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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4)

by 예다준 2022. 8. 31.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4)

 

 

 

3. 마태복음 24-25장 전체 구조의 함의

  마태복음 24-25장의 문체와 구조를 통해서 성경 저자가 말하려 했던 가르침을 찾으면서 가장 많이 신경 쓰인 것은 이 부분에 대한 황당하고 이단적인 해석이나 주장들이 온라인 여기저기에 난발해 있는 것이었다. 건전한 해석을 위해 논쟁을 거듭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상상을 초월한 엉뚱한 해석들과 이단 사이비 근처에서 맴도는 주장들은 길어질수록 결국 교회를 더 병들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특히 마태복음 24-25장은 잘못된 성경 해석의 지뢰가 가득한 위험 지대로 보인다. 이단들을 비롯해서 듣도 보지도 못한 자들의 실로 해괴한 해석들이 성도들의 컴퓨터 앞에 널려있다. 이들과 한 단어 한 구절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일은 너무나 짜증 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단어나 구절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해석 방법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3-1. 성경 본문 이해에 대한 "저자 중심 해석"의 필요성

  거두절미하고 24:34의 인자의 파루시아(24:29-35)를 예로 살펴본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감람산 종말 강화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인공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구절은 단어와 문장 위주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법으로 보면 24:36의 인자의 파루시아와 만나 혼란의 소용돌이가 열린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 세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질 일은 무엇인가? 성전 파괴인가? 예수님의 재림인가? 제3의 다른 것인가? 만일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주님의 말은 실언인가? 왜 주님께서는 재림에 대해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말해 놓고는 그 때를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는가? 제시된 질문들은 마태복음 24-25장에서 제기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아류적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이 혼란은 두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을 동일하게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리적인 모순을 넘어 교리적인 충돌이 생겨나고 이단 근처에 까지 가는 해괴한 주장들이 나타난다 생각된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두 인자의 파루시아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는가? 그것은 저자인 마태의 논리와 그의 문체와 구조를 무시하고 현대적 논리로 성경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태의 문체와 구조들을 따라 분석을 하면 24:34의 인자의 파루시아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는 마태가 만들어 놓은 글의 구조와 내용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 저자의 독특한 문체와 구조를 찾아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성경은 유대인의 병렬적 논리 구조에 근거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글의 내용으로 말하고 글의 문체와 구조로도 말한다는 학문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 저자 중심의 해석을 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논리로 성경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의 논리로 성경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앞뒤 전후좌우가 어색함 없이 서로 잘 드러 맞게 되는 것이다. 종말론이 담긴 성경에 대해 일어난 많은 문제들이 이 부분에 대한 잘못된 접근 방식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단과 삼단 사이를 오가는 쓰레기 같은 주장들도 말이다. 

  성경 저자가 기록해 놓은 글의 문체와 구조를 가지고 해석하려는 방법은 그냥 자기주장이나 깨달음을 뜬금없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이라 언제나 검증 가능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성경 본문에 그렇게 보도록 인도하는 근거가 있다. 그것이 성경 본문 속에 녹아있는 성경 저자의 문체와 구조이다. 이를 중심으로 성경 본문을 보면 하나님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안전벨트 하나쯤은 가지게 된 셈이다. 

 


  3-2.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전략 :  "산통(재난)의 때"에 대한 강조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온전히 보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략이 담겨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제자들의 질문에는 없는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이다. 
  감람산 강화는 주님께서 제자들로 부터 질문을 받고 이에 답을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에는 제자들이 묻지 않은 "산통(재난)의 때"에 대한 강조가 크게 부각되어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복음의 종말 강화에서 특별히 나타나는 강조점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질문은 성전 파괴의 시기와 징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막 13: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하지만 마태복음은 다르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파루시아와 세상 끝의 징조를 포함해서 두(세) 가지를 물었다 묘사했다(24:3). 먼저는 성전 파괴의 때이고 다음은 주의 재림(파루지아)과 세상 끝의 징조이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것으로 제자들은 성전의 파괴와 주의 파루시아를 세상의 끝으로 이해했다 보여진다. 성전 파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세상의 종말과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실재로는 세상의 끝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의 오해를 교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산통의 때"이다.
  제자들은 1-2절에서 예수님의 성전파괴에 대한 말씀을 듣고 3절에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3-14a이다. 주님의 대답에는 "산통(재난)의 시기"에 대한 8가지 현상들이 있다. 그리고 14b에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말씀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치셨다. 제자들의 질문이 세상 끝에 대한 것이었고(3절) 주님의 대답이 끝에 대한 것이므로(14절) 문답이 종결된 한 단락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칫 24:4-14을 한 단위로 보는 것을 자연스러운 관찰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주님의 대답은 완전한 대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물음은 두(세) 가지였다. 먼저는 "성전의 파괴의 때"(3a)였고, 두 번째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3b)이다. 여기에서 주의 임하심의 징조와 세상 끝의 징조를 다른 것으로 보면 하나의 때와 두 개의 징조에 대한 질문이 제자들의 질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산통"(재난)에 대한 8가지 현상들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제야 끝이 오리라"(14b)라고 끝에 대한 언급은 했지만 제자들이 요구한 끝의 징조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언급한 "산통의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이 된다해도 분명한 것은 "끝"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4절을 보면 산통의 때의 8가지 현상들이 일어난 후에야 끝이 오기 때문에 "산통의 때"와 "끝"은 다른 시기가 분명하다. 결국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두 질문에 대해 완벽한 대답을 하지 않고 제자들의 질문에는 없는 "산통의 때"만을 설명했다. 이것은 산통의 때에 대한 주님의 의도적인 강조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

  실재로 제자들이 질문했던 세 가지는 마태복음 24-25장 전체에 걸쳐 나온다. 먼저 "성전의 파괴의 때(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때(24:15) = 가장 큰 환란의 때(24:21))"는 24:15-28절에 나온다. "주의 임하심"(파루시아) 대해서는 24:27-28에 한 번, "주의 임하심의 징조"는 24:29-31과 24:36-44에 두 번 나온다. 그리고 "세상 끝의 징조"는 25:31-46에 비유를 통해서 설명된다. 결국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4-25장 전체에 걸쳐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네 가지를 말씀하신 셈이다. 먼저는 두 개의 때로 "산통의 때", "성전의 파괴의 때"이고 그다음에는  두 개의 징조로 "주의 임하심의 징조" 그리고 "세상 끝의 징조"이다. 이것들을 앞의 관찰 결과를 통해서 "산통의 때"와 "성전의 파괴의 때" 그리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의 임하심"을 같은 것으로 보면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이 얼마나 강하게 산통의 때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예수님의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는 주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이 어떤 목적을 위해 선포되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예수님의 종말론은 종말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종말에 대한 비성경적인 기대나 올바른 제자도에서 이탈한 몰입으로 야기되는 미혹됨과 구원의 실패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주님의 가르침의 중점이 세상 종말에 대한 잘못된 생각(성전 파괴 = 세상의 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미혹에 대한 경고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산통의 때를 엄청나게 강조하셨다면 종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전략적으로 자제되는 것은 가장 상식적인 어법이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합당한 적절한 수준에서 종말론의 수위를 조절하여 알려주셨다. 이것이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에 숨겨진 예수님의 전략이다.

  주님께서는 이 전략에 따라 몇 가지 필요하다 생각한 가르침들만을 종말론으로 주셨다 판단된다. 먼저는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이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이에 대한 교회의 도피가 있다. 그리고 종말의 때에 대한 불가지성, 이에서 비롯되는 제자도인 깨어 준비함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전체 정보에서 본다면 아주 제한적인 정보가 분명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들만을 골라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수준의 메세지라 생각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종말론에 대한 이단과 삼단을 오가는 쓰레기 같은 주장들은 모두 예수님의 전략과 가르침의 수준을 넘으려할 때 비롯된다. 그들은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제자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적절한 수준의 가르침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추가적 말씀에 메달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전략은 오늘 우리에게는 올바른 성경 해석의 전략, 특히 종말론 해석에서 올바른 해석의 전략이 된다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현재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마태복음 24-25장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 중에서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해석을 분별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성경 저자의 의도에 맞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가르침의 원저자인 예수님의 의도에 합당한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에서 빗나간 해석들은 아무리 현란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었어도 올바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 이상, 그 외의 것을 논하는 해석들은 교회에게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낼 수 있는 해석적 도구들을 개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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