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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6-28장(5)

by 예다준 2022. 9. 2.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6-28장(5)

 

 

  1-2-5. 대제사장의 심문 기사(26:58-27:10)와 예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사건 기사(27:51-56)의 특징과 구조 분석

  이제 가장 까다로운 두 단락인  26:58-27:10과 27:51-56이 남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단락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어 서로 대칭되는 문학적 구조 상의 한 짝이다. 이를 알아내는 데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골머리가 동원되었다. 아마도 전문 성경 신학자의 연구 결과가 없었다면 무기한 미제로 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거두절미하고 두 단락의 문학적 구조를 본다. 전체 구조에서 보면 두 단락은 C레이아웃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결하면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이 완성된다.

  a. 대제사장의 심문(26:58-68)
    b. 베드로의 세 번 부인(26:69-75) -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줌(27:1-2)
      c. 유다의 자살과 피 밭(27:3-10)


    = C 레이아웃 =

 

  a'.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27:51-53)
    b'. 백부장의 하나님의 아들 증거(27:54)
      c'. 목격자들(27:55-56)

  마태는 동일한 주제를 가진 단락을 반쪽으로 나누어 동의적 평행법에서 대조되는 자리에 배치했다. 이렇게 구조를 분석하는 이유는 두 단락을 지배하는 주제가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단락은 동일한 주제를 가진 대조되는 짝으로 마태복음 26-28장의 전체 구조에서 하나의 레이아웃을 구성한다.
  연역적인 설명은 그만하고 귀납적 분석을 해본다. 이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두 단락의 주제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단 두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면 두 단락의 주제가 같다는 사실이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것이 두 단락의 구조 분석을 가로막는 가장 큰 난점이었다. 우연히 본 한 신학자의 논문(강대훈, "마태의 수난 기사에 나타난 성전의 하늘 상징성", 신약 연구 12권 1호)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논문에는 여기에서 제시되는 두 단락의 문학적 구조는 나오지 않지만 두 단락을 지배하는 주제를 알려주어 문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1-2-5-1. 대제사장의 심문 기사(26:58-68)와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27:51-53)의 공통 주제

  신학자의 귀한 연구 결과를 통해 얻은 도움의 핵심은 마태는 "대제사장의 심문 기사"(26:58-68)와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27:51-53)을 동일한 주제로 보았고, 이 주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성경 본문을 보는 데에 새로운 전망을 주었다. 이제 그의 견해를 이해한 대로  요약 적용하면서 본문의 특성과 문학적 구조를 살펴본다.
  
  1) 먼저 "대제사장의 심문 기사"의 주제와 문체와 구조의 특성을 본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받아 십자가에 달렸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26:63-64a를 근거로 한다. 여기에서 대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라고 윽박질렀고 주님께서는 이에 "내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으로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천명(주장)했기 때문에 참람죄(신성모독죄)를 받았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학자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천명한다고 무조건 신성모독죄를 받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예수님의 또 다른 대답인 64b절과 이에 대한 대제사장의 반응인 65절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참람죄명의 직접적 원인은 64b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장했다.


  26:64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두 단계로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64a절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이고, 64b절은 첫 번째 대답을 예수께서 보충하는 대답으로 시 110:1과 단 7:13-14을 혼용한 예언적 선언이다. 

  26:64 "a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b"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런 다음 65절에 대제사장의 분노와 참람죄 선언이 나온다. 그런데 65절은 "이에'(τοτε)로 시작한다. 이것은 "그 후에"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대답이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보면 대제사장이 분개하여 옷을 찢고 참람죄를 선포한 직접적인 동기는 26:63-64a보다는 26:64b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단어이다. 


  위의 해석을 돕는 것으로 26:63의 대제사장의 질문("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 "네가 말하였느니라"(26:64a Σὺ εἶπας, Thou hast said)는 애매모호해서 격한 분노와 사형 판결을 결정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태의 기록을 마가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마태는 일부러 예수님의 대답을 애매모호하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는 대제사장의 동일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가 그니라"(Ἐγώ εἰμι, I am)라고 대답했다 (막 14:62). 하지만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대답은 대제사장의 질문을 긍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 제삼자 화법이다. 이는 대제사장의 분노의 원인은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보다 두 번째 대답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하려는 마태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판단할 수 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는 말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이어지는 접속사인 "그러나"(πλην)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지라도 오히려" 등의 뜻을 가진 반의적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여 보충이나 수정을 가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반대의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충(수정)하여 이르노니"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말이 흡족하지 못하다 생각하여 그의 말을 수정 보충하여 완벽한 대답을 준 것이 26:64b의 두 번째 대답인 인자에 대한 말씀이다.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에 대해 주님께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한 애매모호한 대답("네가 말하였느니라")을 했는데 그것으로 대제사장이 참람형을 선고하는 것은 공식적인 재판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수정 보완해서 준 두 번째 인자에 대한 대답이 대제사장을 격노케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본문의 흐름으로 볼 때 합리적이다. 

 

  그리고 참조할 가치가 있는 연구 자료로, 유대인들은 사회적 측면에서 유대의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로 부름 받은 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에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이 대제사장이다. 앞의 논거와 같이 재판석에서 대제사장의 질문이 애매모호하다고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은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유대 법정과 대제사장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다. 이 설명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라 마태복음 본문을 보면 성경적 근거가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이는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참람하다 탄식하며 자신의 옷을 찢은 행위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된다(26:65). 마태는 대제사장이 찢은 옷을 마가와 같이 일반적인 옷(막 14:63 "대제사장이 자기 옷(τοὺς χιτῶνας)을 찢으며")으로 묘사하지 않고 레위기의 표현(레 21:10)과 같이 대제사장의 공식적인 옷인 "히마티아"(τα ιματια)로 묘사했다. 이는 대제사장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옷을 찢은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공식적인 예복을 찢어 대제사장의 권위에 모욕을 당했다 몸짓을 한 것이라는 메세지가 된다.  

  그러면 26:64b의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이길래 대제사장을 광분케 했는지 설명을 해야만 한다. 거두절미하고 마태가 이 구절에서 사용한 주제, 모티브와 용어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예수가 인자로 하늘 법정을 가지고 내려와 유대 법정을 심판할 것이라 선언했고 이를 대제사장은 성전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보아 신성모독으로 분노한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상의 법정(성전)과 지상의 법정(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생각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관계를 보자. 

  유대인에게 유대 법정은 하나님의 법정, 천상의 법정을 의미했다. 천상의 법정은 하나님의 어전에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법정을 대리하는 유대 법정을 심판하겠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정을 심판하겠다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지성소에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자인 대제사장의 권위를 무시한 선언으로 들렸다.
  유대인에게 지상의 성전은 우주적 천상적 성전의 모형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섬기던 성막(지상의 성전)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히 8:5). 이러한 믿음은 개념만이 아니라 실제로 지상 성전의 건축에 실행되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참 성전인 천상의 성전을 원본으로 디자인되었다(출 25:9, 40; 26: 27:8; 민 8:4; 대상 28:19). 그 외에도 구약 성경은 성막과 지상의 성전은 하늘 또는 하늘 성전의 축소판으로 디자인되었다는 말씀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전의 세 구조(바깥뜰, 성소, 지성소)는 땅과 바다, 보이는 하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좌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상의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하신다(왕상 8:13).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상의 성전을 간단하게 "하늘"이라고 불렀다(사 63:15). 그래서 구약과 묵시문학에서 천상의 성전은 하늘과 같은 것으로 통용되었다. 결국 지상의 성전은 하늘 성전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상 세계를 담은 것으로 땅에 있는 우주, 또는 땅에 있는 하늘로 이해되었다.


  두 번째로 하늘의 법정과 지상의 법정의 관계를 본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재판장이자 군사령관이었으므로 하늘 왕의 궁전은 하늘 성전은 물론 하늘 법정과 하늘 군대로 인식되곤 했다. 하늘의 성전의 중심인 하나님의 보좌에서는 천상 회의가 열린다. 이 천상 회의의 주된 역할이 "심판" 또는 "재판"인 것이 마태복음 26-28장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천상 성전이 천상 법정으로 구원과 심판을 다루는 그림이 가장 잘 나타난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다. 가장 좋은 예로 계 20:12은 하나님의 보좌가 어떤 광경으로 하늘의 법정이 되는지 잘 보여준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결국 유대인들에게 지상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과 같고, 하늘의 법정과도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세 번째로 천상의 성전과 대제사장의 관계를 본다. 

  천상 성전(법정)과 지상 성전(법정)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성전과 연관된 자인 대제사장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유일한 특권을 가진 자이기에 지상의 법정에서 하늘 성전의 뜻을 받을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는 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대제사장에 관한 것들을 하늘과 연관된 것으로 묘사해서 대제사장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말씀들이 나온다. 
  성전의 휘장은 하늘의 궁창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인식했는데, 특히 대제사장의 의복은 지상의 성전과 우주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여겨 그의 권세를 하늘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대제사장이 그의 공식 의복을 찢은 사건과 연관되는 부분이다. 대제사장의 의복의 재료는 성막과 재료가 같고(출 25-28, 38장), 성전 휘장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색깔과 재료가 같고, 성전의 구조를 따라 만들어졌다(출 27:1; 41:21; 43:16; 43:17). 대제사장의 속옷은 천상의 존재들이 입는 옷이나 그들의 빛나는 모습을 암시한다(레 16:4; 겔 9;2; 단 10:5).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보석들은 하늘 성전의 하늘의 별들을 상징한다(사 40:22, 26; 시 19:4b-5a). 그래서 대제사장의 의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여 대제사장의 권위를 보여주는 핵심으로 여겼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가 시 110:1과 단 7:13-14을 혼용하여 종말론적 인자가 되어서 권능의 우편에 앉아서 하늘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대제사장이 보게 될 것이라 말은 예삿말로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대답을 예언적 선언으로 받아들여 예수가 하늘 법정의 권능, 특히 심판의 권능을 가지고 와서 지상의 법정을 심판한다는 말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선언은 지상의 성전과 대제사장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되어 대제사장은 예수를 하늘 성전과 대제사장직을 위협하는 신성모독자로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시화한 것이 성전의 휘장과 같은 대제사장의 예복을 찢어 참람하다 탄식한 제스추어였다.  

  아마도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대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않은 황당한 대답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그리스도임을 물었다(26:63).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말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적인 메시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소망했다. 대제사장의 질문은 이 이해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종말론적 인자로 하늘 법정의 권능, 특히 심판의 권능을 가지고 와서 지상의 법정을 심판한다 하니 극도의 분개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2) 27:51-53의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도 26:58-27:10과 같이 하늘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단락에는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나타난 묵시적 사건들이 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시자 먼저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리고 두 가지 묵시적 현상이 일어났다. 땅이 진동하는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떠졌다. 마지막으로 죽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27:51-52). 
  그리고 마태는 종말론적 3가지 사건들에 백부장의 고백을 연결시켰다. 이는 마태가 백부장의 고백이 종말론적 사건인 "지진"에서 비롯되었다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27:54을 보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 고백했다 말했다. 여기에서 "그 되는 일들"은 무엇을 말하는지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백부장이 "지진을 보고" 신앙고백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백부장의 고백은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 두 개의 묵시적 사건과 연결되어 예수의 죽음, 특히 묵시적 사건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도록 해준다. 결국 예수의 죽음(27:51a) -> 찢어진 성전 휘장(27:51b) -> 지진과 열린 무덤(27:52-53) -> 백부장의 고백(27:54)은 하나로 연결된 말씀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로 해석하는 것이 저자인 마태의 의도에 충실한 해석이다.

  그러면 연관된 네 개의 단락을 주도하는 주제는 무엇이며 그 주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다음에 일어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으로 보는 해석은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해석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두 개의 묵시적 현상들과 백부장의 고백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의 죽음(27:51a) -> 찢어진 성전 휘장(27:51b) -> 지진과 열린 무덤(27:52-53) -> 백부장의 고백(27:54)을 하나로 연결한 마태의 논지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7:51a-54을 연결해서 동의적 평행법으로 보는 것이 어렵게 된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에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고, 하늘 열리는 것은 천상의 성전(또는 천상의 성전의 주인인 하나님)이 지상에 임하여 종말론적인 새 세상이 도래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앞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의 휘장을 하늘의 궁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언급했다. 성전에는 세 개의 휘장이 있는데, 그것들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만들어졌고 그룹이 수놓아져 있다(출 26:31). 학자들은 성전 휘장의 세 가지 색깔은 왕을 상징하는 것에 일치한다. 왕을 상징하는 색깔에 그룹이 그려진 것은 마치 그룹들이 하나님을 하늘의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은 성전에 좌정해 계시는 장면을 그려주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하늘 보좌를 보호하고 그룹들이 에덴을 지켰던 것과 같이(창 3:24; 참조 겔 47:1-12; 시 46:4; 슥 14:8; 계 22:1-2) 성전 휘장이 지성소를 보호하는 기능이 나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의 휘장은 지성소를 보호하고 하늘과 피조세계를 분리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늘의 열림, 천상의 열림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내려) 오심과 감추었던 비밀의 계시를 의미한다.

 

  하지만 마태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특수 자료를 덧붙였다. 그는 열린 하늘에 두 개의 묵시문학적 사건을 연결해서 성전 휘장의 찢어짐이 천상의 열림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려 했다. 
  먼저 땅의 진동을 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올 때 땅이 진동한다 말했다. 하늘의 문이 열릴 때 땅이 진동하고(사 24:18-19),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내려오면 산들이 진동한다(사 64:1-3).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 이루어진다. 이것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땅이 진동하는 것과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을 연동해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약 성경과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올 때 땅이 진동하는 것은 물론 심판이 이루어져 의인들이 회복된다 믿었다. 삼하 22:7-8에서 다윗은 땅에 사는 성도들이 성전에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이에 반응해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내려오셔서(삼하 22:10)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고백했다(22:17). 이러한 생각이 확장되어 하나님이 오시는 종말에는 무덤이 열려 하나님의 백성들아 살아나며(겔 37:12-13), 하나님이 임해서 성도들과 함께 하며(슥 14:5), 땅의 티끌 가운데 자던 자들이 부활할 것이라 예언되었다(단 12:2).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고, 거룩한 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어 자기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겔 37:14). 결국 이러한 구약과 묵시문학의 생각은 마 27:51-53에 나오는 찢어진 성전 휘장(27:51b)이 곧바로 지진과 열린 무덤(27:52-53)으로 연결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졌고, 이 사건으로 지진과 열린 무덤 사건이 발생했다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들을 목격한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에서 놀라운 신앙고백이 터졌다고 말했다. 그것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었다(27:54). 백부장의 고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그의 고백은 최고 신앙고백으로 인정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같다는 점이다(16:16). 이방인인 백부장이 예수의 십자가를 목격한 짧은 시간에 제자들만이 알고 있는 최상의 신앙고백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적이다. 그래서 백부장의 신앙고백도 천상의 하나님이 오신 것을 암시하는 증표로 마태는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드디어  이방인에게 "천국의 비밀"이 열렸고, 천국의 열쇠가 주어졌다고 말이다(참고. 마 16:19).  

  두 번째는 대제사장에게 한 예수님의 예언적 선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인자 말씀은 예수께서 하늘의 성전을 가지고 오실 거라는 예언이었다. 이 예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백부장이 신앙고백을 하는 천국의 비밀의 개방으로 실현되었다. 대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물었는데(26:63)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대답하므로(27:54) 예수님의 예언이 실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결국 예수의 죽음(27:51a)으로 이어진 세 개의 사건들은 모두 하늘 성전의 강림과 새 시대의 비밀의 열림을 의미하는 시리즈로 마태는 기록했다 판단된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에게 주님께서 던진 예언적 선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떠진 것이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제시된 종말론적 인자가 하늘 성전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마지막 결론이 된다. 

 

  1-2-5-2. 26:58-27:10과 마 27:51-56이 만드는 문학적 구조

  마 26:58-27:10과 마 27:51-56을 하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관계에서 보면 성경 본문에 숨어있는 주제를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두 단락에 포함된 기사들이 현재 마태복음의 모양대로 배치된 이유와 이를 통해 마태가 나타내려 하는 메시지를 설명할 수 있고 문학적 구조도 정리할 수 있다. 

  1) 가장 먼저 "대제사장의 심문"(26:58-68) 단락과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27:51-53) 단락은 "하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이라는 주제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보았다. 두 단락은 같은 주제로 서로 대응하여 평행법의 짝이 된다. "대제사장의 심문"(26:58-68) 단락(a)은 예수님의 예언적 성격이 아주 강하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 단락(a')은 a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대제사장의 심문 자리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예언은 28:18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이 온전한 성취의 전조가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로 나타난 것이다.  


  2) 이어지는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마태가 하늘 성전이 열림으로 나타난 결과로 소개했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다. 그래서 백부장의 고백이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a')에 이어서 연달아 있는 것이다(b').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칭되는 자리인 26:69-75에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것(b)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단 이방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b')은 반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대조를 이룬다. 베드로의 부인 장면을 보면, 그 단락(26:69-75)은 교차대조법으로 문학적 구조의 중심은 26:72의 "내(베드로)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다. 이 단발마적 부인은 백부장의 한 마디 고백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과 완전히 대비된다.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로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나타난 하늘의 열림이 이방인인 백부장에게 얼마나 즉각적이고 놀라운 변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3) 유다의 자살과 피 밭에 관한 단락(c)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유다의 배반에 대해 언급은 하지만 그의 최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마태는 그의 최후를 추적해서 성경에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마태가 유다의 최후를 애써 기록한 것은 그의 죽음이 비참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보다 예수의 죽음이 무죄한 죽음임을 명백하게 증거 하려는 것에 있다. 
  이는 이 단락에 예수의 죽음의 무죄함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와 강조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배반자 유다 자신이 예수의 무죄를 인정하고 후회했다는 기록이다(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두 번째는 대제사장들이 유다가 성전에 던져놓은 돈을 "피값"이라 칭하며 성전고에 넣어둘 수 없다고 말한 기록이다(27:6). 이는 대제사장들도 유다의 돈이 성전에 둘 수 없는 부정한 돈, 무죄한 피를 흘린 돈이라 여겼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예수의 무죄한 죽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기록된 것이 명백하다. 그것도 예수를 죽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이 예수의 무죄를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기에 마태는 이 기사를 반드시 성경에 기록하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는 이러한 설명에 구약성경을 성취했다는 말씀(27:9-10)을 추가해서 예수의 무죄한 죽음을 하나님께서도 이미 입증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가롯 유다의 죽음 이야기가 예수 죽음의 무죄를 증거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곧바로 27:55-56과 상응되는 접촉점을 보도록 해준다. 이는 이 단락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마태는 27:3-10에서 예수의 무죄한 죽음을 증명했고 27:55-56에서는 부활의 목격자들을 명시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성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c와 c'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완벽한 증명을 제시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이 c 레이아웃의 기능이다. 이를 위해 마태는 두 개의 증명을 평행법에서 대조되는 짝으로 만들어 성경에 제시한 것이다. 

  4) 결론적인 마무리를 하면 마태는 26:58-27:10과 27:51-56을 동의적 평행법으로 만들어 26:58-27:10에서 하늘 성전이 세상의 성전을 심판했다고 말하고(B), 27:51-56에서는 하늘 성전이 열리고 종말론적 새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B'). 그로 인해 이방인인 백부장에게 하늘의 비밀이 열렸고(b'), 예수의 무죄 죽음과 부활의 사실성이 명백하게 증명되었다(c와 c'). 이상의 결과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B. 하늘 성전이 세상의 성전을 심판하다(26:58-27:10)
    a. 대제사장의 심문(26:58-68)
      b. 베드로의 세 번 부인(26:69-75) -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줌(27:1-2)
        c. 유다의 자살과 피 밭(27:3-10)

    = C레이아웃 =

  B'. 하늘 성전이 열리고 종말론적 새 시대가 열리다(27:51-56)
    a'. 종말론적 3가지 현상들(27:51-53)
      b'. 백부장의 하나님의 아들 증거(27:54)
        c'. 목격자들(27: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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