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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2)

by 예다준 2022. 8. 31.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2)

 

 

  1-3. 인자의 파루시아를 위해 만들어놓은 24:4-28과 24:29-33의 공통적인 구조

  앞에서 24:1-28의 문학적 특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범위를 확대해서 24:1-35을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24:29-35은 인자의 파루시아(임함)을 상세하게 설명한 첫 번째 단락인데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문학적 구조와 비교해 보면 재고해야 할 사항이 생기기 때문이다. 


  관찰의 포인트는 24:1-35에는 24:4-28을 전반부로 24:29-33을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는 공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부분은 "인자의 파루시아"(임함) 모티브를 중심으로 각각 앞에는 거짓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의 출현을 상징하는 사건들이 설명되어 있고, 뒤에는 비유(또는 예화)와 인자의 임하심에 대한 가르침이 결합되어 있는 공통적인 구조를 각자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만들어놓은 문학적 구조로 구조적인 메세지를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24:4-28을 보자. 27절에 인자의 임함(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은 파루시아)이 나온다. 그리고 인자의 임함의 특징을 설명하는 "주검과 독수리 예화"가 28절에 있다. 곧 "인자의 파루시아 + 예화" 문형이다. 이 문형 앞의 23-26절을 보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4-22절에는 종말 전의 현상으로 두 개의 환란이 연달아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이렇다.



종말 전 현상(24:4-22) - 두 환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24:23-26)
인자의 임함(24:27)
주검과 독수리 예화(24:28)

  그러면 24:29-33을 보자. 여기에서 인자의 파루시아는 33절에 특별한 설명없이 단어만으로 언급되어 있고, 이 인자의 파루시아는 32절에 무화과나무 비유로 설명되었다. 그러니까 "비유 + 인자의 파루시아(임함)" 구조가 된다. 이 구조는 24:4-28의 "인자의 파루시아 + 예화" 문형과 순서는 반대이나 구조는 같다. "비유 + 인자의 파루시아" 구조의 앞인 30b-31절에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또 그 앞인 29-30a절에는 인자 임함 전의 현상이 묘사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인자 임함 전 현상(24:29-30b)
그리스도의 출현(24:30b-31)
무화과나무 비유(24:32)
인자의 임함(24:33)

  두 단락에서 같은 구조를 가진 인자의 임함과 이에 대한 비유(예화)를 하나로 보면 a, b, c 세 개의 레이아웃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을 발견할 수 있다. 

  a. 종말 전 현상(24:4-22)
    b.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24:23-26)
      c. 인자의 임함(24:27) + 주검과 독수리 예화(24:28)
  a'. 인자 임함 전 현상(24:29-30a)
    b'. 그리스도의 출현(24:30b-31)
      c'. 무화과 나무 비유(24:32) + 인자의 임함(24:33)



  이러한 구조에는 어떤 메세지가 있다 할 수 있을까? 

  1) 무엇보다도 마태는 전반부(24:4-28)와 후반부(24:29-33)를 서로 긴밀히 연결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전반부는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이 주요 내용이고 후반부는 진짜 그리스도의 임하심의 징조가 주된 내용이다. 그러면 중요한 메세지는 분명히 후반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량(전반부 25절, 후반부 5절)은 물론 구조를 보더라도 전반부가 없다면 후반부의 중요성은 효과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전반부는 인자의 파루시아를 방해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으로 제자들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하는 주의사항으로 분량이 길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진짜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가르침은 징조에 대한 설명이 3절로 약간 있고 정작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는 인자의 파루시아 자체보다는 인자의 파루시아 전의 징조와 특별히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을 올바로 분별시키고자 경고하는 것에 가르침의 관심이 몰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인자의 파루시아와 같은 구조로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을 더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마태의 저작 의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2) 두번째는 이상의 판단이 올바르다면 전반부와 후반부를 완전히 내용이 다른 것으로 볼 필요가 없어진다.

  전반부인 24:27에 나오는 인자의 파루시아는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다는 설명(보통 주석가들은 이 표현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하나만 나왔지 인자의 파루시아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이 부분에서 주님의 가르침은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비교 설명하는 것에 몰려있다.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은 24:29-31에 나오는 것 같은데, 이 부분도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자의 파루시아가 아니라 "인자의 파루시아 전의 징조"이다. 이는 24:29-31을 받아 설명한 33절이 29-31절의 현상들을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상황"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전반부인 24:27에 나오는 인자의 파루시아에는 인자의 오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고,  후반부의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말씀(24:29-31)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기에 두 부분을 비교해서 인자의 파루시아를 중심으로 차이점을 분별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전반부인 24:27에 나오는 인자의 파루시아와 후반부인 24:29-31에 나오는 인자의 파루시아는 무턱대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오히려 우리는 두 단락에 나오는 인자의 파루시아는 같은 사건이거나 아니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단락은 구조상 서로 대조가 되어 상호 보충하는 짝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1-4. 24:36과 25:13의 인클루지오의 기능

  마태복음 24-25장의 문학적 특징 중 하나로 24:36과 25:13의 인클루지오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인클루지오는 구조를 통해서 본문의 상관관계를 해석하는데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인클루지오는 문학적 도구로 보면 인클루지오에 포함된 부분이 모두 하나의 문학적 단락을 이룬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24:36과 25:13 사이에 구성된 인클루지오는 24:36-25:13을 하나로 묶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24:29-35의 두 번째 인자의 임함 말씀을 24:36-44에 나오는 세 번째 인자의 임함 말씀과 구분하는 해석법에 대해 구조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부연 설명하면, 마태복음 24장에는 "인자의 임함"에 대한 언급이 세 번 나온다.

 

  첫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27 /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두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29-34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세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36-44 /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앞에서 마태복음 24장에 연이어 나오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인자의 임함 말씀들은 내용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해석에 곤란을 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했다. 전통적인 해석은 둘 다 분명히 인자의 파루시아(오심)를 말하기때문에 같은 것으로 본다. 하지만 언급된 파루시아의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두 파루시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논란이 발생한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파루시아는 제자들의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 언급하셨는데(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세 번째 파루시아는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불확정적인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셨다(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세 번째 파루시아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재림으로 이해되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두 번째 파루시아는 제자들의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인데 표현은 마치 예수님의 종말론적 재림으로 보여 종말론적인 재림으로 해석하니 문제가 된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재림과 같은 사건이 12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일어났다는 논리는 무척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태가 24:36 이하 세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말씀을 아래 그림과 같이 인클루지오로 구분한 것은 첫 번째, 두번째 인자의 임함과 세 번째 인자의 임함을 따로 떼어서 이해하는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첫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27

    두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29-34

인클루지오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24:36)

    세 번째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 24:36-44

인클루지오 :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이런 생각을 가지고 두번째 인자의 임함과 세 번째 인자의 임함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비록 인자의 파루시아로 제목은 같을지라도 세부 내용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1) 가장 먼저 세번째 파루시아 말씀에는 종말론적 심판이 나온다. 세 번째 파루시아는 노아의 때와 같아서 어떤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심판의 상황이 나온다. 또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달리 악한 종에게 주인이 임하여 구타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는 비참한 심판이 내려진다. 이것들은 모두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에는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언급이 없다. 
  2)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는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it is near, [even] at the doors) 상황이지만(24:33) 세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는 인자가 이미 임해서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고 있는 상황으로 다르다. 
  3) 그래서 세번째로 인자의 임하심에 대한 제자들의 대응도 다르게 주어졌다.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징조를 보고 때를 인식하는 것 "알라"(γινωσκετε)이다(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하지만 세번째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권면은 때를 아는 것을 넘어 종말론적 심판의 결정되는 "그 날"과 "그 시"를 깨어 준비하는 삶이 "깨어라"(γρηγορειτε)와 "예비하라"(γινεσθε)로 강조되었다(24:43-44). 세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의 "그 날"과 "그 시"는 종말론적 심판이 실제로 내려지는 그 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져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이 날과 이 시는 인자의 파루시아의 징조와는 다른 것이다. 주님의 강조점은 아무도 인자의 파루시아의 그 날과 그 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인식이나 깨달음의 차원을 넘어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나 도둑의 침입과 같이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쳐 불상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준비해서 마지막 날 심판에서 합격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4) 또한 네번째로 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를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24:29-31)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비유는 인자의 오심을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으로 묘사한 비유이다. 이 비유를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과 비교하면 고려할 수 있는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양과 염소 비유의 25:31을 보면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에는 "모든 민족"이 인자의 영광의 보좌에 모이게 된다 말한다. 이에 비해 두번째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에는 "택하신 자들이" 사방에서 인자에게 모이게 된다(24:31). 양과 염소 비유에서는 인자의 보좌에 모든 민족이 모인 후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여 심판을 선언한다(25:32, 46). 하지만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에는 택하신 자들만이 모인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상의 네 가지 비교 사항들을 보면 두번째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은 종말론적 인자의 파루시아와 정황이 다른 것이라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은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와 세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를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를 지지해준다.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는 비록 기록된 문체가 유대 묵시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마치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파루시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재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종말론적 재림과 별개의 다른 인자의 임하심으로 보인다. 그러면 두 번째 인자의 임하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더더욱 궁금해진다. 문맥의 흐름에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성전 파괴 사건으로 보인다. 

 


  1-5. "깨어있으라"의 반복 강조와 "징조가 없는 종말"

  마 24:36-25:46에는 연속해서 이어지는 6개의 단락이 있다. 이 단락들의 특징은 내용 중에 비유 또는 예화가 첨가된 것인데 후반부의 4개의 단락에는 다른 설명없이 비유로만 내용이 전개되어있다. 


  1) 그중 마 24:37-25:13의 4개의 단락 "노아의 때"(24:37-39), "도둑 비유"(24:42-44), "지혜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24:45-51), 그리고 "열 처녀 비유"(25:1-13)에는 모두 "종말론적 각성"을 주제로 하는 말씀으로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노아의 때 : 깨어있으라(24:42) + 데려감 vs 버려둠
• 도둑 비유 : 깨어있어(24:43) + 집을 뚫음 vs 뚫지 못함
• 지혜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 : 의미상 깨어있음("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24:48) + 주인이 모든 소유를 맡김 vs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됨
• 열처녀 비유 : 깨어있으라(25:13) + 혼인 잔치에 참여함 vs 거절됨(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구조는 앞에서 본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를 다루는 24:36과 25:13의 인클루지오와 같은 한 단락으로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주제와 맞물린다. 그러나 이 구조는 뒤에 이어지는 "달란트 비유"(25:14-30)와 "양과 염소 비유"(25:31-46)에는 없다. 
  이것은 24:37-25:13과 25:14-46이 문학적 구조로 구분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를 다루는 24:36과 25:13은 인클루지오로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의 특징인 그 날과 그 때(시)에 대한 불가지성(不可知性)과 겹친다. 이 겹침은 문맥 속에서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메세지를 만든다.  

원인 : 인클루지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결과 :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
   • 노아의 때 : 깨어있으라(24:42) + 데려감 vs 버려둠
  • 도둑 비유 : 깨어있어(24:43) + 집을 뚫음 vs 뚫지 못함
  • 지혜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 : 의미상 깨어있음(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24:48) + 주인이 모든 소유를 맡김 vs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됨
  • 열처녀 비유 : 깨어있으라(25:13) + 혼인 잔치에 참여함 vs 거절됨(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원인 : 인클루지오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25:1-13)

 

   • 달란트 비유(25:14-30)

   • 양과 염소 비유(25:31-46)


  위의 관찰은 24:37-25:13을 한 단락으로 구분하는 것이 저자 마태의 분명한 의도였음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준다 판단된다. 이는 24:29-34의 인자의 파루시아와 24:36-44의 인자의 파루시아를 다른 것으로 구분하고, 24:37-25:13에 나오는 비유들(예화)을 25:14-46의 두 비유와 구분하는 이중적인 기능을 한다. 

  2) 또한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는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의 특징 중 하나인 "징조가 없는 종말"로 이어진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종말론의 특징 중 하나는 인자의 재림 때에 대한 언급이 없고, 때를 모르기 때문에 예상치 않은 시점에 인자의 파루시아가 실현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자의 파루시아는 성전 파괴와는 달리 종말을 미리 알아차릴 징조가 없다. 주님께서는 24:36에 종말의 날과 때는 아버지 외에는 아는 자가 없다 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종말에 대한 "필연적 무지" 또는 "불가지성"은 종말에 대한 징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에는 징조가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심판만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때를 위한 제자도는 깨어 예비하는 것뿐이라고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강조하셨다.

  징조가 없는 종말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해되는 24:29-31의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증명해준다. 이는 24:30을 보면 24:29-31의 인자의 파루시아에는 징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징조가 있으므로 징조를 보고 인자가 가까이 왔음을 눈치채는 "앎"이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24:33). 하지만 24:36부터 25장 끝까지 나오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에는 재림의 징조에 대한 가르침은 한 마디도 없다. 오히려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깨어있으라"(γρηγορειτε)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가 나온다. 이것은 24:29-31의 두 번째 인자의 파루시아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해주는 본문의 증거가 된다.

 


  1-6. 마태복음 24-25장의 문체와 구조의 특징을 통해 알게된 해석적 가이드라인

  마태복음 24-25장은 세세한 부분에서 해석적인 차이 때문에 논쟁이 끊이지 않는 성경이다. 그래서 한 구절 한 단어를 가지고도 극렬한 논쟁이 일어나고, 논쟁 내용들을 살펴보면 머리가 아파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것은 건전하고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한 단어 한 구절을 생각할 수 도 없는 엉뚱한 비약과 상징적 해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게 만드는 불건전한 가르침이 생산되어 퍼지는 것이다. 구절과 단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해석자의 자세가 바뀌지 않는 이상 달라지기 어렵고 다른 해석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해석적 전제가 있으므로 아무리 본문을 보아도 해석적 전제에 따라 해석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구절이나 단어 중심의 해석을 내려놓고 문장의 구조나 문체의 특성을 따라 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유용할 때가 많다. 특히 마태복음 24-25장에서는 그 가치가 의미심장하다 볼 수 있다. 

  저자 마태가 사용한 문학적 구조와 문체적 특징들을 살펴보면 본문 해석에 빛을 주는 몇 가지 가이드라인이 보인다. 
  1. 마태복음 24-25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현대적인 순차적 논리나 시간적 논리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현대적인 논리들을 따라 성경 본문을 보려 하기 때문에 신학적 교리적 논쟁이 끊이지 않고, 또 성경에 논리적인 모순 또는 충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 저자들이 사용했던 병렬적 논리에 따라 본문의 문체와 구조를 따라 해석하는 것이 원만한 해석의 지름길이다. 그럴 경우 아래와 같은 판단이 생겨난다. 


  2. 24:4-14의 "산통의 때"(또는 작은 환란)와 24:15-28의 "가장 큰 환란의 때"는 서로 다른 때가 아니라 같거나 연관성이 깊은 때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3. 24:27(4-28)의 "인자의 파루시아"와 24:29-33의 "인자의 파루시아"를 다른 것으로 보기보다 같은 것이거나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24:29-33의 "인자의 파루시아"와 24:36-44의 '인자의 파루시아"는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5. 24:37-25:13의 비유(예화)와 25:14-46의 비유는 다른 내용을 가진 것으로 구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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