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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마 18:21-35)

by 예다준 2022. 10. 21.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마 18:21-35)

 

 

 

  필자는 개인적으로 계 21:3-4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설명을 아주 좋아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성경을 보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천국에 대한 설명 하나하나가 현재 내 눈앞에 있는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진 모습이기 때문에 마음에 큰 위로가 되고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다. 사도 요한은 천국을 이런 식으로 많이 설명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셨다. 그것은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서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이러니 이런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반대로 이렇지 않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설명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천국의 주인이므로 이 설명 방법은 설득력이 아주 강한 직설적인 가르침이다.

 

  흔히 성품은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다. 어떤 성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관계를 통해서 그 성품이 나타나는가를 보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은 죄인된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주님께서는 죄인된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 곧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셨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연구의 본문인 용서할줄 모르는 종의 비유이다(18:21-35).

 

용서할줄 모르는 종 비유에 대한 삽화
용서할줄 모르는 종 비유에 대한 삽화, 출처=구글 이미지

 

  성경 해석 연습에서는 이 비유에 대해 전체 구조 분석을 위해 필요한 부분만 언급했다. 그래서 보충으로 상세 구조 분석과 간단한 해설을 첨가해본다.

 

 

1.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구조를 통해서 읽기

  얼마 전에 해병대에 입대한 막내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말에 한 번 5분 동안만 허락된 전화가 얼마나 애절하고 소중하던지 우리 식구는 훈련 중인 아들의 전화를 일주일 내내 기다렸다. 첫 번째 통화를 하고 난 후 두 번째 통화를 할 때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사용했다. 짧고 순간적인 통화가 아쉬웠기에 더 오래 더 분명하게 통화 내용과 아들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비유가 적절치는 않지만 성경의 문학적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문학적 도구들은 핸드폰의 녹음 기능과 같은 1세기 유대인들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당시는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도구의 대부분이 사람의 기억에 의존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음성 정보를 효과적으로 기억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그것이 그림 같은 구조를 가진 평행법과 기타 문학적 도구들을 통해 말을 하는 방법이다.

 

  현대인은 이런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글이나 말을 내용 위주로 표현한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인들은 내용보다 문학적 구조에 의존해서 의사를 표현했고, 어떤 성경은 문학적 구조를 모르고 내용만 보면 쉽게 오해할 수 있게 기록된 것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성경 저자 중심으로, 문학적 구조를 중심으로 보는 방법은 아주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1-1.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의 전체 상세 구조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이해하기 쉽게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내용 중심의 순차적 분석을 먼저 시도해본다.

 

  1. 도입 : 형제 용서에 대한 질문과 대답(18:21-22)

  2.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18:23-34)

    도입(18:23)

    장면 1(18:24-27) : 임금이 첫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줌

    장면 2(18:28-30) :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음

    장면 3(18:31-34) : 첫 번째 종이 임금에게서 처벌을 받음

  3. 마무리 : 결론(18:35)

 

  1) 18:21-22의 도입은 베드로의 형제 용서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이 대답이다.

  베드로의 질문은 형제를 용서하는 횟수였다(“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제시한 횟수의 제한을 파괴하는 무제한적 용서를 답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신의 대답을 보완하기 위해 비유를 주셨다. 이것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이다.

 

  2) 본문인 비유는 4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는 비유의 설정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도입이다. 도입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비유는 천국 비유인데, 특히 종들을 회계하는 임금과 같은 천국이다.

 

  그리고 비유는 3개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먼저는 임금이 첫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주는 장면이고,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는 장면이다. 세 번째 장면은 동료들의 고발로 첫 번째 종이 받은 용서가 취소되고 임금에게서 처벌을 받는 장면이다.

 

  3) 그리고 결론인 마무리로 비유는 끝난다.

 

  4) 현대적인 내용 중심의 순차적 분석으로 우리는 비유에 대해 대략 이 정도의 분석을 할 수 있다.

  이 분석은 전체 내용을 간단하지만 빠짐없이 꼼꼼히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양호하고, 마치 전개도를 보듯이 비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 또는 비유에 담긴 비유의 흐름과 전개의 강약은 보여주지 못한다.

  이는 마치 사진 한 장으로 푸른 들판을 보는 것과 같다. 사진 한 장은 아름답고 푸르른 들판을 한 눈에 보여준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은 현장에 있는 들판의 풀들과 꽃들, 그리고 풀과 꽃을 휘감고 도는 바람, 바람을 따라 다가오는 검은 구름 등과 같은 세세한 동작들과 들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황과 분위기 등은 보여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수십 장 수백 장의 사진들이 모인 동영상으로 가능한데, 성경에서 동영상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성경 저자가 다양한 주제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문학적 구조와 도구들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18:21-35를 전체 문학적 구조로 분석해 본다.

 

  18:21-35은 본문인 비유를 중심으로 하는 A-X-A 대조법이다. 비유 본문인 18:23-34은 세 개의 장면이 시간적 또는 논리적 순서로 진술된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개의 단락에는 모두 각각의 문학적 구조들을 가지고 있다.

 

A. 도입 : 형제 용서에 대한 질문과 대답(18:21-22)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a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a. 22b 일곱 번뿐 아니라

    b. 22c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X.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18:23-34)

  도입

  18:23 이러므로 천국은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장면 1(18:24-27)

  a.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b. 25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c.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d. 27

         a) 27a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b) 27b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장면 2(18:28-30)

  a'. 28a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b'. 28b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c'.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하되

         d'. 30

         a') 30a 허락하지 아니하고

           b') 30b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장면 3(18:31-34)

  a.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x. 32-33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

       a) 32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x) 33a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a') 33b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a'.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A'. 마무리(18:35)

a'. 35a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b'. 35b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1-2. 도입(A)과 마무리(A')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의 배경이 되는 도입과 마무리는 단순히 배경과 결론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 해석의 핵심이 되는 키를 가진 부분이다. 이는 도입(A)은 비유가 전파되게 된 배경으로 베드로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의 질문인 용서죄의 용서라 정의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유의 마무리인 A'천부의 용서죄에 대한 천부의 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AA'를 동의적 평행법으로 짝을 지어 구조화한 예수님의 문학적 구성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AA'를 모아 보면 예수님의 대답에 이런 문학적 구조가 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a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a. 22b 일곱 번뿐 아니라

  b. 22c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a'. 35a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b'. 35b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a-b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이고, a'-b'는 비유를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이다. 이것은 첫 번째 대답을 보다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b-a'-b'로 진행된 도입과 마무리의 동의적 평행법은 비유의 도입(A)21절에 대한 두 번의 대답으로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문장의 자체만 보면 정확한 뜻이 애매모호한 35b절의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이와 같이가 무슨 뜻인지 확인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죄의 용서이다.

 

  1-3. 장면 1 : 임금과 첫 번째 종(18:24-27)

  비유의 첫 번째 장면은 임금이 돈을 받기 위해 빚을 진 첫 번째 종에게 가혹하게 행하는 모습과 종의 거짓말 같은 간청과 임금이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임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절대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종은 끌려가는”(προσηνέχθη) 절대적인 피동적인 역할로 나온다. 임금은 돈을 받기 위해 종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하는 무자비한 요구를 했다(b). 종은 갚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빈털터리였기에(a)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c).

 

  학자들은 종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임금의 태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을 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참으면(Μακροθύμησον) 모든 것(πάντα)을 갚겠다는 종의 간청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의 말이라는 데에 일치한다. 이는 빚진 금액인 일만 달란트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헤롯 대왕이 그의 모든 왕궁에서 거두어들이는 총세입이 900 달란트였다고 한다. “유대고대사”를 기록한 요세푸스의 계산에 따라 1만 달란트를 계산한 한 신학자는 1달란트는 10,000 데나리온으로 1만 달란트를 변제하려면 당시인으로 32만 년이 걸린다 계산했다.

 

  그러므로 빚진 돈을 1만 달란트라 제시한 예수님의 의도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첫 번째 종의 모든 것을 갚겠다는 간청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이라면 거액을 빚진 것과 함께 임금을 능멸하는 죄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반전이 일어난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임금은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임금의 상상을 초월한 탕감을 종의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일방적인 마음의 결단 때문이라 설명해 주셨다.

 

  일방적인 마음의 결단은 무엇일까? 그것이 종을 불쌍히 여김”(σπλαγχνισθες)에서 비롯된(18:27, 33) “용서이다(18:22). 이러한 이야기의 대반전을 통해서 임금은 무자비한 임금에서 자비로운 임금으로 특히 불쌍히 여기는 임금으로 이미지가 변화된다.

 

  1-4. 장면 2 : 첫째 종과 두 번째 종(18:28-30)

  비유의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종이 그에게 빚을 진 두 번째 종에게서 돈을 받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행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문학적 구조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문학적 구조를 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장면 1의 문학적 구조와 장면 2의 문학적 구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a.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b. 25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ἀποδίδωμι) 한대

    c.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Μακροθύμησον π’ ἐμοί, καπάντα ποδώσω σοι)하거늘

      d. 27

        a) 27a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b) 27b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a'. 28a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b'. 28b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ἀποδίδωμι) 하매

    c'.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Μακροθύμησον π’ ἐμοί, καὶ ἀποδώσω σοι) 하되

      d'. 30

        a' ) 30a 허락하지 아니하고

          b') 30b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aa'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만남으로 같다. bb' 돈을 받기 위해 잔인하게 요구하는 모습이 묘사된 것이 같다. cc'는 돈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같고, 간청하는 문장은 c(모든 것)”(πάντα)를 빼면 동일하다.

 

  c. Μακροθύμησον π’ ἐμοί, καπάντα ποδώσω σοι

  c'. Μακροθύμησον π’ ἐμοί, καὶ           ἀποδώσω σοι

 

  dd'는 빚진 자에 대한 채권자인 임금과 첫 번째 종의 행동을 묘사한 것인데, 행동이 동의적 평행법으로 정확하게 상응한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임금은 첫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탕감받은 종은 두 번째 종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무자비한 벌을 가해 옥에 가두었다.

 

  a) 27a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b) 27b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a') 30a 허락하지 아니하고

    b') 30b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여기에다가 장면 1b와 장면 2b'를 비교해 보면 탕감을 받은 첫 번째 종이 임금과 비교해서 어떤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b. 25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ἀποδίδωμι) 한 대

  b'. 28b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ἀποδίδωμι) 하매

 

  b에서 임금은 종을 잡아끌고 와서(προσηνέχθη)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무자비한 자이다. 그런데 b'를 보면 첫 번째 종의 모습은 무자비한 임금과 다를 바가 없이 동료인 종을 붙잡아(κρατήσας) 목을 조르고(ἔπνιγεν) 빚을 갚으라 윽박지른 후 옥에 가두었다. 임금은 무자비한 요구를 했고, 첫 번째 종은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그러니까 결국 첫 번째 종은 무자비한 임금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동의적 평행법은 말해주는 셈이다.

 

  이렇게 비유 속에 담긴 구조적이고 문체적인 유사성과 이에 대비되는 반의적 내용 흐름이라는 이 비유의 특징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해 준다.

 

  1) 독자들에게 임금과 첫 번째 종에 대한 이미지의 대 반전을 각인시켜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비유의 장면 1과 장면 2의 동의적 평행법의 대조는 무자비한 임금에서 불쌍히 여기는 임금에로의 대변화와 함께 무자비한 임금을 따라 하는 무자비한 종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조해준다.

 

  임금의 "불쌍히 여기고"(σπλαγχνισθες), "풀어주고"(ἀπέλυσεν), "탕감해 주는"(ἀφκεν) 행동은 첫 번째 종이 동료 종의 부탁을 "거절하고"(οκ θελεν), "옥에 가두고"(ἔβαλεν ες φυλακν), "빚을 갚도록"(ἀποδῷ) 하는 행동과 정확하게 반의적으로 비교된다.

임금과 첫번째 종의 행동 비교

 

  독자들은 임금의 대반전적인 이미지 변화를 보고 안도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무자비한 임금을 따라 행하는 종의 모습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무자비한 임금의 압박으로 패가 망할 뻔했던 자가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빚을 진 동료를 탕감해 줄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돈 앞에서 그가 받은 바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무자비한 임금과 똑같이 행했기 때문이다.

 

  2) 동의적 평행 구조와 두 종들의 간청문이 같은 것으로 주님께서는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을 대조하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엄청난 빚을 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두 종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별로 다른 것이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비를 비는 간청뿐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첫 번째 종이 모든 빚을 다 갚겠다 말한 것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면 두 번째 종은 첫 번째 종에 비해 용서하기가 더 쉬운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두 종이 감당해야만 하는 채무 액수는 비교가 안될 만큼 차이(1만 달란트=100,000,000 데나리온 vs 100 데나리온)가 난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치 품삯이므로 주 6일을 일한다 치면 100 데나리온은 넉 달이면 빚을 갚을 수 있다. 두 번째 종은 시간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액수였다.

 

  여기에 다가 두 사람은 같은 종이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 그리고 보고를 한 종들은 모두 “함께 종이 된" 동관(ὁ σνδουλος) 사이였다(18:31). 그러므로 두 번째 종을 용서하지 않은 첫 번째 종의 무자비한 행동은 다른 동료 종들로부터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18:31 “심히 민망하여”)로 느껴져 자세히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될 악한 일”(18:32 “악한 종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대조되는 두 종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첫 번째 종의 무자비함은 털끝만큼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은 냉혹하고 악한 무자비함으로 보이도록 재촉한다.

 

  3)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교는 결국 임금의 자발적인 용서와 첫 번째 종의 자발적인 무자비함의 대조로 귀결된다. 이것은 장면 3의 핵심 주제로 등장한다.

 

  1-5. 장면 3 : 임금과 첫 번째 종(18:31-34)

  아마도 탕감을 받은 첫 번째 종은 자신이 탕감을 받은 일과 빚을 진 다른 종을 옥에 가둔 일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는 무자비한 첫 번째 종의 행동을 보고 동료 종들이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는 것으로 장면 3의 문을 연다(18:31). 장면 3은 동료 종들의 보고로 결국 불쌍히 여기는 임금의 용서가 취소되는 종의 비참한 결말이 내용이다.

 

  이 단락에서는 무자비한 종을 심판하여 용서를 취소하는 임금의 설명이 핵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를 교차대조법이 이중으로 겹치는 구조로 묘사하셨다.

 

  장면 3(18:31-34)

  a.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x. 32-33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a) 32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x) 33a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ὡς κἀγὼ)

    a') 33b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a'.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πν)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aa'는 무자비한 종의 악한 행동에 대한 동료 종들의 반응과 임금의 반응으로 서로 상응한다. 무자비한 종의 악행은 심히 민망한 것으로(a) 임금의 노를 발하게 했다(a'). 그래서 그의 악한 행동은 임금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임금은 베푼 자비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을 옥에 가둔 것과 같이 이제는 자신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왕은 첫 번째 종을 책망하고 그를 고문관(옥졸)들에게 넘겼다. 고문관들(βασανιστής)은 빚진 자가 숨겨진 재산을 가져오게 하고, 재산이 있는 친인척들이 대신 빚을 갚게 하기 위해서 고문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다.

 

  비유의 마지막에 그 빚을 다 갚도록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1만 달란트의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 형벌의 고통이 끝없는 것을 의미한다.

 

  x는 임금이 악한 종의 용서를 취소하고 옥에 가두는 이유를 설명한 말로 교차대조법의 중심이다. 임금의 설명은 a)-x)-a')의 교차대조법으로 조직되어 중앙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ὡς κγὼ) ”가 핵심 메시지가 된다.

 

  a)a')는 임금이 종의 빚을 모두 탕감해준 일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임금이 빚을 탕감해준 것(a))은 불쌍히 여김(a'))에서 비롯된 결과라 주님께서는 풀어주셨다. 그래서 임금이 용서를 받은 종에게 원하는 바가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다. 임금은 이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마땅치 아니하냐”, ἔδει)이라 지적했다(18:33).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는 돌연 용서를 취소하고 무자비한 임금으로 돌변한 임금의 마음의 근본을 알려준다. 그것은 나와 같이”(ὡς κγὼ)로 표현된 임금을 닮음이다. 이것이 악한 종의 용서가 취소된 이유요, 임금이 빚의 탕감(a))과 불쌍히 여김(a'))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임금은 거액의 빚은 포기 했지만 악한 종이 임금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포기하지는 않았고 마땅히(ἔδει) 자신의 마음을 알아 임금과 같은(ὡς κγὼ) 마음을 가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1만 달란트와 맞바꾸면서 취하기를 원했던 임금의 보상이었다.

 

  이 바램이 어긋나자 임금은 다시 무자비한 자로 돌변했다. 그는 악한 종이 이전에 약속했던 다 갚으리이다”(18:26)를 기억했고, 악한 종이 동료 종에게 했던 것과 같은 무자비한 처벌을 내렸다(18:34).

 

  18:30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8:34 그 빚을 갚도록 저를 옥졸들(고문하는 교도관)에게 붙이니라

 

  결국 악한 종의 상황은 임금에게 인내를 간청했던 이전보다 더 악화된 상태로 돌아갔다. 엄청난 금액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것과 이를 보상할 때까지 끊임없는 고문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용서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발휘될 수 없게 되었다.

 

 

  1-6. X의 도입

  마지막으로 비유의 도입을 본다. 이 부분은 간단한 한 절이지만 비유 이해에 결정적인 해석적 힌트가 있다. 그것은 비유가 지시하는 실상은 천국이고, 천국 중에서도 종들을 회계하는 임금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18:23 “이러므로 천국은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이 한 구절은 비유를 바라보는 관점을 오직 하나에로 집중하도록 만들어 준다. 베드로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한계를 물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한정 용서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설득하기 위해 이 비유를 주셨는데, 예수님의 전망은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용서를 천국의 임금과 관련된 것으로 높이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일을 천국 임금이 그의 종들을 회계하는 일과 긴밀하게 연관시켜서 하늘나라 차원의 일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천국 임금의 회계는 고문자 또는 형리에게 넘겨주다”(18:34 “옥졸들에게 붙이니라”)와 옥에 “던져넣다”(18:30 “옥에 가두거늘”)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종말론적 심판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악한 종은 돈을 갚을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형벌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를 넘는 영원한(어떤 학자의 계산대로 라면 32만년) 형벌이다.

 

  예수님의 논지는 분명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천국 임금께서 그의 종들을 회계하는 종말론적 심판과 직결된 일이다. 이를 보다 쉽게 말하면 천국 임금과 같음”(ὡς κγὼ)을 증명하는 계산(회계)이다. 그 결과 그의 종들에게 베풀어진 천국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용서의 유지와 취소가 좌우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라면 형제의 죄를 무한정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형제 용서에서 시작해서 결국 천국 임금과 같음”(ὡς κγὼ)으로 종결된다. 이것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방식이고, 예수 천국 가르침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는 요지가 아닐까 한다.

 

 

2. 마무리와 함의

  천국은 어떤 나라일까? 예수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천국을 내가 너에게 한 것과 같이”(ὡς κγσὲ)의 나라라 말씀해주셨다. 이 나라의 특징은 천국 임금과 같음”(ὡς κγὼ)을 계산(회계)하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합당한 사람은 모두가 천국 임금과 같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천국 임금과 같음은 특히 범죄 한 형제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다.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했기에 이는 모르는 타인이 아니다. 범죄 했다 했으니 용서자는 피해자 일 수도 있다. 형제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사람에게 범죄를 당한 것으로 받는 피해는 모르는 자에게 당한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이다. 그만큼 용서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질문에 언급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이라는 상황 설정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때 천국 임금과 같음”(ὡς κγὼ)을 증명하라 명하셨다. 명한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종말론적 비참한 파국을 경고하셨다. 왜 그런가? 그는 천국 임금과 같음”(ὡς κγὼ)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용서할지 모르는 종에 대한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생각된다.

 

  1)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것으로 종말론적 심판을 받는 비유의 결말은 행위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구원론과 충돌한다고 본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꼴통들!!. 이 사람들은 교리는 알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구원론은 아주 간단하다. 그는 절대 능동적 선택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닮지 않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고 행복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닮음으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특징들이 있다. 그중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어쩌면 가장 처음으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특징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꼽은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이 전파된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 얻음의 배후에는 천국 임금과 같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천국은 천국 임금과 같음으로 그 종들을 회계하는 임금의 나라이다(18:23).

 

  2) “천국 임금과 같음은 구원론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도 된다.

  이는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천국 임금과 같음을 실제로 나타내는 현실적 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에는 없는 구원의 다른 측면을 보강해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사항이 된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정의는 구원이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가르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 하지만 본 비유의 구원론인 천국 임금과 같음에는 하나님과 내가 기본적인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고 나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천국 임금과 같음이 있음을 나의 자발적 선택 또는 하나님에 대한 모방으로 타인에게 나타내는 천국 임금과 같은 용서로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구원론과 예수의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제자-제자 제자도를 결합하여(“제자-제자 제자도에 대해서는 필자의 마태복음 연습-마태복음 18장에 상세하게 설명했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참 예수의 제자를 보다 폭넓고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준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에 대한 비유를 분석하면서 윌리엄 아서 워드(William Arthur Ward)의 말이 마음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우리는 살인을 할 때 가장 짐승과 같이 되고, 우리가 심판을 할 때 가장 사람 같이 되며, 용서할 때 가장 하나님과 같이 된다."(We are most like beasts when we kill, We are most like men when we judge, We are most like God when we for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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