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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달란트 비유(마 25:14-30)

by 예다준 2022. 10. 24.

달란트 비유(마 25:14-30)

 
  달란트 비유는 너무나 친근한 성경이다. 내용도 쉽고 재미있어 어린이 설교의 주제로 주일학교 2부 행사의 놀이로도 응용되어 교훈이 어떤가를 따지기 전에 이미 잘 아는 성경 말씀으로 여겨진 성경이다.

  하지만 성경 해석의 차원에서 보면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는 해석 논쟁 때문에 오해의 성경으로 유명한 성경이다. 전통적 해석은 흔들리고 다양하고 도전적인 해석이 분분하여 성경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이해가 더 난해해졌고 골치 아픈 성경이 되었다.
 

달란트 비유에 대한 삽화
달란트 비유에 대한 삽화, 출처=구글이미지

 


  1) 한국 교회에 널리퍼진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두 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먼저는 오래된 논쟁거리로 달란트를 잘 활용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내세의 상급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상급론 논쟁"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착한 종이 받은 상을 내세에 받을 상급이라 이해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주장이 점점 강해졌다.

  그 결과 전통적 이해와 달리 보려는 시도들로 이전에 알고 있던 비유의 세세한 부분의 의미들이 불확정적인 것이 되어 해석에 어려움이 커졌다.

  두 번째 논쟁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한 종에게 종말론적 심판이 가해진 것으로 야기되는 해석상의 모순이다.

   비유에서 달란트를 잘 활용하지 못한 종은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심판을 받는다(25:30).  이 표현은 종말론적 심판을 받은 자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한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최후의 심판에서 악인으로 영벌에 처해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특히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 교리로 보면 문제가 된다. 이신칭의로 보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문제가 되듯이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한 종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

  이에 더해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 활용에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벌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모아 보면 결론이 서로 맞지 않는 부조화가 생긴다.  이는 달란트 비유의 결말이 내세 상급과 종말론적 영벌의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해석에서 내세 상급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누리게될 상으로 천국의 복된 삶에 더 해지는 추가적 옵션이다. 이에 비해 심판은 종말론적 심판이다. 달란트의 활용의 성공은 영생과 관계없는 추가적 옵션이고 달란트 활용의 실패는 영벌로 해석하면 달란트 활용의 성공과 실패의 댓가가 비등가(non-equivalence)가 되어 형평성에 모순이 생긴다.
 

  2) 두번째는 전통적인 해석에 반기를 들고 나온 전복적 해석들이 크게 대두되어(1990년대 초 부터) 새로운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 해석이 악한 종으로 보는 벌을 받은 종이 주인에게 한 말을(25:24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올바른 말이라 여기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고 이윤을 남기지 않은 종의 행동은 종들을 착취하는 악한 주인에 대한 항거로 이해한다. 이들은 달란트 활용을 거부한 마지막 종을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예수님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일각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전통적인 해석과 논쟁을 하고 사회학적, 문화적, 더 나아가서는 이데올로기적 비유 해석들의 물고를 열어 본문을 논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전통적인 해석에 반기를 든 해석과 전통적인 해석과의 논쟁으로 비유의 세세한 문장과 단어의 뜻이 모호해지고 해석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전통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문장과 단어에 대한 세부 해석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여기에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새로운 해석이 가세해서 문장과 단어들의 해석은 더 어려워졌다.
 
  3) 이와 같은 해석적 난해 상황은 일선에 있는 목회자와 사역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성경 해석은 물론 묵상도 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남게 된다.

  설교자들은 전통적인 해석에 의구심을 품게되고 그렇다고 반대 해석을 따르는 것도 그런, 선택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는 사회학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비유 해석들의 논리가 더욱 더 세련되는 상황이라 성경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교회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이 비유를 설교하기도 방치하기도 부담스러운 성경으로 보는 것이 달란트 비유의 현재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문제거리들을 일단 뒤로 하고 본문을 문학적인 구조와 문체의 특징들을 통해서 살펴보면 비유 이해에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성경을 문학적 구조와 문체적 특징을 중심으로 관찰하는 방법은 성경에 대한 해석적 전제를 많이 배제하고 실행할 수 있다. 성경의 내용 보다 성경 내용 배후에 있는 문학적 구조를 중심으로 성경을 관찰하기 때문에 특정 단어나 문장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이고 중립적인 해석을 유지하기 용이하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해석들은 대부분이 성경 본문에 대한 논쟁이 중심이기 때문에 본문보다 구조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새로운 관점을 찾고 유지하는 데에 이점이 많을 수 있다.
 
 

1. 달란트 비유의 문학적 구조 분석과 관찰

  성경 저자는 가르침을 내용으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와 다양한 문학적 도구들을 통해서 표현했다. 이것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성경은 히브리적 병렬적 논리와 이 논리를 구조화한 평행법을 중심으로 기록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어나 문장 말고 구조와 문체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비유를 문학적 구조로 분석하는 이유이다.

  이제 달란트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보고 분석 작업을 시도해본다.
 
 

  1-1. 달란트 비유의 문학적 구조

  달란트 비유는 치밀하고 규칙적으로 조직된 문학적 구조틀 안에서 기술된 비유이다.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내용이 구조를 만든 것 보다는 구조가 내용을 선택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정형화된 구조틀이 비유 전체를 담고 있다.

   마태는 그가 만든 비유의 틀 안에서 주인과 종들의 대면과 대화 상황을 반복해서 진술했다.

  우선 전체 구조를 본다.
 
도입 1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도입 2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장면 1(25:15-18)
25:15a 각각 그 재능대로
a. 15b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b. 15c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c. 15d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a'.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b'.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c'.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장면 2(25:19-30)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a".
20a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a) 1. 20b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2. 20c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b) 21a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1. 21b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2. 21c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3. 21d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b".
  22a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a) 1. 22b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2. 22c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b) 23a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1. 23b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2. 23c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3. 23d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c".
      24a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a') 1. a] 24b 주여, 내가 알았으므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b] 24c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a'] 25a (그래서 내가) 두려워하여 나가서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b'] 25b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2. 25c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b') 26a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1. a] 26b 네가 알았느냐
                  b] 26c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a'] 27a 그러면 네가 마땅히
                 b'] 27b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2. a] 28a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b] 28b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b'] 29a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a'] 29a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평행법의 기본 뼈대는 주인과 세 명의 종들이 대면하는 장면을 묘사한 a(첫 번째 종)-b(두번째 종)-c(세번째 종) 세 개로 이어지는 단락들이다. 달란트를 맡길 때도 a-b-c 순서가 유지되고, 종들이 달란트를 받아 취한 행동들을 묘사하는 것에도 a'-b'-c' 순서가 유지된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종들을 만나 결산할 때도 a"-b"-c" 순서가 그대로 유지된다.

  비유는 시간적 순서로 장면 1과 장면 2로 나누어진다. 장면 1에는 주인이 세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a-b-c), 종들이 주인의 달란트를 받고 취한 행동(a'-b'-c')이 주된 내용이고, 장면 2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주인이 달란트를 맡은 종들과 대면하여 결산하는 장면(a"-b"-c")이 주 내용이다.

  장면 1은 아주 간략하게 묘사된 반면에 장면 2는 보다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마태의 강조점이 이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면 2에서 분량과 이중으로 겹쳐진 문학적 구조로 볼 때 주인과 세 번째 종과 나눈 대화와 상과 벌에 대한 선언(c")에 최종적인 강조점임 알 수 있다.
 

  1-2. 도입 1과 2

  달란트 비유의 도입은 논리로 보면 두 부분으로 떨어져 있다. 이는 마태가 마태복음 25장에 세 개의 천국 비유를 연달아 배치하므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마태는 25:1a에 ""그때에 천국은 마치"라는 비유 도입 문구를 필두로 25:1b-13에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를, 25:14-30에 "달란트 비유"를, 25:31-46에 "양과 염소 비유"를 소개했다.

  그는 첫 번째 비유인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와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 사이에 "또 같으니"(가르 호스페르, γὰρ Ὥσπερ)를 집어넣어 두 비유는 인과관계로 연속되는 천국 비유임을 알려주었다(25:14).
 
  그래서 25:1a의 "그 때에 천국은 마치"라는 도입구 1과 25:14 "또 같으니"로 시작되는 도입구 2는 서로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도입 1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
  도입 2 25:14 "(γρ) 같으니(Ὥσπερ)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
 
  이러한 연결점은 달란트 비유가 25장의 첫 번째 비유에 이은 두 번째 천국에 대한 비유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연결을 좀 더 상세하게 볼 필요가 있다.

  1) 25:14에 "또 같으니"(γὰρ Ὥσπερ)로 시작하는 도입구 2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를 우리말에는"또"로 번역해서 달란트 비유가 단지 앞의 비유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문은 원인과 이유의 접속사인 "가르"(왜냐하면, γὰρ)로 되어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for"로 번역하여 앞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원인과 이유로 연결된 것임을 표시했다. 그러면 "달란트 비유"는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의 원인이고,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열)비유"는 "달란트 비유"의 결과라 이해할 수 있다.
 
  2) 그런데 마태는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 비유"에는 다른 접속사인 "그러나(그리고) ~할 때에 "(데 호탄, δὲ Ὅταν)으로 시작했다(25:31).

  무엇 때문에 마태는 첫 번째 비유와 두 번째 비유를 "가르"(왜냐하면, γὰρ)로 연결하고 마지막 비유에는 단순한 연결을 의미하는 "그러나"(데, δὲ)를 사용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본문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을 직접적인 단서가 없지만 비유들을 비교해 보고 문학적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렇게 표현한 마태의 의중을 능히 이해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슷하여 마치 쌍둥이 비유처럼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두 비유는 비유의 전반적인 배경과 인물 사이의 관계, 그리고 스토리의 구조는 물론 내용 전개 방식이 같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24-25장(3)을 참조하라).
 
   그리고 마태복음 24-25장에 있는 "재림의 준비에 대한 세 비유들"(24:45-25:30)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의 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보인다.
 
  A. 24:44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B. 24:45-51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 : 주인과 종
       (24:51,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X. 25:1-13 열 처녀 비유 : 신랑과 처녀(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B'. 25:14-30 달란트 비유 : 주인과 종
        (25:30,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A'.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양과 염소 비유(25:31-46)
 

  위 그림은 마태복음 24-25장에 있는 네 개의 비유로 이루어지는 교차대조법이다.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는 모두 "주인과 종의 모티브"를 가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동일한 결론적인 문구로 서로 대칭되는 짝(B와 B')을 이룬다.

  그리고 두 비유의 바로 직전 직후 외곽에 "인자의 도래"를 주제로 한 가르침과 비유가 포진되어 평행법의 짝(A와 A')을 이룬다. 그 가운데에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열)처녀 비유"가 있어 교차대조법의 중앙이 된다(X).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B-X-B' 세 비유에는 모두 다가오는 천국에 대한 준비에 실패한 자들의 비참한 상태가 있지만 A와 A'에는 없고 대신 다른 주제인 인자의 오심으로 대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네 개의 비유가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B-X-B' 세 비유는 주제가 같은 비유이고 양과 염소 비유(A')는 주제가 다른 비유라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구조적 관계는 아래 표와 같이 비유들의 도입구들을 정리하면 세 개의 비유를 진술할 때 마태의 논점이 변화되어 이동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 25장의 세 가지 비유의 도입구 비교

 

  마태는 열 처녀 비유에서 천국이 임하기 전 파루시아를 준비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두 번째 비유에서도 동일하게 천국이 임하기 전 파루시아를 준비하는 상황을 묘사했다. 그래서 두 비유 사이를 "또 같으니"(γὰρ Ὥσπερ)로 연결한 것이다(25:14).

  마태는 두 번째 비유의 마지막을 종말론적 심판으로 끝내고(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세 번째 비유의 논점을 종말론적 심판의 핵심인 인자가 자기의 영광으로 오실 때로 집중시키길 원했다. 그러니까 비유의 논점이 앞의 두 비유에서 강조한 천국이 오기 전 상황에서 영광의 인자가 임하는 종말 심판의 때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논점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마태가 선택한 도입구가 "그러나(그리고) ~할 때에 "(데 호탄, δὲ Ὅταν)이다. 마태는 이런 논점의 변화로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 강화를 영광의 인자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끝맺음한 것이다.
 
 

  1-3. 장면 1 :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다(25:15-18)

  이 부분의 구조는 세 개의 짝(a//a', b//b', c//c')이 서로 상응하는 동의적 평행법이다.
 
  25:15a 각각 그 재능대로
  a. 15b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b. 15c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c. 15d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a'.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b'.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c'.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a에는 첫 번째 종에게 주인이 금 다섯 달란트를 맡기는 장면과 a'에는 주인의 다섯 달란트를 맡은 첫 번째 종의 행동과 결과가 묘사되어있다.

  b와 b'도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묘사된 것으로 a//a'과 내용이 동일하다.

  하지만 c와 c'에 와서 구조는 같은데 내용이 달라진다. 앞의 두 종들은 달란트를 받고 장사하여 이익을 남겼지만(a', b') 세 번째 종은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c' 25:18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러므로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종의 행동이 다른 종들과 다른 이유에 독자들의 관심이 쏠리도록 만든다.

  무엇 때문에 마지막 종은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 행동은 주인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 질문이 일어나게 만든다.
 
  1) 이제는 전통적인 해석에서 가르쳤던 것과 같이 달란트를 선천적인 "능력" 이나 "재능"으로 이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런 해석 방법은 15세기에 생긴 영어 단어 "talent"의 의미를 1세기 용어에 주입한 잘못된 해석 방법이라 보기 때문이다.

   또 본문에서 달란트는 "능력"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임감"을 말하는 것인지 구조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답은 문맥과 단어 위주의 해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에서 이렇다 저렇다 언급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달란트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주인은 종들 각자의 역량에 따라서 자신의 달란트를 동일한 비율로 분배해서 맡겼다는 사실이다. 이를 비유는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었다 말했다(25:15a).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이나 책임감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는 분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은 재능이 다른 종들을 가능하면 모두 그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상을 주려는 목적으로 달란트를 운영하시는 분임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주인의 달란트 분배 방식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의 사례를 보면 정확하게 옳았다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달란트를 이용해서 동일한 비율의 이득을 만들었고 동일한 칭찬과 상을 받았다.

  주인의 달란트 운영 방법은 상대적 능력 테스트가 아니라 커트라인을 넘으면 모두가 합격되는 절대적 테스트라 말할 수 있다. 주인은 종들을 경쟁시키지 않았고 주인에 대한 동일한 행동(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과 동일한 비율의 결과 그리고 동일한 상을 달란트 운영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가지고 주인의 차별을 지적하는 질문은 본문이 알려주는 주인의 정체와 거리가 먼 것이다. 주인의 차별을 강조하여 누구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누구는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어 차별하느냐라는 식의 접근은 비유에 설정된 달란트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는 다섯 달란트를 남겨 상을 많이 받고 누구는 두 달란트를 남겨 상을 덜 받고 식의 접근도 비유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생각이다. 이런 질문은 성경 중심적인 해석을 방해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주인의 달란트 운영 밥벙을 보고 독자들은 한 달란트를 받은 세 번째 종에게도 동일한 비율의 이득이 만들어질 것이라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완전히 엉뚱한 행동으로 엉뚱한 결과를 주인에게 주게 된다.
 
  2)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a').  "바로"는 "즉시"(유씌스 εὐθὺς)라는 의미로 종의 즉각적인 충성된 태도를 보여준다.

  두 달란트를 맡은 종도 첫 번째 종과 "같이"(호사우토스 ὡσαύτως) 즉각적인 충성된 태도로 두 달란트를 배로 늘렸다(b'). 하지만 세 번째 종은 두 종들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했다. 그는 바로가 아니라 언제 행동을 취했는지 알 수 없는 그냥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었다(c').

   앞의 두 종들이 장사했다는 표현과 마지막 종이 땅을 파고 돈을 감추었다는 표현은 행동을 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으로 본다면 비교가 안될 만큼 차이가 보인다.

  앞의 두 종은 장사의 이득을 보기 위해 일 년 이년이 아니라 주인이 올 때까지 일을 했을 것이지만 마지막 종의 일은 그 순간의 노동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이 흘러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25:19 "오랜 후에").

  이 행동은 종들이 장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비유의 설명(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에서 보면 돈을 맡은 청지기로서 업무 태만을 넘어 주인의 재산에 해를 끼치고 주인을 모독하는 것이다.
 
 

  1-4. 장면 2 : 주인이 종들을 회계하여 평가하고 상과 벌을 주다(25:19-30)

  긴 시간이 흐르고, 주인은 돌아와 맡긴 주인의 달란트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된다(25:19).

  주인이 종들이 남긴 이윤을 결산하고 상과 벌을 주는 것이 장면 2의 주요 내용이다.

   마태는 이를 묘사하는 데에, 장면 1에서 사용한 종들에 대한 묘사 방법인 a는 첫 번째 종, b는 두 번째 종, c는 세 번째 종의 구조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장면 2의 구조도 a-b-c의 논리적 순서가 기본 뼈대이다.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a".
20a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a) 1. 20b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2. 20c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b) 21a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1. 21b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2. 21c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3. 21d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b".
  22a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a) 1. 22b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2. 22c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b) 23a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1. 23b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2. 23c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3. 23d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c".
      24a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a') 1. a] 24b 주여내가 알았으므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b] 24c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a'] 25a (그래서 내가두려워하여 나가서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b'] 25b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2. 25c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b') 26a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1. a] 26b 네가 알았느냐
                  b] 26c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a'] 27a 그러면 네가 마땅히
                 b'] 27b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2. a] 28a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b] 28b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b'] 29a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a'] 29a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태는 a-b-c의 논리적 순서를 각 단락으로 삼고, 그 안에 종이 주인에게 남긴 이윤을 주는 장면(a))과 주인은 그것을 받고 평가한 후 상 또는 벌을 선언하는 장면(b))을 하부 단락으로 조성했다. 이 구조는 a, b, c 세명의 종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본 구조가 된다.

  또한 첫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a의 a)과 두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b의 a)은 달란트의 액수만 다를 뿐 동일하다. 그리고 이들을 향한 주인의 평가와 상에 대한 선언(a의 b와 b의 b)에는 남긴 이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내용이 동일하다.
 

  1) 주인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남긴 이윤을 받고 그것을 돈이 아니라 "착함"과 "충성됨"으로 바꾸어 표현했다(21a, 23a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는 종들이 남긴 이득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인이 종들을 평가할 때 무엇에 중심을 두었는지를 알려준다. 주인은 종들이 남긴 금전적 이득의 양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주인의 관심은 그들의 주인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그렇다면 달란트를 맡겼을 때도 주인의 평가의 기준은 종들의 주인에 대한 태도인 "착함"과 "충성됨"에 있었다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와 같은 주인의 평가의 기준은 세 번째 종의 변명과 행동이 주인에 대한 악한 오해와 게으름이라고 판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
 
  2) 주인이 달란트에 대한 두 종의 노력과 그 결과를 통해서 "착함"과 "충성됨"으로 평가했다면 주인이 주는 상인 "많은 것을 맡김"은 더 많은 "착함"과 "충성됨"을 주인에게 나타낼 기회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더 많은 것을 맡김이 한 달란트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본 비유의 핵심 주제는 주인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착함"과 "충성됨"이다. 이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은 세 번째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가 "착함"과 "충성됨"의 반대인 "악함"과 "게으름"이라는 사실이다(26a).

  학자들은 비유의 주인은 어마어마 한 돈을 맡겼으면서도 "작은 일"이라 표현했고, 두 배의 이득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그다지 커다란 이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하였도다"(εὖ)라 칭찬했음을 지적하면서 주인의 됨됨이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주인의 관심은 애초부터 종들이 돈을 불리므로 얻게 될 이득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타낸 주인에 대한 "착함"과 "충성됨"에 있었다 보는 것이 비유가 설정한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세 번째 종의 문제는 이 이득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악함"과 "게으름"으로 응대한 것이다.
 

  3) 주인이 두 종에게 내린 보상은 두 가지이다.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25:21, 23).
   그러면 두 개의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먼저는 주인이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구조적으로 볼 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먼저 히브리 평행법(특히 동의적 평행법)에서 짝으로 제시되는 요소들은 각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에 대한 보충되는 표현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많은 것"은 "주인의 즐거움"과 "맡기다"는 "참여하다"와 서로 보완되는 표현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그러면 주인이 준 보상은 "더 많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라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에 추가된 설명들로 확대해서 보면 조금 더 상세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두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찾는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25:28-29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더 많은 것을 맡김이 한 달란트로 나온다.
 
  25:28-29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28-29의 더 많은 것을 맡김은 내향적 평행법 모양의 교차대조법 안에 있다.
 
  a] 28a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αρω-ἄρατε)
    b] 28b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δίδωμι-δότε)
    b'] 29a 무릇(γὰρ) 있는 자는 받아(δίδωμι-δοθήσεται) 풍족하게 되고
  a'] 29a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αρω-ἀρθήσεται)
 
  a-b에는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이 받은 "많은 것"의 실질적인 액수인 한 달란트가 나온다.

  a'-b'는 이유를 의미하는 "가르"(γὰρ)로 시작한다. 그래서 주인이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의 한 달란트를 뺏어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는 이유를 하나의 정의된 원리(a defined principle)로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a-b와 a'-b'를 교차대조법에서 대조되는 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a-b와 a'-b'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주인의 종말론적 상벌의 원리(25:29)를 상징적 보여주는 조치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응용하면 본문에 두 달란트를 받은 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문학적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두 달란트를 맡은 종에 대한 상을 추가 언급하면 비유를 담고 있는 교차대조법이 깨진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에게 한 달란트를 준 것은 세 번째 종에게 주었던 주인의 배려가 박탈당한 것과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평행법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두 번째 종이 상을 받는 장면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래서 이를 표현한다면 비유의 흐름이 어긋나고 다른 평행법이 추가되어 a-b-c를 기초하는 전체 구조가 깨진다.

  병렬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를 구현하는 평행법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겐 정확하고 사실적인 내용보다 문학적 구조의 명료함이 더 중요했다. 그러므로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주어지는 상을 표현하고 안 하고 그리고 무엇을 주었는지를 언급하는 것은 교차대조법이 명료하게 유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항아니다.

  마태는 단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주어진 보상을 통해서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종들이 누리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는" 원리가 어떻게 실행되는 가를 충분히 설명했다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25:30을 답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 구절에는 주인의 즐거움과 반대되는 슬픔과 괴로움이 나오기 때문에 주인이 착한 종들에게 주는 상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구절의 "바깥 어두운 안(속)으로"(εἰς τὸ σκότος τὸ ἐξώτερον)는 23절의 "주인의 즐거움 안(속)으로"(εἰς τὴν χαρὰν τοῦ κυρίου)와 완전히 반대되는 반의적 표현이다.

  마태복음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은 종말론적 심판을 받는 자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한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마태는 이 표현에다 "바깥 어두운 곳"(8:12; 22:13)이나 "풀무불"(13:42, 50)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을 따라 붙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곳은 모두 종말론적인 심판에서 형벌을 받는 자들이 가는 곳으로 "주인의 즐거움 안(속)으로"(εἰς τὴν χαρὰν τοῦ κυρίου)와 대비되는 표현이다.

  "주인의 즐거움"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묘사한 표현이고 "바깥 어두운 곳"이라는 표현은 연회가 열리는 밝은 곳과 대조된 쫓겨난(ἐκβάλετε) 장소를 말한다. 그리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게헨나에서 겪을 고통을 말한다(8:12; 13:30, 41, 50; 22:13; 24:51; 25:30).

  그러면 주인이 착한 종들에게 주는 상은 종말론적 심판에서 구원을 얻어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과 주인의 만남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은 세 번째 종과의 만남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마태는 이 부분의 문학적 구조를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에게 사용했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 단락에 미시적 구조를 추가해서 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래 도식에서 검은 글씨는 첫 번째 종과 두번째 종에게 사용했던 구조와 같은 부분이지만 보라색 글씨 부분은 마지막 종과 주인과의 대화에서 추가된 내용들이 평행법으로 조직된 모습이다.
 
24a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a') 1. a] 24b 주여내가 알았으므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b] 24c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a'] 25a (그래서 내가두려워하여 나가서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b'] 25b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2. 25c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b') 26a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1. a] 26b 네가 알았느냐
                  b] 26c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a'] 27a 그러면 네가 마땅히
                 b'] 27b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2. a] 28a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b] 28b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b'] 29a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a'] 29a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a')-1은 소득 없이 본전만을 돌려주는 것에 대한 세 번째 종의 변명이다. 그런데 이 변명에서 종은 자신의 행동의 이유로 주인의 정체를 문제시했다. 세 번째 종은 이것으로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을 변호하려 했다 보인다.

  b')-1은 세 번째 종의 변명을 듣고 그의 변명의 허점을 지적하는 주인의 반론이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변명을 토대로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렇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냐"라고 그의 변명과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b')-2는 악하고 게으른 세 번째 종에 대한 주인의 심판 선언이다.
 

 
  5) 24b절의 "주여, 내가 알았으므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의 "굳은 사람"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상의 논쟁이 많다. 마찬가지로 24c절의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도 같다.

  이 부분의 평행법을 보면 동의적 평행법에서 a]-b]로 이어지는 단락으로 서로를 상호 보충하는 문장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두 문장은 서로를 보충 해설해 주는 관계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두 문장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학자들의 해석은 분분하지만 그래도 두 번째 문장에 대한 해석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가능성이 보인다. 학자들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보는"이라 이해한다. 이 해석은 주인이 종의 논리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말한 25:27과 잘 어울린다.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겨 이자를 남김"으로 달리 표현했다. 그렇다면 종이 말한 "굳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보려는 자"와 비슷한 의미로, 불법을 해서라도 이득을 취하려는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겨 이자를 붙여 받으라"는 유대인들에겐 적극적으로 금지되는 악한 행동이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자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1-2세기에는 랍비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 형태로 강조되었다 한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그런 사람으로 보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게다가 종은 주인의 이런 정체가 두려웠다 말하므로 주인의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정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포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자로 보았다 항변했다(25:25).
 

  6) 26-27절은 악한 종의 자기 변호의 실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해석에 가장 논쟁이 뜨거운 부분이 여기다. 악한 종의 고발이 맞는지 주인의 반론이 맞는지는 이 비유의 해석을 통째로 뒤집을 수 있는 사항이다.   

  주인의 반론은 종의 주장을 그의 행동과 비교하면 모순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태는 종의 반론을 듣고 주인이 한 말인 "네가 알았느냐"(a])와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해야 한다"(οὖν ἔδει σε)(a]')를 대조하는 평행법의 짝으로 배치해서 종의 반론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주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주었다(25:27).
 
  26a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a] 26b 네가 알았느냐
    b] 26c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a'] 27a 그러면 네가 마땅히(ον δει σε)
    b'] 27b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종이 실제로 주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으로 알았다면 종이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돈을 맡겨 이자를 불려 받는" 악한 일을 해서 이득을 가져오더라도 칭찬할 것이 뻔하다. 이것이 b]와 b']가 대조되어 나타내는 악한 종에 대한 주인의 비판적 논지이다.

  게다가 종은 주인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종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주인을 무서워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본문의 내용으로 보면 종이 지적한 주인의 성품(25:24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이 그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맞다면 종은 주인이 "굳은 사람"이라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종에게 모종의 해코지를 가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종은 처벌이 두려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득을 남기려고 했어야만 했다.
  
  이 부분에서 악한 종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인지를 생각해본다.

  만약에 악한 종이 가졌던 주인에 대한 생각이 전부 실제였다면 예수님 당시인들은 종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악한 종은 악한 종이 아니라 불의에 맞선 용기있고 멋진 사람이라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문화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그렇지 않다.

   이는 현대인과 성경 시대인들 사이의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보면 오늘 우리의 사고방식과 달라 많이 오해가 되는 성경 속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성경 시대 문화였던 "명예와 수치의 문화"(Honor-Shame Cultures)이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고대 근동은 물론 그레코-로만 문화 아래에 있었던 지역에서 공유된 문화로 21세기 오늘날도 무슬림 세계에서 공유되는 세계관이다.

   서양문명을 위주로 사는 우리들의 주동적인 세계관은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관이다. 명예보다 이득이 우선이고 관계보다 개인의 유익이 먼저이다.

  하지만 성경 속의 세계관은 달라서 금전적 이득이나 개인적인 유익보다 명예(수치)로 사람의 가치와 성공과 실패를 결정했다.

   예수님 당시대인들에게 명예는 사람을 성공자로 만들지만 수치는 곧 죽음이었을 정도로 명예와 수치는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고 조건으로 작동했었다.

  이 세계관은 성경 속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과 말을 지배하는 것으로 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어떤 학자는 성경에는 약 600 구절의 “명예”와 “수치’ 혹은 “불명예” 사상을 담긴 구절이 있다 했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의 위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 눅 9:26이다.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asheme, ἐπαισχύνομαι)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asheme, ἐπαισχύνομαι)"
 
  이러한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성경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문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를 현대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아 이상하게 보인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눅 16:1-8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이고, 달란트 비유에서도 종들을 평가하는 해석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 비유를 보면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청지기가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다. 청지기는 해고당한 후 어찌해야만 할까 궁리하다가 꾀를 낸다. 비유를 보면 종은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서 부채장부의 내용을 바꾸어 채무자들의 빚 일부를 탕감해 주는 엉뚱하고 위험한 일을 감행했다.

  놀라운 것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결말이다. 주님께서는 이 청지기의 행동을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는 말씀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눅 16:8).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라는 현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너무나 엉뚱한 교훈을 주셨다(16:9).

  청지기의 행동은 현대인이 보기에 문서 조작과 사기에 해당하는 악한 범죄로 주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악행으로 보인다. 이는 결코 지혜로운 일도 모범적인 교훈이 될만한 일이 아닌 악행이다. 그런데 비유의 주인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는 앞뒤가 모순되는 평가를 했다.

   비유의 주인이, 그리고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 평가한 이유가 불의한 청지기를 "명예와 수치의 문화"의 관점에서 평가했기 때문이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보면 청지기는 불의를 했지만 주인의 명예를 높였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로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관점을 달란트 비유의 악한 종에게 대비하면 그의 변명이 얼마나 기만적인 변명인지 알 수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을 악한 자로 보아 주인을 위해 이득을 만들지 않은 행동은 악에 항거하는 의로운 행동이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세계관으로 보면 종의 행동은 결코 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지 못할 처사였다.

  누가복음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마무리에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에 대해 네 번이나 "충성"과 연결해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눅 16:10-12). 그렇다면 악한 종의 행동은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준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주인의 명예를 무너뜨리는 불충성으로 귀결된다.

   주인이 실제로 "굳은 사람"이라 탐욕적이고 착취적인 사람이었다면 주인의 말대로 달란트로 돈놀이를 해서 이자를 주인에게 돌리는 것이 종으로서 의무이자 지혜롭고 충성스러운 행동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종들이 남긴 이득의 액수도 악한 종의 행동이 의로운지 아닌지에 있지 않다. 이것들은 현대인에게는 중요한 이슈이지만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보면 부수적인 것이다.

   비유가 집중하는 것은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서 종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것에 있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보면 악한 종이 돈을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행동은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보았다는 말은 변명밖에 안 되는 거짓말이고, 두려움은 불충성에서 나온 주인을 얕잡아 봄으로 볼 수 있다.
 
  주인의 지적은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 배경을 둔 것으로 동의적 평행법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논리적이고 치밀하다. 그의 논리는 종의 변명의 거짓됨과 그의 두려움의 기만성을 금세 밝혀냈다. 그 결과 주인은 종의 행동을 악함과 게으름이라 결론 내렸다(25:26).

   이로 본다면, 세 번째 종의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는 주인에 대한 "악한 오해"이고, 두 번째는 "모순적인 게으름"이다.

   이것은 다른 종들이 보여준 "착함"과 "충성됨"과 주제로 볼 때 반의적으로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악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는 자를 말한다(5:39; 6:13; 13:19; 12:33-42; 16:4). 세 번째 종은 주인의 일을 반대하고자 하는 악한 오해를 가진 자였다. 그는 주인의 진심을 몰랐고 오해했다. 그러니 그가 주인의 일에 적극적이지 않고 반항심도 가졌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런 악한 오해가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지탱되는 고대 근동에서 게으름으로 나타난 것은 더 이상 핑계가 필요 없는 불충성으로 주인의 얼굴에 먹칠을 한 악행이다.
 

  7) 주인은 악한 종에게서 맡긴 한 달란트를 빼앗았다(25:28). 앞에서 보았듯이 주인이 맡긴 달란트는 돈이 아니라 주인을 향한 "착함"과 "충성됨"을 드러내는 기회로 주인을 명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종들을 주인의 즐거운 잔치 자리에 들어가도록 해주는 명예적 보상의 근거가 된다(25:21, 23).

  그렇다면 맡겨진 달란트의 박탈은 주인에 대한 관계의 박탈, 주인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를 실재 사건으로 표현하면 주인의 즐거운 잔치 자리가 아니라 정반대인 가장 수치스러운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인 게헨나에 들어가는 것이다.
 
  주인은 악한 종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면서 주인이 종들을 결산할 때 사용하는 상과 벌의 두 번째 원칙을 25:28-29에 "빼앗다"(아이로, αἴρω)와 "주다"(디도미, δίδωμι)로 만들어진 교차대조법으로 표현했다.
 
  a] 28a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라(αρω-ἄρατε)
    b] 28b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δίδωμι-δότε)
    b'] 29a 무릇 있는 자는 받아(δίδωμι-δοθήσεται) 풍족하게 되고
  a'] 29a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αρω-ἀρθήσεται)
 
  "빼앗다"(아이로, αἴρω)와 "주다"(디도미, δίδωμι)가 만든 교차대조법의 짝은 악한 종에 대한 심판과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한 약속(25:21, 23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대조의 "없는 자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착함과 즉각적인 순종인 충성됨이다. 

  이는 본문에서 주인이 칭찬을 받은 두 종들에게는 있고 악한 종에게는 없다 확인해 준 유일한 것이다. 

  그러면 25:28-29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착함과 즉각적인 순종인 충성됨"이 있는 자(나타내는 자)는 더 많이 받아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착함과 즉각적인 순종인 충성됨"이 풍족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착함과 즉각적인 순종인 충성됨"이 없는 자(나타내지 않는 자)는 있었던 "착함과 충성됨" 을 나타낼 기회까지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다.
 
  결국 주인은 악한 종이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착함과 즉각적인 순종인 충성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라 표현하고, 그에게서 "착함과 충성됨" 을 나타낼 기회 빼앗아 가장 수치스럽고 괴로운 종말론적 심판으로 결말지었다(25:30).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 요약과 함의

  달란트 비유를 비유 속에 담겨져 있는 문학적 구조와 문체적 특징을 중심으로 관찰해 보았다. 그래서 본문 해석에 논란이 많은 몇몇 부분에 대한 해석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의 원 의미가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어 잘못된 해석들이 사라지길 바란다.
 
 

  2-1. 달란트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가장 궁금한 것은 달란트는 무엇인가 일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는 "천국의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착함)와 즉각적인 순종(충성됨)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라 정의할 수 있다. 추상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비유에서 취득할 수 있는 정보들만을 본다면 이것이 성경 본문에 입각한 달란트에 대한 정의이다. 

  두 번째로 달란트는 천국 주인이 그의 종들을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이유(조건)도 된다. 이것은 달란트의 구원론적 성격을 의미한다. 달란트를 잘 관리한 종이 받은 상은 종말론적인 상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달란트 관리에 실패한 종이 받은 벌은 종말론적인 벌이다. 그렇다면 비유가 말하는 달란트는 주인의 종말론적인 심판과 직결된 조건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이 달란트 비유를 해석하는 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성경적인 가이드라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를 해석할 때 맡겨진 달란트의 액수나 남긴 이윤의 액수에 초점을 두는 해석들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스토리의 전개에서 달란트의 액수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정작 종들을 심판할 때 달란트의 액수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종들의 착함과 충성됨, 악함과 게으름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셨다. 이는 달란트의 액수가 비유에서 별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로 내세의 상급을 논하는 해석이나 더 나아가 차등 상급을 논하는 것은 비유에서 벗어난 해석들로 볼 수 있다. 또한 악한 종의 주인에 대한 파업 행위를 올바른 것으로 보는 해석 또한 본래 비유에서 벗어난 해석이다.
 

  2-2. 종말론적인 제자도의 핵심 : 예수에 대한 올바른 앎과 즉각적인 충성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심판 자리에서 제자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는 착하고 충성된 자이고 두 번 째는 악하고 게으른 자이다.

  전자는 주인의 종말론적 즐거움에 참여하고 후자는 게헨나의 고통 속으로 빠진다. 본문의 내용을 볼 때 착함과 악함은 반의적으로 상응하고 충성됨과 게으름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므로 주인인 예수에 대한 올바른 앎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 종말을 맞이한 제자도의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종국적으로는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을 결정짓는 조건이 된다.

  달란트 비유에서 종말은 주인에 대한 올바른 앎과 충성심을 발휘하는 기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특별한 공포나 위험 사항이 없는 그저 달란트를 활용하기에 충분한 오랜 기회의 시간이다(25:19).

  악한 종이 주인을 향해 불평했던 말은 잘못된 종말론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악한 종은 주인을 두려움과 착취하는 자로 보았다. 그렇다면 악한 종의 종말론은 두려움과 착취를 당하는 기간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서 실제로 일어났던 종말론에 대한 사건들의 전형이다. 필자는 이것을 잘못된 종말론주의자들만의 행태라 보지않는다. 종말을 두렵고 착취당하는 것과 같이 가르친 자들의 기세가 등등했던 것은 한국 교회 저변에 깔린 종말에 대한 생각이 그와 같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자칭 그리스도라는 자들과 종말론적 도피를 강조하는 집단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것은 악한 종의 눈에 보이는 종말론적 현상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종말론적 현상에 제자들이 빠져들어 미혹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생각한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종말은 주님을 향한 올바른 앎과 충성심을 발휘하기에 좋은 기회이며 동시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열매를 맺는 생산적인 기간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달란트를 훌륭하게 활용하여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게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달란트 비유에는 종말에 대한 특단의 방침이나 삶의 요령같은 것이 나오질 않는다. 단순히 착함과 충성으로 달란트를 활용하여 주인의 명예를 높이는 삶만이 나온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태도가 종말론 강화 안에 비유로 가르쳐진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종말론적인 제자도는 무엇인가?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간단하다. 인자의 파루시아에 합당한 제자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는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자의 파루시아를 준비하는 시작과 끝이라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달란트 비유의 문학적 구조는 크게 두 가지를 대조한다. 먼저는 두 종과 마지막 종의 주인에 대한 태도를 대조하고, 두 종들에게 행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을 마지막 종에게 행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과 대조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종말에 나타날 잘못된 제자도인 하나님과 그의 대리자 예수에 대한 오해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게으름이 온갖 변명과 기만적인 사탕발림으로 판을 쳐도 종국에는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것을 강조한다.

  물론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누릴 종말론적 즐거움도 강조되어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더 강조해서 보느냐는 비유의 말씀을 받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덧붙여서 달란트를 구원과 다른 내세의 추가적 축복인 상급으로 보는 것과 현대적 세계관으로 악한 종을 의로운 자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다. 비유 본문에는 구원 이후의 추가적인 축복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악한 종은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로운 자라는 개념도 없다.

  만약에 비유를 그렇게 해석하면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달란트의 활용 여부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가 비등가적이어서 해석의 형평이 깨어져 버리는 모순을 만들고 예수님을 악하고 용감한 모순적인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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