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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땅의 소금 말씀과 세상의 빛 말씀(마 5:3-16)

by 예다준 2022. 10. 17.

땅의 소금 말씀과 세상의 빛 말씀(마 5:3-16)

 
 
 

  마태복음 5장의 초두에는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도 유명한 두 성경 구절들이 포진하고 있다. 먼저는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니"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는 문구의 소금과 빛의 말씀이고, 다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 시작하는 팔복이다.

  이 말씀들은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도 사명을 일깨우는 모토나 대사회적 기도회나 행사를 할 때 독려되는 문구로 많이 인용된다. 물론 두 성경에 대한 설교와 연구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런데 이 성경들을 문학적 구조로 분석한 연구는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팔복과 빛과 소금 비유가 들어있는 마 5:3-16을 문학적 구조 관점에서 분석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1. 내용 위주의 해석 방법의 한계

  마 5:3-16은 해석자의 입장에서 보면 만만한 성경이 아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인 단락 나누기부터 난점으로 브레이크가 걸려 진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내용 위주로 마 5:3-16의 단락을 구분해 본다.

  5:3-10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팔복이다. 그런데 5:11-12에 가면 팔복 다음에 또 다른 복이 나온다.  이것은 구복이냐 팔복에 부속된 추가적인 복이냐로 논란이 많은 문제의 아홉번째 복이다.

  그리고 5:13-16은 유명한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비유)이 이어진다. 그러면 해석자는 아홉번째 복 때문에 마 5:3-16을 두 단락으로 나눌 것인지 세 단락으로 나눌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홉번째 복에는 다음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과는 어떤 관계인지 따져봐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아홉번째 복에 핍박당함이 나오고 소금에 대한 말씀에는 관련성이 많은 듯한 변질에 대한 말씀인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 나온다. 그러면 두 단락을 나눌지 하나로 볼지 또 망설이게 된다.

  결국 성경 본문을 내용 위주로 분석하면 단락 나누기의 가능성이 아래와 같이 세 개가 된다.
 
1) 세 개의 다른 단락으로 보는 경우
  5:3-10 - 팔복
  5:11-12 - 구복
  5:13-16 -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비유)
 
2) 팔복 + 구복 /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으로 보는 경우
  5:1-12 - 팔복 + 구복
  5:13-16 -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비유)
 
3) 팔복 / 구복 +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으로 보는 경우
  5:1-10 - 팔복
  5:11-16 - 구복 +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비유)
 
  무엇이 올바른 단락 구분인가? 현대적인 내용 위주 분석 방법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찾아주지 못한다. 모두가 그럴싸하게 보여 헷갈린다.

  이때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성경 연구 방법이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문학적 도구들과 구조들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문학적 구조로 성경을 분석하는 방법은 글의 내용 저변에 있는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구조적인 메시지로 성경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성경 저자는 전하고 싶은 바를 성경에 기록할 때 당시인 누구나 잘 알고 사용했던 문학적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것이 히브리적 평행법과 평행법의 구조들과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과 문법적 도구들이다.

  성경 저자는 이것들을 사용해서 내용의 흐름(plot)을 만들고, 단락들을 만들어 배치하고, 또 여러 주제들을 다양한 대조 형식으로 변화를 주어 수사학적 효과를 만들었다.

   그렇기때문에 이것들을 역이용하면 성경의 모티프와 주제들, 단락의 구성과 변화, 강조점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문학적 신호등과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이것들을 관찰 분석하면 역으로 성경 저자가 문학적 수단들을 이용하여 나타내려 했던 수사학적 목적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구조적 메세지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글은 내용으로 메세지를 나타내지만 글의 구조로도 메세지를 나타낸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1세기 유대 문화는 오늘날 보다 글의 구조에 의지해서 메세지를 나타내려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때로는 구조적인 메세지를 간과하고 글의 내용으로만 성경을 보면 중요한 주제나 중심 내용까지도 오해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성경이 있는데, 마 5:3-16도 그런 성경이다. 

  혹시 내용 중심의 성경 해석이 아니라 구조와 문체 중심의 해석을 하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성경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반 궁금 반으로 본문을 살펴보았다.
 
 

2. 문학적 구조 분석을 통한 단락 구분과 각 단락의 구조적 문체적 특징 파악

  이제 문학적 구조 분석 방법을 사용해서 마 5:3-16의 단락을 나누어 보고, 단락 간의 관계와 관계에서 나오는 구조적 메세지를 찾아본다.
 

  1-1. 팔복과 아홉번째 복의 구조와 문체적 특징

  팔복과 아홉번째 복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서로 구별된 단락인가? 아니면 연관된 하나로 보아야 하는 단락인가?

  이에 대해 많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중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설득력이 강한 설명은 마태가 사용한 문학적 도구들을 살펴보는 방법이다.

  현대인들은 이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만을 보게 된다. 하지만 마태는 글과 함께 여러 가지 문학적 도구들을 사용했고, 이것들이 마태복음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오늘날 학자들은 대부분이 동의한다.

   마태가 사용한 주요 문학적 단서들 몇 가지를 추려보면 이렇다.
 

    1-1-1. 팔복의 현재 시제의 천국 인클루지오(inclusio)

  팔복을 보면 첫 번째 복(5:3)과 여덟번 째 복(5:10)에는 마태가 만들어 놓은 "현재 시제의 천국 인클루지오"가 있다. 이것이 팔복과 아홉 번째 복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선포하시면서 기가 막힌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셨다. 주님께서는 1복과 8복은 현재형으로 "천국이 (지금) 너희들의 것이다"로 말씀하시고, 2-7복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팔복의 현재 시제의 천국이 만든 inclusio이다.

팔복의 1복과 8복의 인클루지오

  이 inclusio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1복과 8복을 연결해서 나머지 2-7복을 비교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팔복 자체를 한 단락으로 인식하도록 해서 그 안에 담긴 예수의 천국에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inclusio를 사용했던 이유였다. 놀라운 것은 팔복에 담긴 예수의 천국은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는 천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이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의 실체로 믿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겐 현재 임하고 누릴 수 있는 천국은 금시초문으로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 유대교의 믿음과 달리 주님의 천국은 미래적 천국을 포함하는 현재 시제의 천국이 인클루지오(inclusio)를 이루어진 모양으로 선포되어, 현재 임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완성을 기대하는 나라로 선포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팔복의 천국은 침노할 수 있는 천국이 된 것이다(마 11:12).

  팔복의 천국에 표현된 현재 시제의 inclusio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는데에 효과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 보면 1복 - 8복을 완벽하게 하나의 문학적 틀(frame)로 감싸버리는 효과를 가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홉번째 복은 팔복의 inclusio에서 벗어나 있다.
 

    1-1-2. 팔복의 "μακαριος + οτι"구문

  팔복을 감싸고 있는 천국의 현재 시제 인클루지오의 문학적 중요성을 알게 되면, 팔복에 표현된 "복이 있나니 + 이는(왜냐하면)" (마카리오스 + 호티, μακαριος + οτι)구문도 팔복과 아홉 번째 복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팔복의 여덟 가지 복들은 모두 “μακαριος + οτι” 구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8개 축복 선언문은 모두 동사가 생략된 μακάριοι οὶ ... 의 주절 + 원인적 접속사 ὅτι의 간결한 종속절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복인 5:11-12에는 다른 형태(μακάριοι ἐστε의 주절 + 조건적 시간 접속사 ὅταν의 긴 종속절)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팔복과 아홉 번째 복은 문형적인 면에서 결집성의 정도가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팔복인 3-10절은 시적 형식으로, 11-12절은 확장된 산문적 형식으로 다른 것이라 평가한다.
 
  더우기 팔복의 시적 형식은 아래 도표로 요약한 것과 같이 그 자체로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여러 개의 문학적 도구들이 겹쳐져 있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복인 11-12절의 확장된 산문적 형식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않다.

  이유 설명문이 1복과 8복이 같고, 2복-7복이 같다. 동사의 태도 2복-4복은 수동태-능동태-수동태이고, 5복-7복도 수동태-능동태-수동태로 같다. 여기에 1복-4복의 낱말 갯수와 5복-8복의 낱말 갯수가 36개로 서로 대칭이 되고, 마지막으로 4복과 8복이 "의" 주제로 서로 된다.

  이것들은 우연히 생길 수 없는 문학적 규칙성이다. 이것들을 보면 1복-4복과 5복-8복이 문학적으로 나누어지고, 그 안에서 1복과 8복이 또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서 팔복은 그 자체로 치밀하게 짜맞추어진 문학적 구조를 다층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복은 팔복에 있는 이러한 구조적 특징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1-1-3. 객관적인 복에서 개인적인 복으로 변화

  마태복음 5장의 팔복과 아홉 번째 복이 구분되는 또 다른 주요 이유를 살펴보면 아홉 번째 복에서 팔복의 주어와 목적어가 바뀐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아홉번째 복을 가장 관련성이 깊은 여덟 번째 복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0절의 "의"가 11절에서 "나(예수)" 바뀌었고, 10절의 "핍박을 받은 자"라는 3인칭의 가상의 행복자가 11절에서는 "너희들"로 2인칭의 실재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팔복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화자와 청자이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복에서는 예수님과 청자들은 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인공들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미 선포된 1복-8복에서 볼 때 아홉 번째 복은 가르침의 내용의 차원과 설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복이 완성되는 조건은 "핍박을 받음"으로 같다. 핍박을 받는 원인은 애매모호하다. 여덟번째 복에서는 "의"가 핍박의 원인이지만 아홉 번째 복에서는 "나(예수)"가 핍박의 원인이다. 주님께서는 의를 자기 자신으로 대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핍박의 원인인 의와 나는 완전히 같지도 않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홉번째 복은 여덟 번째 복과 내용에서는 맥이 통하는 연계적인 복이지만 구조적으로는 구별되는 복이라 판단하는 것이 본문에 입각한 논리적인 분석으로 보인다.
 
 

  1-1-4. 팔복이 예수에게로 적용된 추가적인 복 : 아홉번째 복

  이상의 문학적 문체적 특징들은 팔복과 아홉 번째 복이 의미로는 깊은 연관이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단락으로 보도록 해준다.

  그래서 학자들은 5:11-12의 아홉번째 복은 팔복의 마지막인 여덟 번째 복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로 적용한 “개인화된 복”, “추가적인 복”, "적용된 복"으로 본다.

  예수님께서는 객관적인 복인 팔복을 아홉번째 복에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팔복에서는 말 그대로 복 있는 자의 특성을 객관적인 측면에서 알려주는 것이 가르침의 목적이었는데, 아홉번째 복에서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천국의 유일한 통로인 자기 자신에게 대입해서 예수 앞에 존재하는 팔복의 주인공의 실재 모습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수로 인하여 핍박받음 한 가지로 요약된다는 것이 실로 놀랍고 부담된다.

  결론이다. 주님께서는 팔복을 메인 메세지로 참된 천국의 행복자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연이어 아홉 번 째 복으로 천국의 행복자를 예수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요약되는지를 알려주셨다.

  그는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이다. 이렇게 팔복은 원리로 아홉 번째 복은 적용으로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두 단락의 문학적 구조는 명백하게 다르다. 그래서 팔복과 아홉 번째 복은 다음과 같이 구조화할 수 있다.
 
  팔복 : 참된 천국의 행복자(5:3-10)
  팔복의 적용 :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제자들(5:11-12)
 
  팔복 주제가 "천국의 복"에서 갑자기 "핍박" 주제로 바뀐 것은 독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급박한 주제의 변화라 거부감이 들 정도다. 복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핍박은 괴롭고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천국의 팔복이라는 최상의 좋은 것이 갑자기 아홉 번째 복에서 핍박 받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바꾼 예수님의 의도가 진짜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팔복이 아홉번째 복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에게 주는 구조적인 메세지의 아웃 라인이다.
 
 

  1-2. 아홉번째 복과 소금에 대한 말씀의 구조와 문체적 특징

  그러면 아홉 번째 복과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진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아마 이 질문은 너무나 뻔해서 묻기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전통적인 성경 해석은 두 단락을 다른 단락으로 이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아홉번째 복에 대한 말씀을 마치고 다른 주제인 소금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아홉번째 복은 예수로 인해 비롯되는 핍박이 주제이지만 소금에 대한 말씀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부패를 막으라는 명령 또는 권고로 이해된다. 그래서 두 단락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우리가 배워온 이해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2-1. 소금에 대한 말씀(5:13)의 참 주제?

  소금에 대한 말씀은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성경 말씀이지만 가장 많이 오해된 성경 말씀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 모두가 소금에 대한 말씀을 "소금과 같이 돼라"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거나 "소금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권고로 이해해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교회)의 사명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소금의 부패 방지나 맛 냄 등을 연결해서 사명의 교훈을 찾는다.

   이해의 차원은 약간 다르지만 이와 같은 이해는 소금과 같이 되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는 한 가지로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성경 본문을 본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 소금에 대한 비유는 13절 한절이 전부이다. 마태복음에 5:13외에 소금의 비유의 이해를 위해 추가된 성경은 없다. 이 사실을 기본 전제로 본문을 구조적인 관점에서 분해해 보면, 소금 비유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비유의 명제가 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이고 그 다음에는 소금에 대한 설명으로 추가된 조건문인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이다.

  이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5:13a 소금 비유의 명제
  5:13b 제자들이 소금으로 비유된 조건적 설명
 
  5:13a는 문학적인 구조가 없는 하나의 문장으로 "너희"로 표현된 제자들을 빗대어 표현한 비유적 명제이다.  

  5:13a 이하는 동의적 평행법으로 구조화된 하나의 단락이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이런 모양이다.
 
  13a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니
  a) 13 b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b) 13c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a') 13d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b') 13e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동의적 평행법의 a-a'는 원인이고 b-b'는 결과로 서로 상응한다.

  a와 a'는 소금이 맛을 잃을 경우에 일어날 두 가지 일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의도를 알려주는 조건문이다.

  b와 b'는 소금이 맛을 잃음으로 발생할 두 가지 결과로 소금 비유의 결론이라 말할 수 있다.

  a와 b는 소금이 맛을 잃어버림으로 벌어질 첫 번째 사건이고, a'와 b'는 소금이 맛을 상실하여 쓸모없어졌을 때 일어날 후속적인 사건이다.
 
  2) 이 구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금 비유는 13a와 13b-13e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이외에 소금 비유에 대한 다른 말씀은 없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해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으로 비유하신 말씀(13a)과 13b-e의 동의적 평행법으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이유를 설명한 말씀 두 가지뿐이다.

   이는 13b-e는 소금으로 비유된 제자들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제자들을 소금으로 비유한 13a의 명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는 추가적인 해설이 없으면 무슨 의미인지 확정할 수 없는 의미가 모호한 구절이다. 이 명제에는 우리가 "소금은 이것이다"라고 권고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해석적 단서가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시면서 명령도 권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를 통해서 주님께서 어떤 명령했다 보거나 권면했다 보는 것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우리의 해석을 가미한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을 묵상하는 것도 성경 본문에는 없는 우리의 해석의 소산물을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금 하면 부패방지, 맛을 냄 등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인식의 경향이다. 물론 다른 인식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들 중에는 소금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저절로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누구의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 문제는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없는 우리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1-2-2. 주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한 이유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13b-e에 나오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으로 제시된 부정적 조건문이다.

   이 부분을 현대적인 정리 방법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A. 비유적 명제(13a): (강조된 "너희"로 시작)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B. 비유적 명제의 설명
  B1. 상실에 대한 가정(13b): "만일 맛을 잃으면"
  B2. 상실의 결과(13c-e)
        회복 불가능(13c):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
        회복 불가능의 결과 폐기처분(13d): "밖에 버리워"
        폐기처분의 결과 저주 받음 또는 비참한 상태 (13e):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위 정리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이유가 명백하게 보인다. 그것은 "만일 맛을 잃으면"으로 표현된 맛을 잃음, 제자들의 변질에 대해 경고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특징을 상실할 경우 당하게 될 결과인 저주 받음 또는 비참한 상태를 삼단계의 "점층적 하강법"(anticlimatic feature)으로 표현해서 경고의 엄중함을 강조하셨다. 회복 불가능(13c) => 폐기처분(13d) => 저주 받음 또는 비참한 상태.

  소금의 비유의 올바른 메시지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지 마라"이다. 이리 본다면 소금에 대한 말씀을 "세상의 소금이 돼라"라 이해하는 것은 "맛을 잃고 변질되어라"라 이해하는 것으로 성경 말씀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소금에 대한 비유를 문체의 구조를 통해 살펴보면 아주 간단하게 비유를 해석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외에 다른 해석은 성경에는 없는 우리의 생각일 따름이다.
 

    1-2-3. 소금 비유와 빛 비유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표현들

   확정적인 의미가 없는 "너희는 소금이다"라는 명제를 부패방지나 맛을 더해줌 같은 해석으로 몰아간 원인은 성경 본문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간과하고 우리의 무의식적인 선입관에 따른 것에만 있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번역된 성경 본문에도 있다.
 
  1)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세상의 소금"이라는 표현이다.
  거두절미하고 이 표현은 직역이 아니라 의역으로 번역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 공정한 이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세상"의 원문은 "땅"(γη)으로 직역하면 "땅의 소금"(αλας της γης)이다. 이에 비해 14절의 "세상의 빛"에서 "세상"은 "κοσμος"로 서로 다른 단어이다. 굳이 의미로 본다면 "κοσμος"가 세상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표현하면 당연히 세상을 향한 소금과 같은 행동이나 자세, 태도, 성질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제자들을 "땅의 소금"이라 하면 이해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땅의 소금은 땅에서 나는 소금인 "암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훨씬 용이한 표현이다. 그리고 암염은 화학적인 변화인 맛의 상실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참고로, 예전에 고대 근동에 대한 고고학적 지식이 부족했을 때 교회는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다는 예수님의 가정은 불가능을 상정한 가정이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오리려 강한 긍정이라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을 향한(위한) 소금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실제로 맛이 사라지는 소금을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대 근동의 문화와 지리를 연구한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 상황에서는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흔했던 일이라 말한다.

   예수님 시대의 소금은 지금처럼 음식에 넣을 수 있게 정제된 소금이 아니라 사해 주변에서 나는 "소금 돌" 곧 "땅의 소금"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여인들은 시장에서 소금 돌을 사 와 밤새도록 물에 담가 두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소금이 우러나와서 짠물이 되고, 여인들은 그 짠물을 빵 반죽이나 요리에 넣어 사용했다.

  이렇게 며칠을 우려내고 나면 소금 돌은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린 돌멩이가 되고 만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이렇게 소금기가 완전히 빠진 소금 돌은 아무 쓸 데가 없으니까 밖에 버려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돌을 밟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짠맛을 잃은 소금은 바로 이 "땅의 소금"(αλας της γης)을 말한다는 설명은 성경 본문은 물론 예수님 당시 문화적 배경과 잘 어울리는 해석이라 가치가 있다. 
 

  2) 소금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두 번째 요인으로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의문문에 대한 해석도 큰 몫을 차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의 대상은 음식이 아니라 소금 자신이다.

  소금이 짜게 하지 못하는 것이 음식이라고 이해하면, 너희는 소금이라는 말은 제자들을 세상을 짜게 하는 일을 하는 존재라 이해하도록 부추기는 작용을 한다. 그러면 이것은 자연스럽게 부패 방지로 연결되어 부패를 방지하는 의미의 소금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소금이다라 하신 말씀의 뜻으로 일반화된다. 그러나 소금이 짜게하는 것이 소금 자신이라면 이해가 180도 달라진다.
 
  가장 쉽게 이 부분에 대한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NIV는 이 질문을 이렇게 번역했다.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맛을 잃은 소금을 다시 짜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번역이 올바른 것은 병행 본문인 눅 14:34을 보면 확증된다. 눅 14:34은 주어인 소금에 "και το αλας"를 사용해서 주어인 소금을 강조했다. 이를 우리말 성경은 "소금이"가 아니라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 번역했다 생각된다. 하지만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다. 이 표현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맛을 회복시킬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한 것은 제자들이 맛을 잃어버리는 변질에 이르면 다시 회복시킬 방법이 없다는 선언을 하신 것으로 제자들의 변질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만드는지를 강조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항들을 종합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 선언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맛을 잃음에 대한 경고, 달리 표현하면 변질에 대한 경고와 심판 선언이 주제요 내용의 전부이다.
 
  3) 소금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아홉 번째 복과 연결해 보면 "핍박받는 예수의 제자"와 "제자의 변질에 대한 경고"로 문맥이 이어진다.
  "핍박받는 예수의 제자"와 "제자의 변질"은 바람직한 주제는 아니지만 분명히 연결될 수 있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두 단락은 문맥이 완전히 단절된 단락이 아니다. 제자의 변질을 경고하는 것으로 핍박받는 제자의 모습을 더욱더 강화하는 것이 아홉 번째 복에 연이어 소금에 대한 비유를 준 예수님의 전략으로 보인다.
 
 

  1-3. 빛에 대한 말씀의 구조와 문체적 특징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신 후 빛으로 비유하셨다. 이것은 내용으로 보면 간단하게 보이는 두 절이다. 하지만 히브리인의 문학적 방법의 관점에서 소금에 대한 비유와 대조하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문학적 구조와 성경 구절의 배치 방법들이 있다.
 

    1-3-1. 빛의 말씀에 사용된 문학적 구조와 문학적 기법들

  1) 빛에 대한 말씀은 소금에 대한 말씀과 동일한 2인칭 복수 "Ὑμεῖς"(휘메이스)가 주어로 강조된 비유의 명제로 시작한다. 

  비유의 두 명제 문장(5:13a와 5:14a)을 대조해 보면 두 개의 강조된 주어인 "너희는(Ὑμεῖς)"과 동사인 "이다(ἐστε)"는 A//A'와 B//B'서로 병행을 이루고, 나머지 문장은 혼합된 평행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비유의 제목과 같은 명제 문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조직되었다는 말이다.

소금의 말씀과 빛의 말씀의 명제 부분의 혼합 평행 구조

 
  2) 또한 빛에 대한 말씀을 내용에 따라 분석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소금에 대한 말씀과 동일한 형태를 가졌다.
 
A. 비유적 명제(14a) : (강조된 너희로 시작)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B. 비유적 명제의 설명
  B1. 빛의 은닉의 불가능성 설명1, 속담(14b) : 산 위에 세운 동네가 숨길 수 없다
  B2. 빛의 은닉의 불가능성 설명2, 속담(15)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취느니라
C. 명령(16a) :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라
  명령 정의(16b): 너희 착한 행실 보게 하라
  명령의 목적(16b):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구조는 "비유적 명제 + 비유적 명제의 설명"으로 소금에 대한 말씀의 구조와 같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는 C의 명령을 추가하셨다.

  두 비유의 명제가 서로 혼합된 평행법을 만들고, 비유를 설명하는 부분의 논리 구조가 같다는 사실은 두 비유가 마태의 세밀한 구성 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하게 만든다. 
 

  3) 하지만 성경 본문을 더 자세히 관찰하면 이것이 추측이 아니라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는 소금의 말씀과 빛의 말씀에 대한 병행 본문들을 대조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에 실린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마태가 평지 설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가상의 어록집(Q라고 부른다)에 있는 다른 소금과 빛에 관한 병행구 말씀들과 속담들을 모으고, 자기만의 특수 자료를 첨가해서 완성한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동의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마 5:11-16을 병행 구절들과 대조를 하면 마태가 두 비유의 구조적 일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4장과 마가복음 4장을 보면 마태복음의 소금에 대한 말씀과 빛에 대한 말씀과 병행되는 말씀들이 나온다. 이 말씀들과 마 5:11-16을 비교하면 병행이 없는 구절들은 모두 다 마태만의 특수자료가 배치되어 있는데 배치된 자리가 의미심장하다.

  마태의 특수 자료는 소금에 관한 말씀과 빛에 관한 말씀의 각각 처음과 마지막에 집중되어있다.

   마태는 다른 병행 구절에는 없는 비유의 명제를 앞에서 살펴본 평행법이 되는 자리(13a와 14a)에 배치하고 병행되는 말씀들을 이용해서 명제에 대한 두 마디의 해설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특수 자료 두 개(13d와 16)를 다시 배치했는데 소금에 대한 말씀인 13d절은 경고에 대한 마지막 설명이지만 빛에 대한 말씀의 마지막인 16절은 14a절과 다르게 명령문으로 비유를 마무리했다.
 
  4) 이것만이 아니다. 세상의 빛 말씀은 비유 명제를 제외하고 빛의 은닉의 불가능성에 대한 설명과 이에 대한 명령을 보면 a, b, c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는 동의적 평행법을 이루고 있다.
 
14a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a) 14b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b) 15a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c) 15b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a') 16a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b') 16c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c')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a-b-c는 빛에 대한 속담을 인용해서 빛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이다. 빛을 숨기고(a) 등불을 말과 같은 그릇으로 덮는 사람은 없다(b). 빛의 용도는 등경 위에 두어(b) 집안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c).

  a'-b'-c'는 빛에 대한 속담과 동일한 구조를 사용해서 빛과 같은 제자들의 특성을 명령으로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빛과 같은 제자들은 제자들의 빛인(a') 착한 행실을 세상이 보게 하여(b')(b')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c').

  그리고 a와 a', b와 b', c와 c'는 서로 상응한다. a와 a'는 동네(세상)가 제자들을 감추고, 제자들이 빛을 사람(세상)에 비추는 것으로 반의적으로 상응한다.

  b와 b'는 사람이 등불이 빛을 잘 비추도록 등경 위에 두는 행동과 제자들이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인과적으로 상응한다.

  c와 c'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과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제자들을 통해 나타나는 긍정적인 결과로 상응한다. 
 
  4) 이런 방식으로 소금의 말씀과 빛의 말씀에는 다층적인 문학적 구조들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소금의 말씀과 빛의 말씀은 구조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평행법으로 얽혀서 구조적으로 보면 마치 쌍동이 비유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두 번째, 하지만 두 말씀은 내용이 다르다. 소금의 말씀과 빛의 말씀이 강조하는 주제는 분명히 다르다.

  세 번째로, 빛의 말씀에는 소금의 말씀에는 없는 16절의 명령이 추가되었고, 이것이 크게 강조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16절의 명령은 빛의 말씀의 해설과 분량이 비슷할 정도로 강조되어 있고, 명령 자체가 동의적 평행법의 한 짝으로 이루어져 구조적으로 보아도 더 많이 강조가 되었다.

   이것은 빛에 대한 말씀은 빛에 대한 설명보다 빛에 대한 말씀을 적용한 명령에 중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을 명령으로 장식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빛에 대한 말씀에서는 비유의 명제를 설명하는 두 가지 설명에다 설명과 같은 구조의 명령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해석적 힌트를 시사해준다. 그것은 팔복이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의 구조로 이루어진 것과 비슷하게 두 비유도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빛에 대한 말씀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마태가 만들어 놓은 빛의 말씀과 소금의 말씀의 일치된 구조는 세상의 소금과 빛인 제자들이 제자 됨을 감당하지 못하면 종말적인 파국을 맞게 되지만 제자됨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그림같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1-3-2. 주님께서 제자들을 빛에 비유한 이유

  1) 동의적 평행법을 살펴보면 제자를 빛으로 비유한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아쉽지만 빛에 대한 말씀도 소금에 대한 말씀과 같이 성경 본문에 없는 우리 맘대로 부여한 의미로 해석되어 유명해진 말씀이다. 이 말씀도 "빛이 되자"라는 권면과 "빛이 되어야만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라 설교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 본문이 말하는 제자의 빛과 같음은 "은닉의 불가능" 또는 "필연적인 드러남"에 있다. "은닉의 불가능"은 a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에 나타나고, "필연적인 드러남"은 b, c에서 두 차례 설명되고, a', b', c'에서는 명령으로 세 번이나 강조되었다.
 
  a는 세상을 의미하는 "도시(동네)"가 빛(등불)과 같은 제자들을 감출 수 없다 설명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등불을 말(μοδιος) 아래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b).

   말(μοδιος)은 예수님 시대 도량형 단위를 측정하는 도구로 우리식으로 보면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됫박 같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병행 본문인 눅 8:16을 보면 "그릇으로 덮다", 막 4:21을 보면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다"로 나온다. 이 설명은 사람들이 빛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빛을 밝히 비추도록 드러나는 곳에 두는 일상적인 행동에서 유추된 속담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비유한 빛은 "은닉의 불가능성"과 "필연적인 드러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빛으로 비유하신 유일한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빛을 "그리스도의 빛"이나 "복음의 빛"이라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한 걸음 멀어진 해석이다. 은혜로운 설명이라 생각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이라 주장하려면 성경 본문에 없는 근거를 대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제자들은 빛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그 존재의 빛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두 차원에서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16c의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는 "저희"로 대변되는 세상이고, 제자들의 착한 행실로 영광을 받는 하늘 아버지시다.
 

  2) 이런 논지는 한 가지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 "착한 행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쉽게도 예수님께서는 착한 행실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착한 행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3) 이상의 관찰 사항들을 종합해서 아홉 번째 복에 대한 말씀으로 부터 소금에 대한 말씀, 그리고 빛에 대한 말씀이 나타내는 각각의 주제를 연결해본다. 그러면 세 개의 단락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문맥의 흐름(plot)이 눈에 보인다.

  가장 먼저, 주님께서는 아홉번째 복에 대한 말씀으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참 행복자는 예수로 인해 핍박 받음을 즐거워하는 자라 알려주셨다.

  이를 뒤따르는 소금에 대한 비유는 제자들의 변질에 대한 경고가 주제이다. 변질된 제자는 다시 회복될 수 없어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제자의 변질은 분명히 아홉 번째 복에 나오는 예수를 위해 받게 되는 핍박을 천국의 복으로 즐거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두 가르침으로 제자들의 마음에는 천국의 복과 현실적인 핍박 사이의 갈등, 긴장감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자연히 핍박을 피하여 숨고, 자신을 감추는 행동을 바라보게 된다. 이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숨고 자신을 감추는 것에 대한 경고를 주셨다. 이것이 이어지는 빛에 대한 말씀과 소금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은 세상에 의해 은닉될 수 없고 그 존재가 필연적으로 밝히 드러나 자신의 빛을 세상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드러내는 자라 강조하셨다.

  만약에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그는 맛을 상실한 소금과 같이 변질된 자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예수의 제자는 그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명령으로 비유는 마감되었다.

  이러한 예수 제자들의 존재적 특징은 결국 순환적인 교훈으로 우리 맘에 남게 된다. 세상이 감출 수 없고 반대로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예수의 제자 됨은 결국 세상의 핍박에 노출되어 핍박받는 제자들로 다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순환은 제자들이 변질되지 않는 한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복된 제자들의 삶이다. 이것이 마 5:11-16 전체를 총괄한 메세지로 보인다.
 
 

2. 마 5:3-16의 전체 구조와 분석

  앞의 단락별 분석과 해설을 통해서 각 단락의 문학적 구조를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모아 보면 마 5:11-16 전체의 문학적 구조가 완성된다.

   하지만 이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각 단락의 문학적 구조들은 거시적 구조를 이루는 미시적 구조들이다. 미시적 구조들이 모여서 거시적 구조를 만들지만 그냥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미시적 구조들이 평행법적 관계를 만들어 결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거시적 구조를 만들 때는 미시적 구조들을 그저 모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구조들이 평행법에서 어떤 관계의 짝을 이루는가를 확인한 후 결합해야만 한다.
 
  이 작업은 미시적 구조들이 많고, 미시적 구조들의 관계과 단순히 동등한 차원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1차 미시적 구조, 2차 미시적 구조와 같이 다층적인 상부와 하부의 관계로 결합되는 경우에는 각 미시적 구조를 결합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2-1.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고려사항

  앞의 연구를 동해서 마 5:3-16을 네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네 개의 미시적 구조가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팔복
  아홉번째 복
  소금에 대한 비유
  빛에 대한 비유
 
  미시적 구조의 숫자가 적고 모두가 동등한 차원에서 상응하기 때문에 구조의 완성이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제 네 개의 미시적 구조를 모아서 종합하면 거시적 구조가 완성된다. 그러면 어떤 모양으로 문학적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 마태의 수사학적 의도에 맞는 분석일까? 위 네개의 단락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진 것으로 마태는 구조화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앞에서 구조를 분석하다 발견한 마 5:3-16의 구조적 특징인 팔복이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구조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두 비유도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초강추한다.

  그렇다면 마 5:3-16의 전체 구조는 A-B-'A-B'의 동의적 평행법이 된다.
 
  이렇게 구조를 구성하려는 것은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구조와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 구조에는 서로 상응하는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1) 가장 먼저, 팔복과 아홉번째 복이 소금에 대한 비유와 빛에 대한 비유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두 부분은 내용과 구조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팔복과 아홉번째 복은 구조는 다른데 내용에 연속성이 있다. 이와 반대로 소금에 대한 비유와 빛에 대한 비유는 내용은 다른데 구조가 같아 연속성이 있다.

   이와 반면에 팔복 또는 아홉번째 복과 두 비유는 내용과 구조에서 연관성을 찾을만한 것이 발견되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락별 연관성을 팔복과 아홉번째 복, 소금에 대한 비유와 빛에 대한 비유에서 찾는 것이 마태의 의도에 맞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각 단락을 분석하다 발견한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구조와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은 팔복 자체의 단단하게 구성된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추가적 복이고, 마지막 비유의 적용도 두 비유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추가적인 명령이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제시된 적용 부분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되는 마태의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보았다. 이런 이유로 마태의 의도를 따라 문학적 구조를 하려는 우리들은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구조와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 구조를 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 되버린다.
 

  2) 두 번째로 두 부분의 추가적인 적용에는 모두 결론적인 명령이 있다.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5:12)라는 명령문으로 마무리되고, 마지막 비유의 적용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라는 명령문으로 마무리된다. 
 
  3) 게다가 두 개의 추가적인 적용에 사용된 명령들을 비교해 보면 문학적 도치 구조가 보인다는 것이 아홉번째복의 명령과 두 비유의 명령이 따로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해서 구조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면 두 개의 추가적인 적용의 가치는 더 커진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홉 번째 복의 명령문의 "하늘의 상"과 빛의 말씀의 명령문의 "하늘 아버지께 영광"이 주제로 대조되고, 이 주제는 주제의 진행 방향이 하늘의 상은 "하나님 => 제자들"로, 하늘 아버지께 영광은 "제자들 => 하나님"으로 진행되는 도치 구조를 만든다.
 
  추가적인 두 부분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 사항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것은 팔복이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의 구조로 이루어진 것과 비슷하게 두 비유도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빛에 대한 말씀의 명령)"의 구조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 5:3-16의 전체 구조는 "팔복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구조와 "두 비유 + 마지막 비유의 적용(빛에 대한 말씀의 명령)" 구조가 결합되어서 만들어지는 A-B-'A-B'의 평행법이 된다.

  이것이 미시적인 구조들을 모아서 거시적인 구조를 완성할 때 반드시 고려 해야만 하는 주의사항이다. 구조 분석의 범위가 달라지면 해당 단락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평행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래서 문학적 구조가 드러내는 구조적 메시지의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다.
 
 

2-2. 마 5:3-16의 전체 구조

  드디어 마 5:3-16의 전체 구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마 5:3-16는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이다.
 
A. 팔복(5:3-10)
 
  B. 아홉 번째 복 : 팔복의 적용 – 예수를 위해 핍박 받음과 하늘의 상(5:11-12)
  a) 11a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b) 11b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b') 12a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a') 12b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A. 제자들에 대한 두 비유 : 팔복자에 대한 경고와 명령(5:13-15)
a. 땅의 소금 : 변질에 대한 경고
13a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니
a) 13b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b) 13c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a') 13d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b') 13e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a'. 세상의 빛 : 은닉의 불가능
14a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a) 14b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b) 15a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c) 15b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B'. 비유의 적용적 결론(5:13-16)
a') 16a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b') 16b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c') 16c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마 5:3-16은 "팔복 + 적용"과 "두 비유 + 적용"이라는 구조로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말씀이다.

  팔복은 예수로 인해 도래한 하늘나라에 합당한 참 행복자를 정의한 부분이고, 두 비유는 팔복이 정의한 참 행복자가 예수의 제자로서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두 가지 특징을 설명한 부분이다.

  마태는 두 개의 메인 메시지를 명령이 삽입된 추가적인 설명과 조합해서 하나의 문학적 구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문학적 구조로 도식화하면 이렇게 표시할 수 있다.
 
  A. 팔복
    B. + 팔복의 적용(아홉 번째 복)
  A'. 두 비유
    B'. + 마지막 비유의 적용(빛에 대한 말씀의 명령)
 
  2) 대조를 이루는 A과 A'는 두 개의 메인 메시지이다.
  A의 주인공은 3인칭으로 묘사된 행복자로 천국을 현재 소유했고 미래에 소유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A'의 주인공은 3인칭으로 묘사된 행복자들이 예수로 인해 현실적으로 정의되는 2인칭의 "너희들" 곧 제자들이다.

  그중 천국의 주인공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A'에서 두 가지 특징으로 비유되었다. a에서는 "땅의 소금"으로 변질의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 a'에서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으로부터 은닉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자신의 빛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3) B와 B'는 "하늘의 상"과 "하늘 아버지께 영광"으로 대조를 이루는 짝을 이룬다.
  하늘의 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참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복이다. 하늘 아버지께 영광은 세상의 빛 된 예수의 참 제자들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착한 행실로 제자됨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두 단락은 하나님과 제자 사이의 궁극적인 실체가 B에서는 "하나님 => 제자들"로 진행되다 B'에서는 "제자들=> 하나님"으로 진행되는 흐름의 도치를 만드는 구조가 된다.

   이 도치 구조는 문맥의 흐름이 완전하게 종결되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구조적으로 인클루지오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 구조가 완성된 느낌을 준다.
 
  4) 또한 이 구조는 B가 강조하는 핍박 주제와 B'가 강조하는 빛 주제로 내용이 보다 풍부해진다.
  하늘의 상은 핍박과 함께 있고,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영광은 제자들의 빛과 함께 있다. 두 주제가 평행법의 짝으로 대조되면 제자들이 받을 핍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빛과 등가로 이해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면 B'의 "착한 행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B가 강조하는 "예수를 위해 핍박 받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마태는 동의적 평행법의 짝인 B와 B'를 통해서 제자의 변질에 대해 경고하고 세상으로부터 은닉될 수 없음을 명령하려는 것이 마 5:1-16의 메시지의 결론이라 볼 수 있다.
 

  5) 이것으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한다.
  먼저는 제자의 변질을 A와 A'에 대한 변질로 보도록 해준다. 예수를 위해 핍박 받음을 하늘의 복(A)으로 여기지 않거나 빛과 착한 행실을 세상에 보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A')을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예수의 제자에서 맛을 상실한 소금이 돼버린 자가 된 것이다.

  마태가 이 가르침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병행 본문 대조표를 다시 보면 알 수 있다. 마 5:11-16을 병행 구절들과 대조를 해보면 마태가 어디에서 무엇을 강조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태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인 자신의 특수 자료를 소금에 관한 말씀과 빛에 관한 말씀 각각의 처음과 마지막에 집중되게 사용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다르게 소금과 빛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과 같다는 비유적 명제와 제자들이 제자 됨을 감당하지 못하면 종말적인 파국을 맞게 되지만 제자됨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설명을 강조하려 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런 마태의 저작 경향은 소금에 대한 말씀과 빛에 대한 말씀을 팔복과 아홉번째 복에 대한 말씀을 동의적 평행법의 대칭이 되는 자리에 배치하는 방법으로 표현되었다고 판단된다.
 
  두 번째로 마 5:11-16은 제자도와 구원론이 결합된 형태로 마태복음에 제시된 처음 성경 본문이 된다.

  우리는 흔히 천국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구원론과만 연결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천국에 대한 가르침에 구원론은 물론 제자도가 함께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회는 제자도를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제자들의 삶이라 이해해서 제자도를 구원과 연관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마태는 제자도와 구원을 연결한 말씀을 많이 소개해주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경고의 불을 밝혀주는 주의사항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돼라"고 말씀하지 않았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빛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빛을 나타내려 하는 자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땅의 소금이다. 제자들에게는 누구나 맛을 상실하는 변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변질의 가능성을 간과하면 밖에 버리워지는 종말론적 참상을 맞이하게 된다.

  존재가 빛과 같으므로 빛을 발하는 삶과 변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소금과 같으므로 변질에 대한 경고에 순종해야 하는 제자의 두 가지 모습은 이미 얻은 구원(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과 변질의 가능성 사이에서 긴장하는 제자도로 표출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마 5:3-16에 대한 문학적 구조는 마태복음 5-7장을 망라하는 산상수(보)훈의 전체 구조를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데에 기여를 한다.

 
  본 연구는 마 5:3-16을 "팔복 + 적용"과 "두 비유 + 적용"이라는 동의적 평행법 구조로 분석하고 거시적 구조를 위한 한 단락으로 구분했다.

  이 분석은 산상수훈 전체인 5-7장에서 보면 마 5:3-16(B)이 본론의 마지막 단락인 7:13-27(B')과 대조가 되는 짝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7:13-27의 내용이 참으로 예수로 인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군가를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이에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마 5:3-16과 같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위 도표와 같이 마 5:3-16은 "서론적 강화"로 7:13-27은 "결론적 강화"로 서로 대조되어 교차대조법에서 하나의 레이아웃을 만들어낸다.  
 
 
 

3. 마무리

  우리는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성경 해석이 필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성경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을 누구나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도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해석해주는 사람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의 성격을 오해하는 경우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성경을 설명하고 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행위를 성경 해석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 자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해석이란 성경 저자의, 또는 성경의 저자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가르침 바로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성경 저자의 가르침 만이 남도록 하는 일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 해석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손바닥의 양면과 같은 필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찾아내는 것과 성경 본문의 의미를 찾을 때 해석자의 인간적인 해석을 배제하는 것이다.

  성경해석을 위해 해석자의 기발한 발상이나 은혜로운 풀이는 전혀 필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에 대한 말씀과 빛에 대한 말씀은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오랫동안 피해를 보았던 성경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성경 말씀이라 믿는 것은 어찌 보면 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두렵고 떨린 썩소이다.

   “소금은 세상의 악을 막고 세상의 존재 의미를 보존하는 방부제 역할에 대한 비유이다. 빛은 세상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선도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알려주신 비유이다.”

  이것은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목회도움지에 실린 어떤 신학자의 소금과 빛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좋은 말이지만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고자했던 변질에 대한 경고와 세상에 파묻혀 은닉할 수 없음은 없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가르침에서는 두세 발걸음 물러난 것이다. 소금에 대한 말씀은 세상의 부패를 막고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이 만들라는 말씀이 아니라 정반대로 제자의 변질을 경고하고 변질될 경우 나타날 되돌릴 수 없는 종말적 파국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빛에 대한 말씀은 복음의 빛, 예수의 빛을 어두움의 세상을 향해 드러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소금의 말씀에서 경고된 변질 되어서는 안 되는 제자 됨은 은닉이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제자적 숙명이라 강조하는 말씀이다.

  소금의 말씀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함께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팔복이 예수님과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아홉 번째 복이 될 때 핍박에 대한 말씀 하나로 요약된 것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팔복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중을 메웠던 제자들을 향한 마음이었다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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