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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마태복음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3장(2)

by 예다준 2022. 8. 8.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 : 마태복음 13장(2)

 

 

2. 각 레이아웃에 대한 설명과 발견할 수 있는 메세지

  이제 각 레이아웃들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하나씩 대조하며 메세지를 살펴보고, 전체 메세지를 통합하여 살펴볼 차례다. 

 


  2-1. 씨 뿌리는 비유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비유(A와 A')

  먼저  "씨 뿌리는 비유"를 본다. 비유에 대한 해설을 보면 씨 뿌리는 비유는 씨를 뿌릴 때보다는 씨 뿌린 후 결과에 집중하는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씨를 뿌린 이후 나타난 결과에 대한 비유라 말하는 것이 조금 더 메세지의 핵심을 잘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는 천국의 말씀을 친히 뿌렸고, 뿌린 후에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또는 결과)들을 목격한 주님께서 관찰한 바를 친히 분석하고 평가한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의 천국 말씀을 잘못 받아들인 상태와 합당하게 받아들인 상태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진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비유의 결론은 간단하다.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만 예수 천국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던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4가지(길가, 흙이 얇은 돌밭, 가시덩굴 밭, 좋은 땅)로 나누고 그 마음들이 말씀을 받아 나타내는 현상들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주셨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예수의 천국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열매이다. 이는 네 개의 밭 중 결과가 극명하게 비교되는 길 가와 좋은 땅에 대한 비교 분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마태는 두 경우를 모두 "깨달음"으로 평가했다(19절-깨닫지 못하고, 23절-듣고 깨달아 결실을 하여). 중간의 두 밭에 대한 평가도 깨달음과 직결되는 열매가 없음으로 평가했다(21절-뿌리가 없어 넘어짐, 22절-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함). 여기에서 말씀은 길 가와는 다르게 싹이 나고 자라는 생명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농부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 식물이 죽지 않고 단지 살아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열매(삼십 배 육십 배 백배)를 맺어 추수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씨를 뿌린다. 이런 이유에서 주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어떤 상황에서도(21절-말씀으로 인한 환란과 핍박, 22절-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지속되어 결국 합당한 열매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닌 것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참으로 깨달은 자는 어떤 열매를 맺는가? 씨 뿌리는 자 비유는 이 열매의 정체를 엄청난 성장으로만 설명했다. 깨달음의 열매는 이것이다는 방식으로(이를테면 사랑처럼) 말하지 않고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라는 성장의 양으로 묘사했다(13:8). 이것의 강조점은 어떤 수준의 양이 든 간에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반드시 놀라운(또는 폭발적인) 성장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말씀을 깨달았다면 씨 한 알의 말씀은 반드시 30배로, 60배로 더 나아가서는 100배로 열매 맺는다는 말이다(주님께서 원하는 열매의 구체적인 모습은 전체 구조의 후반부인 C와 C' 그리고 A'에 실체가 드러난다). 


  이와 동시에 이 비유는 열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조건도 알려준다. 그것은 씨가 뿌려지는 사람의 마음이다. 뿌려진 씨앗인 말씀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말씀이 열매를 맺고 맺지 못해 실패하는 유일한 이유는 말씀이 뿌려지는 장소인 마음의 상태에 달려있다(19절). 길 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말씀이 뿌려지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갈 수 있다. 또 돌밭과 같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은 잠시 견디기는 하지만 돌 때문에 말씀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넘어져 죽어버리고 만다. 또 어떤 말씀은 싹이나 자라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가시덤불에 가려져 죽지 않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적은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예수 천국의 현재는 결국 사람의 마음 때문에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와 관련 깊은 것이 비유를 보면 성공과 실패 확률이 1:3의 비율로 마치 천국 씨앗이 허무하게 낭비되는 것 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성공한 하나의 경우가 만드는 소득은 뻥튀기 수준으로 급상승 곡선을 그린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모든 비유들이 가진 기본 틀(프레임)이다. "실패한 것 처럼 보이는 천국의 현재"와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만드는 천국의 미래"가 대비되는 프레임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모든 비유는 예수 천국의 현재는 형편없다는 사실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천국의 미래는 상상을 초월한 번성과 영광을 이룬다. 이것은 실패처럼 보이는 예수 천국의 현실과 현재를 보지 말고 놀라운 성장을 이루는 천국의 미래를 주목하도록 격려하는 기능을 한다. 예수의 천국은 초라한 현재적 모습과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이루는 미래적 모습이 마치 손바닥의 앞과 뒤처럼 공존해 있다. 이것이 예수 천국의 "비밀"이다(11절). 그 비밀을 제자들만 깨닫도록 설명하신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수수께끼 같은 비유들이다. 결국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 비유를 종합해보면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예수 천국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 통해서 열매의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으로 보인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핵심 메세지라는 관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마지막 비유인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비유와 의미상 대조를 이루는 짝이 된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의 핵심 주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비유는 깨달음에 이른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준다. 그래서 13장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씨뿌리는 비유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는 평행법의 최외곽 레이아웃인 A와 A'가 되는 것이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비유는 현대인들에게는 의미에 대한 상세한 해석 이전에 본문 내용 파악도 어려운 난해구절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문장이 엉성하고 문맥이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해석에 논쟁이 많다. 하지만 이 비유의 개괄적인 메세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평행법의 구조를 감안해서 보면 엉성하게 보이는 문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비유는 51절의 예수님의 질문 "이 모든 것(즉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과 그에 대한 가르침)을 깨달았느냐?"와 연관된 비유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다 깨달았다" 답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러므로"라는 말로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그러므로"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비유가 제자들의 대답 때문에 나온 것임을 알게 해준다.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제자들의 대답에 대해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진짜로 다 깨달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하게 그려주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의 대답에 대한 부가적 교훈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가 주어졌다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무엇보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라는 단어로 확인할 수 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예수의)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이라는 말과 동일한 용어이다. 서기관은 율법학자로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선생이다. 그러면 (예수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천국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이다.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달리 아주 많이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 법을 완전하게 가르치는 메시야적 교사로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완전하게 깨달은 사람들로 그린다는 점이라 입을 모은다. 여기에서 메시야적 교사인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은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다. 즉 주님의 가르침을 "다 이해한 자"="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 는 등식이 A와 A'를 연결해서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결론이 된다. 
  이를 강화해주는 것이 52절의 "옛 것"과 "새것"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들은 산상보훈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5:21, 33)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 34)라는 문구로 알려진 "율법에 대한 옛 해석"과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해석인 "메시야적 율법"을 생각나게 한다.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제자는 단지 예수를 믿는 것만이 아니라 옛 율법 해석을 버리고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율법 해석을 깨닫고 서기관처럼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의 율법 해석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옛 율법 해석을 성취하고 완성하는 메시야적 율법이기 때문에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서기관과 질적으로 다른 예수를 통해 도래한 새 시대의 서기관이다. 이들이 옛 율법 해석을 폐기하고 예수가 가르치는 새로운 율법 해석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행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인 제자들이 옛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행동은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고 스스로의 자발적인 결단으로 만들어낸 열매이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52절의 "집주인"으로 묘사하셨다 보인다. 종은 자기 맘대로 곳간의 물건들을 처분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주인에게만 있다. 참 제자는 천국의 서기관과 같고, 동시에 곳간의 물건들을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집주인과 같다. 이것이 예수 천국의 비밀을 온전히 깨달은 제자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제 첫 번째 레이아웃인 A와 A'를 연결해보면 A 레이아웃이 의미하는 메세지가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합당한 열매를 맺는 제자(A)는 곧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과 같은 사람이다(A'). 이런 이유로 씨뿌리는 비유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비유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의 도입과 종결의 역할을 하는 아주 훌륭한 짝이 되어 교차대조법의 최외곽 레이아웃으로 기능을 한다.

 

  2-2. 막간(10-23과 34-43)

  이 부분을 막간으로 구분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비유가 아니기에 비유로 이루어진 다른 본문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다음 이유가 더 중요하다. 두 번째로 이 부분은 공히 구약을 인용한 비유의 목적에 대한 설명(10-17절과 34-35절)과 앞에 언급된 비유에 대한 설명(18-23절과 36-43절)이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마태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유가 중심인 마태복음 13장을 분석할 때 이 부분을 "막간"(intermission)이라는 하나의 레이아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막간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와 목적을 구약 성경을 토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는 일에 선지자의 예언적 배경이 있음을 나타냄으로 주님의 비유 사용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구속사적 경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동시에 주님의 행동은 단지 가르치는 행동이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가르치는 메시야적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B와 B'가 인용한 구약 성경을 대조해보면 막간의 기능을 쉽게 알 수 있다. B의 인용 성경인 13:14-15과 B'의 인용성경인 13:35을 이어 보면 인용구만으로 서로 문맥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B의 인용구 :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B'의 인용구 : 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13:14-15의 이사야서 인용구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아 버린 사람들이 더 이상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을 선언한 말씀이다. 이것이 천국을 거부하고 예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예언에는 비유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있지 않다. 이때 이어지는 마태복음 13:35의 구약 인용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아무리 듣고 보아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비유, 즉 수수께끼로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기는 가르치되 비유로 빗대에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자는 듣고 깨닫지만 마음이 완악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자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선지자는 이를 미리 내다보고 예언을 했고 주님께서는 예언된 말씀의 때가 무르익은 것을 아시고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막간은 주님께서 비유를 어쩌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준다. 예수님의 비유 사용은 예언을 성취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두 개의 구약 성경이 실행될 상황이 이루어졌다.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아 버린 사람들과 좋은 땅과 같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구분되었다. 그래서 선지자의 예언대로 비유를 사용해야 하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적인 상황이 무르익은 것이다(마태복음 11-12장). 이 때문에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했다 설명하는 것이 막간의 구약성경 인용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막간은 비유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세 가지 사항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막간은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대한 것임을 명백하게 정의 내려준다. 제자들은 첫 번째 비유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듣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비유로 가르치는 것에 당황해했고(13:10), 가라지 비유를 듣고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설명을 요구했다(13:36, 막 4:13). 주님의 설명이 없다면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 중 그 누구도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천국의 비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막간은 비유 이해에 결정적이다.  


  2) 막간은 두 비유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준다. 즉 비유가 담고 있는 진짜 메세지와 비유에 사용된 각 요소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준다. 이것이 없다면 비유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우리의 해석이 중구난방이 될 것이다. 씨가 무엇을 말하는지, 씨를 가로챈 새는 무엇인지, 돌은 무엇이고 가시떨기는 무엇인지 말한 당사자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3) 세 번째로 막간은 우리에게 비유 해석의 범위를 생각하게 해 준다. 주님께서는 씨, 새, 돌, 가시떨기 등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었지만 열매는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았다(18-23).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에도 이런 사례가 많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질문이 생긴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비유 해석의 범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님(성경 저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의 의미를 애써 찾는 일은 무가치하며 더 나아가 해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도 그것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고, 교회사를 보면 절제되지 않은 억측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미혹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의미를 설명하지 않은 것들은 의미 부여가 필요 없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을 빼놓고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강요한 무례하고 엉성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운 권능을 경험했다(13:54). 이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15:12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을 듣고 마음이 상했다 말했다. 이는 대적자들도 주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았을 뿐이지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마음의 완악함이었다. 결론적으로 비유를 이해하는 데는 성경의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설명이 없는 것들에게 굳이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고 더 나아가서는 완고한 길로 가는 발걸음이 된다.

  마지막으로 막간의 기능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마태복음이 병렬적 논리로 기록되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오늘 우리들의 논리 구조로 보면 B의 인용구와 B'의 인용구를 떼지 말고 그냥 이어놓으면 쉽게 이해된다. 이는 우리의 논리 구조가 한 가지 논리를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두 개의 논리가 짝을 이루어 병행하는 이중적 논리 구조를 가졌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생소한 평행법이 나온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두 마디 말을 한꺼번에 번갈아 표현했고 이를 잘 이해했다. 그래서 막간의 구약 인용을 떼어서 중간에 다른 주제를 끼워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잘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태는 괜히 말을 끊고 중간에 다른 말을 하다 다시 이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아니면 전혀 관련 없는 말들을 이것저것 불연속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2-3.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주인(밭의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B와 B')

  두 비유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천국의 현재와 악한 자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강조하는 것에서 동일한 메세지를 가진 레이아웃이다.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주인(밭의 가라지) 비유는 비유 자체와 해석 부분의 메세지의 초점이 서로 달라 논쟁이 있다. 이는 비유 자체에서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주인 비유"라 말하여(24절) 주인의 인내를 강조하는 반면에, 해설에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라 말하여 가라지의 종말에 초점이 집중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36절). 전자는 예수님께서 붙인 제목이고 후자는 비유를 들은 제자들이 붙인 제목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붙인 제목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개의 내용은 서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어쨌든 두 부분이 강조하는 내용에 차이가 난다.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주인 비유"의 본문에서는 알곡과 가라지의 공존과 추수 때까지 알곡을 보호하기 위해 인내하는 집주인이 강조되어 있다. 비유 전체 7구절에서 서론인 1절(24절)과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다룬 1절(30절)을 뺀 5절이 원수가 뿌린 가라지로 부터 알곡들을 보호하기 위해 참을 것을 명하는 주인의 모습이 나온다. 

 

  비유에 등장하는 "가라지"는 우리나라 논에 자라는 피와 같은 잡초보다 훨씬 더 해로운 것이라 한다. 가라지는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단어로 그 열매에는 독성이 있어 밀과 섞이면 밀의 가치를 현격하게 떨어뜨린다 한다. 그러므로 주인은 추수 때 까지 가라지를 건들지 말라 명하고 인내했던 것이다(28-30절).
  이와 달리  "밭의 가라지 비유"의 해설에서는 주인의 인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 없이 종말론적 추수 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고 심판하는 것이 확대되어 강조되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신학적인 질문으로 논쟁은 할 수 있지만 오늘 우리들은 비유 자체의 메세지와 해설의 메세지를 모두 채택해서 두 가지 강조점으로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해석 방법이다. 



  이러한 이해는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주인 비유를 그물 비유와 연결할 때 가치를 발한다. 이는 그물 비유와 정확하게 강조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물 비유에는 그물 안에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천국의 현재가 나오고(47-48절)  동시에 그물 안의 물고기들을 좋은 것(의인)과 못된 것(악인)으로 갈라내고 악인을 풀무불에 던져 넣는 종말론적 심판이 강조되어(49-50절) 좋은 씨를 뿌린 주인 비유와 주제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전체 구조에서 보면 이 레이아웃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비유를 앞 뒤로 두 번이나 반복 강조하는 짝이 된다. 
  이를 앞서 선언된 A와 A' 짝에 연이어 이해하면 비유로 전해지는 메세지가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 A와 A' 짝은 주님이 뿌린 천국 말씀의 씨앗을 깨달음으로 받아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헛되이 소비되는 천국  씨들이 크게 거론되었다. 
  이제 주님께서는 가르침의 포커스를 종말론적 심판 쪽으로 기울여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B와 B' 레이아웃에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천국의 현재 모습(원수의 방해로 알곡(의인)과 가라지(악인)가 썩여있고,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혼합되어 있는)에 대한 말씀과 함께 A와 A' 짝에는 없는 가라지와 못된 물고기가 당할 종말론적 심판이 추가된 것이다.
  이는 말씀에 대해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반드시 종말론적 심판에 끔찍한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된다. 

 


  2-4.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C와 C')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C)는 보잘것없는 천국의 현재와 상상을 초월한 성장을 이루는 천국의 미래에 대한 비유로 의미가 같고,  보화 비유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C')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대가에 대한 비유로 의미가 같다.  

  먼저, 겨자씨 비유는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천국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겨자 씨 한 알과 같이 심겨져 있다 말씀하셨다(31절). 이는 예수를 통해 도래한 천국이 지금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비유에서 겨자 씨는 씨중에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한다(32절). 그래서 독자들은 겨자 씨, 그것도 달랑 한 알을 생각하면 너무나 작기 때문에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또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천국의 초라한 현재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겨자 씨 한 알과 같은 천국은 놀라운 반전적 미래를 만든다. 그것은 나중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나무가 되어 그 나무로 인해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쉼을 누리는 상상을 초월한 성장과 성공을 이룬다(32절). 주님께서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과 "나물보다 커서"라는 극단적인 대조로 예수로 인해 도래한 천국의 현재가 만들어낼 놀라운 역전적 미래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선명하게 그려주었다.

  누룩 비유는 비유의 소재만 다를 뿐 겨자씨 비유와 똑같이 천국의 보잘것없는 현재와 상상을 초월한 긍정적인 결과를 성취하는 천국의 미래를 묘사하는 비유이다. 빵을 만들 때 사용되는 밀가루의 양에 비해 누룩의 사용량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천국의 특징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적은 양(또는 반죽에 섞으면 숨겨져 보이지 않는)의 누룩은 서말이나 되는 (혹자는 서말을 100인분 정도 되는 양이라 말한다.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어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아마도 굉장히 많은 양을 의미하는 표현이지 않나 생각한다) 밀가루를 빵으로 만들어버리는 엄청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천국은 지금 보기에는 아주 적고 또 세상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다 싶을 정도로 보잘 것 없이 보이지만 미래에는 온 세상을 뒤집어엎는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 설명하셨다.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면서 이것이 예수 천국의 특징으로 천국의 현재와 미래가 그려주는 신적인 로드맵에 담겨진 비밀임을 깨달을 수 있다. 


  종합하면 두 비유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예수 천국의 현재(겨자씨, 누룩)와 그에 비해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 긍정적인 미래(나물보다 큰 나무, 빵)를 만드는 천국을 비교하게 만들어주고, 이로 인해 예수의 천국에 대해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게 된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는 어떤가? 두 비유는 모두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내하는 제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라는 문구가 두 비유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것이 눈에 띈다. 남의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가지려면 그 밭을 사야만 한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주인공을 밭을 사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넉넉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신 것 같다. 어쨌든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차지하기 원한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동원해서라도 그 밭을 사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밭에 숨겨져 있는 보화와 같이 존재하는 현재의 천국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극히 값비싼 진주를 구한다면 장사꾼은 자기의 전 재산을 아끼지 않고 진주를 구하는데 투자한다.  

  주님께서는 두 비유가 비록 주제는 같지만 교훈의 효과를 극대하기 위해서 비유의 초점을 약간 달리하셨다. 앞의 비유에서는 천국이 은닉성이 강조된 밭에 감추인 보화(13:44)로 제시되고, 다음 비유에서는 천국은 사람인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13:45)으로 묘사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제자(장사꾼)와 천국으로 등치를 이룬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예수님과 예수로 인해 도래한 감추어진 천국이라면 장사꾼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 제자들이다. 주님의 표현은 두 가지 모두가 천국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천국의 현재는 숨겨져 알아보는 자만 알아볼 수 있는 미미한 천국과 이 천국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제자와의 상관관계로 존재한다. 기독론과 제자도가 함께 천국으로 설명되었다. 

  이상의 관찰을 배경으로 C와 C'를 하나 짝으로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메세지가 된다. 참 예수의 제자는 보잘것없는 예수의 천국의 현재를 보지 않고 상상을 초월한 성장을 이루는 미래의 천국을 보는  자이다(C).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천국을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나 값진 진주처럼 여기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C'). 이것이 C와 C'가 어우러져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 퍼지도록 기획하신 주님의 메세지이다. 

 

3. 마태복음 13장의 실천적 함의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3장을 분석하면서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할 몇 가지 실천적 함의를 살펴본다.

 

  3-1. 예수의 천국과 "천국의 비밀"(μυστηριον της βασιλειας των ουρανων)

  이스라엘은 세상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후 나타난 결과(참고, 마태복음 11-12장)는 이해하기 힘든 처참한 모습이었다. 제자와 같은 소수는 예수의 하늘나라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했지만 전반적인 이스라엘은 천국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천국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예수를 미워하고 배척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천국 선포는 실패한 사역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관찰 분석 결론이 예수의 천국 선포로 천국의 비밀이 작동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이 배척받는 것을 사역의 실패가 아니라 천국의 비밀이 실행되는 증거로 판단하셨고, 작동하고 있는 천국의 비밀을 따라 수수께끼(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설명한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다.  
  천국 말씀의 씨앗을 직접 뿌린 예수님은 천국 말씀이 뿌려진 현장에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면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조건 때문에 막간 레이아웃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예수 천국의 현재와 미래와 그것의 종말론적 특징"과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계시가 주어진) 사람의 마음 상태" 두 조건이 결합하여 있는 자는 받아 더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다(13:12).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예수 천국의 현재와 미래와 그것의 종말론적 특징"은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에 집중적으로 설명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천국의 현재와 현재와는 전혀 다르게 상상을 초월한 성장과 성공을 거두는 천국의 미래로 인해 발생하는 씨 뿌리는 자 비유의 핵심 주제인 "말씀을 깨닫지 못함"이다. "말씀을 깨닫지 못함"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에 나타나는 최후의 심판에서 생명과 멸망을 결정하기에 종말론적 특징을 가졌다 표현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 상태"는 천국의 비밀이 생기는 원인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계시가 주어지는 장소이다. 그 마음에 예수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계시가 주어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마음에 주어진 계시의 유무가 예수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현저한 차이를 깨닫고 깨닫지 못함을 좌우하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지혜를 받지 못한 마음은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가 그림을 그려주는) 예수 천국의 미래적 종말론적 모습을 보지 못하여 (밭에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사람 비유처럼) 천국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계시받은 마음은 예수 천국의 미래적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결단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천국 열매를 맺는다. 이것을 총칭해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이라 부른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사람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그친다.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11:25-27에 나온다. 이곳을 보면 스스로를 지혜롭고 슬기롭다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계시가 "숨겨지고" 어린아이와 같이 여기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의 계시가 "나타난다". 이로 보건대 마태는 사람의 마음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계시가 주어지는 것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인간의 책임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3-2. 하나님의 전략의 변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서 우리가 주목할 또 다른 함의는 하나님의 전략은 믿음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긴장감을 가진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제자와 무리들을 구분하고 무리들에게는 비유만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설명과 교훈을 주신 것은 티칭 방식의 변화나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을 따른 신적인 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처음 전도 전략에는 사람에 대한 구분 없이 회개로만 모든 사람에게 천국의 문이 열려있었다(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과 소수의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초점이 몰리고 13:12의 선언과 같이 회개의 열매를 맺은 자들에게 하늘의 은혜가 집중되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주어진 은혜마저 사라져 버리는 전략으로 확정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와 같은 전도 전략의 변화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가는 결과에 까지 이른다. 이 변화는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는 사건으로 이미 예고되었다(12:14-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올바른 반응하기를 기다리고 참다가 전략의 변화를 결심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태의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교리적 논란이 첨예한 것을 안다. 그것이 어쨌든 간에 우리는 적어도 마태는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날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준비한 은혜로운 계획을 사람에게 적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동의한 성경 저자라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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