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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보충 상세 구조 분석과 해설 : 열(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처녀 비유(25:1-13)

by 예다준 2022. 11. 7.

열(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처녀 비유(25:1-13)

 

  열(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비유는 주일학교 유치부에서 배울만큼 성도들에게 아주 많이 알려진 이른바 유명 본문이다. 내용이 재미있는 것은 물론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의 결혼 잔치에 참여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결혼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여보내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은 마음에 종말론적인 스릴감을 주기도 한다.

 

열처녀 비유를 묘사한 그림
열처녀 비유를 묘사한 그림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비유를 성서신학적 차원에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국내 논문이 별로 많지 않고, 더군다나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서사적 분석으로 연구한 글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은 거의 대부분이 성경 난제 질문의 이슈로 이 비유를 다루거니 이미 우리가 많이 들어온 바있는 단어나 문장 해석 중심의 설명 글들이 대부분이다. 

 

  천편일률적인 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올바르니까 모두가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올바른 것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것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이나 새로운 도전은 항상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를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구조와 문체, 그리고 문학적 도구들, 서사적 도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비유를 보다 원의미에 가깝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참신한 참고사항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1. 열처녀 비유 전체 상세 구조와 특징 분석

  열 처녀 비유의 문학적 구조는 A-B-X-B'-A'의 교차대조법을 기본으로 하부의 미세 구조가 조직적으로 연결된 아주 잘 짜여진 히브리 평행법의 모범과도 같은 비유이다.

 

  A와 A'는 비유의 도입과 결론으로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가진다. B-X-B'는 비유의 본문으로, B는 신랑이 오기 전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상태를 묘사한 단락이고(25:2-4), B'는 신랑이 온 후 특히 미련한 처녀들의 상태(닫힌 문을 열어달라 간청한 것과 주님의 거절)를 집중적으로 묘사한 단락이다(20:10c-13). 

 

  내용을 보아 알겠지만 B와 B'는 신랑 오기 전 열 처녀의 모습과 신랑이 온 후 특히 미련한 처녀들의 모습이 대조된다.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에게 일어난 소동을 묘사한 부분으로 구조로 보면 비유의 중심적인 부분이다(20:5-10b). 

  우선 비유의 전체 상세 구조를 본다. 보다 문학적 구조 분석에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은 원문 성경의 순서와 직역을 사용했다는 점을 알린다. 

A. 도입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B. 신랑 오기 전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25:2-4)
  a. 2a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b. 2b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a'.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b'.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X.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에게 일어난 소동(20:5-10b)
    a. 
       a) 5a 신랑이 더디 오므로 
          b) 5b 다 졸며 잘쌔

      b.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b'.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a) 8a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b) 8b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c) 8c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a') 9a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b') 9b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c') 9c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a'. 
         b) 10a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a) 10b 신랑이 오므로

  B'. 신랑이 온 후 미련한 처녀들의 간청과 주님의 거절(20:10c-13)
  a. 10c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x.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a'.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A'. 결론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구조를 보면 주목되는 특징으로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 


  1) 문학적 구조로 보면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 단락의 문학적 구조가 가장 발달되어있다.

  X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20:5a)와 "신랑이 오므로"(20:10b)가 분명하게 대조되어 구분되는 단락이다. 이 단락은 하부 구조로 a-b-b'-a'의 교차대조법을 가지고 있고, 이 교차대조법의 하부에는 2차 미시적 구조가 4개나 추가되어있다.

 

  이 부분은 갑자기 닥친 신랑의 도착으로 열 처녀에게 일어난 소동을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대화로 묘사했는데, 이들의 대화가 이중으로 겹친 미시적 구조로 표현되어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서사적 효과가 뛰어난 부분이다. 


  비유의 결론은 마지막 단락인 A'인데, 문학적 구조의 중심은 A'가 아니라 열처녀에게 일어난 소동인 X라는 것이 다소 의외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스토리의 절정과 교훈은 B'와 A'에 몰려있다. 그런데 문학적 구조로 보면 교차대조법의 중심은 열 처녀에게 일어난 소동에 있다(X). 어째서 이렇게 비유의 구조를 만들었지는 예수님의 서사적 의도를 탐구하면서 본문을 분석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생각된다.


  2) 반의적인 인클루지오로 눈에 띄게 강조된 X의 a와 a' 

  이 부분은 X의 하부 구조로 a-b-b'-a' 모양의 최외곽 단락이다. 두 단락은 교차대조법에서 대조가 되는 짝이라는 기능을 하지만 두 단락을 맞대어 비교해 보면, 반대 내용이 서로 인클루지오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는 "신랑이 오므로"와 연결되고 "다 졸며 잘쌔"는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와 연결되는데 내용이 반의적이다.  

      a) 5a 신랑이 더디 오므로 
        b) 5b 다 졸며 잘쌔
        b) 10a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a) 10b 신랑이 오므로


  3) B' 단락은 신랑이 온 후 열처녀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한 단락이다. 

  이 단락은 문학적 구조 없이 내용만으로 보면 a'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중요한 교훈으로 마음에 남는다. 하지만 이 부분을 문학적 구조로 보면 마태가 의도한 강조점은 x의 미련한 다섯 처녀의 간청인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강조법은 대조되는 짝인 B의 표현과 다르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B는 동의적 평행법으로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과 미련한 처녀들의 행동을 동일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B'에 와서 마태는 비유의 초점을 간청하는 다섯 처녀들에게 맞추었다. 

  4)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구조적 특성은 오늘 우리들이 비유를 읽을 때 느끼는 강조점과 다르다.

  이는 우리는 내용의 흐름을 위주로 비유를 이해하여 잘 알려진 기-승-전-결의 구도로 보지만 예수님 당시인들은 내용과 함께 병렬적인 문학적 구조를 따라 비유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글 안에 담긴 구조는 거의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 당시인들은 글의 내용보다 글의 구조와 글의 구조가 만드는 병렬적 짝들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1세기 유대인들을 위해 설계된 문학적 구조가 나타내는 메시지와 우리의 이해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자로서 오늘 우리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참고사항이 된다.  

  이제 단력별로 좀 더 상세하게 문학적 서사적 특징을 살펴본다.

 


  1-1. A. 도입(25:1)

  1) 비유의 도입은 "그때"로 시작한다.

  "그때"(토테, Τότε)는 앞에 나온 비유(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24:45-51))의 끝 부분에 묘사된 장면인 24:50-51의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인이 올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앞 비유의 결론을 그대로 이어받아 논지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접속사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생각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주인이 올 때"에 일어날 사건의 두 번째 국면을 교훈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생각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주인이 올 그 때"에 대해 무엇을 교훈하기 위해 두 번 연이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는 두 비유를 비교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 비유를 비교해 보면 주인 또는 신랑의 오는 시기가 정반대이다. 이것으로 주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대해 보다 확장된 관점을 가지도록 이 비유를 가르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악한 종의 생각과는 달리(24:48) 일찍 온다(24:50). 그러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은 들러리들의 예상과 다르게 늦게 온다. 여기에다가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적 비유 시리즈의 마지막인 달란트 비유(25:14-30)를 보면,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는 "오랜 후에"(25:19) 온다.

 

  그러니까 세 비유를 함께 보면 주인공의 입장에 따라 주인이나 신랑의 오심은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이나 신랑의 오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인자의 날과 때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인자의 파루시아의 특징에서 비롯된 올바르지 않은 현상이다(24:36).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주님의 파루시아가 지연된다 생각하고 방심하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야 할 말씀이라 할 수 있다.


  2)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라는 도입구는 비유의 메세지의 지향점을 앞의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와 달리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비유의 특징은 천국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에서 빗대어 정의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실린 천국 비유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는 천국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비유들이다. 예를 들면, 마 20:1의 포도원 주인 비유가 이에 속한다. 이 비유의 도입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정의했다(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이 비유는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을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해서 품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비유의 메시지로 가르치는 비유이다.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가 이에 속한다.

 

  이것과는 정반대의 관점으로 천국에 대한 사람의 반응(성품, 행동, 태도 등)을 중심으로 천국의 특징을 설명한 비유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비유가 열 처녀 비유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 등이 같은 비유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비유들은 예수를 통해 도래한 천국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반응의 특징들을 비유의 주제로 삼는다. 그러니까 신랑의 결혼 잔치로 비유된 예수의 파루시아를 열 처녀가 맞이하는 모습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사건과 그 사건 속에 담긴 처녀들의 성품이나 태도가 비유가 묘사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이 비유를 해석하는 중심 타깃이 무엇이어야만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 된다. 이 중심 타깃을 잘못 설정하면 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로 비유의 해석을 채우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3) 우리 말 성경에는 "천국은 마치 ~와 같다"라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은 "하늘나라는…와 같을 것이다"로 미래형이다.

 

  "같을 것이다"는 "동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호모이오오"(ὁμοιόω)의 미래 수동태형이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 비유의 도입문구 중에서 독특한 모양이라 주목할 만하다.

 

  마태복음의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과 같다"라는 표현은 주로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먼저는 동사 "호모이오오"(ὁμοιόω)를 현재 직설법 수동태형인 "호모이오떼"(Ὡμοιώθη)"로 사용하는 경우이다(13:24, 18:23, 22:2). 그리고 두번째는 형용사인 "호모이아"(Ὁμοία)와 현재형 be 동사(ἐστὶν)가 결합된 형태(13:31, 33, 44, 45, 47; 20:1)로 사용되는 경우인데, 둘 다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경우와 같이 "호모이오오"를 미래 수동태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천국의 "마치 ~와 같음"은 단순한 직설법적인 비유적 설명을 넘어 신랑 예수의 파루시아 때 열 처녀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적 미래형이나 확정적인 미래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2. B. 신랑 오기 전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25:2-4)

  이 단락의 문학적 구조는 동의적 평행법으로 간단한 문장들로 구성되어있다. 

  1) a와 a'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것으로 대조되는 짝을 이루고 b와 b'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대한 것으로 대조되는 짝이다. a-b는 처녀들을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두 그룹으로 정의를 내림으로 시작한다. a'-b'는 a-b에서 처녀들을 두 그룹으로 정의한 이유를 알려준다. 

 

  비유가 처녀들을 두 그룹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이다. 비유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은 똑같이 등은 가지고 있다 말했다. 문제는 등은 가지고 있지만 여분의 기름은 가지고 있지 못한 처녀들이 있는 것이다. 비유는 이들을 미련한 자들이라 정의했다.

  a. 2a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b. 2b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a'.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b'.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슬기로움과 미련함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신랑이 결혼식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얼마든지 지연될 수 있음을 미리 고려하는 마음 자세와 연관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은 유대 풍습에 익숙했기에 결혼 풍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비유 이해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당시의 결혼 풍습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 유대인들은 결혼식 전에 약혼을 했다. 약혼한 신부는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자신의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결혼식과 날짜가 결정되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으로 간다.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 값을 지불한 신랑은 신부와 함께 밤에 신랑이나 신랑 부모의 집으로 "밤"에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신랑과 신부를 맞이했다. 들러리들의 임무는 결혼할 새 커플을 준비된 혼인 잔치 자리까지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러리들에게 "등불"(람파스, λαμπάς)이 필요했고, 신혼부부의 도착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지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등불"을 유지할 기름이 부차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들러리들이 횃불을 들고 결혼을 축하하는 춤을 추었던 것이 당시의 관습 중의 하나였음과 연결해서 이때 사용된 횃불이 비유에 나오는 등불이라 주장한다. 이 등불은 막대기에 천을 감아서 기름을 발라 불을 붙이는 횃불이다. 그렇다면 등불과 기름을 따로 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더 커진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 신부의 값(모하르)이 비싸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의 부모와 흥정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장에 늦게 도착하는 일은 경험을 통해 누구나 알고있는 상식이고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들러리가 할 수 있는 삶의 지혜요 슬기였다.

 

  비유에서 문제는 이 삶의 지혜에 무관심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비유는 여분의 기름 준비를 곧바로 슬기로움과 미련함의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다.


  2절의 "슬기로운"은 "신중한", "생각이 있는", "분별력이 있는" 등의 뜻으로 번역되는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이다. 이 단어는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현명하고 사리에 맞는 판단이나 결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상황을 분별력 있게 파악해서 사고의 가능성을 미리 대처하는 태도나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이런 해석이 올바르다면 "기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은 이 비유의 해석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질문을 비유 해석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다양한 명제적 의미를 해석해서 가르쳤다. 온라인에서 "열처녀 비유의 기름"이라 검색해 보면 기름은 이런 의미라고 설명한 글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거룩하게 구별된 삶,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 믿음, 복음에 대한 깨달음, 기도 ... 


  하지만 기름은 특별한 의미를 뽑아내야만 하는 비유의 핵심 진리가 아니다. 비유가 문제를 삼는 것은 기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여분의 기름을 미리 준비한 슬기로운 분별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유 본문과 구조에는 기름과 상응하는 주제가 나오지 않는다(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면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마음 태도"는 "깨어있음"으로, 깨어있음은 "슬기로움"으로 상응하여 비유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것이 분명한 것은 비유의 결론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기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기름이 비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을 "깨어있음"으로 마무리했다(25:13). 

 

  마태복음 24-25장에서 "깨어있음"은 인자의 파루시아의 때를 알 수 없는 불가지성에서 비롯되는 제자도의 필연적이고 유일한 모습이다(24:42, 43, 25:13).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를 그 누구도 알 수 없음은 마태복음 24-25장의 세 개의 비유에서는 다양한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다.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에서 주인은 생각과는 달리 일찍 오고(24:50), 열 처녀 비유에서는 늦게 온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에서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는 "오랜 후"로 나온다(25:19). 이는 비유의 주인공들의 정황에 따라 인자의 종말론적 파루시아의 때를 체감하는 것이 다르다는 암시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를 통틀어 가장 슬기로운 대처 방법은 깨어 인자의 파루시아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 깨어있음으로 비유의 주인공들의 정체가 판정된다.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에서는 깨어있음으로 "충성됨과 지혜있음"과 반대인 "악함"이 판별되고(24:45, 48), 열 처녀 비유에서는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판별되고, 달란트 비유에서는 "착함과 충성됨", 그리고 "악함과 게으름"이 판별된다(25:23, 26). 특히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의 "지혜 있음"과 열 처녀 비유의 "슬기로움"은 "프로니모스"(φρόνιμος)로 같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비유의 결론인 깨어있음이 기름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때를 알 수 없는 신랑의 파루시아를 준비해서 신랑을 성공적으로 영접하는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마음가짐과 연관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3. X.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에게 일어난 소동(20:5-10b)

  비유 본문의 중심인 X는 두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는 신랑의 지연으로 처녀들이 기다림에 지쳐 조는 장면으로 a 단락이다. 두 번째는 갑자기 신랑이 도착해서 처녀들에게 발생한 소동인 b-b'-a' 단락으로 여기에 분량이 대부분 몰려있다. 

  1) 하지만 a 단락은 문학적 도구로서, 서사적 도구로 차지하는 기능이 의미심장하다. 
  먼저 문학적 도구로 보면, a 단락은 a' 단락과 어울러 인클루지오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신랑의 더디 옴"(a))과 "신랑의 옴"(a))이 반의적으로 대조 강조되고, 졸며 자는 시간과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시간이 다섯 처녀들의 미련함을 상호보완적으로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 모양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신랑의 행차로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게 일어나는 소동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두 번째로, 이 부분은 비유에서 서사적으로 결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25:13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이다. 이 결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부분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로 표현된 a)-b)이다. 이 부분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들의 미련함이 다시 한번 더 크게 부각되는 부분이다.

 

  비유는 이미 B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말했다. 이 표현은 결론인 "그런즉 깨어 있으라"라로 보면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이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보면서 처녀들이 미련하게 행했다 판단한다.

 

  하지만 X의 a와 a'를 보면 미련한 처녀들의 미련함이 얼마나 대책없는 미련함인지 확실하게 보게된다. 이는 이들이 신랑이 아직 오지않은 시간 때문에 생긴 여분의 기름을 채울 수 있는 찬스를 졸음으로 완전히 날려버렸고, 이것이 "그런즉 깨어 있으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표현을 보면 열 처녀가 모두 신랑을 기다리다 졸았다("다 졸며 잘쌔"). 하지만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비유의 결론에 적용되지 않아 미련하다는 평가에서 제외된다. 이들은 신랑의 관점에서 보면 잠을 잦지만 결혼식을 섬기는 들러리로서는 깨어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면에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은 졸며 잘 시간을 대칭되는 행동인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로 만들 수 있었지만 잠을 잦다. 그렇게 졸다가 신랑이 온 후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저희가 사러 간 동안"을 하고 만다. 그러니 신랑의 관점에서 보면 이 처녀들은 신랑의 결혼 잔치에 무관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잠을 잔 것이다.

 

  비유는 미련한 처녀들이 미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찬스가 있었음과 미련한 처녀들이 이를 슬기롭게 활용하지 못했을 인클루지오와 같이 작동하는 구조를 통해 암시해준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미 미련한 처녀들이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미련함이 단순하지 않고 아주 심각했다고 느끼게 된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사러 갈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진 후 여분의 기름을 사러 가는 웃지못할 어리석음을 행한다. 비유의 결론인 "그런즉 깨어 있으라"로 보면, 이 모든 행위가 미련한 처녀가 졸며 잔 것으로 판명된다. 

  여기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디 오므로"는 "끄덕거리다", "꾸벅꾸벅 졸다"로 번역될 수 있는 "뉴스타조"(νυστάζω)이다. 그래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를 "신랑이 꾸벅꾸벅 졸다 시간이 걸려 모두 다 잠잤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으로 보면 열처녀의 상황이 잠으로 충만해서 신랑이 졸았고 열 처녀들도 졸며 잠을 잔 것이다. 심각한 미련함을 가진 처녀들과 잠으로 충만한 상황의 결합은 신랑의 결혼 잔치를 위해 들러리로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극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 본문의 묘사 방법들을 모두 모아보면 미련한 처녀들의 미련함은 더욱더 크게 강조된다. 신랑이 졸고 있어 늦는다 생각되었으면 기름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하여 점검하는 것은 상식적인 조치이다. 게다가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지체된 시간을 기름을 채우는 시간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고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 지연으로 생긴 여분의 기름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심각한 미련함에서 비롯된 잠자는 것으로 날려버렸다. 이는 이들의 깨어 준비하는 태도가 대단히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2) b와 b'는 갑작스럽게 신랑이 도착함으로 일어난 소동을 처녀들의 대화로 설명한 단락이다. 

  b에서 처녀들은 신랑이 도착했고 이제 신랑을 맞으러 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모두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다(b'). 이때 열 처녀에게 일어난 문제를 보게 된다. 기름이 부족해서 등불이 꺼지려 한 것이다. 여분의 기름이 필요해졌다. 문제는 미련한 처녀들에겐 사용할 기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주님께서는 처녀들의 대화로 설명해주셨다. 


  주님의 설명은 a)-b)-c) 세 개의 단락이 반복되는 동의적 평행법이다. a)-b)-c)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나누어 달라 청한다. 하지만 a')-b')-c')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면 모두에게 기름이 부족해져 신랑을 맞이할 수 없으니 차라리 기름을 사 오라 제안했다.

 

  미련한 처녀들이 이 제안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고 행동한 것으로 보아 이 제안은 합리적인 제안임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제안은 신랑을 맞으러 오기 전이나 신랑을 기다리던 시간에 실행했어야만 했던 유통기한이 다한 무가치한 제안이다. 어쩔 수 없이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갔고, 그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고 말았다.

  3) 여기에서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은 처녀들의 비정함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비유가 묘사하는 관점은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처녀들의 비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한 처녀들의 미련함에 있다. 그러므로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은 처녀들의 비정함을 성토하는 해석은 예수님의 비유를 올바로 듣는 자세가 아니다.

 


  1-4. B'. 미련한 처녀들의 간청과 주님의 거절(20:10c-13)

  이 부분은 읽으면 읽을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부분의 문학적 구조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이 닫힌 상황(a)과 신랑이 미련한 처녀들을 모른다고 거부하는 상황(a')이 대조되고, 교차대조법의 중앙에 문을 열어달라는 미련한 처녀들의 간청이 배치되어 있다(x).

 

  이 구조는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힌 것이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는 주님의 냉담한 선언보다 미련한 처녀들의 애타지만 부질없는 간청을 강조한다. 이로서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파루시아를 깨어 준비하지 못한 미련함이 만든 애처로운 결과를 청자들의 마음에 메아리치도록 하신 것이다.

  1) 여기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을 "준비한 자들"(아이에토이모이, αἱ ἕτοιμοι)이라 부른다.

  이 표현은 비유가 열 처녀를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나누는 기준을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알려준다. 신랑의 파루시아를 "준비한 자들"은 슬기로운 자들이고 신랑의 파루시아를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다.

 

  이 표현은 결론의 "깨어 있으라"는 명령과 결합해서 이 비유가 우리들에게 궁극적으로 가르치려 하는 바를 "깨어 준비함"으로 집약해준다. 
  
  2) 첨언으로, 여기에서 미련한 처녀들에 대해 이들은 구원을 상실한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교회에만 다니는 껍데기 그리스도인인가라 묻는 질문은 비유 본문을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비유와 무관한 질문으로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물론 비유의 설정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굳이 답을 원한다면 관련된 다른 말씀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고 성경적이다. 


  게다가 이 질문은 현실적인 질문도 아니다. 비유의 알레고리적 경향을 참조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신랑 예수의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교회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열 처녀와 같다 할 수 있다. 

 

  오늘날 모든 교인들은 열 처녀와 같이 신랑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참 그리스도인이고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될 사람들을 구원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이나 껍데기 그리스도인이라 우리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의 믿음의 진실성을 판별할 수 없고, 종말론적 심판에서 나타날 최후의 판결로 우리들을 돌아볼 수 있는 자도 없다.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시점에서는 이 질문에 답이 있다. 그러나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 처녀들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는 예수님의 파루시아를 깨어 준비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1-5. A'. 결론(25:13)

  "깨어있으라"는 결론적인 명령 앞에는 "그런즉"이라는 접속사가 있고, 뒤에는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접속사 호티(ὅτι)가 있다. 

 

  "깨어있으라"는 결론은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라 했던 비유의 도입과 대조를 이루며 비유를 마무리한다. 천국이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은 깨어있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이다.


  그러면 왜 천국은 깨어있어야만 하는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이 운영되는가? 

  우리는 그 누구도 인자의 파루시아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신랑의 파루시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신랑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들을 신랑의 잔치에 함께 들어가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마태복음 24-25장의 종말론 비유들이 경계하는 것은 인자의 파루시아가 아직 멀다라 단정하거나 이제 금방 올 것이라 단정하는 우리 맘의 성경적인 근거없는 결단이다. 비유에서 천국은 현재의 나의 준비로 미래가 결정되는 나라로, 천국 입성의 시기를 그 누구도 알지못하기 때문에 현재적인 긴장으로 항상 준비해야 하는 종말론적인 기다림의 나라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신랑이 오실 때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로 판정된다. 

 


2. 요약과 마무리

  열 처녀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문체, 서사적 의도를 중심으로 관찰해 보았다. 이 비유의 요약은 아주 간단하게 정리된다.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시와 때를 알 수 없는 인자의 파루시아를 항상 준비하는 삶이다. 특히 신랑 되신 예수님이 "꾸벅꾸벅 졸아 시간이 걸리는 것 같이" 느껴져 영적인 졸림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어찌 보면 이 비유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핵심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도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알아내기가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비유의 메시지가 주는 마음의 부담은 너무나 커서 괴롭다. 남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이며 과거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미래의 이야기, 그것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절규가 결정되는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 그렇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공과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달린 후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사랑하는 가족, 부모님, 형제, 친구들이 내 주변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너무나 열심히 인생을 살다 보니 인자의 파루시아에 대한 각성을 잃어버린 내 마음을 보게 된다. 나의 달려간 길이 목회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닫힌 문 안쪽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절망의 선언을 들을지 모르는 미련한 삶이다. 

 

  처녀들이 준비해야할 기름이 무엇인지 신학적으로 이것 저것 따지기 전에 비유를 통해 깊은 고민과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실제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양심이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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