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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혼인 잔치 비유(마 22:1-4)

by 예다준 2022. 11. 4.

혼인 잔치 비유(마 22:1-4)

 


  혼인 잔치 비유는 한마디로 난감한 비유이다. 비유가 말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비유 내용이 황당하기 그지없어서 비유를 읽고 나면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이 맘속에 쏟아져 나와 묵상이 어렵다. 

 

  이런 것들이다. 

 

  왕의 혼인 잔치에 참가하라는 초대를 거부하고 밭 일이나 장사하러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에 한술 더 떠서 혼인 잔치에 가기 싫다고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는 사람들은 무슨 정신을 가진 사람들인가? 무엇 때문에 분노한 왕은 살인자들을 죽이고도 그들의 도시까지 불태워 버렸을까? 군대를 파견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잔치를 벌이면 어떤 백성들이 잔치에 가려고 하겠는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 하더니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내쫓는 것은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마지막으로 비유가 막장 드라마 같아서 선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가르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느낌이 우리 맘에 남는다.   

 

  그러면 혼인 잔치 비유는 무엇을 가르치는 비유일까 더 궁금해진다. 이 마음으로 온라인을 검색해 보면 설명이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도 비유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글들도 보이고, 성경 본문에는 없는 다른 성경을 가져다가 짜깁기한 글들, 이단 가까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글들도 보인다. 

 

  그래서 이 비유를 저자 중심의 문학적 수사학적 특징을 살펴보기로 했다. 성경 저자는 가르침을 내용으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와 다양한 문학적 도구들을 통해서 표현했다. 이것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성경은 히브리적 병렬적 논리와 이 논리를 구조화한 평행법을 중심으로 기록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단어나 문장 말고 구조와 문체로 성경의 수사학적 가르침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비유를 문학적 구조로 분석하는 이유이다. 
 


1. 비유의 전체 상세 구조와 분석 

  혼인 잔치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다룬 논문들이나 설명들을 보면 전체 비유를 내용을 따라 단락을 나누어서  A-B-B'-A'의 교차대조법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구분은 도입(A)과 결론(A')을 처음과 마지막으로 보고, 비유 본문을 두 개의 장면으로 보아 B와 B'로 나누는 방법이다. 이 분석 방법은 비유의 내용 전개와도 같고 특별한 무리 없이 비유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괜찮은 방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자료들을 보면 비유안에 존재하는 하부 문학적 구조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짜여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아서 비유가 묘사해 놓은 강조점과 문맥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를 보았다.

  1) 이 비유는 문장이 산문 형식으로 서술된 것 같이 보여서 상세한 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써서 본문을 분석해 보면 이 비유는 치밀한 문학적 구조틀(structural framework)에 내용을 맞추어 설명한 구조화된 유대식 평행법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는 최외곽에 언급한 A-B-B'-A'의 교차대조법으로 거시적 구조가 만들어져 있지만 거시적 구조 바로 아래 1차 미시적 구조를 보면 a-b-c라는 동의적 평행법의 기본 틀이 아래 그림과 같이 네 차례 반복되어 있다.

  A. 도입 
    B. 장면 1
      a. 
        b. 
          c. 
      a'. 
        b'. 
          c'. 
      a". 
        b".
          c". 
    B'. 장면 2
      a"'. 
        b"'. 
          c"'. 
  A. 결론

 네 번 반복되는 a-b-c 동의적 평행법은 아래 표와 같이 "a. 왕의 행동, b. 종의 행동, c. 사람들의 반응 또는 결과"를 기본 구조로 반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저자가 글의 구조에 맞추어 내용을 풀은 결과로 판단된다.

장면 1과 장면 2의 1차 미시적 구조의 기본 구조

  2) 그리고 1차 미시적 구조의 13개 단락들의 하부에는 단락별로 5개의 2차 미시적 구조들이 있고, 3차 미시적 구조 2개도 발견되었다. 이로 본다면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눈에 띄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중적 평행법을 가진 비유라 평할 수 있다. 

 

  긴말 필요없이 우선 비유 전체의 상세 구조를 본다. 참고할 것은 원문 성경의 어순과 단어 의미에 따라 사역한 부분이 있어 우리말 성경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각 절마다 평행법을 찾아내는 작업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A. 도입(22:1-2)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B. 장면 1(22:3-7)
    a. 3a 그 종들을 보내어(ἀποστέλλω)
      b. 3b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c. 3c오기를 싫어하거늘
    
    a'. 4a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ἀποστέλλω) 말하라
      b'. a) 4b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b) 4c 보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b') 4d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a') 4e 혼인 잔치에 오소서
        c'. a) 5a 그러나 소홀히 하는 자들(οἱ ἀμελήσαντες)은 가버리고
              b) 5b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장사로
            a') 6a 그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은 
              b') 6b 종들을 붙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a". 7a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πέμπω)
      b". (없음)
        c". a) 7b 그 살인한 자들을
              b) 7c 진멸하고 
            a') 7d 그 동네를
              b') 7e 불사르고

  B'. 장면 2(22:8-13)
    a'". 8a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a) 8b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b) 8c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b') 9a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a') 9b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b'". a) 10a 종들이 길에 나가 
              x) 10b 악한 자(πονηρούς)나 선한 자(ἀγαθούς)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a') 10c 혼인 자리가 기대어 누운자로 가득한지라 

        c'". a) a] 11a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εἰσέρχομαι) 
                    b] 11b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a'] 12a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εἰσέρχομαι)   
                    b'] 12b 예복을 입지 않고
               x)  12c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a') a] 13a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라 
                   b] 13b 쫓아내라. 바깥 어두움에  
                   b'] 13c 거기서 있으리라
                 a'] 13d 슬피 울며 이를 갊이

A. 결론(22:14)
a . 14a 왜냐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b. 14b 많다 
a'. 14c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b'. 14d 작기때문이다

  이제 위에 제시된 문학적 구조를 기초로 문학적 구조와 서사 도구들에 담긴 마태의 저작 의도를 분석해본다.  

 

  1-1. 도입(22:1-2) 

  도입은 1절과 2절,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를 보다 자세하게 1절을 비유의 도입, 2절을 비유의 서두로 나눌 수 있다.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 부분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찰 사항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는 비유를 해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정보와 관찰 지침이 있다.  

  1) 먼저 1절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여"로 시작된다. 이 문장은 혼인 잔치 비유가 바로 앞(21:45-46)에 나온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를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된 "그들에게"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21:45-46에 나온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이 이 비유를 듣는 직접적인 1차 청자였다는 사실은 비유 해석에서 배경적 지식으로 중요하다. 


  21:45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한 포도원 주인 비유(21:33-46)를 듣고 자신들을 빗대어 한 말임을 눈치채고 분노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선지자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했다(21:46). 

 

  그러니까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님과 극단적인 대립각으로 대적하는 상태였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날린 말씀의 펀치가 혼인 잔치 비유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 막장 드라마와 같은 엽기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다. 

  2) "다시"라는 표현은 이 비유는 앞서 언급된 다른 두 개의 비유들(두 아들 비유와 포도원 농부 비유)에 이어 또다시 주어진 비유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것은 순서적인 의미의 "다시"가 아니라 연달아 설파되는 비유들의 연속되는 주제 상의 "다시"로 보아야 한다.

 

  결혼잔치 비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 파괴 행동(21:12-17)으로 야기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과 논쟁,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21:23-27)에 이어 주어진 세 개의 비유들(21:28-22:14) 중 마지막 비유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동일한 대상을 향해 던져진 논쟁적 공격적 비유로 핵심 메시지가 같다.

 

  첫 번째 비유(두 아들 비유)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해 비롯된 결과를 지적하는 것이 핵심 메세지이다. 주님께서는 세 비유를 연달아 말씀하시면서 교훈의 강도를 점점 더 세고 날카롭게 하셨다.

 

  두 번째 비유인 포도원 농부 비유는 첫 번째 비유의 논점이 확대되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그 결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 이스라엘의 출현 문제를 더 공격적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에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주제를 더욱더 구체적이고 공격적으로 교훈한 것이 세 번째 결혼잔치 비유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의 박탈,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군대를 통한 파멸, 그리고 이스라엘의 특권을 받은 새로운 백성은 합당한 조건(결혼 예복)을 충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더 강조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이 비유 해석의 한 가지 팁을 알려준다. 혼인 잔치 비유는 비유만을 따로 떼어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이 비유가 대적자들과의 논쟁 가운데에 나온 것, 게다가 대적자들의 정체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폭로하는 데에 목적을 둔 것이기 때문에 비유의 배경을 무시하면 비유의 온전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비유만을 떼어내어 보면 막장 드라마 같아 해석이 아주 어렵고 현대인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들이 쏟아져 건전한 마음으로 비유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비유를 21-22장 안에서 보고, 주님께서 세 개의 비유를 연속적으로 쏟아내면서 메시지의 핵심을 점점 더 날카롭게 하신 것을 기억하면 비유가 단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2. 장면 1(22:3-7)

  장면 1은 임금과 혼인 잔치에 첫 번째로 초대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왕의 두 번의 부름과 초대받은 사람들의 두 번의 거부가 있고, 마지막에는 노한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과 그 동네를 진멸하고 불살라 버린 내용이 있다. 

  1) 이 단락의 구조적 특징은 앞에서 언급한  "a. 왕의 행동, b. 종의 행동, c. 사람들의 반응 또는 결과"로 이루어진 a-b-c의 동의적 평행법적 단락 흐름이다. 

  이 구조가 세 번 연속적으로 반복된다. 첫 번째 a-b-c는 기본이고, 두 번째 a'-b'-c'에는 종의 행동(b')과 이에 대한 결과(c')가 강조되어 미시적 구조들이 하부에 조직되어있다. 세 번째 a"-b"-c"는 임금이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을 군대를 보내 징벌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b"는 생략되고, c"가 동의적 평행법으로 강조되어있다. 


  그리고 세 개의 a 단락(a, a', a")은 왕의 행동을 묘사하는 "보내다"(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펨포(πέμπω))가 공통적으로 들어있어 왕의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동의적 평행법의 시작을 눈에 띄게 보이도록 했다. 

  B. 장면 1(22:3-7)
    a. 3a 그 종들을 보내어(ἀποστέλλω)
      b. 3b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c. 3c 오기를 싫어하거늘
    
    a'. 4a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ἀποστέλλω) 말하라
      b'. a) 4b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b) 4c 보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b') 4d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a') 4e 혼인 잔치에 오소서
        c'. a) 5a 그러나 소홀히 하는 자들(οἱ ἀμελήσαντες)은 가버리고
              b) 5b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장사로
            a') 6a 그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은 
              b') 6b 종들을 붙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a". 7a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πέμπω)
      b". (없음)
        c". a) 7b 그 살인한 자들을
              b) 7c 진멸하고 
            a') 7d 그 동네를
              b') 7e 불사르고


  2)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이중 초대 방식이다. 

  유대인들은 결혼잔치에 참석할 대상들을 미리 초대하고 그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결혼잔치가 준비되었을 때 오도록 부르는 이중 초대 풍습을 지켰다. 이로 본다면 임금은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예의를 충실하게 지켰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본문의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의를 충실하게 지키는 주인의 모습은 예의를 넘어 인내심으로 보인다. 이는 22:3에 나오는 초대가 두 번째 초대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초대받은 자들을 "청한 사람들"(κεκλημένους)이라 묘사했다. "초대된"(케클레메누스, κεκλημένους)이란 표현은 완료 분사로 초대가 이미 완료되었음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이미 첫 번째 초대를 받아 참석하겠노라고 약속을 한 것이다. 이에 임금은 혼인 잔치 준비가 다 되어 종들을 보내어 참석을 확인하는 두 번째 초대를 한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참석 약속을 깨고 두 번째 초대를 거부를 한 것이다(22:3c).

 

  결혼 준비가 다 끝나 손님들이 참석하기만을 기다리는데 결혼 잔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임금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 세 번째 초대를 했다(22:4).

 

  그래서 임금의 초대는 인내심의 초대이다. 주님께서는 이 임금을 온화하고 인내심이 많은 성정을 가진 자로 설정하신 것 같다. 어쨌든 임금은 괘씸한 마음을 다스리고 성공적으로 결혼 잔치를 치르기 위해 예의를 넘은 세 번째 초대를 했다.


  3) 하지만 임금의 초대를 받은 자들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너가 없고 오만하고 불충스럽다. 

  이는 두 번째 동의적 평행법 단락인 a'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b와 b'를 보면 임금은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마쳐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제 남은 일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만이 남았다.

  a) 4b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b) 4c 보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b') 4d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a') 4e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지만 초대받은 자들의 반응은 실로 괘씸하기 짝이 없다(c'). 이들은 임금과 한 약속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인내심으로 보낸 세 번째 초대를 무시하고 능욕하고 죽였다. 

 

  특히 문학적 구조는 초대받은 자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왕의 초대를 "소홀히 하는 자들(οἱ ἀμελήσαντες)"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왕의 초대를 소홀히 하여 거부하는 것을 넘어 묵살하고 능욕하는 자들로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이다.

  a) 5a 그러나 소홀히 하는 자들(οἱ ἀμελήσαντες)은 가버리고
    b) 5b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장사로
  a') 6a 그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은 
    b') 6b 종들을 붙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왕의 초대를 소홀히 여긴 자들은 왕의 결혼식을 묵살하고 자기 밭으로 가고, 자기 장사를 하러 갔다((a)-b)). 그리고 다른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은 왕이 보낸 종들을 체포해서(κρατέω), 앙심을 품고 학대하고 조롱하고 모욕하더니(ὑβρίζω) 끝내 그들을 죽였다(ἀποκτείνω).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샬라흐 원칙"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원칙으로 "어떤 사람의 대리인(살루아흐)은 그 사람 자신과 같다"(Ber. 5:5)라는 원칙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마태복음에는 "샬라흐 원칙"을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 많다. 

 

  그러므로 왕이 보낸 종들은 왕과 같은 자들로 대접해야 한다. 만일 이들을 무시하면 왕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본다). 이로 본다면,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의 행동은 왕의 초대를 거부한 것을 넘어 왕에게 대항하는 반역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4) 학자들은 이들의 행동을 이 비유 앞에 선포된 두 비유에 나오는 악한 자들의 행동과 연관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먼저 왕이 보낸 종들을 그 남은 자들(οἱ λοιποὶ)이 붙잡아 능욕하고 죽이는 것은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악한 소작인들이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한 행위와 비슷하다(21:35).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그리고 그들이 첫 번째 초대를 받아들이고 왕의 두 번째 부름을 거절한 것은 두 아들 비유에서 첫째 아들이 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순종하지 않았다. 

  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점잖으신 예수님께서 너무 말이 안 되는 막장 드라마 같은 비유를 가르쳤다는 것에 의아심을 느낀다. 누가 왕의 초대를 묵살할 수 있으며, 게다가 어떤 사람이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일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비유가 너무 비현실적이다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막장 드라마와 같은 비현실적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 왕에 대한 상상 외의 거부와 반역 행위가 일어났다. 그 반역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의 선생이라 믿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 전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저지른 악행을 빗대어 강렬한 인상으로 부각하기 위한 예수님의 전략이라 판단할 수 있다. 


  5) 그러자 분노한 임금은 이들을 모두 진멸한다. 

  이것이 세 번째 a"-b"-c"의 내용이다. 두 번이나 종들을 보냈던 임금은 세 번째 종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종이 아니라 군대를 보냈다(a"). 이 단락에는 임금이 보낸 종들이 없으므로 b"가 생략되었고, 군대의 행동을 묘사한 c"가 강조되었다.


  왕의 명을 받아 복수의 칼을 들고 보냄을 받은 군대는 왕의 복수를 실행했다. 여기에서 왕의 군대의 복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c"는 앞의 c'에서 왕의 초대를 거부했던 사람들의 행동과 정확하게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해 앞에서 제시한 문학적 구조를 바꾸어 대조되는 단락을 중심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첫번째 초대받은 자들의 심판 단락의 이중 인클루지오

 

  6a절의 "남은 자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죽였다. 그들은 7b절의 "살인한 자들"과 같은 자이다. 왕은 군대를 보내서 그들을 진멸했다(7c절). 이들이 왕의 종들을 죽였으니 이들에 대한 왕의 응분의 대가는 진멸로 동등하다.

 

  그러면 대비되는 문학적 구조를 보면, 5a절의 "소홀히 하는 자들"은 7d절의 "그 동네"와 대조된다. 이들은 왕의 초대를 소홀히 여기고 자기 밭과 자기 장사, 곧 동네로 갔다(5b절).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왕의 응분의 댓가는 무엇이 돼야만 하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담은 구조는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없애는 것이라 답한다. 이는 이들이 왕의 초대를 소홀히 여긴 이유가 그들의 동네에 있는 밭과 장사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 비유를 보면서 가지게 되는 한 가지 의문에 답을 준다. 분노한 왕이 자기가 보낸 종들을 죽인 자들을 죽이는 것은 그럴만한데 그들의 동네까지 불에 태워 버린 것은 지나친 보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하지만 문학적 구조를 살펴보면 왕의 복수는 정당하다. 왕이 왕의 초대를 소홀히 여긴 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은 그들이 핑곗거리로 삼은 동네(밭 일과 장사하는 일)는 불에 타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왕의 진노의 복수는 우리가 지나치다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정당하고 등가적(equivalent)이다. 


  6) 장면 1이 묘사하는 왕의 성품은 유대인의 결혼 풍습인 이중 초대 방식을 철저하게 따름으로 예의를 잘 지키고, 아들의 결혼 준비를 완수하는 것으로 준비성이 철저하고, 왕의 결혼 초청을 거부한 자들에게 재차 초대를 하는 것으로 오래 참음과 자비심이 있는 자이다. 

 

  하지만 두 번의 초청이 묵살당하고 그의 보냄을 받은 종들이 모욕을 당하고 죽기에 이르자 복수의 군대를 보내 진멸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왕으로 돌변했다. 무자비한 왕은 자신의 초대를 거부한 자들의 생명은 물론 거부의 핑곗거리까지 모조리 단호하게 응징해버렸다.


  이와 반면에 장면 1이 그리는 왕의 초청을 거부했던 자들은 참으로 불량하다. 이들 중 한 부류는 왕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기는 그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참석하기로 한 약속을 거부하고 싫어하더니(22:3 "오기를 싫어하거늘") 결국 하찮게 여기고(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왕의 잔치에 참석하기로 한 약속을 거부하고 싫어하다가(22:3 "오기를 싫어하거늘") 결국 왕을 능욕하고 죽이므로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두 주인공인 왕과 왕의 초대를 거부한 자들을 아주 극단적인 캐릭터로 비유하셨다. 이들의 관계는 정상적인 왕과 백성의 관계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엽기적인 관계로 대조된다. 그래서 이 비유를 읽는 우리들은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캐릭터들의 대립으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보고 이 비유가 선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라 믿을 수 없다 생각된다.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토록 극단적인 내용의 비유를 가르치셨을까?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본 대로 26장에 가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붙잡아 십자가에 죽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이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종들(a-b-c, 아마도 구약 시대 선지자들과 세례자 요한)에게 했던 악행들과 이제 그의 아들에게 할 일(a'-b'-c',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과 결국 이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 알려 심판(아마도  a"-b"-c")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내용이 담긴 것이다.  

 


  1-3. 장면 2(22:8-13)

  장면 2는 왕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새롭게 초대된 자들이 결혼 연회에 참석한 것과 연회에서 일어난 일이 내용이다. 

 

  이 단락의 문학적 구조의 특징은 앞에서 기본적인 구조로 사용된 동의적 평행법의 a(왕의 행동)-b(종의 행동)-c(사람들의 반응 또는 결과) 단락 구성이 그대로 사용되지만, 각 단락이 모두 미시적 구조로 보완되어서 내용이 풍부해진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와 임금과의 대화를 다룬 c'" 단락의 경우를 보면 미시적 구조가 두 단계나 겹쳐질 정도로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장면 2의 첫 번째 그림은 왕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을 모두 응징한 왕이 종들에게 새로운 초청자들을 선포하고 그들을 혼인 잔치에 데려오라 명을 내리는 그림이다. 

  이 명령에서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 사항임을 교차대조법으로 알 수 있다. 

    a'". 8a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a) 8b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b) 8c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b') 9a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a') 9b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먼저는 이전에 초대를 받은 자들은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는 임금의 선언이다(b)). 그리고 새롭게 초대받을 사람의 조건이 제시된다. 그들은 종들의 청함을 듣고 오는 자 모두이다(b')). 


  왕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는 것은 일반인들은 꿈만 꿀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초대를 받았던 자들은 일반적인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은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아 주어진 특권이 모두 박탈되었다(22:8c). 

 

  그래서 이제 왕은 새로운 초대자들을 종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정체가 상식 밖이다. 임금은 이들을 "사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라 했다(b'-a'). 실제로 왕이 자신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길거리에 있는 사람 아무나 초대 할리 만무하다. 이는 왕의 위엄은 물론 아들의 위엄을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임금의 아들의 결혼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이 된다. 왕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모두에게 열렸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서 "악한 자"(πονηρούς), "선한 자"(ἀγαθούς)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모두 잔치에 데려왔다(22:10). 

 

  마태는 이것을 b'" 단락의 교차대조법으로 표현했다. 그는 왕의 설명과 명령을 들은 종들이 나아가 악한 자(πονηρούς)나 선한 자(ἀγαθούς)나 만나는 사람은 모두 데려왔다는 사실을 교차대조법의 중앙에 배치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악한 자(πονηρούς)나 선한 자(ἀγαθούς)"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마 5:45을 보면 주님께서 "그(하나님)의 해가 악인들과 선인들에게 떠오르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기 때문이다"라 하셨다. 여기에서 "악한 자와 선한 자"는 특정의 악인과 선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초청의 기회가 제한된 소수에서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된다는 의미가 된다.


  2) 드디어 혼인 잔치 자리가 기대어 누운자들로 가득하게 되었다(b'"-a'). 

  우리 성경에는 "손님"으로 번역된 자들은 원문 성경에는 "기대어 누운"(아나케이메논, ἀνακειμένων)이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잔치 자리에서 기대어 누워 음식을 즐겼던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드디어 임금이 준비한 것들을 즐기는 손님들이 연회장에 가득 차게 되었다.


  임금은 손님들이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뜻밖의 사람을 발견했다. 이 장면이 22:11-12절의 c'"-a) 단락에 동의적 평행법으로 묘사되어있다. 이 평행법을 보면 두 단어가 서로 대조되는 자리에 있어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보여준다. 

  c'". a) a] 11a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εἰσέρχομαι) 
              b] 11b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a'] 12a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εἰσέρχομαι)   
             b'] 12b 예복을 입지 않고

  a]와 a']에는 "들어오다"(에이스에르코마이, εἰσέρχομαι)가 반복 사용되어 대조되고, b]와 b']에서는 "예복"이 반복되어 대조된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연회장에 들어가는 것은 연회의 주인이 담당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라 한다. 손님들은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명예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결혼식의 주인의 관심은 차려진 음식이나 잔치의 진행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을 보기 위해 연회장에 들어갔다(a]). 그런데 그는 어떻게 결혼 연회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보았다(a']). 임금의 들어옴으로 있어서는 안 될 들어옴이 드러나는 대조법이다. 그는 결혼 예복(엔뒤마 가무, ἔνδυμα γάμου)을 입지 않은 자이다(b]와 b']). 


  결혼 예복에 대한 의문과 학자들의 설명은 너무나 많다. 특히 비유 본문을 보면 결혼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은 거리에서 곧바로 연회장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결혼 예복을 입고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비유에는 이에 대한 설명 없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연회에 참가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도 없다. 오히려 비유는 결혼 예복을 입지 못하고 연회에 참석한 것은 더 이상 다른 변명이 필요 없는 잘못이라 단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아무 변명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이 c'" 단락을 구성하는 교차대조법의 중심이다(x,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c'". a) a] 11a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b] 11b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a'] 12a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b'] 12b 예복을 입지 않고
               x)  12c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a') a] 13a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라 
                    b] 13b 쫓아내라. 바깥 어두움에  
                    b'] 13c 거기서 있으리라
                 a'] 13d 슬피 울며 이를 갊이

  a) 단락은 "들어오다"와 "예복"의 반복되는 대조로 동의적 평행법이 완벽하게 구분된다. a') 단락도 b]와 b']가  교차대조법의 중심으로 짜여진 한 단락이다. 이에 비해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는 아무 문학적 구조가 없는 짧은 문장 하나뿐이다("그러나 그는 잠잠하게 되었다", δὲ ὁ ἐφιμώθη). 이 구조는 두말할 필요 없이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잘못임을 강조하는 문형이다.


  임금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누구라도 연회에 참석할 수 있다 말했다. 하지만 예외 조건이 있었다. 결혼 예복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이다(12a절의 직역은 "결혼 예복을 가지고 있지 않고"(μὴ ἔχων ἔνδυμα γάμου)이다). 

 

  그러면 임금의 결혼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조건이 두 개로 정리된다. 먼저는 임금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결혼 예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전자는 첫 번째 초대를 받았던 자들에게서 발견한 조건이고 후자는 두 번째 초대받은 자들에게서 발견한 조건이다. 

  "이 결혼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은 아마도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한 이래로 교회가 이 비유를 해석할 때마다 제기되었던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답들이 제안되었지만 이레니우스(Irenaeus) 이래로 결혼 예복을 "천국(또는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어울리는 행위(또는 삶)"이라고 보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은 동의한다. 

 

  그리고 결혼잔치에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자와 예복을 입은 자들이 함께 섞여있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누리는 교회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만 아니라 가짜로 판명될 자들도 섞여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결말은 교회 안에 섞여 있는 의의 행위 또는 신자다운 삶이 없는 악한 자들의 종말론적 결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문학적 구조는 이에 대해 무슨 답을 줄 수 있는가? 문학적 구조는 이에 대해 색다른 답을 주지 못한다. 이는 비유 본문에 색다르게 말할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구조는 결혼 예복에 대해 이런 것들을 말해준다 할 수 있다. 

  ①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필수적으로 결혼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점이 비유에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연회에 참석한 것은 더 이상 다른 변명이 필요 없는 잘못이다. 이는 c'"의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를 통해 알 수 있고,
  ②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악한 자나 선한 자"라는 조건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결혼 예식에 참가할 수 없는 궁극적인 조건이다. 이는 c'" 단락의 교차대조법의 중심을 보면 알 수 있다.
  ③ 결혼 잔치의 주인이 손님들에게 유일하게 주목하여 본 것은 결혼 예복을 입었는가이다. 이는 c'"-a)를 통해 확인 가능하며,
  ④ 결혼 예복을 입지 않으면 결혼 잔치에 있더라도 결국 퇴출된다. 이는 c'"-a')의 교차대조법이 말해준다.

  3) 어쨌든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결혼 연회에 가는 것은 연회의 주인에 대한 실례요 모독이다. 더군다나 연회의 주인이 임금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운 모독이 될 수 있다. 결국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바깥 어두움에 쫓아내라 명했다. 

 

  연회장은 풍요와 즐거움이 넘치는 곳으로 밤에도 환하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는 "바깥 어두움"은 연회장 밖의 어두운 곳을 말한다. 그곳에는 연회장에서 온종일 즐길 수 있는 풍요와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슬픔과 이를 갊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의 전망에서 보면 특별한 곳을 지칭하는 숙어이다.

 먼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게헨나에서 겪을 고통을 말한다(8:12; 13:30, 41, 50; 22:13; 24:51; 25:30). 그래서 마태는 이 표현에 "바깥 어두운 곳"(8:12; 22:13)이나 "풀무불"(13:42, 50)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을 붙여 종말론적인 심판에서 형벌을 받는 자들이 가는 곳을 의미하는 숙어로 사용했다. 

 

  비유의 마지막 부분이 종말론적인 차원으로 채색되는 것이 다소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것이 말로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포도원 주인 비유의 배경이요 전망이라 볼 수 있다.

 


  1-4. 결론(22:14)

  포도원 주인 비유의 결론은 동의적 평행법으로 만들어진 경구이다. 

  a . 14a 왜냐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b. 14b 많다 
  a'. 14c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b'. 14d 작기 때문이다

  a와 a'는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로 대조되는 짝이다. b와 b'는 "많다"와 "작다"로 대조된다. 경구의 앞에는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접속사 "가르"(γάρ)가 있다.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는 비유 내용 전체를 압축하는 결론적인 두 인물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으로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의 의 불균형이 천국의 특징이라 결론 내렸다. 그래서 두 인물을 설명하는 b와 b'가 불균등을 표현하는 "많다"와 "작다"로 비교 대조되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서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두고 경영한 아들의 결혼 잔치의 결과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불균형하게 진행되었다는 예수님의 설명은 의외의 가르침이다. 학자들은 경구의 "많음"과 "적음"은 셈어적 배경으로 보아 "많은"은 "더 많은" 또는 "모두"로 보고, "적은"은 "더 적은" 또는 "모두는 아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결혼 잔치를 위해 "모두"를 투자했는데 "더 적은" 결과를 얻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비유를 보면 임금은 결혼 잔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자했다. 첫 번째 초대받은 자들의 무관심과 거부를 알고도 예의를 지켜 다시 초청을 했고(22:3-4), 결혼 잔치를 잘 치르기 위해 자신의 소유들("자신의 종들"(3, 6, 8절), "자기의 군대"(7절), 잔치 음식도 "나의 음식, 나의 황소, 나의 살진 짐승"(4절))을 사용해서 잔치의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22:4). 이들의 거부가 임금을 모욕하는 수준에 이른 것을 알고 군대를 보내어 진멸해 버림으로 결혼 잔치의 수치를 완벽하게 제거해 버렸다(22:7).

 

  두 번째 초대에서는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리지 않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참석 제한 조건을 아예 없앴다(22:9-10). 많은 학자들은 22:4의 "사거리 길"은 도시의 거리가 아니라 변방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로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도 포함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비유의 임금은 결혼 잔치를 위해 유대인의 임금으로 유대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파격적인 초대를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초대는 완전히 실패했고, 두 번째 초대에서도 합당하지 않은 자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경영하신 천국의 현실적인 특징이라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이유를 폭로하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친 마태복음 21-22장의 배경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 비유의 직접적인 1차 청자는 일반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었다. 바로 이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천국 경영에 상상할 수 없는 차질과 불균형이 발생했다. 그래서 비유의 결말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 비유는 이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대를 거부하지 않고 천국 잔치에 합당하도록 예복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여운을 남기고 마무리된다. 이로서 혼인 잔치 비유의 메시지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을 향한 경고가 되어 버린다. 

  임금의 혼인 잔치 비유에는 임금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천국 잔치의 역사가 배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구속사적 역사신학이 숨겨진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속사적 역사관을 불신으로 가득 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의 무기로 선포하셨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개선의 가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 비유를 말씀하시므로 이스라엘의 특권이 박탈됨과 그들의 군대를 통한 멸망을 예언적으로 경고하셨다. 그러면 이 비유를 직접 들은 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22:15-16이 이에 대한 대답이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땅의 제사장이라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에게 달라붙어 세속화된 자들이라 욕을 하던 헤롯 당원과 야합하여 예수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체포할 올무를 꾀했다 마태는 말했다. 이로 보건대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확고히 하므로 "왕의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는" 예수님의 비유(22:6)를 미래의 사건을 정확하게 꼬집는 예언으로 만들어 버렸다.


2. 마무리

  난해 비유로 유명한 혼인 잔치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비유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학적 틀인 구조에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여러 가지 문학적 도구들이 숨겨져 있다. 이것을 살펴보면 문학적 구조 속에 담긴 비유의 원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와 강조점과 비교점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비유를 해석할 때 강조하고 비교해야 할 사항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대해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의 답이 될만한 단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작업은 전적으로 본문에 의존한 작업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질문이나 난해 구절과 단어에 대한 세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단지 본문에 담긴 구조와 문체들의 특징으로 통해 해석의 가이드라인 정도만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신학적-역사적 해석과 근래에 새롭게 소개되는 다양한 수사학적 해석 방법들이 합해져서 본문을 고찰하면 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접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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