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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중심의 문체-구조적 성경 해석법

"칭의"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1)

by 예다준 2022. 8. 18.

"칭의"를 중심으로 본 저자 중심 성경 해석의 중요성(1)

 

 

 성경을 성경 저자의 관점에서 성경 저자가 말한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전문적인 신학 이론이 아니라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원리이다. 내가 A라고 말한 것을 누군가가 B나 C로 이해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게다가 그 오해로 인해 뜻밖의 부정적인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동일하다. 교회가 성경 저자가 말하는 바 "원 의미"(original meaning)에 올바로 귀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교회는 사람의 이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 예상 밖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는 끊임없이 성경으로, 성경을 기록한 성경 저자들의 가르침으로 돌이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교회가 성경 저자들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 와서 문제로 지적되는 전통적인 가르침 하나를 언급해 본다. 이는 "칭의"와 연관된 해석적 오해이다. 이것을 살펴봄으로 성경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1. "칭의"에 대한 교회의 이해

  "칭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칭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말씀(칭)하면 그는 의인이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 그를 의롭다 칭해주신다. 그래서 교회는 오래전부터 "믿음-칭의 프레임"을 구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틀로 이해하고 이 틀로부터 구원에 대한 보다 세밀한 교리들을 발전시켰다. 

  그 중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칭의에 대한 몇 가지를 이해들을 보면 이렇다.
  1) 칭의는 구원의 시작이다.
  2) 이것이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신자가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칭의 -> 성화 -> 영화"라는 구원의 순서가 있다. 이를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른다. 이는 신자의 구원과 관련된 요소들을 순서화시킨 것이다. 
  3)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칭의 -> 성화 -> 영화"라는 구원의 순서가  "구원의 과거 -> 구원의 현재 -> 구원의 미래"라는 시간적 틀로 해석된다. 

  칭의는 과거의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고, 성화는 전 생애에 일어나는 과정으로 어떤 이는 적게 또 다른 이는 더 많게 이루어질 수 있는 신자의 현재적 모습으로 이해되고, 영화는 칭의를 받은 신자가 죽음으로 덧입게 되는 상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상태로 천국 입성을 위한 미래의 모습이라 이해된다. 이러한 프레임으로 신자의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가 견지하는 구원에 대한 입장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다른 성경들을 만나면 문제를 만든다. 다른 성경들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논리적인 충돌이 발생해서 온전한 설명이 궁해진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먼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곧 칭의)을 사용한 각 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고 한 성경 저자의 가르침(특히 사도 바울)을 다른 성경에 대입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오늘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무리하게 대입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교회가 성경을 성경 저자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다른 성경 저자의 생각이나 오늘 우리의 생각을 성경에 대입해서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 성경 말씀이 서로 꼬이는 오류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진짜로 그런지 살펴보자. 


2. 믿음-칭의 프레임은 구원의 시작인가?

  가장 먼저, 칭의를 구원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다른 성경 말씀들과 비교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본다. 


  2-1. 바울 서신에서 칭의

  칭의를 믿음의 시작이요, 신자가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회적 과거적 사건으로 주장하는 것은 칭의의 전파자인 사도 바울의 다른 성경 구절들과 어울리지 않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롬 4:3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이를 의로 여겼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창 15:6의 인용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구절이 사도 바울이 강조했고, 오늘날 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으로("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칭의("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의 시발점이 되는 성경이고, 바울의 믿음-칭의 구원론이 설명되는 기본 구절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구절을 따라서 칭의를 구원의 시작으로 본다. 칭의를 구원의 시작이라 본다면 이때가 아브라함의 구원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럼 이때 그는 몇 세였을까? 창 15:6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고 있을 때이지만 정확하게 그가 몇 세 때인지 정보가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창세기 16장에 이스마엘을 낳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다(창 16:16). 창 12:4은 그가 하란을 떠날 때가 75세라 했고(창 12:4), 창 16:16에서는 그가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라 했으니 아브라함이 칭의 되어 구원받은 시점은 75세와 86세의 어느 때쯤이 된다. 

  그런데 롬 4:19-22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또 믿음으로 의로와졌다 말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러면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에겐 두번의 칭의 사건이 있었고, 이것은 결국 아브라함에게는 구원에 대한 두 번의 시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구원의 시작이 두 번 달리 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도 바울이 잘못 말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잘못 이해한 것인가?  

 

  2-2. 다른 성경 저자들의 칭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칭의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이 또 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믿음 장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는데,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나온다. 히 11:8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믿음으로 행했다 한다. 더군다나 앞 절인 11:7을 보면 "믿음으로 의의 후사가 된다"는 로마서와 비슷한 유대식 믿음-칭의 문구가 나온다. 

  히브리서 11:7-8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노아가 믿음으로 의의 후사(상속자)가 되었으면 동일한 믿음을 이은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마땅한 논리이다. 그러니 히브리서 저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반응했으니 의롭다고 칭의 된 것이라 가르쳤다 봐야 한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아브라함은 75세에 칭의 되어 구원받은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또 다른 믿음-칭의 사건을 알려준다(약 2:21-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의 가르침을 보면,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로워졌다는 말은 믿음(의 행함)으로 의로워졌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약 110세 정도에 믿음으로 또다시 칭의 되어 구원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칭의 프레임을 아무 제한없이 모든 신약 성경에 적용하면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러면 그는 일생동안 여러 차례 구원을 받고 여러 차례 구원의 시작을 경험한 것이다. 

 

  성경 그 어디에도 구원을 여러 번 받아야 한다는 구절은 없다. 다중 칭의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의 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라는 논리를 아주 단순하게 아브라함 한 사람의 생애 여기저기에 적용하면 이상과 같은 황당한 결과가 생겨난다. 그러면 이렇게 황당한 논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사실 칭의를 모든 신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구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성경본문을 정확하게 관찰한 논리적인 진술이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들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믿음-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정리하면 이렇게 요약해야만 한다.


  1) 사도 바울, 히브리서 저자, 야고보는 모두 믿음-칭의의 프레임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했다. 
  2) 하지만 그들이 가르친 믿음-칭의 프레임에서는 칭의를 믿음의 시작으로 주장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보면 바울은 바울 자신의 성경에서, 그리고 다른 신약 성경 저자들끼리도 가르침이 충돌한다. 즉 그들에게는 각자 의미가 다른 믿음-칭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3. 믿음-칭의 프레임은 과거의 구원인가?

  신약성경에 여러 저자들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칭의가 여러 번 다른 시점으로 기록된 것은 칭의가 신자의 구원을 위한 일회적 과거적인 사건이 아님을 말하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오히려 신약 성경을 보면 칭의는 과거에 단 일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른 성경 저자의 관점은 차치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칭의를 여러 번 다른 시점에서 사용한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로 파악된다. 

  이 결론에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은 최종 심판과 관련된 구절에서 미래적인 칭의를 사용했다. 롬 2:13과 3:20, 30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세 구절의 "의롭다하다"는 모두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미래 수동태 직설법 동사이다. 이것은 명백한 칭의의 미래적 모습이다. 칭의를 구원론의 핵심 주제로 삼았던 바울도 칭의를 과거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적인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러면 바울의 칭의는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과거의 사건도 미래의 사건도 된다. 그러므로 칭의를 중심으로 구원의 순서를 "칭의 - 성화 - 영화"로 구분하고 그것을 과거 - 현재 - 미래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칭의론에서 어긋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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