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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중심의 문체-구조적 성경 해석법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

by 예다준 2022. 11. 24.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 

 
 
  수십 년 전 선교사님 댁 방문차 이스라엘에 갔었다. 마침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 생각을 하던 중이라 히브리대학은 어떤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히브리 대학의 강의를 청강할 수 있게 되어 선교사님 가족과 같이 히브리대학에 가던 중 거지 노인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히브리어는 물론 영어와 그리스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선교사님 부부는 그 노인이 너무나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는 말을 듣고 난 속으로 놀랬다. 왜냐하면 나는 그 거지 노인을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깝다. 히브리어는 더 아깝고, 그리스어는 너무나 아깝다!!”

  외국 유학하려면 가장 먼저 걸리는 문제가 외국어 아니던가? 그때 내 맘에는 특히 영어와 히브리어 문제로 부담이 있었다. 그러니 불쌍한 거지 노인의 어려움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동일한 일인데 입장에 따라 보는 것과 해석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경험한 순간이자 나의 매정함을 보고 부끄러웠던 순간이어서 내 맘에 큰 교훈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일이 성경을 볼 때 일어난다면 어떤가?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잘못 중 하나는 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아 성경 저자(또는 성경 본문)를 무시하는 경우이다.

  최근 들어 우리는 성경 저자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성경을 해석하는 현재 우리의 정황(praxis)이 더 중요하다 주장하면서 독자 중심의 해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미는 있지만 이들의 주장을 무한 질주하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객관적인 진리 없이 내 맘과 형편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용하는 도구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저자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성경 본문의 가치가 더욱더 중요하다 복음주의적 해석가들은 주장한다.

  성경 저자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최종적이고 권위적인 결과물이
성경 본문이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 저자와 같다. 그래서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성경 저자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본문을 최종적인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고 성경 본문 중심의  해석법이 개발되었는데, 그중 복음서의 경우 복음주의적 해석가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해석법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북미 대륙에서 일어난 문학적, 수사학적 해석 방법이다.

 
  이 방법은 복음서를 내러티브(이야기)로 보고 내러티브 안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양한 해석적 모델들을 개발했는데, 필자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성경을 단어나 어려운 문장을 설명하는 이전의 해석 방식을 넘어서 성경 본문 안에 숨겨져 있는 성경 저자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흔적이란 성경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그의 논리와 그 논리를 풀어 기술할 때 사용한 문학적 구조와 문체들, 그리고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 등을 말한다.

  이것을 주목하는 이유는 성경 저자들은 1세기 유대적 논리와 그 논리를 피력하는 문학적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방법들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본문 중심으로 해석하려면 이 방법들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성경 해석의 초기 전략이다.

  이것을 필자는 쉽게 "성경 저자 중심의 문학적 수사학적 해석 방법"이라 부른다.  이제 이 방법은 전문적인 성경 해석 논문이나 서적에서 필수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와 일선에서 목회하는 설교자들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성경 해석 서적이나 논문들이 알려주는 보다 성경 본문에 입각한 성경 이해의 방법과 결과물들과는 달리 이전에 들어왔던 해석들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실정이다.

  이에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 방법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를 문학적 수사학적 방법으로 해석할 때 기존의 해석과 얼마나 다르고 심도깊은 해석이 나오는지를 확인해본다. 


 


1. 비유를 해석하는 "두 개의 눈"

  누가복음 15장에는 아주 유명한 세 개의 비유가 시리즈로 나온다. 잃어버린 양 비유(15:4-7),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15:8-10), 마지막으로 탕자 비유(15:11-32)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중 하나인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 대한 삽화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중 하나인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 대한 삽화

 


  일반적으로 누가복음 15장(1-32절)의 15:1-2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게된 이유가 되는 사건을 기록한 "비유의 도입"으로 구분하고, 나머지는 "세 개의 비유"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은 너무나 당연하여 다른 구분을 생각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이 구분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sequential logic centered on contents)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다른 눈이 있다. 이른바 제 2의 눈이라 불릴 수 있는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parallel logic centered on literary structure)의 눈이다.

  사실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가 성경을 보는 최초의 눈이었다. 이는 예수님과 성경의 저자와 처음 성경을 읽었던 독자들 모두가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용하는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의 눈은 성경을 충분하고 효과적으로 보는 데에 제약을 가진 눈이다.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와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의 차이와 역사적 흐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장황해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두 눈으로 성경을 보았을 때 해석한 결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오는 가를 보여주어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제공해주는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라 생각한다. 

 


  1-1.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보았을 때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로 해석할 경우를 살펴본다. 이 경우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길고 상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학자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시리즈"라 부른다. 시리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세 개의 비유가 각기 다른 비유가 아니라 마치 같은 종류의 연속 기획물처럼 누가복음 15장 안에서 기능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앞에 잠시 언급한 대로 다음과 같이 누가복음 15장을 분류한다.

  도입(15:1-3)
  두 개의 짧은 비유(15: 4-7, 8-10)
    - 잃어버린 양 비유(15:4-7)
    -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15:8-10)
  하나의 긴 비유(15:11-32)
    - (잃어버린) 탕자 비유(15:11-32)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를 분석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처음 두 개의 비유는 마치 "쌍둥이(twin)"와 같이 구조와 수사학적 기능에 있어 유사한 점이 많아 쌍을 이룬다 보는 것이다.

  실제로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비유의 보조 관념(양과 동전)과 분량이 다를 뿐 문학적 구조와 주요 주제와 내용의 진행까지도 거의 비슷하다.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의 문학적 구조 비교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의 문학적 구조 비교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three parables)"가 있는데, "쌍둥이(twin) 비유"에 동일한 주제인 "잃어버림"을 가진 긴 비유가 추가되어 "삼중 구조"(threefold structure)를 가졌다 설명한다. 이러한 이해는 주석이나 해설서, 설교 등을 보아도 예외가 거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림"이라는 주제로 세 개의 비유를 연달아 가르치셨는데, 쌍둥이와 같은 두 개의 비유는 예수님의 교훈을 강조하고, 마지막 탕자 비유로 예수님의 교훈이 절정에 이르는 흐름과 구조를 가졌다 해석한다. 

 


  1-2.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보았을 때

  하지만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는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성경 저자인 누가의 의도와 가르침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본다.

  이는 성경 본문의 문학적 구조와 서사적인 장치들(narrative
devices)을 보면 보다 더 많고 심층적인 정보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1-2-1. 서사적인 장치(도구)들

  서사(敍事)는 이야기(네러티브)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능하면 설득력 있게 전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를 정확하고 재미있게(또는 인상적으로) 해야만 한다.

  말하는 내용은 같은데 무엇을 말했는지 잘 모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의 정확성이 없는 경우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재미없게(인상적이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의 재미(또는 감동)가 없는 경우이다. 

  비유를 가르치는 예수님과 이를 성경에 기록하는 누가는 모두 이야기꾼(storyteller)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과 누가는 천국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정확하고 재미있게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이때 사용되는 도구가 서사적 장치(도구)들과 문학적 구조이다.

  서사적 장치란, 이야기 또는 사건의 흐름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야기꾼이 특정한 효과를 얻기 위해 사용한 구조, 소재, 단어 등을 말한다. 문학적 구조는 1세기 유대인들의 병렬적 논리를 구현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평행법과 비슷한 문학적 도구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꾼인 예수님과 성경 저자는 당시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능한 서사적 장치들과 문학적 구조들을 동원해서 사용했다. 문제는 오늘 우리는 이것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경 저자가 사용한 것들을 모르고 지나가거나 눈에 띄는데 이상하고 어색해서 오히려 이해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때 성경 해석자는 서사적 장치들과 문학적 구조들의 기능을 파악하여 성경 이야기들의 원 의미를 복원하고 오늘날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알려서 1차 독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 받았을 말씀에 대한 이해와 감동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 누가복음 15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서사적 장치는 15:3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τὴν παραβολὴν ταύτην)로 이르시되"에서 "이 비유"(τὴν παραβολὴν ταύτην)라는 단수의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직접적으로 보면 바로 이어지는 15:4의 "잃어버린 양 비유"를 지칭한다. 하지만 누가는 단수의 "이 비유"라는 표현을 복수의 비유들을 묶음(시리즈)으로 지칭할 때에 사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먼저, 누가는 동일한 표현을 5:36-38에 사용했다. 이 단락에는 "새 옷 조각 비유"(5:36)와 "새 포도주 비유"(5:37-38)가 있다. 두 비유는 동일한 주제를 연달아 가르친 시리즈 비유이다. 누가는 이 비유들을 이야기하면서 단수 표현인 "비유를"(τὴν παραβολὴν)을 사용했다. 

  그리고 12:35-40의 두 개의 시리즈 비유를 보면 동일한 경우가 또 발견된다. 주님께서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베드로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라 물었다. 여기에서 누가는 "이 비유를"(τὴν παραβολὴν ταύτην)이라는 단수의 표현을 사용했다. 베드로는 분명히 두 개의 비유를 연달아 들었는데 비유들이라 하지 않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개의 비유는 "깨어있는 종의 비유"(12:35-38)와 "도적을 막는 집주인 비유"(12:39-40)이다. 베드로는 두 비유를 듣고 하나의 비유를 들은 것과 같이 판단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두 비유는 동일한 주제를 가진 연속적인 비유로 이른바 시리즈 비유이다.

 
  그렇다면 15:3의 "이 비유"라는 단수 표현은 단순히 바로 이어지는 "잃어버린 양 비유"를 지칭하는 기능 외에 보다 폭 넓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누가는 누가복음 15장에 연달아 나오는 세 개의 비유를 모두 하나의 시리즈 비유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표현 경향대로 단수 표현인 "비유를"을 사용한 것이라 말이다. 

  앞에서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보았을 때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림"이라는 주제적 공통점으로는 같지만 특히 탕자의 비유는 나머지 두 비유와 다른 것으로 취급되었음을 보았다. 이는 "잃어버린 양 비유"(15:4-7)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15:8-10)는 주제는 물론 문학적 구조와 사용된 모티브들이 비슷한 쌍둥이 비유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을 하나의 비유로 표현한 누가의 설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15장의 세 개의 비유를 하나의 비유로 표현한 것에 따라 누가복음 15장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판단이 누가의 생각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이에 대한 해답은 문학적 구조 분석을 통해 찾을 수 있다.


  2) 두 번째로 주목을 끄는 서사적 장치는 비유의 주인공들에 대한 설정의 독특성이다.

  세 비유에는 목자, 여인, 아버지가 비유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고대 근동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고대 근동 사람들의 정서에 정통한 학자들은 비유를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의도에 신경을 써야 한다 강조한다.

 

  이는 이 비유의 주인공들은 대중적이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유대 남성들이 거론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누군가를 향해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와 같다면"이라 비유하면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을 예수님께서 세 비유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먼저, 목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하위 계층으로 예수님 당시인들에게 목자 = 부정직 = 도둑놈이라는 이미지가 굳건해서 랍비들의 금지 직업 목록의 두 번째 였다. 잃어버린 양 비유의 서두인 15:4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목자로서)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인들의 정서에서 볼 때 "너희가 도둑놈 같은 목자라 한다면"이라 말한 것과 같다.

 

  굳이 이런 말을 하려면 말하기 전에 반드시 청중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과정 없이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을 목자와 같다 비유하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비유를 듣자마자 빈정이 상할 것이다.


  그리고 유대 남성들은 대화 중에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여성을 비천하게 여겼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의 주인공이 여자이다. 이런 말을 듣는 유대 남성들, 특히 땅의 제사장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여자 이야기가 곱게 들릴리 만무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유대 남성들, 특히 유대 아버지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싫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대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로 수치와 명예의 문화가 융합된 세상이었다. 유대인들은 명예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겼는데, 가장의 명예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잘 다스릴 때 유지된다 믿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유대 가장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들들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보 같고 여리고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더 나아가 탕자의 아버지는 고대 근동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으로 볼 때 명예심을 포기한 여자와 같은 아버지, 특히 15:20에서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로 묘사되었다 놀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파격을 넘어 듣는 이에게 모욕감을 주는 인물들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묻지않을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의 100% 의도적인 캐스팅, 100% 전략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유의 주인공들을 설정한 예수님의 서사적 의도와 전략이 본문 이해를 위해 중요한 숙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문학적 구조 분석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이와 같이 누가복은 15장에는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서사적 장치들이 숨어있다. 이것은 청중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본문을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저자가 설치해 놓은 도로의 차선과 표지판, 신호등 같은 해석적 가이드라인이다. 이것은 해석을 위한 보조물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석의 방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1-2-2. 문학적 구조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을 수사학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하나같이 비유들을 구성하고 있는 문학적 구조가 너무나 뚜렷하고 조직적이라는 점에 놀란다.

 

  세 개의 비유는 모두가 교차대조법을 가지고 있는데 각 레이아웃들의 평행법의 짝들은 단어나 문구, 또는 모티브들의 대조가 명확해서 마치 문학적 구조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구조틀 위에 내용을 덪입혀 놓은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다.

 

  앞에서 제시한 "잃어버린 양 비유"(15:4-7)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15:8-10)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교차대조법을 구성하는 각 단락의 짝들이 거의 비슷하게 반복된다. 여기에 중심적인 주제의 흐름이 "잃어버림 → 찾음 → 발견의 기쁨 → 함께 즐거워함 → 회개"의 순으로 같다. 이래서 내러티브의 구조틀이 상정된 상태에서 내용을 넣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비유들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적 구조가 아니라, 세 개의 비유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구조, 즉 문학적 상관성이다. 
  
  1)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탕자 비유의 구조를 분석하면 두 개의 교차대조법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사실 탕자의 비유는 내용의 흐름을 보아도 두 장면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를 문학적 구조로 보면 두 개의 교차대조법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탕자 비유의 이중 교차대조법
탕자 비유의 이중 교차대조법

 

 

  위 그림은 탕자의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여 대조한 것이다.

 

  장면 1을 보면 교차대조법의 최외곽 레이아웃(a//a')이 "둘째 아들을 잃어버림"과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음"으로 시작과 마무리가 정확하게 일치하여 대비된다. 이는 내용적인 면에서 장면 1의 스토리가 마무리되었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문학적인 구조로 보면 평행법의 최외곽 레이아웃이 완전히 구조화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것도 된다. 곧 문학적인 차원의 한 단락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여기에도 평행되는 짝들의 대조가 명백한 교차대조법이 조성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두 개의 의미를 가진 단락으로 일부러 나누었다는 말이다. 즉 문학적인 의도로 비유를 두 조각으로 나누었다는 말이다.

  2) 이러한 예수님의 문학적 의도를 가지고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를 분류하면 앞에서 실행했던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에 의한 정리와 다른 "사중 구조"(quadruple structure)로 누가복음 15장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 15장을 순차적 논리의 삼중 구조로 분석한 것과 병렬적 논리의 사중 구조로 분석한 것을 대조한 표
누가복음 15장을 순차적 논리의 삼중 구조로 분석한 것과 병렬적 논리의 사중 구조로 분석한 것을 대조한 표

 

 

  3) 문학적 구조 중심으로 단락을 네 개로 나누는 "사중 구조"는 결국 이 단락들 사이에 A-A'-B-B'의 동의적 평행법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 먼저 "잃어버린 양 비유"와 "탕자 비유의 장면 1"를 비교해 본다.
  "잃어버림 주제"로 "잃어버린 양 비유"와 "탕자 비유의 장면 1"은 동일하다. 15:4은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 중  하나를 "잃었다" 말했고, 15:24은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렸다" 말했다("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리고 두 단락에서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음"과 "기쁨"이 중심주제이다.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찾음이 세 번 나오고(4, 5, 6절),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얻었노라"고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동일하게 "회개"가 주제로 나온다(15:7, 18). "잃어버림", "찾음", "기쁨", "회개"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주도하는 핵심 주제들이다. 이것들이 모두 두 비유에 있다는 것은 두 비유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비유임을 증명해준다.

 

  • "잃어버린 양 비유"와 "탕자 비유 장면 1" 사이의 주제적 유사성은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와 "탕자 비유 장면 2"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양을 집 밖에서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동전을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 즉 잃어버림 주제가 안과 바깥 두 차원에서 일어났다.

 

  이와 비슷하게 "탕자 비유 장면 1"에서 둘째 아들은 집 밖으로 나아가 잃어버리고, "탕자 비유 장면 2"에서는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전혀 모르고 오히려 아버지를 대적하는 자로 집 안에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둘째 아들은 "공공연하게(overtly) 잃어버린 자"라 한다면 큰 아들은 "은밀하게(covertly) 잃어버린 자"라 부른다.

 

  여기에서도 잃어버림 주제가 안과 바깥 두 차원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양의 동의적 평행법을 예상할 수 있다.

 

세 개의 잃어버림 비유의 동의적 평행법 비교
세 개의 잃어버림 비유의 동의적 평행법 비교

 

  • 여기에서 탕자의 비유의 특징을 기억해야 한다.

  탕자의 비유가 앞의 두 비유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비유의 보조 관념이 사물에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앞의 두 비유는 양과 동전을 비유의 이미지로 삼았지만 탕자의 비유의 비유의 이미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에서는 앞의 두 비유와는 달리 두 아들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설명이 아주 많이 강조되었다.

 

  앞의 두 비유에서는 양과 동전을 찾는 목자와 여인을 중심으로 비유가 설명되어 양과 동전의 반응은 하나도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에 와서는 목자와 여인과 같은 기능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설명 못지않게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반응이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그러면 비유를 듣는 청중의 관심은 내용의 흐름을 따라 "목자 → 여인 → 둘째 아들 → 큰 아들"로 이동하게 된다. 


  • 위 구조를 A-B와 A'-B'의 대조로 보면 문학적 구조의 대응 사항이 보다 입체적으로 보인다. 

  A-B의 잃어버린 자는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내러티브 안에서 보면 세리와 죄인들을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A'-B'에서는 대조의 대상이 달라진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의 잃어버린 동전(A')은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하지만 탕자 비유 장면 2의 큰 아들(B')은 둘째 아들의 회복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세 개의 잃어버림 비유의 동의적 평행법 비교 2
세 개의 잃어버림 비유의 동의적 평행법 비교2

 

  위 표를 보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의 가치와 이 비유와 탕자 비유 장면 2과의 연관관계를 새롭게 보게 된다.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로 보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잃어버린 양 비유의 축소판으로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비유로 이해된다.

 

  하지만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로 보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와 탕자 비유 장면 2의 관계가 보여,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앞의 비유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탕자 비유 장면 2와 연계되어서 중요하게 담당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하는 큰 아들(B')을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과 같이 찾기를 간절히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A')을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집 밖에서 잃어버린 둘째 아들과 집 안에서 잃어버린 동전이라는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비슷하게 보이는 비유를 두 차례 연이어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비유를 듣는 청자들에게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동의적 평행법을 아주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던 청자들은 잃어버린 양 비유를 듣고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를 들은 후 두 비유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다가 탕자의 비유 장면 1을 듣고는 곧바로 잃어버린 양 비유를 연상하다가, 탕자의 비유 장면 2를 듣고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를 연계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목자 여인 둘째 아들 큰 아들로 이동하는 청중의 관심과 맛 물리면 마지막에는 잃어버린 동전을 집 안에서 찾는 여인의 이미지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에 동참하자 권고하는 아버지에게 반응을 해야 하는 큰 아들의 이미지가 겹쳐지게 된다. 

 

  이렇게 청자들의 이해를 몰고가는 구조적인 메세지는 결국 비유 시리즈의 마지막에 가서 집 안에서 잃어버린 큰 아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므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의 도입 부분에 묘사된 상황,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환영하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일을 기억나게 만들어준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물론 청중들은 비유를 다 듣고 예수가 비유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 여기에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의 여인과 탕자 비유의 아버지와의 이미지적 연관관계도 중요하게 한몫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 비유의 주인공으로 "여인"과 "여자같이 보이는 아버지"를 설정한 것은 유대 남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무례하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탕자의 비유의 아버지는 고대 근동 지방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으로 볼 때 명예심을 포기한 여자와 같은 이미지라 단언한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 살아 생전에 유산을 달라 조르는 일은 아버지를 죽은 자와 같이 취급하는 수치스러운 불효였다. 그리고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사용한 표현과 이미지들도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상황이다.

 

  아마도 정상적인 유대적 아버지였다면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처벌을 가했을 것이고(15:19의 둘째 아들의 결심이 아버지가 내릴 수 있는 처벌의 한 예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큰 아들도 징계를 내렸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탕자의 비유의 아버지는 여자 같은 아버지라 부른다.


  탕자의 비유의 아버지의 파격적인 특성은 둘째 아들이 오기 전에 아버지가 했던 행동인 15:20에서 절정을 이룬다 평가된다.
주석가들은 이 행동은 고대 근동의 아버지로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 완전히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 놀란다.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팔레스틴의 가부장적 정서는 유대 남성들은 공적이고 대중적인 자리에서 이야기의 주제로 여자에 대한 것을 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굳이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듣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반드시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 번째 비유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듣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거부감은 분명히 더 컸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잃어버린 동전 비유의 주인공과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이 여성(적임)으로 평행법에서 대조되는 짝이 된다는 점이다. 이 대조는 금기사항이므로 예수님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성적인 대조점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청자들의 이해를 몰고 가는 구조적인 메세지의 설득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비유 시리즈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 교훈의 포커스가 집 안에서 동전을 찾으려는 여인의 마음과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결단해야 하는 큰 아들에게로 청중의 관심이 몰리게 하려 했던 것이다. 

  •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비유에 와서 비유의 포커스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로 돌렸는지 궁금해진다.
 혹자는 이에 대해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이라 평가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대적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 비유의 마지막 장면의 포커스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하는 큰 아들에게로 돌린 이유는 비유 장면 2의 교차대조법의 마지막이 열린 종결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탕자 비유의 장면 2를 보면 아버지의 즐거움에 동참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큰 아들을 징계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달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런 종결은 가부장적인 유대 문화에서 볼 때 매우 우유부단한 조치로 유대인들의 마음(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에 엉성하고 찝찝하게 느껴지는 결말이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재미없게 미온적으로 비유를 마쳤는지 남자답지 않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문학적 구조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장면 2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a에 상응하는 a'가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a. 풍류 소리로 당황한 큰 아들(15:25-26)
    b. 동생의 복귀와 다시 받아들임(15:27)
      c. 노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화해(15:28)
        d. 큰 아들의 불평(15:29)
        d'. 큰 아들의 불평(15:30)
      c'. 아버지의 권고(15:31)
    b'. 동생의 잃었다 얻음, 죽었다 살아남(15:32)
  a'. ?

  a에는 풍류 소리에 당황한 큰 아들의 모습이 나오고 그는 노하여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반항을 묘사한 표현들을 보면 그의 모습은 너무나 버릇없기 짝이 없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버지!"라는 칭호를 버리고 "보십시오!"라는 대단히 버릇없는 표현을 사용했다(15:17, 18a, 18b).

 

  이에 더하여 그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마치 "노예와 주인"의 관계처럼 표현하면서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에 대한 착취와 비교해서 부당하다 공격했다(15:29~30).

 

  결국 그는 마치 타인과 같은 태도로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사용했던 "나의 이 아들"(this son of mine, 24절)을 역으로 뒤집어 아버지에게 "당신의 이 아들"(this son of yours)이라 빈정거렸다.

 

  이것은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사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아버지와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켜 수치스럽게 만드는 작태이다.

 

  그렇다면 a와 대조되는 평행법의 짝인 a'에는 큰 아들이 아버지의 권유를 듣고 회개하고 함께 기쁨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아버지와 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든 아들이 징계받는 모습이 나올 것이라 독자들은 예상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부분을 생략하여 "열린 종결"을 만드셨다.


   "열린 종결"은 무슨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의 천국에 초대하는 부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눅 19:10을 보면 주님께서는 자신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정의하셨다. 이것은 요새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자기 사명 선언이다. 예수님의 사명 선언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죄인들은 물론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큰 아들과 같은 자들도 동일하게 잃어버린 자이다. 그러므로 큰 아들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환영의 대상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을 보면 결국 주님에게는 죄인들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동전과 같고,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이나 모두가 똑같이 잃어버린 불쌍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초청은 동일하게 열려있는 것이다.

 

  비유를 보면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서 집으로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향해 측은히 여겨 달려갔다(15:20), 이와 같이 아버지는 집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기를 주춤하는 큰 아들에게 달려 나갔다(15:28). 두 아들을 모두 사랑했던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도 큰 아들이 상징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다시 한번 더 초대하는 문학적 구조로 비유를 마무리하신 것이다.

 

  결국 탕자의 비유 장면 2는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15:32). 비유는 큰 아들을 상징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인들이 천국 말씀으로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를 권고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2. 결론과 마무리

  본 소고에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을 두 눈이라 칭하고 먼저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의 눈으로 다음에는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으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시리즈를 살펴보고 결과를 비교해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두 방법은 상보적이다. 하지만 성경 해석의 접근 전략으로 보면 우선순위는 분명히 구분된다 본다. 

 

  우리는 현대적인 논리와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 현대인에게 익숙한 "내용 중심의 순차적 논리"의 눈으로 성경을 본다. 하지만 이것만을 고집하거나 이것을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는 비유를 가르친 예수님과 이를 성경으로 기록한 누가, 첫 번째 청자 그리고 성경, 모두가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 되어야 하고 다른 성경 해석 방법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문학적 구조 중심의 병렬적 논리"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현대적인 눈으로 성경을 볼 때 보지 못하거나 오해하게 되는 많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림 비유 시리즈로 확인했다. 덕분에 비유들을 세밀히 살펴보고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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