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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양과 염소 비유(마 25:31-46)

by 예다준 2022. 10. 11.

양과 염소 비유(마 25:31-46)

 

 


  필자는 이미 발표한 “마태복음 24-25장 성경 해석 연습”에서 마태복음 24-25장의 전체 구조를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3)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3) 2. 마태복음 24-25장의 문학적 구조를 찾아서 앞의 관찰들을 통해서 마태복음 24-25장의 문체와 구조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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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 전에 일어날 일들 : 환란과 미혹 그리고 성전 파괴(24:1-35)
   a. 도입(1-3)
     b. 종말 전 현상(24:4-29)
     b'. 인자 임함 전 징조(24:30-31)
   a'. 귀결(34-35)

   X. 인자의 파루시아를 위한 올바른 자세 : 깨어있어야 함과 준비함(24:36-25:30)
     a. 깨어있으라" + 종말론적 구원 vs 심판"의 구조 말씀들(24:36-44)
       b. 지혜있는 종과 미련한 종 비유(24:45-51)
     a'. 열처녀 비유(25:1-13)
       b'. 달란트 비유(25:14-30)

 A'. 인자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 : 양과 염소의 심판(25:31-46)

  이때 "A'. 인자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 : 양과 염소의 심판 (25:31-46)"을 시간의 진행 순서에 따라 분석했다. 마태복음 24-25장을 시간적인 서술 방식으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A-X-A'의 교차대조법이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분석한 내용을 복기하다가 "양과 염소 비유"(25:31-46)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없이 지나친 것과 그래서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서 마태가 24-25장에서 말하는 바를 보다 충실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양과 염소 비유"(또는 최후 심판 비유)가 교차대조법에서 대조되는 짝인 A와 연결되어 나타내는 구조적인 메세지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설명을 생략하여 A의 "산통의 때"에 대한 마태의 강조가 지향하는 목적과 A'에서 종말론적 심판이라는 상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를 강조하므로 지향하는 목적이 서로 상응한다는 사실을 누락시키는 실수(?)를 범했다는 자기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에 추가적으로 "양과 염소 비유"(25:31-46)를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이 A 단락의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와 어떤 관계를 가진 것인지를 밝혀본다. 


1.  A 단락의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에 대한 약술과 자아 비판

  필자는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빠드리지 말아야 하는 예수님의 종말론 설명 전략이 있고, 그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제자들의 질문에는 없는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라 명시했다.

 

  이는 마태복음 24-25장에 주어지는 예수님의 종말론은 종말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비성경적인 기대와 올바르지 않은 종말론적 제자도에 몰입되어 제자들이 미혹에 속아 구원에 실패하는 비극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주님께서는 이 전략에 따라 필요하다 판단한 몇 가지 가르침들을 골라서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으로 주셨다. 먼저는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이고, 그다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이에 대한 교회의 도피, 그리고 종말의 때에 대한 불가지성과 이에서 비롯되는 제자도인 깨어 준비함 등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종말 강화는 종말에 대한 전체적인 청사진을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파루시아 때의 대혼란과 미혹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과 용기를 주기 위한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해설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본문 전체의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는 내적인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한다. 이는 전체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산통의 때"에 대한 말씀을 담은 단락과 대조되는 "양과 염소 비유"(25:31-46)를 거의 생략하듯이 지나가 버린 것 때문이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에 담긴 “깨어 준비함”이라는 제자도와 다른 독특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략하고 지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따로 시간을 내어 "양과 염소 비유"(25:31-46)를 분석해보고 보충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비유를 본문 전체를 가지고 상세 구조 분석을 실시하고, 이에서 추출할 수 있는 메세지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함의를 산통의 때에 대한 강조와 연결해서 다시 한번 더 상고하고자 한다.

 



2. "양과 염소 비유"(25:31-46)에 대한 상세 구조 분석 

  이 비유의 상세 구조 분석은 이미 많은 학자들의 것들이 제시되었고 대부분 모양이 비슷하다. 특히 학자들이 주목하여 분석하는 부분, 그래서 문학적 구조 분석에서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 부분은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과 두 그룹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25:34-40, 25:41-45) 부분이다. 

 

  두 부분은 내용과 순서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동의적 평행법을 만든다. 또한 두 부분은 교차대조법의 짝(B-B')이 되는 단락으로 전체 구조에서 보면 본론을 구성하는 두 단락으로 이 부분 앞과 뒤로 서론(A 25:31-33)과 본론(A' 25:46)이 짝을 이루어 A-B-B'-A'의 교차대조법을 만든다. 

 


  2-1. 서론과 결론(25:31-33//25:46)

  1) 비유의 서론인 25:31-33은 비유의 배경을 설정해 준다. 

  비유의 배경과 등장인물, 비유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그 내용 등을 알려주어 마치 묵시적인 예언과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비유의 서론이 제공하는 정보 중에 가장 중요한 사항은 비유의 주제인데, 서론은 이를 "분별"(분리하다, 아포리조 ἀφοριζω)로 명시했다.

A. 서론 : 양과 염소 분리(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3)
    ---------------------------------------------------
A'. 결론 : 영생과 영벌(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이에 상응해서 결론인 25:46은 서론의 "분별" 주제를 “의인과 악인”그리고 “영생과 영벌”로 보다 상세하게 결론 맺는다. 마태는 서론에서는 분리(별)를 "양과 염소", "오른편과 왼편"으로 표현하고, 결론에서는 분리(별)를 "악인과 의인", "영벌과 영생"으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에는 마치 교차대조법과 같은 도치 구조가 들어있다.

 

양과 염소 심판 비유 서론과 결론의 도치 구조


  서론의 순서는 "양과 염소"와 "오른편과 왼편"으로 선 -> 악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결론에서는 악 -> 선으로 순서가 도치되어 "악인과 의인"과 "영벌과 영생"으로 논리의 진행이 뒤집힌다. 이것은 비유의 문맥 흐름에 따른 표현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에게 전도 또는 반전이라는 인식적 효과를 발휘하는 구문으로 교차대조법과 같은 효과를 주는 문학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2) 서론이 제공하는 정보로 빠질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을 영광 가운데에 좌정한 "인자-오시는 이"로 설명하는 기독론적 배경 설정이다(31절). 

  비유에서 예수님은 "인자-오시는 이"로서  "천상적인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런데 "천상적인 심판자"인 "인자-오시는 이"는 "목자"로서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분리하고(32절) "임금"으로 악인과 의인을 심판 선언한다(40, 45절).

 
  “영광의 인자”는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자기 칭호이다.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사용되는 영광의 인자에 대한 말씀은 마 6:27과 19:28에서 볼 수 있듯이 천사들을 대동한 심판주의 모습이 전형이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16:27과 19:28에 사용된 “인자”는 “오시는 이”로서 영광 가운데 왕좌에 좌정할 심판자인데,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그림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인자”를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이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제자도를 강론하실 때 집중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심판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인자”가 되어 세상을 심판하는 그림은 제자들에게는 어색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목자”와 “임금” 칭호가 “영광의 인자”의 활동에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목자-예수”그림은 마태복음 전반에 펼쳐진 예수님에 대한 칭호이다. 마태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예수님의 탄생을 “이스라엘의 목자”의 탄생으로 소개하고(2:6),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처량한 모습을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이라 설명했고(9:36), 예수를 배반하는 가롯 유다의 도발과 제자들의 배반을 “목자”를 치는 것과 양 떼의 흩어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26:31). 


  특히 마태복음의 “목자-예수”의 모습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이는 현장에서 강력하게 드러났던 예수님의 정체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는 3중 사역의 발로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사람들을 향한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라 설명했다(마 9:35-36).

  마 9:35-36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양들을 치유하고 먹이시던 “목자-예수”가 이 비유에 와서는 심판을 위한 분별을 수행하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비유의 32절에서 예수님은 목자들의 용어인 “모으고”(순아고, συνάγω)와 “분별”(아포리조 ἀφοριζω)을 종말론적 행동으로 실행하신다.

  “임금(왕)-예수” 그림도 마태복음 전반에 퍼져있는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 칭호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기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한다(1:1, 20).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했다(2:2). 예수님은 스스로를 “솔로몬보다 더 큰 이”로 소개했고(12:42), 병든 자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했다(9:27; 15:22; 20:30, 31). 그리고 21장에 이르러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한 왕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언하시고(21:5) 십자가 재판과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신다(27:11, 29, 37, 42).


  이 모든 것 중에서 이 비유와 관련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16:28에서 예수의 왕권을 인자와 연결시켰다는 사실이다.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은 "인자-오시는 이" 예수와 "임금"(왕) 예수가 연결되는 말씀으로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인자-오시는 이"와 "목자", "임금"(왕)이라는 세 가지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도하는 중심적인 칭호들인데, 이것들이 모두 이 비유에 모여 사용된 것은 아주 특이한 점이라 학자들은 이 비유를 "복음서의 요약" 또는 "복음서 안의 복음서"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본문을 보면 "목자"와 "임금"(왕)인 예수님의 모습이 "천상적인 심판자"로 등장하는 "인자-오시는 이"인 예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위해 사용된다. 달리 말하면 "천상적인 심판자"인 "인자-오시는 이"가 종말론적 심판을 행할 때 그의 지상 생애 가운데에 나타났던 "목자"와 "임금"(왕) 예수의 모습들을 심판에서 사용하신다. 이로서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그가 기술한 예수님의 모습들을 모두 모아서 최종 심판의 클라이맥스를 주도하는 그림을 그려준다.

 


  2-2. 영광의 왕 인자의 심판 선언과 두 그룹에 있는 자들과의 대화(25:34-40//25:41-45)

  두 단락은 영광의 왕으로 심판을 행하시는 인자와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이 심판에 대해서 나눈 대화를 내용으로 한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왕의 심판 선언문(34절, 41절)
  2) 두 그룹에 있는 자들과의 질의 또는 불만(35-39절, 42-44절)
  3) 질의와 불만에 대한 왕의 대답(40절, 45절)

  이를 구조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두 그룹의 사람들과 나눈 대화의 중심 주제인 여섯 가지 대접이 내용과 순서가 정확하게 일치하여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을 이룬다. 

  B. 영광의 왕 인자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의 대화(25:34-40)
    a.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34)

    a)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b)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c)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d)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e)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f)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b.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a')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귀하였으며
        b')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c')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d')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8)
              e')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f')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9)

        c.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40)

  B'. 영광의 왕 인자와 왼편에 있는 자들의 대화(25:41-45)
    a'.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

    a")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b")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2)
        c")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d")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e") 병들었을 때와 
              f")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3)
      b'.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a'")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b'") 목마르신 것이나 
          c'") 나그네 되신 것이나 
            d'") 벗으신 것이나 
              e'") 병드신 것이나 
                f'")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c'.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하지만 내용의 흐름을 보면 다른 점이 보인다. B에서 임금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a)-f)를 했다 칭찬하는데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언제 자신들이 예수님께 a)-f)를 했는지 의아해한다. 이와 반면에 B'에서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a)-f)를 하지 않았음을 꾸짖자 왼편에 있는 자들은 a)-f)를 했다 자부했다. 

 

  이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본다.

  1)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영생과 영벌의 조건이 되는 여섯 가지 대접 a)-f)가 모두 왕과 관련된 것이라고 임금이신 인자가 지적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는 a)-f)의 여섯 가지 대접 모두에 일인칭 대명사 “나”(ἐγώ)를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하여 여섯 가지 대접이 궁극적으로 “임금”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알려준다.

  2) 하지만 임금의 설명을 들은 두 그룹의 반응이 의아하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은 자신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으로 임금인 예수를 대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반대로 왼편에 있는 악인들은 제자들을 대접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임금인 예수를 대접했다 생각했다. 비유를 통해 표현된 것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과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자를 대접한 것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 제자들에 대한 대접이 심판주인 임금 예수에 대한 대접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들은 제자들을 보낸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이 임금인 인자를 대접한 것임을 몰랐다는 것은 의외의 대답이다. 이들은 심판주에게 여섯 가지 대접으로 올바른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과 분명히 구별되지만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가지고 있는 의미, 특히 종말론적 심판에서 발휘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과 비슷하다.

 

  왜 주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하셨을까? 비유의 주인공들은 무엇 때문에 종말론적 심판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여섯 가지 대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의인"으로 묘사되었을까? 


  학자들은 여섯 가지 대접의 성격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논쟁을 해왔다. 

 

  어떤 학자는 여섯 개의 대접은 사랑의 선한 행실, 즉 선한 윤리적인 행동이라 이해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임금”인 예수님과 그의 대행자로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대접이 여섯 가지 대접의 의미라 해석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여섯 가지 대접이 종말론적 심판에서 영생과 영멸을 결정하는 키라는 비유의 가르침과 어울리면 해석의 어려움이 더 증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판을 받는 두 그룹의 상태는 “지극히 작은 자”로 표현되는 제자들에 대한 여섯 가지 대접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좋은 힌트가 될 수 있다. 제자들을 대접하지 않고도 심판주를 대접했다 우기는 사람들과 제자들을 대접한 것이 심판주를 대접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언가 어설프게 보이는 비유의 설정은 오히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자 하는 강조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가지고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종말론적 가치와 이로 인해 종말을 맞이하는 제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올바른 태도, 즉 올바른 종말론적 제자도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3) 제자들에 대한 여섯 가지 대접인 a)-f)를 보면, 제자들의 처지가 극한의 고통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벗고”,“병들고”, “옥에 갇히는 것” 은 모두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의 부재 상황을 묘사하는 것들이다. 제자들은 의식주의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 외에 질병과 법적인 구속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다.

 

  주님께서는 두 그룹과의 대화를 통해 제자들의 한계적 상황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비유에 묘사된 제자들은 거의 죽음 일보직전으로 보이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주님의 표현이 “지극히 작은 자”가 된다(25:40, 45). “지극히 작은 자”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4) 그러면 “오른편에 있는 자들”(δεξιός)과 “왼편에 있는 자들”(εὐώνυμος)은 어떤 사람들로 비유는 설정했는가? 
  주님께서는 이들의 정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두 개만을 남겨놓으셨다. 먼저 그들은 “모든 민족”에서 구분된 사람들이다(25:32). 그리고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인 제자들에게 여섯 가지 대접을 해준 사람이거나 해주지 않은 사람들이다.

 

  비유에서는 이외에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없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과 제자들에 대한 설명이 길고 자세한 것을 본다면 이들에 대한 설명은 극히 절제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비유에서 제자가 "옥에 갇힌 것"과 제자들을 대접함으로 심판받는 사람들이 "모든 민족"으로 정의된 사실을 앞 단락의 내용들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이들이 누구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주님께서는 비유의 앞 단락에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있을 사건들과 징조들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는 가운데 제자들이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아 환란에 넘겨지게 된다는 말씀(24:9)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된다는 말씀(24:14)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양과 염소 비유이다. 이로 본다면 인자의 심판을 받는 자들의 정체는 명확해진다.

  5) 이제 가장 많은 해석상의 논쟁이 일어나는 심판의 조건을 본다.

  비유에서 임금의 종말론적 심판의 조건은 B-c와 B'-c'에 대조되는 짝으로 제시되어있다. 이것이 사람을 오른편에 있는 자와 왼편에 있는 자로, 의인과 악인으로 그리고 영생과 영벌로 분리하는 결정적인 조건이다.

c.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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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종말론적 심판에서 내려지는 임금의 판결 기준은 c에서 의인들에게 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말씀과 c'에서 악인들에게 준 말씀인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는 설명에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 사에에 존재하는 아주 특별한 관계인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이다.


  주님의 설명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예수님의 형제인 “내 형제들”(ἀδελφῶν μου)이다(25:40).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특정 인물을 “내 형제”라 부른 경우는 세 번이다(12:50, 25:40, 28:10). 12:50에서 내 형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육적인 가족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참 제자를 말한다. 그리고 마 28:10의 내 형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새로워진 제자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12:50과 28:10을 보면 “내 형제”라는 주님의 표현은 참 제자 또는 이상적인 제자를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알려주신 종말론적 심판은 예수님과 지극히 작은 내 형제와의 동일시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즉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구조이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제자에게 베푼 대접의 유무가 심판주로 임하신 예수님께 베푼 대접의 유무가 되어 영생과 영벌로 귀결되는 것이다.

  양과 염소 심판 비유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주제와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는 마태복음에서 생소한 주제가 아니라 마태복음이 아주 중요하게 강조하는 제자도의 기본적인 개념이자 구조이다. 마태는 마태복음 10장 하나를 예수-제자의 동일성을 주제로 따로 구분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구조를 집중적으로 설명할 정도로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이곳을 보면 예수와 제자의 동일성이 얼마나 깊은 차원으로 심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10:40-42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주제로 양과 염소 심판 비유와 가장 연관성이 깊은 부분이다. 10:40-42 다음과 같은 동의적 평행법을 이루고 있다.

  a. 제자를 영접하는 자 예수를 영접(40a)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b. 예수를 영접하는 자 하나님을 영접(40b)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a'. ~의 이름으로 ~를 영접하면 상을 받을 것이요(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b'. 제자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의 받을 상(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a와 a'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인 "샬라흐 원칙"("어떤 사람의 대리인(살루아흐)은 그 사람 자신과 같다"(Ber. 5:5))에 대한 언급이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스승인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a). 마찬가지로 선지자(의인)의 이름으로 선지자(의인)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의인)를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기에 선지자(의인)를 보낸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인)의 상을 받게 된다. 
  문제는 b와 b'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적용된 "샬라흐 원칙"이다. 이것은 예수와 제자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므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제자들을 보낸 예수를 영접한 것과 같다는 말(a)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다음 b가 문제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보낸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적용한 샬라흐 원칙의 핵심이다(b). 그래서 b’에 나오는 것과 같이 소자라 하더라도 제자의 이름으로 그를 대접하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선대 하는 것 이상의 차원의 일이 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주가 되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전권대사인 “인자-오시는 이”로 보내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늘의 상(반대로 벌)은 “종말론적 심판”과 직결되는 것으로 더 심화된다. 마태복음 10장의 “예수-제자의 관계”에는 예수는 현재 제자들의 스승이지만 종말론적 미래의 심판 자리에서는 예수를 시인한 자들의 중재자로 규정하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10:32-33로 교차대조법의 짝이 되는 10:24-25과 대조되어 현재의 “예수-제자의 관계”와 종말의 “예수-제자의 관계”가 요약되어있다.

※ 현재 “예수-제자의 관계”: 스승과 동일하게 핍박을 받는 삶
  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 종말의 “예수-제자의 관계”: 종말론적 심판에서는 예수를 시인한 자들의 중재자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두 단락을 연결해 보면,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따라 핍박받는 현재의 삶은 미래(종말)에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중재자인 예수의 변호(시인)로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결과를 만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시인하여 종말론적인 은혜를 받는 것과 같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종말론적인 복과 화가 임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이다. 10:12-15이다.

 

  a. 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b.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a'.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b'.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제자들을 영접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이 임한다. 이와 반대로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에 임했던 심판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임할 것이다. 무슨 이유로 제자들을 통해서 종말론적 심판이 결정되는가? 그들은 예수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여 대접하는 일은 제자들을 보낸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에 동참하는 것이 되고, 결국 종말론적 심판자요 중재자인 예수를 통해서 최후의 심판에서 영생에 이르는 변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는 마태복음 10장의 가르침을 비유로 압축 요약해서 표현한 것과 같다 할 수 있을 만큼 주제와 내용과 구조가 같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의 가르침을 이어서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를 보면 종말론적 심판의 기준이 무엇 때문에 예수-제자의 동일성으로 제시되는지를 알 수 있다.  


  6) 여기에 2)에서 살펴본 비유의 주인공들이 왜 무엇 때문에 종말론적 심판에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여섯 가지 대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의인"으로 묘사되었는지를 연결해 본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주인공인 의인들을 여섯 가지 대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의인"으로 묘사한 것에는 세밀하고 사려깊은 의도가 있다 볼 수 있다.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론을 설명하면서 취했던 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현상들을 그저 알려주기 위해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고 오히려 그들을 격려해서 사명을 잘감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종말론적 지침들을 주려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태복음 24-25장을 채운 종말론 교훈들은 모두 교리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정리된 종말 교리가 아니라 인자의 파루시아 전에 발생할 혼돈과 핍박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더 나아가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위한 실천적이고 격려적인 종말론적 가르침들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의 질문에는 없는 “산통의 때”에 강조와 “예루살렘 멸망 때와 도피”, “거짓 선지자의 출현과 미혹에 집중된 가르침들”이 선포된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전략은 마지막 결론인 양과 염소 비유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표현되었다. 특히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어설픈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를 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어설픈 주인공들의 모습은 "지극히 작은 자"로 표현된 제자들의 현실적인 삶의 정황에 대한 아주 정확한 묘사로 제자들의 고통과 비천함을 잘 아시고 동참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려주는 효과를 가진다. 비유를 보면 의인과 악인의 모두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를 모른다. 악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대접하지 않고도 심판 주를 섬겼다 황당한 주장을 했다. 악인들의 관점에서 제자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인들은 제자들을 대접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인지 전혀 모를 정도로 제자들은 보잘것 없이 보였다. 악인에게도 의인에게도 제자들은 그저 스스로의 생명과 안전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지극히 작은 자”로 보일 뿐이다. 
  두 번째 제자들의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에 대한 묘사는 제자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사건의 의미와 효과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만든다. 제자들을 영접한 사람들도 그들을 통해 종말론적 심판에서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제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면 그 누가 예수를 따르는 자로, 예수의 보냄을 받은 자로 산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제자들은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 강화의 마지막 결론인 양과 염소 비유에서 강조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이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에게 영생의 상속에 있고(25:34), 제자들을 대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의 벌이 있다(25:41, 46).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제자들은 종말론적 영생과 영벌로 구분되는 분깃점 역할을 한다. 그들에 대한 태도에 따라 영생과 영멸이 결정된다면 이 세상 그 누가 제자들보다 중요하다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아 예수와 동일화된 제자들의 가치요 중요성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점은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제자들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결려하기 위해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은 자로 모든 민족으로 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으며 지극히 작은 자로 살아가는 삶이지만 자신들을 영접한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은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7)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는 산통의 때 말씀과 의미상 대조를 이루는 교차대조법의 짝으로 아주 적당하다. 마태복음 24-25장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구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교차대조법이다.

  A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 전에 일어날 일들 : 환란과 미혹 그리고 성전 파괴(24:1-35)
    X. 인자의 파루시아를 위한 올바른 자세 : 깨어있어야 함과 준비함(24:36-25:30)
  A'. 인자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 :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25:31-46)
  
  주님께서는 잘못된 종말에 대한 기대와 올바른 제자도에서 이탈한 믿음으로 산통의 때에 일어날 여러 가지 미혹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A의 말씀들을 주셨다. 그리고는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처하는 올바른 제자도인 깨어 있어야함과 준비함을 중심 메시지로 제시하셨다(X). 하지만 미혹과 환란 속에서 깨어 준비하는 삶은 너무나 고달프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제자들의 영적인 신분은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제자들을 영접하여 대접하는 믿음의 사람들도 모를 정도로 제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로 존재해야만 한다. 이러한 제자들이 종말론적 제자의 삶을 용감히 지킬 것을 격려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의 마무리를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로 장식하신 것이다(A').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사람들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 이 한 마디의 가르침은 어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사람들이 더욱더 많이 제자들을 만나 영접하도록 사명감을 격려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강행하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제자들은 인자의 파루시아에 횡행할 미혹들을 이겨 스스로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다.  


3. "양과 염소 비유"(25:31-46)의 전체 구조와 함의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 비유"(25:31-46)의 전체 상세 구조를 종합 정리하고 몇 가지 함의를 생각해본다.

A. 서론 : 양과 염소 분리(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3)

 B. 영광의 왕 인자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의 대화(25:34-40)
    a.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34)

    a)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b)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c)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d)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e)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f)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b.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a')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귀하였으며
        b')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c')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d')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8)
              e')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f')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9)

        c.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40)

  B'. 영광의 왕 인자와 왼편에 있는 자들의 대화(25:41-45)
    a'.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

    a")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b")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2)
        c")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d")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e") 병들었을 때와 
              f")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3)
      b'.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a'")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b'") 목마르신 것이나 
          c'") 나그네 되신 것이나 
            d'") 벗으신 것이나 
              e'") 병드신 것이나 
                f'")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c'.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Aʹ. 결론 : 영벌과 영생(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본문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와닿은 교훈이 많았다. 이것이 장시간을 들여 성경을 연구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요 기쁨이다. 함의는 일반적으로 성경 해석에서 적용에 해당한다. 두 가지 느낀 점을 첨부하고 싶다.

 

  3-1. 저자 중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자세의 중요성

  아이러니하게도 양과 염소 비유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말씀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환영할만한 말씀으로 취급되는 성경이다. 이 비유를 불편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양과 염소 비유에는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가르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이다. 제자들을 대접함으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되는 가르침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신칭의 구원론과 상충된다 보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이 비유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인자의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심판의 기준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베푼 자선과 자비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이라 이해한다. 이들은 이 이해를 보편적으로(universalistic) 적용하여 자비의 행위가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의무라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는 카톨릭과 해방신학자들은 본문을 근거로 가난과 사회적 불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불편함과 환영에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결여되어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의 구조와 마태의 표현들의 특징을 하나씩 살펴본 결과 양과 염소 비유에는 예수님께서 종말론을 말씀할 때 사용한 특별한 전략이 있고, 그 전략에 부응하기 위하여 양과 염소 비유에 사용된 비유의 배경이 되는  모티브와 구조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모티브와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 구조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양과 염소 비유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가 만들어낼 놀라운 종말론적 결과를 알려줌으로 종말의 혼동과 미혹, 그리고 환란과 팝박의 상황에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보호하는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이 비유를 불편하게 보거나 반대로 환영하는 것인가? 그것은 비유의 배경이 되는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적으로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는 저자의 관점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원리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과 예수님을 사람의 이데올로기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립하게 만드는 참으로 안타까운 태도이다. 성경을 성경 저자의 관점에서 보려는 자세는 사람의 필요와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는 미련과 교만을 이기게 해주는 효과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다. 
  마태복음의 제자도에는 보낸 자 예수와 보냄을 받은 자 제자들 사이의 동일화 주제가 기본적인 개념이고, 예수-제자 동일화는 결국에는 종말론적 심판과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 이것이 비유를 만들고 전달한 예수님과 마태의 관점이다. 하지만 이 관점에서 이탈하면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 강화 전체는 물론 양과 염소 비유의 배경이 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일화 + 종말론적 심판”구조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3-2.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전략 : 제자의 삶의 진정한 가치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우리들은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에 담겨진 예수님의 전략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태복음 24-25장의 구조 분석에서 언급한 바와 산통의 때에 담겨진 전략과 같은 것이다.

 

  본문의 구조와 내용들을 분석해보면 양과 염소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가 말세의 혼돈과 미혹의 상황에서도 얼마나 놀랍게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고 혼돈과 미혹 속에 자신들이 존재하지만 끝까지 사명을 다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 격려와 용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유효하다. 그것은 이 비유가 우리에게도 제자도의 관점을 새롭게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한 제자도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제자도는 그 차원과 결과가 크게 다를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제자도라 하면 구원받기 위한 제자도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은 물론 예수의 보냄을 받아 세상 속에서 영생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제자들을 환대하는 자들은 비록 그들이 제자들을 환대한 것이 예수님을 환대한 것임을 모르더라도 영생에 이르는 복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파송받은 제자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너무나 큰 차이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사기꾼 같이 여겨지는 현 불신의 시대 안에 사는 우리 예수의 제자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교회를 신뢰하고 목회자나 사역자들을 존경하는 풍토가 사라져 참 제자로 사는 삶이 무시되고 곡해되는 것이 오늘의 영적 환경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별 볼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우리들에게 양과 염소 비유는 아무 보잘 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제자들의 현재가 종말에 놀라운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오늘을 이기는 힘을 제공해준다.

 

  종말의 혼돈과 환란의 시기에도 제자들을 환호하고 대접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은혜가 일어난다. 제자들이 아무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로 취급을 받아도 그들을 대접하는 자들이 영생을 상속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이 믿음은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면 할수록 제자들을 거부하면 할수록 제자들의 마음에 사명감과 기쁨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예수님의 생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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