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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중심의 문체-구조적 성경 해석법

사도 바울의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 Inclusio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

by 예다준 2022. 11. 30.

사도 바울의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 Inclusio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

 

 

 

  * 이 글은 이경석 님의 “Inclusio 형식을 통해 본 고린도전서 5:1-6:20의 이해”(신약연구 제18권 3호)를 통해 알게 된 사항을 보완해서 정리한 것이다. 좋은 논문으로 성경 이해에 전문적인 지침을 준 이경석 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람마다 특이한 말 버릇이 있다. 특정 단어나 문구를 반복하는 것은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경험일 것이다. 또한 특정 사고방식이나 논리를 남다르게 사용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요새는 일부러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나 말투, 개념과 논리 방식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연예인들의 유행어를 들 수 있다. 또 역사를 보면 어떤 유명 인물의 사상이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특별한 표현과 사상들이 있고 이것들을 무시하면 그 인물의 사상과 표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기만의 독특한 단어나 개념, 표현을 통해서 자신만의 논리와 메세지를 가장 잘 피력한 주인공이 예수님이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의 자기 호칭인 “그 사람의 아들”(우리 말 성경은 이를 “인자”(the Son of Man)로 번역했다)이 생각난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향해 사용한 유일한 호칭이다. 제자들은 이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른 일이 없고,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예수님께 사용한 일도 없는 아주 독특한 호칭이다. “그 사람의 아들”은 불명확한 누군가를 칭하는 유대적 표현으로 호칭이 아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문구를 자신을 칭하는 별칭으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이 호칭에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신학이 있다 믿고 학자들은 연구에 매달린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이 칭호가 들어가는 부분에서 이 칭호가 성경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칭호의 특성과 의미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충분한 해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살펴본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만의 독특한 논리 방식과 남다른 문체적 문학적 구조가 있다. 그중 바울 서신에 자주 나타나서 중요하고, 바울만의 독특한 논리를 담은 것이기에 잘 모르면 자칫 오해되기 쉬운 것으로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을 사용하는 Inclusio”를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바울 서신의 구조를 분석하다가 바울의 논리가 이탈하거나 이질적인 주제가 삽입되는 경우를 보고 의문을 가진 일이 많았었다. 이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순차적 논리의 내용 중심적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으로 성경을 볼 때마다 걸림돌이 되었었다. 성경 저자들의 병렬적 논리와 문학적 구조 분석을 알고 난 후에 바울에게는 병렬적 논리에서 구현되는 아주 간단한 교차대조법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고 해결점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한 논문을 보게 되었는데, 이 논문에서 필자가 아주 간단한 교차대조법이라 알고 있었던 것을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을 사용하는 Inclusio”라는 보다 수사학적으로 논증되고 정의된 주장을 보게 되어 어슴푸레하게 알고 있던 것을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필자가 이미 올린 글 “디모데전서 2장 구조 분석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보면 디모데전서 1-2장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법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삽입 단락이 있다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는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딤전 1:12-17에 나오는 “바울의 간증” 단락으로 앞뒤 단락의 문맥을 끊어버려 주제가 이탈한 것 같이 보이는 엉뚱한 삽입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1:3-11 : 다른 교훈(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
  1:12-17 : 바울의 간증(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그리스도의 은혜)
  1:18-20 : 선한 싸움 명령(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3-11과 1:18-20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주제로 한 단락으로 문맥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사이에 낀 1:12-17은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 주제와 상관이 없는 내용이어서 해석에 곤란을 준다. 문제는 이 어색한 삽입 단락이 2장에도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게재한 글의 일부분을 다시 옮겨본다.


  이해를 돕기 위해 1:3-2:7에 있는 단락들을 내용별로 정리해 보자.

  1) 1:3-11 : 다른 교훈(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
  2) 1:12-17 : 바울의 간증(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그리스도의 은혜)
  3) 1:18-20 : 선한 싸움 명령(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4) 2:1-6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기도
  5) 2:7 바울의 부름 받음
  6) 2:8 : 남자들의 기도
  7) 2:9-15 : 여자들의 구원을 위한 행실

  바울은 1:3-11에 첫 번째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을 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교훈이 교회에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자의 특징을 알려주고 경계를 주었다. 그리고 1:18-20에 가서는 선한 싸움 명령하면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명하고 실패자들을 거론했다. 그러니까 다른 교훈과 믿음의 선한 싸움은 서로 직결되는 주제로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사이에 전혀 다른 주제로 보이는 바울의 자서전적 간증 2)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주제인 1)과 3) 사이에 들어간 황당한 삽입구로 문맥을 끊어버려 자연스런 이해에 문제를 만든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가면 이제까지 1장과 다른 주제로 여겨져 온 4)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기도"가 나온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2장은 1장과 다른 목회에 대한 지침이라 해석해 왔다. 그런데 2:7에 가면 간략하지만 2) 바울의 간증과 같은 바울의 부름 받음 7)이 또 나온다. 그래서 세 가지 주제가 아무 규칙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은 모양이 된다.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독자들을 대단히 곤란하게 만든다. 바울은 자꾸 이 말하다 저 말하고 또 다른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1을 "그러므로"라 표현해서 1장을 받으니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그리고 2:8-15에는 앞에서 살펴본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두 가지 지침인 6), 7)이 이어진다. 여기에도 1장과 같은 현상이 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두 가지 지침인 6), 7) 사이에 바울의 부름 받음이 주제인 5)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디모데전서 1-2장을 볼 때 경험하게 되는 문제를 설명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바울의 저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 문제를 a, b, c 세 개의 레이아웃이 연속되면서 중첩되는 동의적 평행법으로 해결했다. 

  a. 1:3-11 : 다른 교훈(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
    b. 1:12-17 : 바울의 간증(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그리스도의 은혜)
  a'. 1:18-20 : 선한 싸움 명령(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c. 2:1-6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기도
    b'. 2:7 바울의 부름 받음
      c'. 6)-7) 2:8 : 남자들의 기도 + 2:9-15 : 여자들의 구원을 위한 행실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단락들을 배치한 바울의 전략과 그 가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깊이 연구하지 않았는데 논문을 보고 사도 바울의 독특한 논리와 표현방법의 가치를 보게 되어 성경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법이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었다. 

 


1.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클루지오의 일반적인 용례

  인클루지오(inclusio)는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유대인의 문학적 장치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문단의 시작과 끝에 같은 단어나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단락의 주제를 강조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양괄 대칭구조, 수미상관법, 수미쌍관구조, 샌드위치구조, 봉투 구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시작과 끝에 같은 단어나 어휘를 반복 사용한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모두 같다. 
  이는 현대인에게도 사용되는 기법이기 때문에 이해는 물론 발견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필자는 “바위가 되리라”라는 문구로 시의 시작과 마무리를 어우른 유치환님의 “바위”라는 시를 든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를 보면 시인이 되리라 다짐하는 바위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바위가 되리라”라는 인클루지오 사이에 그가 말하는 바위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시에서 인클루지오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 먼저 바위가 되리라는 다짐을 시작과 마지막에 두어 강조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과 마지막의 반복이 가운데 내용을 수식하는 것으로 바위가 시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도 알려준다.

  성경에 사용된 인클루지오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시보다 길이가 훨씬 길고, 시뿐만이 아니라 시의 형태를 가진 글인 운문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쓴 글인 산문 등이 혼합되어있다. 그래서 성경은 시에서 사용된 것보다 더 많은 기능과 변형을 가진 인클루지오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순차적 논리에 익숙하기 때문에 인클루지오를 즐겨 사용하지 않지만, 성경 저자들인 유대인들은 병렬적 논리를 기본적인 논리로 사용했다. 병렬적 논리는 당연히 병렬적 표현을 사용하게 되니 병렬적 논리를 가장 쉽게 구조화할 수 있는 인클루지오는 필수적으로(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문학적 도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상상을 넘는 탁월한 수준으로 인클루지오는 활용 발전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 예를 들자면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마 4:23과 9:35의 인클루지오를 들겠다. 여기에서 마태는 동일한 문구를 반복 사용한 인클루지오를 사용했는데, 인클루지오의 가운데에 마 5-7장의 산상수훈과 8-9장의 10가지 기적들을 넣는 구조를 만들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인클루지오는 A-B-A'를 기본 구조로 가졌다 이해할 수 있다. A와 A’는 인클루지오를 이루는 반복되는 요소이고, 가운데의 B는 성경 저자에 따라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인클루지오 가운데에 삽입된 것을 말한다. 마태의 마 4:23과 9:35이 만드는 인클루지오는 동일한 문장이 반복된 것이므로 발견하기 아주 쉬운 기본적인 형태의 인클루지오라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인클루지오는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해서 성경의 문학적 구조틀로서 성경 본문을 주관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로 앞에서 언급된 마 4:23과 9:35이 만드는 인클루지오가 더 확장된 마태복음 4-9장의 "3중적 하늘나라 inclusio"를 들 수 있다.

  4:23과 9:35절의 인클루지오 ①은 앞에서 언급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τῆς βασιλείας) 인클루지오이다. 여기에 팔복인 5:3과 5:10이 "현재적 하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로 인클루지오 ②를 구성하여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고, 5:3과 5:10이 하나로 7:21과 어울려 또 다른 "하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인클루지오 ③을 만든다. 그래서 마태복음 4-9장은 "3중적 하늘나라 inclusio"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러한 3중적 inclusio를 통해서 팔복은 물론 마태복음 4-9장 전체가 철저하게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추져 있음을 아주 인상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이해할 수 있다.

 


2. 사도 바울의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을 사용하는 인클루지오

  마태는 주로 중첩되는 형태로 발전된 인클루지오를 사용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달리 발전된 형태의 인클루지오를 사용했다. 그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인클루지오 사용할 때 구조의 B 단락을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을 사용하는 바울의 인클루지오는 일반적으로 "주제에 관한 원칙 제시 부분"(A), "다른 주제에 의하여 논증을 강화하는 부분"(B), "주제에 관한 실제적인 권면 부분"(A')으로 구조를 만드는 인클루지오이다. 

  A : 주제에 관한 원칙 제시 부분
    B : 다른 주제에 의하여 논증을 강화하는 부분
  A' : 주제에 관한 실제적인 권면 부분

  A와 A'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원칙 제시"와 "실제적인 권면"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제는 이 인클루지오의 가운데인 B가 "다른 주제에 의하여 논증을 강화하는 부분"으로 A와 A'에 사용된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를 거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병렬적 논리에 의해서 조성된 인클루지오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갑자기 엉뚱한 주제가 삽입되어 문맥의 흐름이 깨진 것으로 보여 바울이 엉뚱한 말을 한다고 이해된다는 점이다. 필자가 참조한 논문은 고린도전서에서 해당 본문들을 발췌해서 자세하게 분석과 해설을 해주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 5:1-6:20에 바울이 사용한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Digression) 인클루지오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필자의 생각을 첨가해 개진해 본다.


  바울은 고전 5:1-13에서 근친상간한 형제를 교회에서 쫓아내지 아니한 고린도교회를 질타하면서 그를 축출하라는 원칙을 제시했다(A). 그리고 바울은 6장 후반부(6:12-20)에서 간음의 주제를 말하면서 음행을 삼가하라고 실제적인 권면의 명령들을 했다(A'). 순차적인 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런 전개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두 단락 사이에 끼어있는 6:1-11을 보면, 문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단락이 나타난다. 그것은 성도 간의 송사에 대해 언급이다(B). 이를 인클루지오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은 구조가 된다.

  A : 음행한 형제에 관한 원칙 제시(5:1-13)
    B : 성도간의 송사의 예시에 의한 논증(6:1-11)
  A' : 음행에 관한 실제적인 권면(6:12-20)

  하지만 B는 몇 가지 수사학적 사항들을 살펴보면 A//A'와 별개의 단락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우선 5:12에 언급된 "외부 사람들(τοὺς ἔξω)"과 "내부 사람들(τοὺς ἔσω)"의 대조는 6:1에서 "불의한 자들(τῶν ἀδίκων)"과 "거룩한 자들(τῶν ἁγίων)"의 대조로 반복되어 6:1-11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준다.
  2) 5:10-11에 열거된 죄의 목록이 6:9-10에 확대된 형태로 언급되었다. 6장의 목록은 5장에 나열된 죄의 목록에 4가지 항목이 추가적으로 덧붙여져 강조되는데 특히 간음, 변태, 동성애 등 성적 범죄가 특별히 강조 언급되었다.
  3) 6:1의 질문("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5장의 논지를 이어 전개하기 위한 예시적인 질문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연관된다 볼 수 있다. 그러니까 5:1-13에서 교회가 행음한 자를 올바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법정에서 일어날 성도 간의 소송 사건을 가정하여 6:1-11을 말하고, 이 모습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역설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6:1-11은 5:1-13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바울은 음행에 대한 주제를 다루다가 주제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는 성도간의 송사를 언급했는지 궁금해진다. 여기가 바로 주제 이탈을 통한 논리의 가치가 눈에 띄는 부분이다. 바울은 B에서 성도 간의 송사의 문제를 예로 들어 개인의 유익보다 교회의 명예가 더 우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주력하는 논지는 성도 간의 송사 문제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교회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인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6:1-6). 6:2-3에서 바울은 장차 세상이나 천사들을 심판하게 될 거룩한 자들이 세상의 사소한 일들을 재판하지 못하느냐 반문하고, 6:5을 보면 성도들의 송사 문제를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재판받는 것이 수치스러움(ἐντροπή)이 아니냐고 다시 반문했다. 이러한 재차 반문은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불의한 자들)에게 (교회)의 송사를 맡기는 것 자체가 완전한 실패라 바울은 보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6:7a, "너희가 서로 소송하는 것이 이미 너희에게 완전한 실패이다"). 바울은 이에 한 걸은 더 나아가 교회의 실패와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 강조했다(6:7). 
  바울이 이렇게 B 단락에서 교회를 향해 역설적인 표현을 연거푸 사용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는 신자들이 세상을 심판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울은 신자들이 천사까지도 심판할 것이라 말했다. 이것은 "너희들"(σύ), "성도"(οἱ ἅγιοι)이라 불리는 교회의 세상을 뛰어넘은 높은 차원의 정체성을 강조한 말이다. 두 번째는 교회는 전에는 불의 중에 있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어(6:11),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된 자들이다(6:17). 이제 성도들은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체성으로 산다(6:20). 그러므로 자기 몸을 창기와 합하여 창기와 한 몸으로 만드는 삶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6:16).
  그렇다면 바울이 B에서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인 정체성의 뛰어남과 그 순결 유지라는 공동체적 전망에서 근친상간한 음행한 자를 반드시 교회 밖으로 축출해야만 한다는 A 단락의 명령에 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음행한 자가 무조건 잘못했으니 교회에서 축출하라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참 성도의 정체성과 종말론적 심판에서 세상을 심판할 교회의 탁월성을 근거로 범죄한 자를 축출하는 일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B 단락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5:1-6:20에 대한 문학적 구조 분석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다 생각한다. 필자의 상세 구조 분석에 의하면 5:1-6:20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 교차대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A. 5:1-8 음행한 자에 대한 축출하지 못함에 대한 질타
   + 성도에 대한 "누룩 모티브" 
  B. 5:9-13 악한 자에 대한 축출 명령
     + "성도가 사귈 수 없는 자들 목록"

    X. 6:1-8 성도 간의 송사를 예시로 든 논증
      a) 6:1-4 너희 중에...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b) 6:5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c)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a') 6:7a 너희가 서로 소송하는 것이 이미 너희에게 완전한 실패이다
        b') 6:7b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c')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B'. 6:9-13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
   +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 목록"(특히 세 가지 성적 범죄가 추가됨)
A'. 6:13b-20 성도에 대한 주와 합한 "성령의 전 모티브"
   + 음행을 피하고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


  인클루지오와 교차대조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아직 일치하지 않는다. 혹자는 인클루지오를 하나의 레이아웃을 가진 교차대조법이고 교차대조법은 여러 개의 레이아웃을 가진 인클루지오라 주장한다. 어쨌든 인클루지오는 크게 보아 복합적인 교차대조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는 성경에 삼중 사중으로 인클루지오가 겹치는 예가 많이 나오고 기본 구조가 서로 같기에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해 각설하고 필자는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해서 인클루지오의 A와 A'를 각각 두 단락으로 나누고, 인클루지오의 B 단락을 세 개의 레이아웃으로 만들어지는 동의적 평행법으로 보았다. 
  먼저 A와 A'를 각각 두 단락으로 나눈 것은 각 단락이 "성도를 비유하는 모티브" + "죄인 목록"의 구조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그 앞과 뒤에 "행음자에 대한 축출 명령"과 "음행을 피하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비슷한 명령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연히 이루어진 구조가 아니라 바울의 조직적인 구성 작업으로 만들어진 구조이다. 더군다나 "성도를 비유하는 모티브" + "죄인 목록"의 구조를 비교해 보면 순서가 서로 교차하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교차대조법으로 분석이 된다.

A. 5:1-8 음행한 자에 대한 축출하지 못함에 대한 질타
   + 성도에 대한 "누룩 모티브" 
  B. 5:9-13 악한 자에 대한 축출 명령
     + "성도가 사귈 수 없는 자들 목록"
--------------------------------------------------------------
  B'. 6:9-13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
   +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 목록"(특히 세 가지 성적 범죄가 추가됨)
A'. 6:13b-20 성도에 대한 주와 합한 "성령의 전 모티브"
   + 음행을 피하고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

  이는 A와 A'가 내용은 물론 구조적으로 보아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알려주는 성경적 증거가 된다. 성도를 비유하는 두 개의 모티브는 성도의 정체성을 확증해주는 바울의 논리의 신학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두 개의 죄인에 대한 목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동일한 목록이 성적 범죄 부분으로 보다 확장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A-B(인클루지오의 A)는 음행 한 형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원칙을 제시한 단락이고, A'-B'(인클루지오의 B)는 음행에 관한 실제적인 권면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제 문제는 인클루지오의 가운데 단락인 B이다. 이 부분은 성도간의 송사를 예시로 든 논증 부분이다. 바울은 성도(교회)의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정체성을 근거로 논리를 풀어가면서 행음자를 교회가 치리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상태를 질타하고 행음자를 반드시 축출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주었다. 교회가 행음자를 자체로 치리 하지 못하면 결국 교회는 교회 성도 간의 문제들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상상하고 바울은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를 분석 비판하여 논증 물로 제시한 것이다. 바울의 논증은 동의적 평행법으로 교회는 교회의 문제를 세상에 가져가지 말고 반드시 교회 내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런 문맥으로 이 단락의 동의적 평행법들의 짝을 대조해 보면 평행법의 짝으로 서로 상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a) 6:1-4 너희 중에 ...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b) 6:5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c)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a') 6:7a 너희가 서로 소송하는 것이 이미 너희에게 완전한 실패이다
        b') 6:7b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c')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바울은 교회가 성도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a)을 a'에서 이미 완전한 실패라 정의 내렸다. 이는 교회(성도)가 세상은 물론 천사까지도 심판할 것이기 때문으로(6:2-3) 교회의 문제를 세상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뛰어난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b와 b'는 바울의 역설적인 반문으로 서로 대조를 이룬다. 교회가 성도 간의 송사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교회에는 문제를 해결할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b). 바울은 형제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교회에 없다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교회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했다. 특히 이 부분은 고대 근동 사람들을 주도했던 명예와 수치의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수치스러움"(ἐντροπή)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6:5). 바울은 교회가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할 지혜가 없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아 버리는 것이 명예롭다 강조한 것이다. c와 c'는 결국 성도 간의 소송이 세상 법정에 의지할 경우 발생하는 비참한 결과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서로 대조된다. 즉 c를 행하면 결국 c'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교회가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성도 간의 문제를 송사하면(c), 교회는 결국 형제간에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들로 보이게 된다(c').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의 문제가 세상 법정으로 가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예시를 들어 논증한 것이다.


  이상의 관찰을 통해서 인클루지오의 가운데 단락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교회가 성도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교회 안에서 치리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과 수치스러움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그래서 A 단락에서 음행 한 자를 축출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문제이며 또 무엇 때문에 바울이 교회를 질타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이로서 A' 단락의 성령의 전인 성도들이 결국 음행을 피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전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결국 인클루지오의 B 단락은 A 단락의 원칙과 A' 단락의 실제 적용을 논리적인 예시로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B라는 주제를 가지고 A라는 다른 주제를 가진 두 단락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니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이란 분석은 정당한 분석이라 판단할 수 있다.

 


3. 마무리

  바울이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을 그의 인클루지오에 사용했다는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디모데전서 1-2장의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주제 이탈 단락을 설명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다. 논문의 저자는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이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을 그의 인클루지오에 사용한 구절로 5:1-6:20 외에 1:10-3:23, 7:1-40, 8:1-11:1, 12:1-14:40을 제시해주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 주제 이탈을 통한 논증을 사용하는 바울의 인클루지오가 성경 해석에 차지하는 중요도는 가히 중대하여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사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독특한 인클루지오 사용방식은 그의 성경에 아주 중요한 수사학적 도구로 사용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오해를 일으키는 엉뚱한 논리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바울의 독특한 인클루지오 사용법을 모르는 우리가 성경 저자의 관점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생긴다. 성경 저자들의 관점을 잃어버리게 되면 성경의 권위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결국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려 몰락하게 된다는 것은 교회 역사와 실제적인 현상들로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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