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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1-12장(1)

by 예다준 2022. 8. 6.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1-12장(1)

 

  10장에서 제자 파송 강화를 주신 주님께서는 다시 전도하기 위해 떠나셨다(11:1). 이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다. 세례 요한의 질문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였다(11:3). 이 질문은 주님을 기다리던 메시야라 소개한 세례 요한이 제기했다는 것으로 당혹스러운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예수가 기대하던 메시야와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의 눈으로 보면 자칫 잘못하면 실족의 위기 앞에 서 있는 불신앙이다(11:6). 이에 주님께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앙을 경계하는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11장이 시작된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오해와 불신앙이 마태복음 11-12장을 이끌어가는 중심 주제가 되고 마태복음 11-12장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들을 모아놓은 성경이 되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초청을 담은 두 개의 기사(11:25-30; 12:15-21)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을 다루는 6개의 기사(11:2-19; 11:20-24; 12:1-8; 12:9-14; 12:22-37; 12:38-45)로 구성되어있다.

 

1. 직선적 논리 구조를 따른 분석

  마태복음 11-12장의 이야기들을 오늘 현대인이 사용하는 직선적인(linear) 논리 순서대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1(11:2-19)
  + 세례요한의 질문
  + 불신 세대에 대한 장터 아이들 비유

2.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 2(11:20-24)
  +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라신과 벳세다의 회개치 않음

3. 주님의 초청1(11:25-30)
  + 아버지의 뜻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아버지를 알게 한 숨김과 나타내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초청

4.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3(12:1-8)
  안식일 이삭 잘라 먹은 논쟁과 안식일의 주인

5.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 4(12:9-14)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 논쟁

6. 주님의 초청2(12:15-21)
  치유의 결과 : 심판과 이방을 향한 초대

7.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5(12:22-37)
  + 예수의 치유와 바알세불 논쟁
  + 성령훼방죄와 말에 대한 심판 말씀

8.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 6(12:38-45)
  + 바리새인의 표적 요구와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위한 요나의 표적
  +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된 악한 세대에 대한 비유

  이것은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문단 나누기와 같은 방식이다.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는 논리 방식, 즉 사고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 방식은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논리를 진행하고 그 주제가 끝나는 지점을 한 문단으로 나누고 또 다른 주제를 진행하는 식의 직선적 논리로 순차적 순서(sequential order)로 문맥(literary context)을 펼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현대인의 논리 방식을 도식화한 것이 문단 나누기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성경을 볼 때 문제를 만든다. 성경 저자인 마태는 2개 이상의 주제들을 병행적으로 진행하는 논리 방식을 사용하는 히브리인들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 방식은 순차적 순서 보다는 두 개 이상의 주제를 짝으로 묶어서 만든 레이아웃들을 작자의 맘에 따라 번갈아가면서(예를 들자면 한 번은 A 레이아웃, 그다음은 B 레이아웃, 그다음은 작자의 맘에 따라 A 레이아웃이 아니면 또 다른 C 레이아웃의 순서로) 전개하는 병행적 연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현대적 논리로 구분한 문단들의 연관관계를 찾아서 서로 상응하는 짝을 찾아보면 마태가 사용한 병렬적 논리에서 사용된 문체와 구조를 알 수 있다. 

2. 히브리인의 병렬적 논리 구조를 따른 대조와 분석

  때때로 현대인의 논리에 따른 문단 구분과 성경 저자들의 병렬적 논리에 따른 문단 구분이 서로 다를 경우가 있다. 그런데 다행이도 마태복음 11-12장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8개의 문단들을 현대인의 논리 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병렬(행)적 논리 방식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두 문단이 연합하여 한 문단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보다 심화된 메세지를 드러낸다면 마태가 평행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았다 말할 수 있다. 
  앞에서 그려본 전체 개괄 도표를 보면 1과 8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거절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단락과 마지막 단락의 주제가 같다는 것은 두 단락이 문학적 구조의 가장 바깥 레이아웃이라는 말이다. 이 레이아웃이 평행법의 레이아웃인지 교차대조법의 레이아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병행법의 레이아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단락들을 외곽 레이아웃에서 안쪽 레이아웃으로 진행하면서 비교하는 것이 쉽게 문학적 구조를 찾는 요령이다. 이에 1과 8을 그리고 2와 7의 순으로 비교 관찰한다.

 

  2-1. 문단 1과 문단 8

  가장 먼저 1과 8을 비교해 보면,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지않고 거부하는 "세대"에 대한 가르침으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 11-12장에서 두 문단에만 예수를 거부하는 세대에 대한 주님의 비판이 비유와 동반되어 나온다. 이것은 문학적 구조의 짝을 탐색할 때 아주 중요한 가치를 발휘한다. 단락 1과 8은 아래와 같이 "불신적 질문과 요구 + 비판적인 비유"'라는 독특한 하부 구조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하부 구조는 단락 1과 8이 비록 다른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같은 구조와 같은 주제로 서로 연계되었음을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증거가 된다.   
  
문단1
 a1. 세례 요한의 실족 가능한 질문
    a2. 불신 세대에 대한 장터 아이들 비유
문단 8  
  a1'. 바리새인의 악하고 음란한 표적 요구
    a2'.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 악한 세대에 대한 비유

  문단 1에 담긴 비유에서 예수님은 예수 천국을 거부하는 "지혜롭지 못한 세대"를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부르는 놀이 비유로 표현하셨다. 아이들의 놀이는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애곡을 하면 가슴을 치는 놀이이다. 비유에서 피리를 부는 아이와 곡을 하는 아이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의미하고 춤을 추고 곡을 하는 아이는 예수님 당대인들, 불신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천국 잔치를 했고 세례 요한은 회개의 금식을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세례요한은 귀신 들렸고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죄인들의 친구라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겼다(11:18-19). 손바닥은 서로 부딪쳐야 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헐뜯고 비난함으로 하나님의 손을 빈 손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완악함을 행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을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라는 경구로 마감하셨다. 이는 예수님 보기에 당대인들의 불신은 "지혜롭지 못함"의 결과라 판단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에 나오는 예수님의 당 세대에 대한 비유는 1의 비유와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지만 주제를 보면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가 "악한 세대"에 대한 비유(12:45)라고 불신하는 세대의 정체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1의 비유와 접촉점을 분명히 동일하게 제시해주셨다. 이 비유의 특징은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 악한 세대의 예언적이고 미래적 상황이다(12:45,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한 사람에게서 나간 더러운 귀신이 떠돌다 전에 집으로 삼았던 사람에게로 갔다. 그런데 그 집은 소제되고 수리되어 이전보다 살기에 더 좋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귀신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사람)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한 해석에는 논쟁이 많다. 하지만 비유의 메세지는 주님께서 알려주었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는다. 그것은 집이 소제되어 이전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12:45). 
  1의 지혜롭지 못한 세대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 당대인들이 왜 불신의 세대가 되었는지 이유를 알리는데 중심이 있고, 8의 악한 세대에 대한 비유는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맞게 될 미래적 운명을 예언적으로 제시하는 데에 중심이 있다. 그러니까 두 문단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당대인들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맥이 서로 상응하는 짝으로 기능한다. 

 

  2-2. 문단 2와 문단 7

  2와 7 문단을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두 문단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두 문단은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최악의 거부로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의 불신과 거부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을 불심판을 받은 소돔보다 더하다 비판하셨다(11:23-24). 소돔은 죽음을 보지 않고 지옥의 불 심판을 받은 극악무도한 불신의 도시이다. 
  7에서는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는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들려서 축사한 것이라 비난했다(12:24).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불신과 완악함인지 주님께서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 죄라 말씀하셨다(12:31).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 훼방 죄는 살아있으나 사함이 불가능한 죄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주님을 향한 비난은 그들이 살아있으나 이미 지옥의 형벌이 결정된 죽은 자가 되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유대인의 불신에 대해 아직 살아있지만 이미 지옥의 죽음이 예약된 것과 같은 극한의 완악함에 이르렀다고 전혀 다른 두 사건을 통해서 반복해서 선언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3. 문단 3과 문단 6

  3과 6은 어떤가? 일단 두 부분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거부가 일색인 11-12장에서 예수님의 초청을 담은 전혀 다른 주제를 가진 문단이다. 그래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자연스럽게 눈에 띈다. 게다가 이 부분들은 두 개의 "불신과 거부" 기사들 사이에 끼어 평면적으로 보면 2+1+2+1+2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구조는 가운데 2를 중심으로 서로 짝을 이루어 아래와 같은 문학적 모양을 만든다.

 2 불신과 거부
    1 예수님의 초청
       2 불신과 거부
    1 예수님의 초청
  2 불신과 거부

  이 모양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문학적 구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닌 의도적인 배치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런 구조에서 내용이 서로 연관된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문학적 구조의 짝으로 보아야만 한다.
  두 부분의 내용을 보면 상호관계를 알 수 있다. 먼저 3의 초대에서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고 천국 초대에 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라 정의하셨다. 이는 바로 앞의 기사인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한 곳이 회개하지 않았던 사건과 연관 지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예수를 깨닫는 계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큰 권능을 경험했음에도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계시가 없으므로 자신들은 예수의 천국이 필요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자라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와 완악함을 지혜롭고 슬기롭다 생각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감탄했다(11:26). 어째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천국 가르침을 불신으로 거부하는데 하나님의 뜻이라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대조의 짝을 이루는 6에 나온다. 이것이 두 문단이 짝을 이루어 서로를 보완해주는 병렬적 논리의 효과이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 사람들을 구원에로 초대하신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6은 3과 동일하게 초대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두 내용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믿음의 문이 열리는 새로운 초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상관성이 의미심장하다. 
  6의 초대를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고치신 후 소문내지 말라 함구를 명하셨다(12:15-16). 문제는 이 함구 명령이 단순히 조용히 있고 싶어서 내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태는 이 명은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서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명이라 꼬집어주었다. 그것은 불신자에 대한 심판과 이방인의 구원이다. 인용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택한 종은 성령으로 (불신과 거부와 핍박 속에서도) 다투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가만히 받은 바 사역을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할 것이라 예언했다(12:18-20). 마태는 예수님께서 불신과 거부와 핍박 속에서 있지만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 그 마지막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 경고했다 증거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심판의 결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되고(12:18) 그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새로운 초대의 개막이 생긴다는 것이다(12:21). 다시 말해서 심판과 새로운 믿음에로의 초대가 일어난다. 이로서 독자들은 마태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천국에로의 초대가 종국에는 마 28:18-20과 같이 실행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3과 6의 초대는 극심한 불신과 거부를 이기고 예수의 천국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알려준다는 면에서 서로 연관성이 깊다. 아버지의 뜻대로 계시를 받아 예수 천국을 영접할 초대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완악함으로 초대를 거부한다. 그 증거 목록이 마태복음 11-12장의 불신과 거부 이야기들로 모아져 있다. 이들의 불신과 거부는 곧바로 심판으로 치환된다.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이들의 거부는 즉시로 종말론적 심판의 증표가 되어 구원에로 초대받는 은혜가 다른 이에게로 옮겨진다. 이제 이들에게 필요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외에 없다. 
  3의 초대는 예수를 믿는 자가 어떤 자인지 그들의 정체를 보여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6의 초대에는 주님께서 불신과 거부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사역을 강행하는 이유와 그 결과로 불신의 유대인들은 심판을 받고 이방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려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초점이 다른 두 개의 주님의 초대를 연결하면 앞에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구원의 은혜가 옮겨가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이 보인다. 이것이 마태복음 11-12장이 히브리적 문학 구조로 기록되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이다.

 

  2-4. 문단 4와 문단 5

  마지막으로 4와 5의 관계가 남았다. 4와 5는 천국을 가시화한 주님의 치유 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두 부분의 배경이 동일하다. 둘 다 안식일에 일어난 논쟁이고, 주제도 사람을 살리는 것(배고픔을 채우는 일과 손 마른 자를 치료하는 일)으로 같다. 시비를 건 자도 같고, 그들의 믿음과 논리의 허점(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와 12:1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을 꼬집어 무력화시키는 예수님의 대응 방식도 같다. 하지만 핵심 주제는 서로 달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4의 핵심주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고, 안식일의 주인인 인자는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배고픈 자가 먹을 것을 타작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5의 핵심주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에도 할 수 있는 선한 일임과 안식일이라도 자기 양은 살려주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꼬집는 것이다. 두 개의 주제를 예수에 대한 불신과 거부로 둘러싸인 11-12장 전체 안에서 보면 예수의 치유에 대해 두 가지 교훈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먼저는 치유자 예수의 신적인 권위(사람을 살리는 안식일의 주인)와 예수의 치유의 정당성(선한 일)이다. 예수의 사역은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가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신적인 일이고 성경이 말하는 바(11: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와 같은 일이다. 두 번째는 예수를 불신하고 거부하는 것에 대한 평가로, 그것은 하나님(안식일의 주인인 인자)과 성경에 대한 무지이고 동시에 비성경적이고 비도덕적인 위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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