 예수의 참 제자로 판명되는 표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예수가 기다리던 종말의 메시야임을 알려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질문(11:3)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 알 수 있다(11:4-5).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메시야로 다른 이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증거로 자신을 통해서 새 시대의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제시한 새 시대의 기적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와 같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새 시대 도래의 표지요 메시야의 표지요 또한 참 제자의 표지로 기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생각이 특히 마태에게 유별나다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제자의 표지로 말하지 않는다. 눅 7:22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새 시대, 메시야의 표지라 말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누가는 제자들은 예수와 같이 죽은 자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새 시대의 표지요 메시야의 표지로 보는 것을 넘어 제자의 표지로 말하는 것은 마태만의 특별한 인사이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의 특별한 의미를 알면 마태복음 9-11장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모티브로 만들어지는 모티브의 연계 라인을 발견할 수 있다. 새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는 마태복음 9장에는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고, 바로 뒤를 따라 오는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에서 주님께서는 예수의 제자의 표지로 죽은 자를 살리라 명령하셨다. 그리고 11장에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메시야의 표지와 새 시대 도래의 표지로 알아야 하며 이에 실패하는 자에게는 옛 부대가 터지는 것과 같은 상상 이상의 손실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모티브의 흐름이 있다. 이 모티브의 흐름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에 대한 마태의 생각을 알려준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해 시작된 새 시대의 표지이다. 그래서 이 기적을 행하는 자는 새 시대의 일군(메시야와 제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때문에 마태가 죽은 소녀를 살린 기적을 묘사할 때 소녀의 죽음을 강조했고 죽은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믿음보다 소녀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한 예수님을 강조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이 기사가 마태복음 9장에 배치된 전략적인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적극적인 의지로 다시 살렸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이 새 시대 도래의 표지요 자신이 메시야라는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 주님께서는 9장에서 죽은 자를 살린 메시야로 스스로의 정체를 입증하셨기 때문에 10장에서는 제자들에게 제자의 표지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요구할 수 있었고, 11장에서는 세례 요한에게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이유로 말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9장의 죽은 소녀를 살리는 기적은 10장과 11장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의 실증적 근거가 된다. 만약에 주님께서 친히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행하지 않았거나 행했다 하더라도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10장의 제자도 강화와 11장의 세례 요한에게 준 답에 있는 죽은 자를 살린 기적에 대한 언급들은 실체가 없는 가르침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마태복음 9장의 죽은 소녀를 살린 기적은 필수적이고 전략적인 위치에 배치된 것이다. 


  이상의 관찰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이 기적에 대해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이 기적의 표면적 의미와 내면적 의미이다. 이 기적의 의미는 혈루병을 앓은 여인의 믿음의 위대함과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고자 하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지를 교훈받을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표면적 의미이다. 본문에는 내면적 의미가 있다. 죽은 소녀를 살린 예수님은 새 시대 메시야 시대의 문을 열고 은혜의 표지를 보여주는 구원자이시다. 
  두번째로 우리는 죽은 소녀를 살린 기적이 마태복음 9장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적의 표면적 의미만 본다면 이 기적은 마태복음 9장 전체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이 기사가 마태복음 8-9장에 기록된 기사들 중에 가장 난해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였다. 하지만 보다 넓은 마태복음 9-11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적 안에 숨겨진 마태의 포괄적인 의도가 파악된다. 

 

2. 마태복음 8-9장 전체 구조

  마태복음 8-9장의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이해의 틀을 마련하려는 작업이다. 이해의 틀은 해석의 길잡이이다. 이런 방식(틀)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방식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의 틀이 다르면 성경 본문을 주목하는 관점이 달라지고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앞에서 살펴본 관찰 결과를 종합하면 마태복음 8-9장의 문학적 구조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A. 예수의 권위와 믿음이 강조된 세 개의 치유 기사(8:2-15) 
  B. 설교1. 치유와 축사 사역의 의미(8:16-17) 
    C. 예수를 좇음에 따르는 어려움이 강조된 세 개의 강화(8:18-27)
       D.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축사(8:28-34) 
         X. 치유에 대한 논쟁(9:1-8) 
   C'. 예수를 좇음에 대한 두 개의 논쟁(9:9-13) 
  B'. 설교2. 예수를 좇음의 의미 논쟁 (9:14-17)
A'.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믿음이 강조된 두 개의 치유 기사(9:18-31)
     D'. 새 일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축사(논쟁)(9:32-34) - 귀신의 왕

  위 도식은 아주 간단하게 그린 것이다. 보다 충분하게 그려진 도식은 아래와 같다. 

A. 예수의 권위와 믿음이 강조된 세 개의 치유 기사(8:2-15) 
 a1. 한 문둥병자 치유 :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2)
 a2. 백부장의 하인 치유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7-8) / 이스라엘에는 없는 믿음 강조
 a3. 베드로의 장모 치유 :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15)

  B. 설교 1. 치유와 축사 사역의 의미(8:16-17) - 고난 받는 종의 치유

    C. 예수를 좇음에 따르는 어려움이 강조된 세 개의 강화(8:18-27)

       D.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축사(8:28-34) : 가다라 지방 두 광인 축사

         X. 치유에 대한 논쟁 - 치유하는 죄 사하는 권세(9:1-8) - 치유가 죄 사하는 권세로 심화

   C'. 예수를 좇음에 대한 두 개의 논쟁(9:9-13) -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 하나님의 참된 원함(긍휼)이 예수를 좇음의 원인
  c1'. 죄인들과의 식사 논쟁 1
  c2'. 죄인들과의 식사 논쟁 2 : 금식

  B'. 설교 2. 예수를 좇음의 의미 논쟁 (9:14-17) - 고난의 종을 통한 새 시대의 도래

A'.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믿음이 강조된 두 개의 치유 기사(9:18-31)
  a1'. 한 직원의 딸과 예수의 옷을 만진 여인 치유
  a2'. 두 소경 치유

     D'. 새 일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축사(논쟁)(9:32-34) - 귀신의 왕

  마태복음 8-9장은 변형된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졌다 판단된다. A, B, C, X 레이아웃은 교차대조법의 모양인데 D 레이아웃은 동의적 평행법 모양이다.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를 중심으로 4개의 짝(pair)이 어울린 레이아웃의 연관성은 비교적 선명하다. 
  마태는 마태복음 8-9장을 축사 기사로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축사 기사에서 크게 대비되는 부정적 반응과 긍정적 반응을 근거로 다음 장인 10장에 전개될 제자도를 연결하려 했다 보인다. 그래서 그는 D'를 X 다음에 배치하지 않고 A' 다음에 있게 하는 변형을 만들고, 곧이어 9:35-10:4을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으로 10장과 연결하는 다리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A. 예수의 사역 요약(9:35)
  B. 추수할 일군에 대한 요청(9:36-38)
A'. 제자들의 사역 요약(10:1)
  B'. 12제자(10:2-4)

  그래서 전체 구조는 교차대조법인데 D와 D'는 동의적 평행법 모양을 가지게 되었다 판단된다. 이 구도에서 메세지의 중심은 키아즘의 중앙인 X가 된다. 각 레이아웃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본문을 설명해 본다.

  2-1. X

    X는 교차대조법(Chiasm)에서 대조되는 짝이 없이 하나만 있는 레이아웃이다. 교차대조법은 일반적으로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고, 다른 부분들은 병행적인 위치에 배치하여 서로 보충, 대조, 역전, 동의, 반의 등의 연관관계로 중심을 보충 설명하는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구조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한 것을 넘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이 틀을 사용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했고 성경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적 구조 자체가 아니라 문학적 구조가 일종의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구조적 메세지"이다. 이것은 각 기사들이 메세지를 가지고 있듯이 독자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인들은 각 기사의 메세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문학적 구조가 나타내려는 메세지는 모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러면 성경 저자가 문학적 구조로 나타내고 있는 메세지를 놓치고 만다. 
  교차대조법의 중심(보통 X로 표기한다)은 중심 메세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마태복음 8-9장에서도 X는 메세지의 중심으로 볼 수 있다. X는 치유 논쟁(9:1-8)으로 핵심 기능은 예수의 치유를 인자의 죄 사하는 권세와 연결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 관점에서 마태복음 8-9장의 모든 기사들을 설명했다. 바꾸어 말하면 마태복음 8-9장의 각 기사들은 내용과 등장인물 주제도 다르지만 모두 X의 메세지를 돕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치유는 마태복음 8-9장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이다. 이 주제는 8-9장에 나오는 모든 주제들을 포함한다. 축사를 보자. 마태는 귀신 들림으로 질병이 생겨난 것(9:32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 12:22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과 귀신 들림으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상태가 생겨났음을 알려주었다(12:45). 또 4:24을 보면 귀신 들림이 각종 질병 목록 중 하나로 열거되었다. 이로서 마태는 메시야의 치유의 관점에서 축사를 치유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치유는 마태복음 8-9장의 기사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곧바로 믿음과 동반된 개념이다. 또 치유는 예수님의 파송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들의 행동 강령이요 표지이기에 제자도와도 연결된다. 결국 치유는 마태복음 8-9장의 모든 주제들을 포괄하는 중심 주제이다. 이런 치유가 예수의 죄 사하는 권세와 연결되어 치유자 예수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인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X의 메세지이다. 
  이 메세지가 마태복음 8-9장을 구성하는 다른 레이아웃들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보충하고 설명되어 증명되는 것이 문학적 구조의 기능이다. 실제로 각 레이아웃을 보면 비록 주제는 다르다 해도 모두 그 안에는 구원-심판의 내용이 담겨 있다.

A. 치유-믿음 / 이방인의 구원
  B. 설교 1. 치유-축사 / 고난 받는 종
    C. 예수를 좇음
       D. 축사-하나님 나라의 도래 / 때
         X. 치유-죄 사함
     C'. 예수를 좇음 / 헌 옷, 헌부대의 파괴
  B'. 설교 2. 예수를 좇음 
A'. 치유-하나님 나라의 도래
       D'. 축사-하나님 나라의 도래

  치유가 주제인 A 레이아웃은 백부장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멸망과 이방인의 구원을 말했다. B 레이아웃에는 치유자 예수를 사 53장의 고난 받는 종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X와 메세지가 완전히 똑같다. C 레이아웃에는 예수를 좇음이 주제인데 심판이 나온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를 무시하면 헌 옷과 헌부 대가 파괴되는 것과 같은 심판이 있을 것이라 경고되었다. D 레이아웃도 마찬가지이다. 축사가 주제이지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최후의 심판을 행하는 때에 대한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8-9장을 구성하는 레이아웃들의 주제인 치유, 예수를 좇음, 축사, 믿음 모두에 구원-심판이 함께 나온다. 결국 모든 레이아웃들이 X의 치유-죄사함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2. A와 A'

  A와 A'는 믿음과 치유가 공통적인 주제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짝을 만든다. 믿음은 치유와도 연관되고 죄사함과도 연관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치유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직접적으로 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A와 A'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X를 부가 설명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하지만 A와 A'는 믿음의 강조점이 다르다. A의 믿음은 치유자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는 믿음이고 A'의 믿음은 예수의 치유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강조하는 믿음이다. A'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으므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A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A에서 연달아 나오는 세 개의 치유 기사들의 공통점은 치유를 행하는 예수님의 권세를 최대한 높이고 배려하는 믿음(태도)이다. 세 기사에서 치유를 바라는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기적을 행하라 예수님을 촉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자신을 맞추고 섬기려는 자세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기사에서 문둥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 말하며 치유를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두고 치유자인 예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했다. 이 말은 내가 믿으니 나를 치료해달라는 믿음과 비교하면 전적으로 예수님의 바램에 의존한 요구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치유를 선언할 때 공관복음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요구자의 믿음에 대한 언급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 하지 않고 "내가 원하니"(3절)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치유 기사를 담고 있는 복음서에서도 오직 이 기사에만 나오는 유일한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마 8:3, 막 1:41, 눅 5:13). 
  특히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문둥병자가 치유를 받고 난 다음에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소문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마태는 이를 생략했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문둥병자의 예수께 완전히 의존적인 믿음을 희석시키는 내용이라 판단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백부장의 하인 치유 기사에도 치유를 청하는 백부장의 믿음의 간절함보다 치유를 행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최대로 높이려는 백부장의 믿음이 눈에 띈다. 백부장은 자신과 주님의 관계를 군대식 상하관계로 설명하여 예수님의 치료자로서의 권세를 말 한마디면 즉각적으로 실행되는 최상의 권세로 높였다. 
  또한 마태는 백부장의 믿음에 산상수훈 결론부에서 서기관들과 다른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εξουσια)와 동일한 용어인 "권세"(εξουσια)를 사용했다. 9절의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수하"는 "권세"(εξουσια)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백부장의 믿음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고 권위적으로 높이는 믿음으로 예수의 권세를 자신의 치유에 실천적으로 적용한 이상적인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주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내린 평가로 확증된다.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에게는 없는 믿음"으로 평가하셨다(8:10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어지는 11-13절을 보면 백부장의 믿음은 유대인들은 실패하고 이방인들이 구원에 성공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백부장의 믿음은 치유의 기적을 받은 믿음을 넘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마태는 치유의 믿음을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했고, 이 생각은 X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장모 치유 기사는 결론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마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누가의 병행 본문의 설명과 비교할 때 가치를 발휘한다. 마가와 누가는 그들의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를 받은 후 예수님을 포함한 집안사람들을 시중들었다 말했다(막 1:31, 눅 4:39). 하지만 마태는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 예수만을 시중들었다 기록했다.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 같이 보이지 않지만 앞의 두 치유 기사가 예수님의 권세를 높이는 데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하다. 또한 앞의 두 치유 기사는 치료를 받기 전에 예수님의 권세를 높인 것이라면 베드로의 장모 치유 기사는 치유를 받은 후에 예수님의 권세를 높인 것으로 시차가 발생한다. 이것도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치유자 예수의 권세를 높이려 했다는 면에서 보면 앞의 두 기사의 시간을 보완한다는 면에서 나름 의미심장하다. 
  A의 세 개의 치유 기사를 살펴본 결과 모든 기사가 치유자 예수의 권세를 최대한 높이려는 믿음에서 일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태는 이 믿음으로 치유를 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A'의 치유 기사 두 개는 앞에서 언급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두 기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 즉 새 일이 나타난 치유 기사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죽은 소녀가 다시 살아난 것과 다윗의 아들 예수가 맹인을 치유한 것은 모두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새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A와 A'를 서로 연결 지어 보면 우리들은 이런 메세지를 볼 수 있다 : 예수는 메시야적 치유자이다(A'). 그리고 그에게 합당한 믿음은 그의 권세를 최대로 높이는 것이다. 이 믿음에서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진다(A).

 

  2-3. B와 B'

  B와 B'는 예수의 정체를 구약성경을 근거로 정의한 설교 1과 2로 구조와 위치가 교차대조법의 짝으로 딱 맞아떨어진다. A짝과 비교해서 B짝의 새로운 점은 제자도가 제시된 것이다. 


  설교 1은 예수를 치유자로 보고 그의 이적 사역(치유와 축사)의 의미를 기독론적으로 설명했고, 설교 2는 예수를 제자를 부르는 자로 보고 그를 좇음(제자도)의 의미를 기독론적으로 설명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태복음 8-9장에는 예수의 기적과 예수를 따름이 다양한 모양으로 기사 중에 결합되어 반복된다. 마태는 예수가 옴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치유와 축사)과 예수를 따름이라는 특징적인 두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치유를 거부하는 것과 예수를 따름을 거부하는 것은 모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나온다. 하지만 세상은 물론 제자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태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8-9장에서 교차대조법의 짝으로 설명된 것이다. 
  마태가 만든 믿음과 제자도의 대조된 짝은 한국 교회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믿음만을 강조하고 제자도는 이차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구원과 삶이 일치하지 않은 수많은 피폐에 고생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메시야 예수는 우리에게 치유-구원의 은혜만을 준다고 믿게 되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하지만 마태복음 8-9장을 다시 분석해 보면 메시야 예수는 제자들에게 치유-구원은 물론 제자도-구원도 함께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치유와 제자도라는 두 가지 현상을 나타냈다. 그래서 치유를 거부하는 믿음은 제자도를 거부하는 믿음과 똑같이 메시야 예수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2-4. C와 C'

  A 레이아웃이 치유-믿음에 집중된 부분이라면 C 레이아웃은 예수를 좇음(따름)에 온전히 집중된 부분이다. C와 C'는 동일 주제를 다루지만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여 대조되는 짝을 만들었다. C에는 예수를 좇음에 따르는 어려움이 강조된 세 개의 강화(8:18-27)가 있고, C'에는 예수를 좇음을 논쟁화한 두 이야기(9:9-13)로 예수를 좇음의 신학적 의미를 알려준다. 

  C의 세 개의 기사에는 모두 예수를 "좇다"(따르다, 아코류세오 ἀκολουθέω)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되어(19, 22, 23) 의미상 한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조를 통해 보면 앞의 두 기사는 부정적인 따름의 예이고 세 번째 제자들의 경우는 긍정적인 따름의 예이다. 여기에는 제자들의 예수를 따름 사이에 부정적인 따름을 삽입한 것 같은 구조가 있다.
 
  A. 다른 쪽으로 가라는 예수의 명령(18)
    B. 한 서기관의 따름과 예수의 반응(19-20)
    B'. 한 제자의 요청과 예수의 반응(21-22)
  A'.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제자들(23)

  이것을 통해서 마태는 부정적인 예와 긍정적인 예를 비교해서 제자도의 의미를 보다 충실하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부정적인 예는 예수를 따르는 삶은 단순히 예수를 선생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삶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불안정과 고난의 삶이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 부정적인 예는 세상으로부터 최악의 욕을 먹는다 하더라도 예수를 따르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삶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겐 부친을 매장하는 일은 대단히 경건한 일로 여겨졌다. 구약은 나실인은 자기 부모를 매장하지 못하도록 말했다(민 6:6-7: 레 21:11). 하지만 후기 랍비 전통에서는 친족을 매장하는 것을 나실인의 의무로 이해했다(tob. 4:3; 6:15). 이것으로 유대인들은 친족 매장 행위를 아주 높은 경건 행위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예수의 명령은 대단히 불경건하고 반윤리적 반 율법적인 천인 공로할 만행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진짜 제자도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 정도로 혹독하고 치명적인 선택도 해야 한다 말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려 했던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배를 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보여줌으로 이들은 긍정적인 예이고 앞의 두 경우는 부정적인 예라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면 예수를 따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예수를 위해 반인륜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태가 주장하는 제자도를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에 대한 대답이 C'에 나온다. C와 C'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 짝을 이루어 구조적인 메세지를 우리에게 준다.

  C'에는 예수를 따름의 근본적인 차원의 의미를 알려주는 두 개의 기사가 있다. 본문을 보면 두 기사의 배경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역을 맡은 캐릭터가 처음에는 바리새인에서 두 번째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첨가된 것 말고 예수를 따름으로 야기된 식탁 교제가 소재로 같다. 바리새인들은 왜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냐고 예수를 힐난했고(9:11),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들과 같이 금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냐 따졌다(9:14).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유대 전통인 식탁정결법(dietary law)을 어겼다 믿었다. 이 법은 바리새인들의 특별한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법으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땅의 제사장"으로 믿고, 마치 제사장과 같이 생활에서 제의적 거룩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의 믿음은 특히 음식에 집중되어 음식과 소비를 제사 행위와 같이 규정한 식탁법이 생겨난 것이다. 이 법은 언제, 무엇을, 누구와 함께 먹어야 거룩한가를 규정했는데, 한 랍비 문헌의 문구와 같이 구원론적인 의미에 까지 확장되어 율법과 버금가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 "성전이 서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속한 것은 제단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식탁이 그를 구속한다"(B.Berakhoth 55a).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대인 전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사 율법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고집하는 예수를 율법을 무시하는 방탕한 자로 보고 비난했던 것이다(눅 7:34).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와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고 식탁 교제를 하는 것으로 메시야를 준비하지 않는다 반문했다. 하지만 이들의 의혹 제기는 근본적으로 예수와 죄인들의 식탁 교제의 의미를 오해했기에 비롯된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죄인의 상징인 세리 마태를 제자로 예수를 따르라 명했고, 마태를 비롯한 죄인들과 함께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구원을 상징하는 신랑 예수와 함께하는 식사의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셨다. 구약성경은 메시야의 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회복된 관계를 결혼, 특히 결혼 잔치의 은유로 예언했다(호 2;18, 사 6:10, 62:5). 이것이 주님께서 끊임없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강행한 이유였다. 이 식탁 교제로 죄인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주님께서는 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긍휼, 즉 회개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어리석은 반대와 의혹 제기를 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주님께서는 자신을 의원으로 비유하시면서 자신의 가치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 곧 죄인에게 있다 말씀하셨다. 이것은 호 6:6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 담긴 비유이다. 마태가 인용한 말씀은 호 6:6의 칠십인역이다. 이것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없는 마태만의 것이다. 그래서 이 인용구는 본 기사의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호 6:6은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이 긍휼을 베풀 것을 알리는 선지자의 외침이다. 선지자는 긍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상호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외쳤다. 이 외침과 같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났고 예수는 그 긍휼에 대응하여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의원으로 반응했다. 그러면 죄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긍휼히 여겨야 하고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과 죄인들의 식탁 교제를 즐거워했어야 마땅한 반응이 된다. 제자들은 예수의 식탁 교제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믿음으로 반응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사람의 법으로 긍휼이 아니라 비난과 거부로 반응했던 것이다. 
  이로서 마태는 앞 8장에서 예수를 따름을 3가지 특징(고난의 삶을 감내함, 세상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삼음, 예수의 정체에 대한 분명한 믿음 소유)으로 설명한 것에 9장에서는 예수를 따름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라 추가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바리새인들이 비난한 일 이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동참해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탁교제에 대해 각도가 다른 논쟁을 걸어왔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같이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기만 하냐고 물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당시 외식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의를 드러내려고 금식을 했다(마 6:16-18). 하지만 이 금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는 눅 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은 금식으로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드러냈다. 바리새인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원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 믿었고, 이 죄를 회개하여 구원을 예비해야 한다 믿고 금식을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궁극적으로 다가올 시대, 즉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구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금식도 이 점에서 매한가지였다. 이들은 메시야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하는 기다림과 준비의 금식을 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입을 맞추어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당연히 금식해야 한다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금식을 하지 않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먹고 마시는 식탁 교제를 강행했다. 그 결과 예수의 식탁 교제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해야 할 제자의 특징적인 행동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기사가 조명하려는 포커스는 금식 자체가 아니라 예수를 따름이라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예수를 따름으로 앞의 논쟁과 주제가 같아진다. 마태는 동일한 주제를 가진 기사를 연속적으로 두 번 반복하여 가르침의 중요성을 더 크게 만들려 했다 보인다.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먹고 마심은 기쁨의 시대의 증표인 신랑 메시야와 함께 하는 식탁 교제이고, 기쁨의 시대가 완성되려면 신랑의 죽음이 있고, 이때 제자들은 새로운 금식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해야 할 금식은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과 본질이 다른 금식이다. 이 말은 사 53:8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즉 메시야의 고난을 통해서 새 시대의 기쁨이 온전해진다는 암시이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금식은 다가올 새 시대를 준비하는 금식이었지만 제자들은 다른 차원의 금식을 한다. 그들의 금식은 이미 오신 메시야가 고난의 종의 사역을 완성하는 금식이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장하는 금식은 유통기한이 다한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식탁 교제와 새 금식을 무시하고 방해하는 것은 고난 받는 메시야의 사역을 반대하여 심판에 이르는 악행이다. 이를 주님께서는 생베 조각과 낡은 옷 비유와 새 술과 새 부대 비유로 설명하셨다. 새것을 옛 것에 맞추면 옛 것은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다. 생베는 낡은 옷을 찢어버리고 옛 부대는 새 술을 감당할 수 없어 떠 저버린다. 제자들의 주님과의 식탁 교제는 이미 도래한 새 시대의 일이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새 시대의 역사를 거부하고 반대하면 손실과 파괴가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경고하신 것이다.  


  C'에서 예수를 따름은 예수의 일, 이미 도래한 새 시대의 일을 따르는 것이다. 금식을 하지 않고 예수와의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은 이미 새 시대가 왔기 때문이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다른 금식을 하는 것도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한 새 시대의 완성을 위한 일이다. 결국 C'에서 예수를 따름은 새 시대를 따르는 일이다. 
  이 결론은 C의 예수를 따름의 의미를 하나님의 차원에서 설명하여 더 근원적 의미를 보충해준다. 왜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고난과 세상의 오해와 질타를 감내해야만 하는가라는 C의 질문에 C'는 그것이 이미 도래한 새 시대의 일, 하나님의 긍휼에 긍휼로 반응하는 일이기 때문이라 대답해 준다.
  예수의 천국의 특징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과 다른 것으로 유대인들은 예수의 실현된 종말론을 몰랐다. 실현된 종말론의 특징은 미래의 종말이 현재에 실현되고 있기에 발생하는 긴장이다. 두 시대(미래와 현재)의 공존으로 발생하는 긴장감과 직결된 것이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기적들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다.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실행되는 제자의 삶은 미래의 천국을 누리면서 동시에 미래의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이중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일은 예수가 행하는 새 시대의 은혜의 혜택을 누리면서 동시에 옛 시대로부터 오는 유혹과 비난과 방해를 부인하고 견디는 이중적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긍휼에 올바로 반응하는 믿음의 삶, 제자의 삶이다. 

  2-5. D와 D'

  이 부분은 앞에서 설명했기에 아주 간략하게 언급한다. D와 D'는 축사를 통해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D)와 새 일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D')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교차대조법의 레이아웃으로 아주 잘 어울린다. 


3. 마무리

  전통적인 성경 해석은 주로 절별 중심, 단어나 신학적 주제 중심의 해석이다. 이 방법들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아주 적당한 방법이기에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성경 저자의 문체와 구조를 중심으로 마태복음 8-9장을 보았다. 
  마태복음 8-9장은 전통적인 해석과 같이 치유, 축사, 믿음을 주요 주제로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을 보고하는 성경이라 이해된다. 그렇지만 마태의 문체-구조 중심으로 보면 이전에 부각되지 않은 몇 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1. 마태복음 8-9장은 예수의 기적과 죄 사함을 연결해서 설명했다. 이것이 마태복음 8-9장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뼈대이다. 예수의 기적과 죄사함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은 예수 기적에 구원론적 차원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게 주는 가치는 상상 이상이라 본다.
  2. 마태복음 8-9장의 중심 뼈대가 치유-죄사함이라면, 마태복음 8-9장의 주요 주제는 치유와 제자도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는 이 두 가지 주제가 예수로 인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체라 설명했다 해석된다. 이것은 마태복음 8-9장은 물론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정하게 만든다.
  3. 마태복음 8-9장의 교차대조법을 구성하는 모든 레이아웃에는 각 주제에 구원-심판의 메세지가 동반된다. 치유, 축사, 제자도 모든 주제가 구원-심판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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