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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포도원 주인 비유(마 20:1-16)

by 예다준 2022. 10. 31.

포도원 주인 비유(마 20:1-16)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사를 살펴보면 옛날에는 이렇게까지 비유를 해석했구나라고 놀랄 만큼 엉뚱하고 희한한 해석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비유가 가진 장르상의 특징이 원인이다. 비유는 말 그대로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표현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빗대어 말하는 것이기에 모호성은 비유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이다. 이 모호성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특이한 해석이 생길 수 있었다.
 
  포도원 주인 비유도 이와 같은 헤프닝으로 유명한 난해 비유이다.
 
  예를 들면 오리겐은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데나리온은 구원을 상징한다고 보고 가장 먼저 고용된 품꾼은 아담부터 노아 시대의 사람들, 제 3시에 고용된 품꾼들은 노아 시대부터 아브라함 시대까지 부름을 받은 사람들, 제 6시에 고용된 품꾼들은 예수 시대에 부름 받은 사람들, 제 9시에 고용된 품꾼들은 초대교회 시대에 부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제 11시에 고용된 품꾼들은 종말의 때에 부름 받은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고용된 일꾼들의 정체를 순서대로 보면, 모태 신자 된 자들, 소년기에 신자된 자들, 청년기에 신자된 자들, 노년기에 신자된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늙어서 죽기 전에 신자 된 자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것은 알레고리 해석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지만 다소 엉뚱해서 웃기기도 하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물으면 옛날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알레고리 해석이 지나가고, 역사-신학적 해석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다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은 사회(과)학적 해석, 지식사회학적 해석, 탈성장주의적 반 팽창주의적 경제적 해석 등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도구들로 사용되고 있다. 이로 보건데 아직도 이 비유는 난해 비유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마태복음 19-20장의 교차대조법의 중심을 차지하는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아주 중요하고 전략적인 가치를 지닌 말씀이다.
 
  16:21에서 시작된 예루살렘 여행은 20:34 20:34에서 마무리된다. 예루살렘 여행의 첫 번째 단계는 가이사랴를 떠나 갈릴리에 이르시는 여정이고(16:21-17:27), 19:1에서 시작되는 예루살렘 여행의 두 번째 단계 곧 갈릴리를 떠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유대 지역으로 가는 여정에는 뜻밖의 인물이 천국의 주인공이 된다는 주제인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이 몰려있다.
 

포도원 주인 비유
포도원 주인 비유에 대한 삽화, 출처=구글이미지

 
  포도원 주인 비유는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적 구조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이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마태복음 19-20장의 천국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도입(19:1-2)
  A. 바리새인의 이혼에 대한 시험(19:3-12)
    B. 천국을 소유하는 어린아이 같은 자에 대한 교훈(19:13-15)
      C. 재물을 포기하지 못한 부자 청년(19:16-24)
        D.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가 받을 상속 교훈(19:25-30)
        D'. 포도원 주인 비유(20:1-16)
      C'. 세번째 죽음 부활 예고(20:17-19)
    B'. 크고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에 대한 교훈(20:20-28)
  A'.  소경 치유 기사(20:29-34)
 
  그래서 성경 본문의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도구들을 살펴보는 방법으로 마태가 이 비유에 어떤 해석적 단서들을 만들어 놓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도구들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끊임없는 논쟁이 물고 물리는 단어나 문장 위주의 해석 방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성경을 보면 어떤 지침들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본다.
 
 

1. 포도원 주인 비유의 문학적 구조와 해석

  비유를 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도입(20:1)과 결론(20:16)이 비유의 처음과 마지막에 있고, 비유의 본문은 장면 1(20:2-10)과 장면 2(20:11-15)로 나눌 수 있다.
 
  비유 본문을 장면 1과 장면 2로 나누는 것은 장면 1은 20:2과 20:10이 "한 데나리온"으로 교차대조법에서 대조되는 짝을 이루기 때문에 한 단락으로 구분되고, 장면 2는 ""첫 번째 품꾼의 원망"(20:12)과 ""첫 번째 품꾼의 악함"(20:15)이 한 단락을 이루는 대조의 짝으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장면 1과 장면 2는 모두 a-b-b'-a'의 거시적인 교차대조법과 각 단락마다 미시적 구조가 이중으로 만들어져 있어 문학적 구조틀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있다 평가할 수 있다.
 
  내용으로 보면, 장면 1은 품꾼들을 계속해서 모집하여 포도원으로 데려가는 포도원 주인의 활동이 주요 내용으로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대화에 중요 메시지가 담겨있고, 장면 2는 일을 다 마친 후 주인이 품꾼들에게 삯을 지불하는 것이 주요 사건으로 불만을 가진 첫 번째 종들과 포도원 주인과의 대화가 비유의 주제를 결정하는 핵심 내용이다.
 
  우선 비유의 전체 문학적 구조를 보고, 각 단락별로 구조와 문체적 특징들을 살펴본다.
 
도입(20:1)
1 (가르, γάρ) 천국은 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장면 1(20:2-10)
a. 먼저 온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 약속(20:2)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b. 삼시, 육시, 구시, 십시 품꾼들(20:3-7)
  a)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ἀργός) 섰는(ἵστημι)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b)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δίκαιος)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a') 5a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b') 5b 그와 같이 하고
    a")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b")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ἀργός) 여기 섰느뇨(ἵστημι)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b'. 나중 온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음(20:8-9)
  8a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a) 8b 품군들을 불러 삯을 주라
    x) 8c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a')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a'. 먼저 온 품꾼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음(20:10)
a) 10a 먼저 온 자들이 와서 알았더니
  b) 10b 더 받을 줄
a') 10c (그리고) 저희도 받은지라
  b') 10d 한 데나리온
 
장면 2(20:11-15)
a. 먼저 온 품꾼들의 원망(20:12)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a) 12a 나중 온 이 사람들은
  b) 12b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a') 12c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저희를
  b') 12d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b. 잘못한 것이 없는 집 주인(20:13-14a)
  13a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a) 13b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ἀδικέω)
    x) 13c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a') 14a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b. 주인의 뜻 =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20:14b-15a)
  a) 14b 내 뜻(θέλω)이니라.
    x) 14c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a') 15a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μοι θέλω)로 할 것이 아니냐
 
a'. 먼저 온 품꾼들의 악함(20:15b)
a) 15b 너희들의 눈이
  b) 15c 악하다
a') 15d 내가
  b') 15e 선하기 때문이다
 
결론(20:16)
16 이와 같이 그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그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1-1. 도입(20:1)

  도입은 분량이 아주 적은 한 구절이지만 비유 해석에서 중요성은 지대하다. 예수님의 비유 중 천국 비유에서 도입은 비유의 주제와 빗대어 말하는 비유의 대상, 그리고 비유 해석을 좌우하는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간략하다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포도원 주인 비유의 도입도 이러한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20:1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의 배경을 어떻게 세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20:1 한 절로 비유에 대한 네 가지 설정 상황들을 구분해 낼 수 있다.
 
  20:1 "(가르, γάρ) 천국은 마치 집주인과 같으니,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앞 비유와의 관계 : 이는 ~ 때문이다(가르, γάρ)
  비유의 주제 : 천국은
  비유의 대상 : 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
  비유의 초점 :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1)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비유를 시작하는 첫 번째 단어는 "이는 ~때문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접속사 "가르"(γάρ)이다.
  이 접속사는 비유가 앞 단락의 결론인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꼴찌들이 되고 꼴찌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19:30)와 밀접하게 연관된 비유임을 알려준다.
 
  마태는 접속사 "가르"의 기능을 확충하는 문학적 도구를 비유의 마지막에 다시 하나 더 표시해 주었는데, 그것이 19:30의 선언을 반복하는 인클루지오로 비유 전체를 감싼 것이다.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포도원 주인 비유)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문학적 구조를 내용보다 더 의미 있게 인식했던 유대인들에게 이 인클루지오는 아주 강력한 각인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이는 아래 그림과 같이 인클루지오로 배치된 두 구절이 "첫째"와 "꼴찌"라는 개념이 도치되는 계단식 병행법(staircase)으로 서로를 마주 보아 이중적으로 대조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도원 주인 비유 도입부의 이중 계단식 평행법과 인클루지오의 결합 구조

 
  19:30과 20:16은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내용에 "첫째"와 "꼴찌"라는 개념이 계단식으로 반복되는 계단식 평행법이다. 계단식 평행법(staircase) 이란 첫 번째 절의 마지막 요소가 두 번째 절의 앞부분에서 반복되는 형식으로 평행법을 이루는 문학적 기법이다.
 
  그런데 계단식 평행법으로 반복된 문장을 보면 "첫째"와 "꼴찌"라는 개념이 19:30에서는 첫째–꼴찌–꼴찌-첫째 순으로 20:16에서는 꼴찌-첫째-첫째–꼴찌 순으로 서로 도치되어 비유를 사이에 두고 이중 인클루지오로 강조되었다. 이로서 주제의 강조와 함께 인지적으로 각인하는 효과가 더 커지는 것이다.
 
  2) "천국은 마치 ~ 집주인과 같으니"라는 표현은 천국 비유를 시작할 때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전형적인 어구이다(13:31, 33, 44, 45, 47; 참조. 13:24; 18:23; 22:2; 25:1). 주님께서는 이 어구를 통해서 비유의 주제는 천국이라 정의하셨다.
 

  3)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천국에 대한 비유라 말씀하시고, 이 비유가 묘사하려는 대상은 포도원의 "집 주인"(오이코데스포테스, οἰκοδεσπότης)과 같다 설정하셨다.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주인은 품꾼들과 대조되는 주인공이다. 주님께서는 품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 집주인의 성품으로 천국을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이 천국 비유는 천국의 주인을 상징하는 집주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주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성품의 총체인 영광의 나라이다(계 21:11, 21:23).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인 포도원 주인을 소재로 천국을 비유하셨다.
 
  4) 하지만 예수님의 주인공 설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집 주인을 "그의 포도원에 일꾼들을 고용하고자" 하는(μισθώσασθαι ἐργάτας εἰς τὸν ἀμπελῶνα αὐτοῦ) 사람이라 보다 상세하게 설명했다.
  학자들은 비유의 주인공인 집주인의 성품은 품꾼들을 고용할 때 나타난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다 생각하고 집주인이 품꾼들을 고용하는 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했다. 그들의 설명에서 일치되는 공통점은 그의 품꾼들을 고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인 고용주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당시 품꾼을 고용하는 주인들은 보통 하루 일량에 적합한 일꾼들의 숫자를 미리 계산하고 청지기를 시켜서 아침에 일찍 인력 시장(20:3 "장터")에 나아가 일꾼들을 고용했다. 당시 품꾼들은 일당제였기 때문에 보통 하루 12시간을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주인은 가능하면 노동시간을 꽉 채워서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이 주인의 상식적인 고용 전략이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일꾼들을 고용하려고 주인이 직접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모습이고, 더군다나 하루 일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 일꾼을 고용하는 것은 품삯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주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는지 각종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견해들은 확인할 수 없는 추측이라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비유에는 그들의 의견을 지지해 줄 만한 아무 반증 자료가 없다.
 
  우리가 비유를 연구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록 예수께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비유의 소재로 삼았지만 그 내용이 항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내용도 이야기꾼이었던 예수님께서 교훈을 목적으로 설정한 이야기다. 주인이 비상식적으로 품꾼들을 여러 번 고용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현실에서 찾을 게 아니라 비유의 설정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을 "그의 포도원에 일꾼들을 고용하고자 하는 자"로 묘사한 것은 본문 이해에 결정적인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도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집주인이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비유를 들었을 것이고 이는 비유를 듣는 데에 흥미를 유발하기 좋은 기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인을 이상하게 설정한 스토리텔러 예수의 주된 이유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상하게 설정된 주인에게서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의 성품을 말씀하려 하신 것이다.
 
 

  1-2. 장면 1(20:2-10)

  장면 1은 교차대조법을 기본 구조로 시간 순서에 따라 스토리를 진행했다. 평행법의 짝인 a와 a'는 가장 먼저 온 품꾼들과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것(a)과 일을 다 마친 후 가장 먼저 온 품꾼들이 품삯을 받는 것으로 대조된다(a'). b와 b'도 동일한 형식이다. 여기에는 삼시, 육시, 구시, 십일 시에 품꾼들이 고용되고(b), 그들도 일을 다 마친 후 품삯을 받는다(b').
 
  1) a와 a' 레이아웃은 "한 데나리온"으로 대조의 짝을 이룬다.
  a에서 주인과 첫 번째 품꾼들이 하루 12시간 노동에 한 데나리온의 계약을 맺는다. a'에서 첫 번째 품꾼들은 일을 마치고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삯으로 받는다.
 
  하지만 a'에는 a에는 없는 동의적 평행법이 있어 눈에 띈다. 그리고 정상적인 상황 진행이라면 필요치 않은 a)-b) 단락이 보인다.
 
  a'. 먼저 온 품꾼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음(20:10)
    a) 10a 먼저 온 자들이 와서 알았더니
      b) 10b 더 받을 줄
    a') 10c (그리고) 저희도 받은지라
      b') 10d 한 데나리온
 
  첫 번째 품꾼들은 나중에 온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더 많은 삯을 받을 것이라(b)) 알았다 한다(a)).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a'-b'). 이것은 a에서 약속한 정당한 보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원망이 발생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 원망은 장면 2에서 주인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데 주인은 이것을 "악함"(20:15)이라 정의했다.
 
  a와 a' 레이아웃은 주인과 첫 번째 품꾼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시작을 알려준다. 이 갈등이 비유의 핵심 내용을 이끌고 여기에서 비유의 중심 메시지가 나타날 것이라 독자들은 짐작하게 될 것이다.
 

  2) b와 b'레이아웃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b이다.
  여기에는 주인이 삼시, 육시, 구시, 십일시에 나가 품꾼들을 데리고 오는 모습이 설명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이 부분을 묘사할 때 서술형으로 일어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과 삯꾼들의 대화를 기록해서 생동감은 물론 비유의 주인공인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꾀했다 보인다.
 
  내용 진술은 삼시에 만난 품꾼들로 시작해서 시간 순서로 이어가는데 a)-b)의 두 단락으로 구조를 구성했다.
 
  특히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제 삼시에 고용한 품꾼들과 십일 시 마지막에 고용한 품꾼들과 주인이 나눈 대화의 구조이다. 두 부분은 품꾼들을 묘사하는 "놀고(ἀργός) 서 있다(ἵστημι)"라는 표현과 이들에 대한 주인의 말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가 대칭되어 인클루지오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주인과 품꾼들이 나눈 대화이지만 마태는 인클루지오를 통해서 포도원 주인의 행동의 특징과 포도원 주인이 고용한 품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동시에 강조하여 보여준다.
 
  a)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εδεν) 장터에 놀고(ἀργός) 섰는(ἵστημι)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b)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δίκαιος)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
  a")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찾으니, ερίσκω)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b")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ἀργός) 여기 섰느뇨(ἵστημι)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포도원 주인이 고용한 품꾼들은 두 번이나 장터에서 놀고 서있는 자들로 강조되어 나온다. 이들이 일터로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장터에 서서 놀고 있는 이유는 b')에 나오는 것과 같이 그들을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는 성전 건축 완료로 예루살렘에서만 1,800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Ant. 20. 219). 이때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많은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구걸은 물론 도둑질이나 강도질까지 서슴지 않았고, 무리를 지어 상인들이나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큰 사회 불안 요소가 되었다 한다. 비유에 나오는 품꾼들은 이들을 상징하는 자들이라 상상되었을지 모른다.
 
  이들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침 일찍 이루어지는 고용에서 제외되어 하루를 공치게 될 위기 앞에서 하염없이 고용주를 기다리는 일용 노동자들이었다. 이것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는 너무나 절망스러운 고통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이들을 날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상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루 품삯을 벌지 못해 가난과 배고픔으로 괴로워할 식구들을 능히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무것도 못하고 서서 그저 자신들을 고용할 사람을 기다렸다. 더군다나 7절에서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 말한 사람들은 1시간 후에 하루 일과가 다 마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고용할 사람은 없다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어쩌면 빈 손으로 집으로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3) 20:3의 "나가보니"는 오해를 일으키기 쉬운 번역이다.
  원문에는 "나갔다"(ἐξελθὼν)와 "보았다"(εἶδεν) 두 개의 동사가 합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고통스러운 기다림으로 서 있는 품꾼들을 나가서 보았다고 묘사했다. 여기에서 "보았다"(εἶδεν)라는 단어는 단지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의미를 넘어 "주목하다", "관찰하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예수님의 표현으로 보면 주인은 이들이 괴롭게 서서 놀고 있음을 유심히 주목하여 본 것이다.
 
  주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주님께서는 3절에서 주인이 "주목하여 보았다"(εἶδεν)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표현을 6절에서는 주인이 제 십일 시에도 나가서 "찾았다"(εὑρίσκω)로 바꾸었다. 이것은 "보았다"(εἶδεν)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이다.
 
  여기에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대한 주인의 행동 묘사를 연결해보면 주인의 품꾼들에 대한 행동은 계속해서 주목하여 찾아보는 "보았다"(εἶδεν)에서 마지막에는 더 적극적인 행동인 "찾았다"(εὑρίσκω)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삼시 : "주목하여 보았다"(εδεν)
  제 육시와 제 구시 : "그와 같이 하고"(ὡσαύτως)
  제 십일 시 : "찾았다"(ερίσκω)
 
  이것은 첫 번째 품꾼들을 데리고 온 이후에 무려 네 번이나 품꾼들을 자신의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는 포도원 주인의 이상한 행동(?)의 원인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후에 보겠지만, 주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이상한 행동의 원인은 이들을 데리고 와서 모두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겠다는 "뜻"(14b의 "내 뜻"은 직역하면 나는 할 것이다(I will, θέλω)이다)에서 나온 것이다. 주인은 일자리가 없어 하루를 공칠 위기에 서있는 품꾼들에게 일 자리를 주어서 하루 품삯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뜻"을 세운 것이다.
 

  4) 포도원 주인은 할 일이 없어 서서 발만 동동 구르는 품꾼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초청을 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b와 b"). 게다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쁨의 소식도 주었다.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δίκαιος) 주리라".
  상당한(δίκαιος) 품삯은 얼마인지 정해지지 않은 품삯이다. 첫 번째 품꾼과의 고용 계약에서는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다. 하지만 두 번째 품꾼들과의 계약에서는 품삯의 액수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품삯의 액수는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렸다.
 
  처음 품꾼들이 나중에 온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면 아무도 나중에 온 품꾼들이 온전한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인은 마지막 품꾼들의 경우 1시간을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주인은 이러한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자신의 성품을 대신하는 "나는 선하다"(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라는 말로 표현했다(20:15).
 
  그렇다면 20:1에서 이 비유를 천국에 대한 비유요, 더 나아가서는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 한 집 주인과 같은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설명된 것은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한 집주인의 성품과 직결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성경 본문에 근거한 해석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해석적 방향 설정은 비유의 저자인 예수님이 의도한 원 의미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데에 아주 유용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준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비유를 묵상하면서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매몰되어 비유의 원 의미에는 없는 사생아적인 해석들을 할 수 있다.
 

  5) 위의 동의적 평행법을 보면 a)와 a"), b")-1]는 비슷한 내용이고, b)-1]과 b")-3]도 내용이 비슷하다. 하지만 b)-2]와 b")-2]는 비슷한 내용이 없는 문장이다. 그러면 두 문장이 눈에 띄게 보여 대조된다.
 
  b)-2] :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δίκαιος)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b")-2] :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두 문장을 대조하여 보면 b")-2]는 품꾼들이 직면한 문제이고 b)-2]는 문제에 대한 해결로 상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집주인이 품꾼들을 고용한 행위가 집주인을 위한 것보다는 품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으로 보도록 해준다.
 
  이로서 예수님께서는 집 주인을 품꾼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최근에 부각된 경제 사회학적 관점에서 집주인과 품꾼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해석들이 본 비유를 해석하는 주된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이들은 포도원 주인을 1세기 지중해 세계를 통치했던 로마 제국의 착취적 경제체제를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한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고용하고 삯을 지불하는 모든 행동을 착취적 경제 행동이라 이해한다. 이 해석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비유가 묘사하는 주인의 이미지와 다르다는 것이 문학적 구조로 성경 본문을 고찰한 결과이다.
 
  6)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끝났다.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서 품군들을 불러 삯을 주라 명했다(20:8). 삯은 나중 온자들로부터 먼저 온자들 순으로 지불되었다. 이때 처음에 온 품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광경이 일어났다.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삯으로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이다(20:9).
 
  이 부분을 문학적 구조로 보면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의 순서가 중앙에 있어 강조된 교차대조법이다.
 
  8a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a) 8b 품군들을 불러 삯을 주라
    x) 8c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a')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이 표현은 비유의 처음 온 품꾼들은 물론 비유를 듣는 청중들의 마음에도 주인은 처음 온 품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많은 삯을 줄 것이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기대는 박살 나고 만다. 그래서 주인의 마음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화가 난 첫 번째 품꾼들의 마음을 따라야 할지 독자들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주인은 처음 온 품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고 이로서 처음 온 품꾼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으로 장면 2로 넘어간다.
 
 

  1-3. 장면 2(20:11-15)

  장면 2는 주인을 원망하는 품꾼들과 포도원 주인의 대화가 a-b-b'-a'의 교차대조법으로 구성된 단락이다. a에는 먼저 온 품꾼들의 원망이 나오고, 이 원망은 a'에서 이들의 악함으로 결론된다. b와 b'는 주인이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품삯을 준 행동의 법적 정당성(b)과 의미(b')를 설명하는 단락으로 비유의 절정이라 볼 수 있다.
 
  1) 장면 2의 시작인 a단락은 먼저 온 품꾼들의 원망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한 분량(b'))과 마지막에 온 품꾼들이 일한 분량(b))을 비교하면서 나중 온 이 사람들을(a)) 자신들과 같이 여겨(a')) 품삯을 지급했다고 원망했다.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a) 12a 나중 온 이 사람들은
    b) 12b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a') 12c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저희를
    b') 12d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a'의 "우리와 같게 하다"는 "우리들과 동등하게 만들다"(ἴσους αὐτοὺς ἐποίησας)라는 의미이다. 늦은 저녁 시원할 때 포도원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나중에 온 품꾼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디면서 12시간을 일한 자신들과 동등하게 삯을 쳐준 것이 부당하다고 처음에 온 일꾼들이 주인을 향해 원망했다고 예수님께서는 묘사하셨다.
 
  나중에 온 품꾼들의 원망의 말은 20:10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명과 비교해 보면 딱 떨어지게 맞지 않는다. 그 구절을 보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 설명되었다. 여기에서 "알았더니"는 "노미조"(νομίζω)라는 단어로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많이 일했으므로 더 품삯을 많이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한 품삯만 받게 되자 나중에 온 품꾼들이 자신들과 동일하게 삯을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주인을 원망했다.
 
  이 말을 바꾸면 나중에 온 품꾼들이 자신들보다 적게 받았다면 원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로서 처음에 온 품꾼들은 삯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마지막에 온 품꾼들에게 베풀어지는 주인의 호의를 타깃으로 삼아 불평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우리 속담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자기들이 먹지 못하니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게 만들자 방해하는 비열한 비방을 한 것이다. 즉 이들의 원망은 채워지지 않는 헛된 욕심과 자신들에게는 혜택이 없는 주인의 호의를 문제 삼아(호의를 베푸는)포도원 주인과 (하루 품삯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게 된)마지막 품꾼들을 동시에 공격한 것이다.
 
  이것이 타당하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처음 온 품꾼들의 원망을 담은 단락 a에 대한 주인의 변호가 b와 b'로 두 가지 차원에서 언급되고 문학적 구조로 구조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장면 2의 문학적 구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a. 먼저 온 품꾼들의 원망(20:12)
    b. 주인의 변호 1 : 고용 계약 상 잘못이 없음(20:13-14a)
    b'. 주인의 변호 1 :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
        (20:14b-15a)
  a'. 먼저 온 품꾼들의 악함(20:15b)
 
  처음 온 품꾼들에 대한 주인의 변호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먼저는 고용 계약 상 아무 잘못이 없다는 법적인 차원이다(b). 이들은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을 때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20:2). 그러므로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므로 주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구절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주인의 말은 한 데나리온 약속을 중앙에 놓고 강조하는 교차대조법으로 되어있다.
 
  13a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a) 13b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x) 13c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a') 14a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주인은 이들에게 법적으로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않았다("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οὐκ ἀδικῶ σε). 그들이 할 일은 원망을 그치고 자신 품삯을 받아 가는 것뿐이다..
 

  2) 하지만 주인의 변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주인은 자신이 법적으로 올바른 것을 변호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두 번째 변호를 했다. 그것은 주인의 마음(성품)에 대한 것으로 나중 온 사람들을 처음 온 일꾼들과 같이 여겨 삯을 주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호의라는 것이다(b').
 
  주인은 처음 온 품꾼들의 생각과 그들의 말속에 담긴 기만을 눈치챈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주인이 처음 온 품꾼들이 표현한 불만만을 알았다면 그의 대답은 법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14a에서 그치고 비유는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의 말 뒤에 숨은 기만적인 욕심과 그 동기를 보았다. 그래서 자신은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 말한 후 자기의 마음을 움직인 호의에 대해 언급하고(b') 마지막에는 품꾼들의 마음의 악함을 지적한 것이다(a').
 
  a) 14b 내 뜻(θέλω)이니라.
    x) 14c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a') 15a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μοι θέλω)로 할 것이 아니냐
 
  교차대조법의 a와 a'는 "내 뜻"(θέλω)이 대조되는 자리에 있어 마치 인클루지오와 같이 기능하여 주인의 뜻인 중앙의 x를 강조해준다. 주인의 뜻은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삯을) 주는" 호의이다.
 
  예수님 당시 일용직 일꾼들의 경제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중에 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지 못하고 가령 1/12 데나리온을 받아갈 경우 그와 그의 식구들은 한 끼도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말한다. 주인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하루 품삯을 채워줘서 그와 그의 가족이 배부른 하루를 보내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보인다.
 
  어쨌든 주인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성품인 호의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호의가 나중에 온 품꾼들을 처음에 온 품군들과 동등하게 만든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 호의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리라 결심하게 만들었고, 이 마음으로 주인은 네 차례나 장터로 나가 일자리가 없어 발을 구르는 품꾼들을 주목하여 "보고"(εἶδεν) 더 적극적으로 "찾게"(εὑρίσκω)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처음 온 일꾼들은 고용 계약에 따라 한 데나리온을 주었고, 다른 품꾼들(특히 마지막에 온 품꾼들)은 그의 호의에 따라 한 데나리온을 지불한 것이다.
 

  3) 이 비유는 눅 15:28-30에 나오는 "탕자 비유"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유산을 미리 달라 조르고(유대문화에서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죽으라고 저주하는 것과 같고, 이는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 사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아주 수치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악행이었다) 집을 나간 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여 돼지보다 못한 삶을 살던 둘째 아들 탕자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의 호의를 베풀어 맞이했다.
 
  이때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첫째 아들이 불평을 했다. 첫째 아들은 둘째가 얼마나 망나니 같은 잘못을 했는지 상기시키면서 자기의 순종과 이에 대한 아버지의 무시를 불평하면서 분노했다(눅 15:29-30).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그것은 죽은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의 기쁨"이었다(눅 15:32).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포도원 주인의 마음과 탕자를 다시 얻은 아버지의 마음과 이를 모르는 자들의 부정적인 태도는 두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일한 구조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한 바는 비유의 결론(눅 15:32)과 비유의 앞에 있는 말씀의 결론(눅 15:10)과 연결되는 "기쁨 인클루지오"에 나온다.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무시하는 것,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등)은 천국에 합당한 조건에서 치명적인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기쁨을 모르고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포도원 주인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호의적인 마음을 모르고 원망하는 것은 선한 주인을 통해서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는 치명적인 악한 행위가 된다.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 단락인 a'에서 처음 온 품꾼들의 원망의 근본적인 정체를 밝혀냈다. 15절의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의역이다. 직역하면 "너희들의 눈이 악하다. 이는 내가 선하기 때문이다"이다. 이를 토대로 문학적 구조를 보면 a와 a'의 "너희들의 눈"과 "나"가 대조되고, b와 b'에서는 "악하다"와 "선하다"가 대조된다.
 
  a) 15b 너희들의 눈이
    b) 15c 악하다
  a') 15d 내가
    b') 15e 선하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정체를 좌우하는 사람의 등불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6:22).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 표현에서 눈은 사람의 영적인 실체 또는 영적인 본질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나온다. 눈은 등불과 같아서 사람의 온 존재(온몸)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한 것은 그의 눈이 악해서 그런 것이다. 악한 눈은 선을 발휘하는 하나님 앞에 서면 가장 분명하게 악한 기능을 수행한다.
 
  아마도 이러한 논지가 처음 온 품꾼들의 악함을 지적하는 15절의 예수님의 말씀 "너희들의 눈이 악하다. 이는 내가 선하기 때문이다"의 의미로 보인다.
 
  그러므로 내가 선하기 때문에 너희들의 눈이 악하다는 선언은 두려운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한 것으로 사람의 정체가 판별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 품꾼들의 원망은 단순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의 원망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마음을 가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거나 그 마음을 무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의 눈이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선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악하다 판별되는 것으로 이는 결국 천국에서 기대하지 않은 대반전의 비극이 될 수 있다.
 
 

  1-4. 결론(20:16)

  결론의 문학적 구조와 문체적 특징에 대해서는 앞의 도입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이중적 인클루지오라고 설명한 19:30과 20:16사이에는 "첫째"와 "꼴찌" 사이의 배열의 도치 외에도 내용이 달라진 것이 있다.
 
  19:30 "많은 첫째들이 꼴찌들이 되고 꼴찌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20:16 " 꼴찌들이 첫째들이 되고 첫째들이 꼴찌들이 될 것이다"
 
  19:30의 "많은"이 20:16에서는 정관사 "그"(호이, οἱ)로 바뀌어서 특정의 대상을 지목하는 것으로 의미가 집중된 것이다. 이것은 19:30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예외 없이 모두가 첫째들이 꼴찌들이 되고 꼴찌들이 첫째가 되는 대반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결론에서 선언한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원리라는 말이다.
 
  포도원 주인의 성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예수 천국의 특징은 하나님(포도원 주인)의 마음, 꼴찌를 첫째와 같이 만들어주려는 호의를 모르거나 원망하는 자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꼴찌가 되는 나라이다. 이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천국의 원리이다. 이것으로 주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셨다.
 
 

2. 적용과 함의

  역사적으로 포도원 주인 비유를 향해 쏟아지는 질문의 베스트를 보면 한 데나리온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생", "구원" 혹은 "내세적 축복"인가? 또한 처음 온 자들과 나중 온 자들의 역사적 실체는 무엇인가? 에 몰려있다.
 
  하지만 비유를 마태가 사용한 문학적 구조와 문학적인 도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단서가 없다 생각된다. 이 질문들은 예수께서 비유를 만드실 때 나타내려 한 가르침에는 포함되지 않은 질문들로 보인다.
 
  그러면 무엇이 이 비유를 통해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일까?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눈"을 가졌는가?"
 
  문학적 구조로 보면 이 비유의 교훈은 아주 단순한 하나이다. 이 비유의 교훈은 천국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베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악하다는 경고가 이 비유의 핵심 메세지이다. 이외의 다른 교훈들은 비유가 말하려 하는 것인가를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 가령 처음 온 품꾼들의 종말론적 결말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비유에는 아무 언급이 없으므로 더 이상의 해석은 불필요한 일이다.
 
  사실 "너희들의 눈이 악하다. 이는 내가 선하기 때문이다"라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은 그 어떤 질문보다도 우리에게 부담과 고민을 주는 말씀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하나님의 선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있는가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악한 자로 하나님의 천국 경영에 상관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가할 때 믿음 만을 외치는 현대 교회의 맹점을 드러내는 말씀이라 생각된다. 무엇이 믿음이 있다는 말인가? 굳이 포도원 주인 비유로 대답을 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이라 대답해 준다.
 
  이 말은 나의 삶의 현장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호의를 보고 순응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맘의 상태를 반성하게 한다. 과연 나에게 특히 마지막에 온 품꾼들과 같이 나도 모르게 얕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가? 달리 말해서 내 맘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가가 비유를 통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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