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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0장(1)

by 예다준 2022. 8. 5.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0장(1)

 

  마태복음 5-9장에서 자신으로 인해 도래한 천국을 가르치고(5-7장) 천국의 실체를 보여주신(8-9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을 향해 파송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어떻게 행해야 하며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를 알려준 가르침이 마태복음 10장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을 "제자 파송 강화"로 부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도를 위한 행동 강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떤 특징을 가진 자들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가르침이 이곳에 담겨 있다. 

  마태복음 10장은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문학적 특성에 따라 문체와 구조를 분석하기에 만만치 않은 성경이다. 

  우선 분석에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인 문단 나누기부터 까다롭다. 문단과 문단이 나누어지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 애매하다. 유명하다는 설교자나 성경 연구자들의 책을 보면 문단 구분이 세밀한 부분에서 다르게 나온다. 
이는 한 주제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단어나 구절 등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서 문맥과 문맥에 대한 해석이 다르게 이해되거나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10장에는 해석에 논란이 되는 부분도 제법 많다. 


1. 전체 구조를 찾아서

  이럴 때 주요하게 사용되는 방법이 전체 구조가 아니라 단락들 안에 있는 구조, 즉 "미시적 구조"(micro structure)를 먼저 찾는 방법이다.

전체 구조를 "거시적 구조"(macroscopic structure)라 부르고 전체 구조를 구성하는 레이아웃 안에 있는 하부 문학적 구조를 미시적 구조라 부른다. 단락 안에 미시적 구조가 있다는 것은 그 부분이 저자가 만들어 놓은 의미상 한 단락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단 나누기와 결과가 다를 수 있다. 우리의 문단 나누기는 직선적 논리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성경의 미시적 구조는 병렬적인 논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구조에 의해서 나누어진 문단은 현대적 문단 나누기와 구별해서 "의미상 문단", 또는 "구조적인 문단"이 된다. 의미상의 문단들이 모이면 전체 구조인 거시적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직선적 논리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 단어나 문구, 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문맥을 알지 못하게 되어 문단을 나눌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성경은 병렬적 논리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단어나 문구, 절 등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도 상관되는 단어, 어구, 절, 문장, 모티브, 문학적 도구들과 더 나아가서는 비논리적인 연속이나 이질적인 논리의 흐름, 불필요하게 보이는 중복 등으로 병행되는 짝을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이 성경 저자가 만들어 놓은 의미상 단락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면 이것으로 난해 문구나 구절의 의미를 유추할 수도 있다. 

  이 방법으로 본문을 살펴본 결과 6개의 단락에서 6개의 미시적 구조를 발견했다. 

 

  1-1. 5b-11절의 미시적 구조

  가장 먼저 미시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던 부분이 10:5b-11절이다. 이 부분이 한 단락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른 구절들에서 사용한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평행법의 단락을 구분할 때는 단어나 모티브, 개념이나 특정 문구의 대조 관계를 통해서 알아보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 10:5 b-11절은 문장의 형태로 대조되는 짝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하지마라(×2)+하라" 문형이 "하라"(×2) 문형을 앞뒤로 감싸 교차대조법의 모양을 보여준다. 때로 한글 번역 성경의 문형과 마태복음의 원문인 헬라어 성경의 문형이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한글 번역 성경이 헬라어 성경 원문과 별 차이가 없었다.  

A. "하지마라"(×2)+"하라"(5b-6)
       하지 마라 : 가지 마라 
       하지마라 : 들어가지 마라(5b)
       하라 : 가라(6)
  X. "하라"(×2)(7-8)
         하라 : 전파하라(7)
         하라 : 선물로 주라(8)
A'. "하지마라"(×2)+"하라"(9-11)
      하지 마라 : 가지지 마라
      하지마라 : 가지지 마라(9-10)
      하라 : 찾으라, 머물라(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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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지마라"(×2)+"하라"(5b-6)
      μὴ ἀπέλθητε 
      μὴ εἰσέλθητε 
      πορεύεσθε 
    X. "하라"(×2)(7-8)
       κηρύσσετε 
       (δωρεὰν) δότε 
A'. "하지마라"(×2)+"하라"(9-11)
     μὴ κτήσησθε 
     μὴ (κτήσησθε가 생략되었음) 
     ἐξετάσατε, μείνατ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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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부정적 명령문과 긍정적 명령문을 2번 반복하는 규칙에 맞추어 배열하여 청자(독자)가 인상 깊게 듣고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글의 유형, 즉 문체(언어 요소가 문장 속에서 배치되고 결합되는 법칙을 형식화하고 규칙화한 글의 형태)이다. 

현대 우리의 직선적 논리로 구분하면 5-11절은 "제자들이 가야 할 곳"(5-6)과 "제자들이 할 일"(7-11)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분석은 내용은 전달해주지만 마태가 문형을 통해서 만들어놓은 문맥의 리듬과 강조점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하지만 문형이 만들어 놓은 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10:5 b-11절이 한 단락이고, 그 안에는 X를 중심으로 하는 교차대조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현대적 논리에 따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합치면 A와 X는 제자의 의무(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고 A'는 제자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자는 주님께서 지정한 곳으로 먼저 가야만 한다(A). 그는 그곳으로 가면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령한 기적들을 선물(거저)로 주어야 한다(X). 이것은 제자의 의무이다. 이와 반면에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마땅함"(특권)이 있다. 그것이 A'의 제자들을 환영하는 가정에게 먹을 것과 머물 곳을 제공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특권이다(A'). 


  10:5b-11절의 문형이 보여주는 문학적 구조는 교차대조법의 중심을 X로 보게 해 준다. X를 중심으로 보면 마태는 독자들이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사역을 같은 맥락의 사역으로 보도록 유도한다 볼 수 있다. 

10:1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준 일을 생각하게 되고(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이는 더 나아가서 9:3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 요약을 기억하도록 해주어, 이것들이 모두 일맥상통하게 흘러 여기 제자 파송 강화에 까지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흐름을 보면, 제자들의 사역의 권세와 능력이 주님에게서 나왔고(10:1),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것(9:35)과 같이 천국을 선포하고 천국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10:7-8).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단어로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 10:2의 "사도들"(아포스톨론, αποστολων)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이곳에만 유일하게 사용된 제자들을 지칭하는 칭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도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보냄을 받은 자"로 "보내다"(아포스텔로)의 명사형이다. 마태가 제자들을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 명한 것은 보낸 자 예수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가 제자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로 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제자들을 제2의 예수와 같이 예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로 인식했다는 말이다. 

이로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이 천국이 임재해 있고 예수님의 권세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1-2. 12-15절의 미시적 구조

  12-15절도 하나의 단락을 이룬다. 이 부분의 구조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가정들의 태도(믿음으로 제자들을 영접하거나 불신으로 제자들을 무시하거나)에 따라 제자들이 취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반의적 평행법을 이루고 있다. 

a. 평안을 빌라(12)
  b. 제자에게 합당한 집의 평안(13)
a'.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4)
  b'.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15)

  a와 a'는 제자들을 대하는 집(가정)의 반응에 대한 제자의 행동으로 서로 대조된다. a는 제자들을 환영하는 가정에 평안(샬롬)을 비는 행위이고 a'는 제자들을 거부하는 가정에 대해 발의 먼지를 떨어 저주를 선언하는 전형적인 유대적 행위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환영하는 가정을 방문할 때 샬롬을 빌었다. 여기에서 "샬롬"은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평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샬롬을 축복하는 행위는 같은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통과하고 유대 땅에 들어오기 전에 신과 옷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행동은 이방적인 것들을 없앤다는 의미를 가진 것인데, 이 행위를 받는 피행위자 가정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을 이방 땅과 같다 선언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그들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절교의 선언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음을 강조하는 심판의 표로 이해할 수 있다(참조. 행 13:51, 18:6). 


  b와 b'는 a와 a'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약속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이 평안을 비는 가정에는 평안(샬롬)이 임하고(b), 반대로 제자들이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린 가정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받은 심판보다 더 심한 심판이 올 것이다(b'). 그래서 a-b-a'-b' 형태로 반의적 평행법이 된다.

  a와 a', 그리고 b와 b'가 상의적으로 서로 대조되는 모양은 제자들의 상징적인 행동(a와 a')과 이에 대한 결과(b와 b')로 대조되는 모양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뒤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이 구조는 문학적 차원으로만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종말론적 차원에서도 가치가 있기에 의미심장한 함의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어떤 가정을 향한 제자들의 상징적인 행동이 실제로 평안이 임하게 하고 종말론적으로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심판이 된다. 

예수님의 상징적 행동이 이런 결과를 실제로 만들어도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상징적 행동이 하늘로부터 오는 상과 벌로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어떤 차원의 사람인지를 숙고하게 만드는 체크 포인트가 된다. 

 

  1-3. 16-23절의 미시적 구조

  이 부분은 본문에 대한 해석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는 아주 복잡하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단락이다. 한 구절 한 단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문학적 구조의 모양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해석에 문제가 되는 부분들의 의미를 결정하고 구조 분석을 해야만 한다. 

일단 여기에서는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 구조를 분석해서 아래의 모양을 제시한다.

a. 핍박에로 파송받는 제자의 자세(16)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b. 사람들 임금들 총독들의 핍박(17-18)
      x. 아버지의 성령의 도움(19-20)
    b'. 가족의 대적과 모든 사람의 미움(21-22a)
a'. 핍박받는 제자들에 대한 인자의 오심(22a-23)  

  가장 먼저 a 레이아웃은 핍박의 현장으로 파송되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a)와 핍박 속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오실 예수님(a')이 서로 보충적인 대비를 이룬다.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두 행동이 비교된다. 16절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다"(αποστελλω)와 23절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다"(ερχομαι)이다. 제자들은 핍박 속으로 보내진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16절에 "이리 가운데로 보냄"이라 표현하셨다 이해된다. 이때 제자들의 태도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것"이다.

 a'는 핍박 속에 파송되는 제자들에게 주는 주님의 위로이자 약속이다. 주님께서는 핍박 속에 살아야 하는 제자들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오신다. 그것도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신속하게 오실 것이다. 핍박받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구원과 안전에의 보장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다. 이 구원과 안전한 보호가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라고 표현하셨다(10:23).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마태복음에서 손에 꼽히는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마태가 이 예수님의 오심을 핍박에로 파송받는 제자의 자세와 교차대조법의 짝으로 배치한 것은 이것으로 핍박 속에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고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신속한 행동을 강조하고자 한 것임은 분명하게 보인다.

  b 레이아웃은 해석의 방향에 따라 대조되는 짝을 구성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10:21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이 구절을 제자들에 대한 핍박으로 이해해서 가장 가까운 식구들마저 제자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제자들에 대한 핍박과는 상관없이 식구들끼리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사랑의 상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10:22a는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를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핍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0:21만을 보면 제자들에 대한 핍박으로는 내용이 애매모호하다. 그래서 10:21과 10:22a를 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이로서 이 부분에 대한 문학적 구조는 달라지게 된다. 분석의 진행을 위해 여기서는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 제자들에 대한 핍박의 상황으로 가정하고 상세한 해석에 대해서는 함의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면 b 레이아웃은 누가 제자들을 핍박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으로 b와 b'가 서로 대조의 짝이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핍박할 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셨다. b는 세상의 권세자들이고 b'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다. 


  이상의 결과 짝이 없이 하나만 남은 레이아웃이 생긴다. 이것이 이 부분의 문학적 구조인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이다. x에는 핍박 속에 처할 제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핍박과 위기의 순간에 지혜롭게 할 말을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은 마태가 마태복음 10장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제자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볼 때, 다시 말해 마태복음 10장의 구조적인 메세지로 볼 때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해 준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제자들을 더욱더 예수님과 비슷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 전반을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세 가지(3중 사역)로 구별했다(4:23, 9:35).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내린 명령(10:7-8)과 이를 이루기 위해 주신 권능(10:1)을 보면 제자들이 할 일은 "복음 전파"와 "치유" 두 가지로 나온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기에 핍박의 상황에서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는 것을 10:18에서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설명한 것을 근거로 제자들의 가르치는 사역으로 보면(그렇지 않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라고 보아도)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3대 사역에 더 근접하게 된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핍박의 현장에서 더욱더 보낸 자인 예수를 닮게 되는 것이다.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제는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대위임 명령을 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28:20절에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사역을 허락하셨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3중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자들로 완성되고, 선교 현장에 주님의 오심은 영원한 임마누엘로 확정된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중간 점검 결과이지만 마태복음 10장을 통해서 마태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언급한다. 각 단락별로 미시적 구조를 분석하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각 단락의 중심 메세지를 연결해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비슷한 권세와 영적인 결과를 만드는 자들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락인 10:5 b-11에서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수가 행한 천국의 선물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믿는 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두 번째 단락인 10:12-15을 보면, 제자들에 대한 믿음의 반응에 따라 실재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늘의 상과 벌이 나타난다. 그리고 지금 살펴본 세 번째 단락 10:16-23은 제자들은 핍박 속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마치 예수님과 같이 3중 사역을 한다. 그러므로 마태는 제자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행동 강령을 마태복음 10장에서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를 말하려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 24-33절의 미시적 구조

  24-33절도 교차대조법이다. 대조를 이루는 레이아웃의 짝들은 비교적 주제가 분명하기 때문에 발견하기 쉽다. 

a. 스승과 같은 제자의 삶(24-25)
  b. 두려워하지 마라(26-27)
    x.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28)
  b'. 두려워하지 마라(29-31)
a'. 예수를 시인/부인, 예수의 시인/부인(32-33)

  a와 a'의 관계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부분은 "예수-제자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서로 연결된다. a에서 예수는 현재 제자들의 스승이고 a'에서 예수는 미래 심판 자리에서 예수를 시인한 자들의 중재자이다. 그래서 a와 a'를 연결해보면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따라 핍박받는 현재의 삶은 미래(종말)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중재자인 예수의 시인을 받아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삶이 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b와 b'는 동일한 단어 "두려워마라"(메 포베쎄테 Μὴ φοβηθῆτε)로 짝을 이룬다. b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인 26절의 "감추인 것"과 "숨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견이 있어 분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드러나고", " 알려지는" "종말론적 공개"로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은 명백하다(10:26).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만천하에 증거 하는 제자의 일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10:27). 
  29절의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등은 세상이 보기에는 너무나 하찮게 보이는 제자들의 존재감을 말한다. 하지만 참새 한 마리에게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면 참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은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될 정도로 세밀하고 치밀하기에(10:28-30)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b'의 메세지이다. 


  그러면 28절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가 교차대조법의 중심으로 남는다. 현대적인 논리로 보면 b와 b'는 연이어 말하는 것이 더 좋다. 제자들이 직면할 두려움의 상황 두 가지를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한 후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마태는 우리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방법인 두려워하지 마라를 둘로 나누고 그 가운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끼어넣었다. 이것이 본문이 마태의 병렬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이 단락은 앞에서 논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주님께서는 예수-제자의 관계를 "와 같이"(ως)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동등한 관계로 표현하셨다. 여기에 주님께서 언급한 주님과 제자의 동등성은 "존재론적 동등성"(ontological equivalence)이 아니라 보낸 자(선생, 상전)와 보냄을 받은 자(제자, 종) 사이의 동등성인 "기능적 종속성"(functional subordin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 주님의 사명과 권능을 위임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모든 기능은 전적으로 주님께 종속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과 권능만을 가지고 파송되었기에 보낸 자 예수와 버금가는 능력과 삶이 가능하고, 제자들에 대한 대접은 예수에게 하는 대접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이 예수와 동등한 제자의 존재적 특징이다. 마태복음 10장의 파송 강화에는 이 사상이 아주 짙게 깔려있고, 이곳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이 사상에 근거해서 적용된 것이라 판단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함의에서 자세히 다룬다.

 

  1-5. 34-39절의 미시적 구조

  34-35절의 중심 개념은 "불화"(검)이고 36-39절의 중심 개념은 "합당치 않음"이다. 34-35절의 불화는 세상과 가족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36-39절의 합당치 않음은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찾는 것(자기 십자가를 취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세상-가족-가족-자기 자신"이 "불화하라-불화하라-합당치 않다-합당치 않다"와 결합되어 반복된다. 
  이러한 평면적인 구조 이해를 병렬적인 문학적 구조로 표현하면 "불화하라-합당치 않다"의 짝이 동의적 평행법이 되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된다.

a. 나는 세상에 검(불화)을 주러 왔다(34)
  b. 자기 집 식구와 불화하라(35-36)
a'. 식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37)
  b'.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치 않다(38-39)

  이것은 비슷한 개념을 반복해서 이해를 풍부하게 돕는 동의적 평행법의 테크닉이다.

  이 단락에서는 예수-제자의 동등성은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언급된다. 앞에서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스승-제자, 상전-종으로 표현되었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 주님께서는 예수-제자의 관계를 "사랑"으로 표현하셨다. 이는 예수-제자의 관계가 어떤 일이나 임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랑으로 맺어진 언약적 관계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의 사명과 권세를 위임받아 예수의 일을 대행하는 자 이상이다. 그들은 예수와 사랑의 관계로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로 존재한다. 그래서 제자들의 삶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삶이기에 세상에 대해 불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수를 사랑하기에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족까지도 원수가 되는 것이 제자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마태복음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세상과 불화의 삶을 사는 자의 대표가 예수님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기독론인데,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복음 10장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기능적으로 종속시킨 보냄을 받은 자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사도", 곧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전권대리인(a universal agent)이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사역을 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이루며 사심으로 하나님 만을 드러내셨다. 이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이다. 

  마태는 이 사상을 예수에게 합당치 않은 제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앞의 네 단락에 나오는 예수-제자의 동등성에 대한 가르침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부정적인 가르침으로 전환된다. 
  근본적으로 제자는 예수와 사랑의 관계로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는 "검", 즉 "불화"가 기본이다(a).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의 삶에는 불화가 나타나야 한다고 주님께서 강조하셨다. 이 불화의 극치가 자기의 목숨을 예수를 위해 잃는 것이고 집안 식구들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b). 
  이 단락에서 예수와 제자의 동등성이 절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예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그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제자들을 보는 예수님의 관점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1-6. 40-42절의 미시적 구조

  이 부분은 일반적인 원리를 먼저 말하고 다음에는 제자를 중심으로 세부적인 원리를 말하는 방법으로 제자를 영접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상을 강조하는 문형이 눈에 띄는 단락이다. 이 문형이 짝을 이루어 동의적 평행법을 만들었다. 
  
a. 제자를 영접하는 자 예수를 영접(40a)
  b. 예수를 영접하는 자 하나님을 영접(40b)
a'. ~의 이름으로 ~를 영접하면 상을 받을 것이요(41)
  b'. 제자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의 받을 상(42)

  a와 a'는 일반적인 원리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를 의미하는 "샬라흐 원칙"("어떤 사람의 대리인(살루아흐)은 그 사람 자신과 같다"(Ber. 5:5))에 대한 가르침이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스승인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a).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를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기에 선지자의 상을 받게 된다. 의인의 경우도 동일하다(a'). 

  하지만 b와 b'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의외의 결론이다. 예수와 제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알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상의 원리이다. 주님께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보낸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b). 이를 현대적인 삼단논법으로 보면 제자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선대 하는 것 이상의 차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은 물론 제자들을 보낸 예수의 권위를 세우는 놀라운 말씀이다. b'도 마찬가지이다.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합당한 예우를 하는 자는 선지자가 받는 상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b'에서 제자들, 그것도 보잘것없이 보이는 소자를 영접한 사람에게 주어질 상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제자들을 선지자나 의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도록 해준다. 


 

  1-7. 중간 결과

  문학적 구조 분석 방법으로 가지게 된 중간 결과는 세 가지이다.
  1. 마태복음 10장은 6개 문학적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2. 6개 미시적 단락의 관계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문학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3. 마태복음 10장의 제자도에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와 제자의 동등성이 아주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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