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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0장(2)

by 예다준 2022. 8. 5.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0장(2)

 

2. 전체 구조와 해설

  이제 마태복음 10장의 전체 구조를 살펴본다. 먼저 기억할 것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8-9장 연구에서 제시된 것으로 10:1-4은 앞 9장의 마지막 단락과 문학적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A. 예수의 사역 요약(9:35)
  B. 추수할 일군에 대한 요청(9:36-38)
A'. 제자들의 사역 요약(10:1)
  B'. 12제자(10:2-4)

  그래서 이 부분은 10장 본문을 분석할 때 제외한다. 그리고 제자 파송 강화는 아래 표와 같이 제자 파송 강화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 내용이 거의 비슷한 도입과 마무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학적으로 보면 10:5 a-11:1이 제자 파송 강화의 완벽한 한 단원이 된다.

A. 도입(10:5a)
  마 10:5a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X. 제자 파송 강화(10:5b-42)
A'. 마무리(11:1)
  마 11: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이 두 가지 문학적 구조를 전제로 본문의 전체 구조를 살펴본다. 요령을 말하자면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진 단락은 중심인 X가 메인 메세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모티브의 짝을 찾으면 좋고, 다른 평행법으로 이루어진 단락은 적절하게 요약하여 평행법의 짝을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처음과 마지막 단락이 "제자"로 주제가 같다. 처음 단락은 제자의 특권과 의무가 중심 주제이고 마지막 단락은 제자를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이 중심 주제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처음 단락은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행해야할 규칙들을 설명한 것으로 관계의 흐름이 "제자-> 사람들"이라면 마지막 단락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할 때 받을 상을 말하기에 관계의 흐름이 "사람들->제자"로 반대가 되어 동일 주제를 서로 보완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두 단락은 충분히 평행법의 짝으로 기능한다 볼 수 있다. 
  두번째로 한 단계 안쪽에 있는 단락들은 "합당한 자"와 '합당치 않은 자"로 주제가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합당한 자는 제자들에게 합당한 자이고 뒤의 합당치 않은 자는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제자를 말한다. 
  나머지 가장 안쪽의 두 단락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연관성이 밀접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을 핍박과 성령의 도움"을 알려주셔서 제자들을 격려하시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라고 경고하심으로 핍박에서 제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승리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두 단락은 핍박에 대한 격려와 경고로 짝을 이룬다. 


  이러한 생각으로 필자가 찾아낸 마태복음 10장의 전체 구조는 이렇다.

도입(10:5a)
A. 제자가 갈 곳과 할 일(10:5 b-11)
     or 제자의 의무와 특권
  B. 제자에게 합당한 자(10:12-15)
    C. 제자들이 받을 핍박과 성령의 도움(10:16-23)
    C'.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10:24-33)
  B'. 예수에게 합당치 않은 자(10:34-39)
A'. 제자를 영접하는 의미와 받을 상(10:40-42)
마무리(11:1)

  앞에서 찾아낸 6개의 단락은 3개의 레이아웃으로 구성된 내향적 평행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내향적 평행법은 각 레이아웃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차대조법으로 볼 수도 있다. 각 레이아웃의 상응 관계가 특별히 안쪽 레이아웃에 치우치지 않으면 내향적 평행법으로 분류하지만 가장 안쪽 레이아웃이 돋보이면 교차대조법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내향적평행법을 마태복음 10장의 기본 뼈대로 삼고 문단과 절 그리고 단어에 이르는 세세한 해석을 진행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지않으면 안 된다 생각한다. 그것은 제시한 전체 구조가 정답이라는 확신이 있는가이다.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제시한 구조 외에 다른 구조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것도 타당성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에 제시한 구조 말고 선택을 고민했던 다른 구조가 실제로 있다. 이 구조도 설득력이 많다 생각한다. 더 연구를 하다 보면 이 구조로 마음이 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는 본문에서 발견한 미시적 구조 중심으로 거시적 구조를 완성하기로 했기에 제시된 구조가 선택된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마태복음 10장을 이렇게도 분석할 수 있다.

도입(10:5a)
  A. 제자의 의무와 특권 : 선교 지침(10:5-15)
    B. 박해에 대한 예견 1(10:16-23)
      X. 박해에 대한 반응(10:24-33)
    B'. 박해에 대한 예견2(10:34-39)
  A'. 제자 영접에 대한 보상(10:40-42)
마무리(11:1)

  위 구조분석은 앞에 제시된 구조 분석에서 A와 B를 하나로 묶어 "선교 지침"으로  분류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것으로 인해 전체 구조가 완벽한 교차대조법으로 강화되고, 앞에서 제시된 구조에서 C 레이아웃이 하나로 합쳐져 중심 메세지 X로 확정된다. 어쩌면 이것이 본문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더 좋은 설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구조에는 하나의 숙제가 생긴다. 그것은 전체 문학적 구조가 바뀌기 때문에 B 레이아웃의 대조되는 주제가 바뀐다. 앞의 구조 B 레이아웃은 "합당치 않은 자"를 중심으로 대조의 짝을 찾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B 레이아웃을 "박해에 대한 예견"의 짝으로 보아 "첫 번째 박해에 대한 예견"과 "두 번째 박해에 대한 예견"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구조분석도 본문 전체를 잘 설명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두 가지 분석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일지도 모른다. 
  
  2-1. A 레이아웃

  마태복음 10장의 처음은 제자의 의무와 특권(A)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제자를 영접하는 행위에 대한 하나님 차원의 의미와 제자를 영접하는 자가 받을 상(A')으로 마무리된다. A는 예수의 제자라면 선교의 현장에서 반드시 행하고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고 A'는 예수의 제자들을 호의적으로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상을 받는가를 알려주는 것으로 A와 A'가 합쳐져 "제자-제자를 영접하는 자"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레이아웃이다. 
  A에서 예수로 부터 파송을 받는 제자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의무와 특권을 행해야 한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선교 전략에 따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나아가야 한다(10:5-6). 그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나아갈 때 천국의 임재를 전파하고(10:7), 주님으로 부터 거저 받은 천국 임재의 역사들을 선물로(거저) 주어야 한다(10:8). 이때 제자들은 여행을 위한 돈이나 준비물을 마련하지 말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자들은 이 특권에 합당한 자를 찾아 머물 수 있다(10:9-11).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한 의무와 특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파송하고 제자도를 명하는 예수님을 닮은 삶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관점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제자는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2의 예수라는 것이다.

  A'의 제자를 영접하는 자들이 받은 상에 대한 말씀도 제자들을 영접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10:41에서 선지자(의인)의 이름으로 선지자(의인)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이 선지자가 받을 상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어째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이 선지자의 상에 동참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지자를 알아보고 그를 영접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상의 원칙은 하나님이 정하신 신적인 규칙으로 멸망하지(잃어버리지) 않는다(10:42). 
  그런데 이 신적인 보상의 원칙이 제자들을 영접한 자에게도 유효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단지 인간 예수가 시키는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상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제자의 사역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제자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 고귀한 일이 된다. 주님의 눈에서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제2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2-2. B 레이아웃

  B 레이아웃에서 주목을 끄는 단어는 "합당한"(αξιος)이라는 표현이다. B에는 제자들을 영접하고 거부하는 가정에 대해 "합당한"이 사용되었고(10:13) B'에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에게 합당치 않은 자를 언급할 때 "합당한"이 사용되었다. B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제자에게 합당한 자"가 주제이고 B'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예수에게 합당치 않은 자"가 주제가 되어 서로 상보하는 관계의 짝이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합당한 자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격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자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보낸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합당한 반응을 해야하고 세상은 제자들에게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합당한 반응을 하는 자는 제자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여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음식과 거처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께 합당한 제자는 자기 식구보다 자기 목숨보다 예수를 더 사랑으로 반응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두 개의 합당한 자에 대한 말씀에는 합당한 자(또는 합당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종말론적 결과가 동일하게 나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B에서 제자에게 합당한 가정에는 샬롬이 임하고, 제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심판이 임할 것이다(10:13, 15). B'에서는 예수께 합당한 자는 목숨을 얻을 것이고 예수께 합당하지 않은 자는 목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10:39). 

  2-3. C 레이아웃

  C 레이아웃은 제자들을 핍박하는 세상 속으로 파송된 제자들에게 용기를 복돋아주는 예수님의 권면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그래서 이 단락에는 다른 단락과는 달리 제자들에게 가해질 세상의 핍박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가 함께 나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C를 보면 제자들은 이리 가운데에 보내진 양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된다(10:16). 17-18절은 제자들을 공격하는 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17절에 나오는 "공회들"와 "회당"은 유대적인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의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18절은 이방인 특히 이방 지도자들(총독들과 임금들)이 언급된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포함된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과 핍박을 받아(10:22)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도망을 가야 하는 형편으로 설명된다(10:23).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제자들을 괴롭힐 고난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제자들을 핍박하는 이방 지도자들에게 제자들이 직접 증거를 해야 하는 경우이다(10:18).  
  C'에는 핍박을 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알세불이라 거부를 당하는 집 주인과 같이 핍박을 받는 "그 집사람들"로 그려진다(10:25). 10:26의 '감추인 것"과 "숨은 것"은 핍박을 당하는 제자들의 처지에 대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억눌림을 당하는 제자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10:29의 "한 앗사리온이 팔리는 두 마리 참새'라는 표현도 제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상징하는 중의적 표현(세상으로부터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는 상황과 하나님에게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를 받는 상황을 모두 의미하는 이중적 상황 표현) 일 수 있다. 10:28에는 제자들의 죽음(순교)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괴롭히는 핍박의 상황으로 묘사된 것이 핍박자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거나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다(10:32-33). 

  C 레이아웃이 묘사하는 제자들이 받을 핍박의 상황은 "제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핍박자들의 미움과 거부"와 "예수에 대한 공적인 증거(시인)"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래서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와 도움도 이차원적으로 제시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제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핍박자들의 거부"에 대해서는 신속한 인자의 오심(10:23)과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헤아리는 하나님의 귀하게 보심(10:29-31)으로 격려하셨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공적인 증거(시인)"는 증거할 말을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10:18-20)과 예수님의 종말론적 변호로 보상된다(10:32-33). 
  결국 C 레이아웃이 강조하는 바는 c와 c'의 미시적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핍박에로 파송된 제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예수를 묵묵히 따르는 것이다. 


3. 전체 구조 분석에서 찾을 수 있는 함의

  마태복음 10장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가르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정리해 본다.   

 

  3-1. 보냄을 받은 예수의 대리자로서 제자의 정체성과 특징에 대한 강조

  마태복음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는 단순히 제자들이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할 때 준수해야 하는 행동 강령이나 규칙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떤 차원에서 보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함의를 가진다. 제자 파송 강화를 보면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에게서 배우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의 "전권대리인"(a universal agent)으로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2의 예수로 그려진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비슷하게 행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자로 나타난다. 제자들에게는 보낸 자에게 속한 사명이 이어지고, 보낸 자의 권세가 동반되고, 제자들을 영접한 자는 제자들을 보낸 자로부터 상을 받는다.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보낸 자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취급을 받는다. 이것에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도가 전개되는 기본적인 배경이다.
  가장 먼저 보이는 예수-제자의 동등성에 대한 말씀은 주님께서 자신이 행하신 권능을 주시고(10:1), 그 권능을 거져받었으니 거저 주라 말씀하신 10:8절이다. 이로서 제자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는 자가 된다(10:7).
  또 순회 전도를 하면서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거처를 제공받는 특권을 약속하신 것도 예수-제자의 동등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10:9-11).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한 돈과 준비물을 챙기지 말고 제자들을 영접하는 합당한 자로부터 음식과 거처를 제공받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이는 제자의 삶은 세상적인 수단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채움으로 유지된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이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보내는 자인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에게 약속된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에게 재정적인 후원자들이 여럿 있었음을 증거 한다(눅 8:1-3).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적인 재정 지원(예, 마 17:24-27의 물고기 입에서 나온 한 세겔)과 음식의 지원(예,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도 받아 전도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필요에 따라 구제하시기도 했다(요 13:27-29).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 일행이 먹는 문제와 기거하는 문제로 사역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한 삶은 스승인 예수의 삶의 연장선에 있는 예수와 같은 삶이다.
  예수-제자의 동등성이 나타나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영접하므로 나타나는 신적인 상과 벌에 대한 말씀이 있다. 10:13, 15절에 제자들을 영접하면 샬롬이 임하고 반대로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받았던 심판보다 더 한 심판이 가해지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샬롬을 주고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샬롬이 임하고 종말론적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다. 이 말씀에 숨겨진 주어는 하나님이다. 제자들에 대한 대우에 따라 신적인 상과 벌이 주어진다. 이것은 제자들의 능력이나 위대함을 과시하는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대리인이기에 가능한 논리이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10:40-42에 나오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제자, 그것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일에 대한 품삯(상)이 결단코 멸망하지(잃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 이 약속의 상과 벌은 제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의인의 상벌을 내리는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런 말씀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해 10:40은 단도직입적인 주님의 대답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제자들을 보낸 자 예수를 영접한 것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결국 예수를 보낸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예수 사이에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가 성립하고 예수-제자 사이에도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으로 제자들의 놀라운 정체성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대한 이런 방식의 설명은 제자들이 핍박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10:25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선생-제자", "상전-종"의 관계와 같다. 이 표현은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서열이나 높고 낮음의 수적적 위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10:25에 나오듯이 관계에서 나오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동등함("같고")을 강조하는 말이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상이 예수님(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부르며 거부했듯이 "그 집 사람들"인 제자들도 핍박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하셨다(10:25). 
  선생과 같은 제자, 상전과 같은 종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잘 아는 "보냄의 형식"(sending formular) 개념에서 나오는 용어이다. 이 개념은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the sent one and sender are same)라는 문구로 대표되는 보냄을 받은 대리자(agent)의 권세에 대한 설명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대리인으로 그의 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보낸 자와 동일한 권세는 물론 동일한 운명을 가진다. 마 10:5b-11에는 보냄을 받은 제자들의 특권이 강조된 본문이고 마 10:25-27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본문이다. 그래서 10:24절의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씀은 스승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될 제자의 숙명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10:34-39에 가면 보낸 자 예수와 보냄을 받은 자 제자들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언급된다. 여기에서 예수-제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이다. 즉 예수와 제자는 일이나 임무, 사역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제자는 자기 식구들은 물론 자기 자신 보다도 더 예수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불화)를 주시는 분으로 제자들은 세상과 불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라는 황당하고 괘변적인 주장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10:34-36).
  이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삶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기능적으로 종속시킨 보냄을 받은 자로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사역을 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이루며 사심으로 하나님 만을 드러내셨다. 이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보낸자를 사랑하여 순종을 삶을 사는 것은 예수와 제자의 동등성이 최절정에 도달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보낸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는 마지막에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결정적인 혜택으로 확인된다. 주님께서는 온갖 핍박에도 보낸 자 예수를 시인한 제자들은 종말의 심판 자리인 아버지 앞에서 예수의 제자라 시인을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반대로 아버지 앞에서 부인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10:32-33). 이 구절에서 보낸 자 예수는 종말론적 심판에서 자신의 보냄을 받은 자들을 중재하는 변호사로 나온다. 중재자 예수님은 예수를 시인한 제자들을 "그의 집에 속한 자들"(τους οικιακους αυτου)이라 시인하실 것이다. 그래서 보낸 자 예수의 시인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인 종말론적 심판주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면제케 해주는 변호로(10:28) 제자의 구원에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 
  

  3-2. 고려할 해석적 제안 : 10:23의 "인자의 오심"의 의미

  23절의 "인자의 오심"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중에 이것을 종말론적 오심(파루시아)로 이해하면 바로 이어지는 문구인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니며 천국을 전파하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 선언하셨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마태복음 종말론의 중심 본문으로 보는 24장의 종말론적 가르침과 상충된다. 주님께서는 24:14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10:23의 인자의 오심은 24:14에 나오는 세상의 끝과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에 천국을 전파하기 전에 일어나는 인자의 오심은 무엇을 말하는지 논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두 가지로 보인다. 먼저는 10:23의 인자의 오심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는 오심이 아니라 단순히 핍박받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을 파송하신 주님께서 얼마 후에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단순 명료한 해석으로 이것이 이 해석의 강점이라 말할 수 있다. 
  두번째는 본문을 마태복음 24장 종말론 강화와 연관 지어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10:23에 나오는 인자의 오심에 대한 설명들(10:16-23b)을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환란 때의 8가지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10:23을 포함하고 있는 단락인 10:16-23에 나오는 설명들을 24:3-14과 비교해보면 이 주장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 10:16-23을 분석하면 아래와 같이 8가지 사항으로 나눌 수 있다.

1. 핍박으로 파송받는 제자의 자세(10:16)
2. 세상의 핍박(10:17-18)
3. 성령의 도우심(10:19-20)
4. 가정 식구들의 대적(10:21)
5. 모든 사람이 제자들을 미워함(10:22a)
6. 나중까지 견디는 자의 구원(10:22b)
7. 핍박에 대한 도피(10:23a)
8. 인자의 오심(10:23b)

   1과 3은 마태복음 10장이 특히 강조하는 가르침이고, 8은 비교 항목이므로 마태복음 24장과의 비교에서 제외할 수 있다. 나머지 굵은 글씨로 나타난 사항들을 24장과 비교하면 주목할만한 결과가 나온다. 
  1) 2는 24:9a와 5는 24:9b와 비슷하다.
  마 24:9 "a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b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2) 4는 24:10과 내용이 비슷하다.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3) 6은 24:13과 비슷하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4) 7은 24:15-21에 나오는 유대에서 도피와 비슷하다. 
  위의 비교로 보면, 24장에 나오는 산통의 때에 나타날 8가지 현상 중 3가지가 이곳에 있고, 이 곳에 나오는 모든 사항이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가 10:17-18에 나오는 제자들에 대한 두 가지 핍박(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인들의 핍박)은 12사도 때에 실재로 일어난 사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제자들이 공회나 회당에 넘겨져 채찍질을 당한 일은 12사도 때에는 없었고 사도 시대 이후 교회에게 일어난 일이다. 이방인의 핍박에 대한 언급도 12사도들에게 실재로 일어나지 않았다. 12사도 당시 갈릴리에는 총독이 없었고 사도들이 총독이나 왕들의 주목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10:16-23이 묘사하는 핍박의 상황은 12사도들이 경험할 핍박의 상황을 포함해서 초대교회의 상황 모두를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결국 10:23의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라는 말씀을 12사도 시기를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보게 한다. 
 
  마지막 기억할 것은 마태복음 24장에 종말론적 마지막 때가 아닌데도 인자의 오심(파루시아)이 나오는 구절이 있다. 그것이 24:33-34의 이 세대가 다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인자의 파루시아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10장의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와 똑같은 것은 아니라 해도 완전히 다른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두 인자의 오심을 서로 연관된 것으로 보는 가능성은 열려있는 것이다. 10:23의 인자의 오심을 마태복음 24장의 종말론과 연계하면 "환란 때의 8가지 현상"(24:3-14) 같은 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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