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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누가복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by 예다준 2022. 12. 6.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Parable of the Good Samaritan)는 이웃을 돕는 선한 이웃(the Good Neighbor)으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정겨우면서도 은혜로운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 학자들에게 이 비유는 해석의 무법 지대와 같은 비유이다. 한 학자는 이 비유에 대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이면서도, 최근까지 통일된 해석을 만들지 못한 비유라 평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보통 두 부분으로 나눈다. 먼저는 사마리아인 비유의 배경이 되는 율법사의 영생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실린 율법사와의 논쟁 단락(10:25-28)이고, 두 번째는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인 내 이웃이 누군가를 묻는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담긴 단락(10:29-37)이다. 하지만 이 구분으로 성경 학자들 간에는 해결되지 않은 해석상의 논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중 대조되는 두 그룹의 성경 해석의 상반된 예를 보면 이 비유 해석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눈치챌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율법사의 영생에 대한 질문(10:25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와 이웃에 대한 질문(10:29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사이에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 말하면서 두 단락의 결합은 어색한 형식의 결합으로 누가의 어울리지 않은 느슨한 편집의 결과라 본다. 그래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지켜오고 있는 비유 본문의 두 단락을 연관된 것으로 보는 성경 해석 방식을 거부하고 비유를 성경본문과 분리해서 해석하자 주장한다. 어떤 논문에 의하면 서구의 많은 학자들이 이 입장에 동의하고 한국의 성경 해석자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들 외에는 이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보았다. 만약에 비유 본문과 누가복음 10장의 문맥을 이원화해서 해석하면 10:25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오직 10:29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에만 해석적 관심이 몰리게 된다. 그 결과 이 비유를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만이 강해지는 편중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본문에 없는 “선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 이해하는 전통적인 해석은 어떤가? 이 해석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 되자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 해석에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해석도 비유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인 율법사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무관심하다. 이 해석이  첫 번째 단락을 취급하려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율법주의를 가르쳤는지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통적 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이 부분을 만나면 해결책을 모르고 의문을 품다 성경을 덮는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유 본문을 나누는 것은 반대하면서 한 단락은 강조하고 다른 단락은 무시하는 기이한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평할 수 있다.
  
  본 글들은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을 지향한다. “저자 중심의 성경 해석”은 곧 “성경 본문 중심의 성경 해석”이다. 현재 성경 본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진 최종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기적이고 축자적인 성령의 영감의 결과물이라 믿는다. 그런 전제 아래에서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문학적, 수사적, 문체적 표현들과 특징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누가복음의 문맥에서 이탈하거나 다른 부분의 성경에 함묵하는 성경 연구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비동의는 무조건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합리적으로 연구한 결과에서 도출된 성경적 근거를 가진 비동의 라야 만 한다. 이런 생각으로 비유 본문을 먼저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도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학적 구조를 제시하고, 그런 다음 예수님 당시의 종교-사회-문화적 배경들을 중심으로 본문의 표현들이 당시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를 살펴서, 10:25-37 전체를 통합적이면서도 각 단락의 의미를 잘 살린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전체 상세 문학적 구조 분석과 관찰

  필자는 문학적 구조 분석을 통해서 비유 본문 전체(눅 10:25-37)는 두 개의 단락(10:25-28과 10:29-37)을 가진 하나의 내러티브로 짜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눅 10:25-37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단락과 두 단락이 통합된 하나의 내러티브가 있음을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증명하고, 이것이 온전히 인정되어야만 이 비유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고 한다.

 


  1-1. 눅 10:25-37 전체 구조

  먼저 비유를 포함한 누가복음의 비유 본문인 눅 10:25-37의 전체 구조를 분석해 본다. 

  1) 전체 구조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놀란 것은 필자가 찾아본 대부분의 자료들은 눅 10:25-37의 전체 구조를 동일하게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이 일치에는 비유 본문 해석에서 문학적(또는 서사적) 구조를 짧든 길든 언급하는 학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비슷했고, 비평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와 그렇지 않은 학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놀랐다. 그만큼 비유 본문 전체의 문학적 구조에 대해 한 가지 주장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눅 10:25-37을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중 평행 구조”(Parallel double structure of conversation)로 이해한다. 학자마다 제시하는 이중 평행 구조의 모양은 도식화한 형식이 다를 뿐 내용은 모두 같았다. 그중 우리가 보고 이해하기 가장 쉬운 형태로 눅 10:25-37의 일반적인 문학적 구조는 이렇게 알려졌다.

  a. 율법사의 질문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b. 예수의 질문 :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10:26)
      c. 율법사의 대답: 사랑의 이중계명 제시(10:27)
        d. 예수의 대답: 긍정과 행할 것에 대한 지시(10:28)
  a'. 율법사의 질문: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10:29)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30-35)
    b'. 예수의 질문 : “이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10:36)
      c'. 율법사의 대답: “자비를 베푼 자”(10:37a)
        d'. 예수의 대답: 긍정과 행할 것에 대한 지시(10:37b)



  이 문학 구조에는 문제가 있다. 이 문학적 구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 알려져 있어 다양한 문학적 구조들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더 좋은 해석적 아이디어와 성경에 더 적합한 해석들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학적 구조의 장점은 성경 본문을 볼 때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구조틀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성경본문은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의 질문과 대답이 번갈아가며 이루어지고, 그 사이에 비유가 등장하여 질문과 대화를 정리하면 위와 같은 모양이 완성된다. 게다가 네 개의 레이아웃으로 동의적 평행법의 전형적인 모양으로 만들어지니 문학적 구조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분석에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적 평행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인 대조되는 평행법의 짝(pair)이 보여주는 구조적 메시지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평행법이 중요한 것은 병렬적인 짝을 만드는 것이고, 이 병렬적인 평행법의 짝(pair)은 구조적 메시지를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평행법이 나타내는 구조적 메세지는 일반적으로 “모티브”(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나 동기)나 “모티프”(어떠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개의 화소)인 “주제”나 “개념들”, 반의적, 동의적, 상호보완적, 종합적으로 대조되는 “상관관계의 의미” 등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평행법이 실제 대화 속에서 활용될 때 화자로부터 청자에게로 인식되는 제2의 메시지이다(제1의 메시지는 이야기의 내용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예수님(누가)은 평행법이라는 문학적 틀을 사용한 것이고, 이것을 듣기 위해서 오늘날 성경 해석자들은 평행법을 찾아 분석하는 것이다. 
  위의 문학적 구조를 보면 마치 눅 10:25-37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찾을 수 있지만, a와 a', b와 b'와 같은 평행법의 짝들의 관계를 보면 짝의 대조됨으로 드러나는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다. 거두절미하고, a와 a'를 보자. 두 단락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율법사의 질문과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율법사의 또 다른 질문이 대조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것 말고 더 이상의 대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해석이 없다. 그러면 이어지는 b와 b' 짝이 구조적 메시지 전달에 일조를 해야한다. 하지만 b와 b'는 대조 사항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히브리적 평행법에서 중요한 것은 평행법의 짝으로 모종의 상관관계를 만들어 청자들이 이를 인식하도록 도와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b의 예수님의 질문인“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와 b'의 예수님의 질문인 “이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로 청자(독자)인 우리에게 해석되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이 분석이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분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2) 위 구조 분석의 또 다른 문제는 성경 본문에 저자가 만들어 놓은 중요한 문학적 도구인 인클루지오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의 분석으로 보면, 눅 10:25-37은 “3중 인클루지오로 이루어진 연속 교차대조법”을 이루고 있다. 3개의 인클루지오가 본문에 겹쳐있고, 이 인클루지오의 영향으로 두 개의 교차대조법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비유 본문에는 먼저 인클루지오 ①이 있다. 10:25b와 10:28은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라는 동사를 통해서 인클루지오를 만들고, 이 인클루지오가 10:37과 동일한 “행하다”로 10:25-37 전체를 아우르는 더 큰 인클루지오를 이중적으로 만든다. 10:25b의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는 질문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시작하는 질문이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 질문과 연동되어 나온 또 다른 하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서 비유 본문의 두 단락이 끝나는 지점에 모두 예수님의 “행하라”(ποίει)라는 명령문이 동일하게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비유 본문을 구성하는 두 단락을 하나로 연결하는 문학적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5b의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와 28절의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로 이 부분이 문학적 차원의 완결된 한 단락으로 끊어지고, 37절의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로 29-37절이 문학적으로 완결된 한 단락으로 끊어지면서, 동시에 10:25-37이 “행하다”인클루지오로 연관된다. 
  10:25b와 10:28이“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로 만드는 인클루지오 ①은 “영생을”(ζωὴν αἰώνιον)과 “살리라”(ζάω)로 이루어지는 인클루지오 ③로 보다 강화된다. 두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표현이다. “영생을”은 동사 “상속받다”(κληρονομέω)와 함께 사용되어 구약의 언약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신약적 관점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을 구약 이스라엘은 언약신학적 관점에서 “영생을 상속받는다”로 표현했다. 결국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 또는 “살다”(ζάω)의 구조는 10:25과 10:28을 완벽한 하나의 단락으로 결속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 중간에 “사랑의 이중 계명”이 있다. 그래서 비유의 첫 번째 단락의 구조는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


    X. 사랑의 이중 계명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살리라(ζάω)

  세 번째 인클루지오는 10:29b와 10:36이 “이웃(πλησίον)”으로 만드는 인클루지오 ②이다. 율법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이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대답으로 마무리면서 인클루지오를 만든다. 이 인클루지오는 문학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① 먼저, 10:29b과 10:36을 의미상 한 단락으로 묶는 역할이다. 이것은 인클루지오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10:25b과 10:28이“행하다”인클루지오로 의미상 한 단락으로 구분되듯이, “이웃 인클루지오”는 10:29b과 10:36을 의미상 한 단락으로 묶어준다.
  ② “이웃 인클루지오”는 인클루지오 가운데 부분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강조한다. 이것도 인클루지오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③ “이웃” 인클루지오 ②는 앞과 뒤에 배치된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와 결합해서 이중으로 교차대조법 형태를 만든다. 성경 본문을 보면 “행하다”와 “이웃”이 “행하다”(28절) – “이웃”(29절) – “이웃”(36절) - “행하다”(37절)의 순서로 나온다. 이것은 아래 그림과 같이 교차대조법 형태를 만든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교차대조법이 있는 것 보다 교차대조법이 두 단락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에 있다. 28절은 앞의 단락 마지막 부분이고, 29절은 두 번째 단락의 시작 부분이다. 이 지점에 행하다 인클루지오와 이웃 인클루지오가 겹쳐있다. 이것은 인클루지오 ①과 동일하게 두 단락을 연결하는 “문학적 경첩”(literary hinge)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본문의 두 단락은 누가의 어울리지 않은 느슨한 편집의 결과라는 평가는 누가가 만들어 놓은 수사학적 장치들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것이다. 
  후에 자세히 보겠지만 이 인클루지오는 논지의 방향을 바꾸는 역전환적인(inverted) 성격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율법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로 “이웃의 대상”에 대한 질문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로 “이웃의 주체”로 역방향적이다. 질문과 대답의 역방향적 전환을 만든 것은 인클루지오 사이에 자리잡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다. 그래서 이 단락의 문학적 구조도 인클루지오가 만든 교차대조법이 된다. 

  B.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X.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B.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 이상의 관찰로 발견한 문학적 구조를 합치면 비유 본문의 전체의 문학적 구조가 완성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인클루지오 중심으로 본 전체 구조는 두 개의 레이아웃을 가진 교차대조법과 세 개의 레이아웃을 가진 교차대조법의 연속적 구조이다. 행하다로 이루어진 인클루지오 두 개가 겹쳐 진행되면서 내러티브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끈다. “행하다”인클루지오는 먼저 “살다”(ζάω) 인클루지오와 조합되면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첫 번째 교차대조법의 중심으로 만든다. 또 “행하다”인클루지오는 “이웃 인클루지오”와 조합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두 번째 교차대조법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
    X. 사랑의 이중 계명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살리라”(ζάω)
    B.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X.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B.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A". 이와 같이 행하라(포이에오, ποιέω)

  하나의 문학적 구조로 성경 본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문학적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 완성도 높은 성경 해석의 비결이다. 위 구조는 본문 안에 누가가 설정해 놓은 인클루지오를 중심으로 작성한 것이다. 인클루지오를 만드는 요소와 인클루지오로 만들어지는 단락 구분, 그리고 인클루지오로 만들어지는 평행법을 중점적으로 표시했다. 

  이로서 우리는 눅 10:25-37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지 몇 가지 가이드 라인을 정리할 수 있다.
  ① 누가는 눅 10:25-37을 온전한 하나의 내러티브로 만들었다. 이 내러티브 안에 두 개의 단락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본문 전체에 치밀하게 짜여진 문학적 구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누가는 인클루지오를 여러 겹으로 겹쳐 놓고, 인클루지오로 겹쳐지는 교차대조법을 만들어놓아 두 단락을 이중 삼중으로 연결했다. 이것을 보고도 누가가 두 이야기(영생에 대한 율법사와 예수님의 논쟁과 사마리아인 비유)를 엉성하게 편집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짜로 엉성한 주장이다.
  ② 누가는 문학적 장치인 인클루지오와 교차대조법을 통해서 물이 흐르는 물 길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작업을 성경 본문에 해놓았다. 이것은 성경 저자가 의도한 해석의 방향이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먼저 성경에 기록된 성경 저자의 흔적을 찾아 해석하는 것이 첫 번째 전략이 되어야만 한다. 
  ③ 어떤 해석 방법이든 관계없이 비유만을 본문의 문맥에서 떼어 해석하는 것은 저자인 누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해석이라 동의할 수 없다.
  ④ 누가는 본문의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연속된 교차대조법의 중앙을 이으면 사랑의 이중 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중심의 성경 해석은 교차대조법의 중심의 두 메시지를 온전하게 연결해주는 설명이 되어야만 한다. 

 


  1-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30-35)의 상세 문학적 구조

  이제 비유 자체의 문학적 구조를 살펴본다. 비유 전체 본문인 눅 10:25-37의 전체 구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만의 상세 문학적 구조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과 같이 필자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가장 적절하게 분석한 것은 케네스 E. 베일리(Kenneth E. Bailey)의 교차대조법으로 보인다. 아래 그림은 베일리가 제시한 문학적 구조를 우리가 보기 쉽도록 정리한 것으로 내용은 동일하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A. 
  a.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b. 때려  
      c.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B. 
    a. 31a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b. 31b 그를 보고 
        c. 31c 피하여 지나가고
    C.   
      a. 32a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b. 32b 그를 보고 
          c. 332c 피하여 지나가되
      X. 
        a. 33a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b. 33b 그를 보고 
            c. 33c 불쌍히 여겨 
    C'.
      a. 34a 가까이 가서 
        b. 34b 그 상처에 싸매고 
          c.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B'. 
    a. 34c 자기 짐승에 태워
      b.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c. 돌보아 주고
A'.
  a. 35a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b.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c'. 35b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전체 구조는 A-B-C-X-C'-B'-A' 모양의 교차대조법이다. 각 단락은 하부에 3연의 미시적 구조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이것이 누가의 문학적 구조의 특징 중 하나라 말한다. 얼핏 보면 문학적 구조가 간단하고 평이하게 조직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안에는 등장인물의 행동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세 개의 패턴(A-A', B-C-X, C'-B'-A')이 존재하고, 이 패턴들이 변화되는 것으로 비유의 플롯이 결정되는 정말로 그림 같은 문학적 구조이다. 

  이 구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A와 A'의 대조가 전체 모양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패턴으로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교차대조법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최외곽 레이아웃인 A와 A'의 하부 미시적 구조가 반의적으로 완벽하게 대조를 이룬다는 점이다. 대조되는 요소가 애매하지 않고 뚜렷하여 강도의 행동에 반의적으로 표현된 사마리아인에 대한 묘사가 분명하여 강도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강도 만난 자의 회복이 기대된다. A와 A'의 하부 미시적 구조를 비교하면 이렇다.

  a//a'. 뺐다(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 주다(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b//b'. 헤치다1(때려) ↔ 살리다1(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c//c'. 헤치다2(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 살리다2(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강도들은 강도당한 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중 먼저 묘사된 것이 재물이다. 강도들은 재물은 물론 옷까지 빼앗았다(a). 학자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은 상당한 부자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 사람이 알몸의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강도와 정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위해 돈을 지불하여 그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a'). 
  강도가 빼앗은 것은 물질만이 아니다. 강도들은 강도 만난 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헤쳤다. 주님께서는 강도들이 사람을 때려(b) 거의 죽게 만들었다 말씀하셨다(c).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사람을 돌보아 주어 살리려는 완전히 반대 행동을 했다(b'). 마지막으로 c와 c'에서 강도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을 버리고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받을 수 있는 곳에서 생명을 보호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로서 사마리아인은 강도가 만들어 놓은 절망적인 상황을 온전히 회복시킨 것으로 그려졌다.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강도 만난 자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2) B-C-X의 하부의 미시적 단락인 a, b, c의 표현들은 서로 연속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 a는 등장인물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표현에서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에 대한 표현이 “이르러”(ἔρχομαι)로 같고, 제사장에 대한 표현은 “내려가다”로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 b에는 모두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다”(ὁράω)라 표현한 것에 일치하고, c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동일하게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난 후“반대편으로 지나가다”(ἀντιπαρέρχομαι)로 같게 표현되었다.
  a, b, c의 3단 표현을 등장인물을 부각하기 위해 4단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면 각 등장인물별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더 쉽게 눈에 보인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 패턴은 기계적일 만큼 동일하다. 사마리아인의 행동 패턴도 2개(b, c)는 같다. 

  a. 우연히 어떤 제사장이
    b. 그 길을 내려가다가
      c. 그를 보고
        d. 지나갔다.
  a. 마찬가지로 어떤 레위인이
    b. 그 장소에 와서
      c. 그를 보고
        d. 지나갔다.
  a.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b. 여행 중에 그에게 와서
      c. 그를 보고
        d. 불쌍히 여겼다.

  B-C-X의 연속적 패턴은 사마리아인(X)의 c 단락에 와서 깨진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반대편으로 지나가다”(ἀντιπαρέρχομαι)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바뀐다.



  3) X의 c 단락에서 깨진 B-C-X의 하부의 미시적 단락의 연속적 패턴은 교차대조법 중앙에서의 역전으로 C'-B'-A'로 이어지는 새로운 패턴을 만든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의 패턴은 아래 표에서 참고할 수 있는 바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분석된다. 

  1) 다가감 : 강도 만난 자를 피하지 않고 접근함(가까이 가서,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2) 치료함 : 거의 죽게 된 사람을 회복시킴(그 상처에 싸매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돌보아 주고)
  3) 재정 지출 :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희생함(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비가 더 들면 갚으리라)

  위의 분석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의 행동 패턴은 치료함(C') → 다가감(B') → 제정 지출(A') 순으로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전체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가 저질러 놓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A)을 회복시키고(A'),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들(B-C)을 교차대조법의 가장 중앙 단락(X-c)에서 “불쌍히 여기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로 역전시키고 다가가 치료해주고 자신의 돈을 지출하는(C'-B'-A') 행동을 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핵심이 되는 주제는 교차대조법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또한 강도와 제사장, 레위인들의 부정적인 패턴을 180도 역전시킨 플롯의 전환점에서 있는 것으로 보아 “불쌍히 여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판단된다.
  사마리아인의 “불쌍히 여김”은 비유를 마치고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에서 한번 더 해석되어 강조되었다. 그것이 “자비를 만듦”(ποιήσας τὸ ἔλεος)이다(10:37). 율법사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비를 만든 자”(Ὁ ποιήσας τὸ ἔλεος)라 대답했다. 이로서 “불쌍히 여김”은 “자비를 만듦”과 같은 의미로 강조되었다. 

  5) 이상의 관찰 사항으로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루는 연속되는 교차대조법의 두 중앙의 연결점이 보다 뚜렷해진다. 앞에서 우리는 사랑의 이중 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문학적 구조로 확인했다. 사랑의 이중 계명 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핵심 메시지가 “불쌍히 여김”=“자비를 만듦”임을 확인했기에 결국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랑의 이중 계명”은 “불쌍히 여김”과 “자비를 만듦”을 내포하는 것이다. 

 


2. 예수 시대 당시의 팔레스틴의 종교-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관찰

  앞에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로만 비유 본문을 살펴보는 작업을 실시했다. 성경 본문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문학적 수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예수 시대 당시의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병행한다. 비유 본문에 표현된 것들은 21세기 현대인의 문화적 관점에 아니라 예수 시대 당시의 팔레스틴의 종교-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보아야 보다 원 의미에 충실한 해석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다. 
  특히 예수 시대 당시의 문화적 관점에서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비유의 해석에서 크게 논쟁이 되는 주제들이 문학적 구조에 대한 분석보다 비유 안의 종교-사회적 상황 분석에 의해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유에 담긴 종교-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서 비유가 조명하는 포커스, 즉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달리 보게 된다. 이 차이에서 각종 해석들이 출현하여 논쟁을 일어나는 것이다. 
  근래에 이 비유에 대해 자주 거론되는 논쟁 주제들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율법사의 질문인 이웃의 범위에 대한 문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과 갈등 문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론의 문제
  예수님과 율법사 사이의 정통과 이단이라는 갈등 문제
  사마리아인의 옳음에서 비롯되는 종교다원주의 문제

  학자들은 위에서 열거된 논쟁 사항들 대부분을 예수님 당시 종교-사회적 정황을 통해 해결하려 노력하며 자신만의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에다가 비유를 누가복음 본문에서 떼어 독립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해석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지는 결과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2-1. 율법사와 예수님의 첫 번째 대화(10:25-28)

  첫 번째 교차대조법의 시작이자 비유 본문의 시작은 율법사의 질문으로 비롯된다. 누가는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했다 설명했다(10:25). 이로서 독자들은 율법사의 악의적 목적을 전제하면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 첫 번째 구절인 25절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전체 본문을 이끌어 가는 두 주인공인 예수님과 율법사를 소개한다. 주목할만한 것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선생님”(διδάσκαλος)이라 부른 것이다. 이 단어는 당시“랍비”들을 칭하던 용어였다. 율법사가 예수에게 랍비라 칭하는 것은 사실 정상적인 태도가 아니다. 율법사는 정통 종교를 대변하는 인물로 공인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는 사이비적인 정체모를 종교 운동가로 보였기 때문이다(참고,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하지만 이 호칭으로 누가는 비유 본문 전체를 주도하는 두 주인공을 랍비와 율법사로 대조했고,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전형적인 랍비들의 논쟁 토론(streitgesprch)으로 기록해서 율법적 논쟁의 기조를 유지했다. 
  후에 보겠지만 이런 비유의 기조는 율법사의 두 질문이 모두 율법과 연관된 문제라는 점에서 참 율법 교사와 거짓 율법 교사와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비유 안에 깔려있다. 율법사는 예수가 거짓 랍비임을 시험하려고 율법과 연관된 영생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을 했고,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대답을 들은 후에 율법에 대한 오해로 가지고 있던 이웃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때 예수님은 참 율법 교사로 율법사의 모든 질문에 탁월한 답을 주셨다. 이렇게 비유의 배경에는 율법에 대한 문제가 깔려있다. 이것은 이 비유 본문 전체를 해석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지침으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본다.



  2) 가장 먼저, 이 부분을 보면 예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 무엇 때문에 예수를 시험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면 성도들이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아 고민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왜 예수님에게 시험 거리가 되는가?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로 응수했다(10:26). 율법사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반격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이어갔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대답에 “옳도다”라 화답했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율법사는 예수님의 칭찬(?)으로 자기 자신이 옳다 보이려 했다 성경은 기록했다(10:29).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적대적인 동기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돋보이는 비적대적 동기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율법사가 예수님으로부터 율법에 대한 대답을 듣기 원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율법사의 마음에는 이미 질문 전부터 “영생을 얻음 = 율법”이라는 정답과 같은 도식이 있었고, 이 도식에 맞지 않는 대답을 예수가 하면 예수를 반격하려는 도전을 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율법사는 “영생을 얻음 = 율법”의 도식으로 예수를 시험하려 했을까? 이에 대해 예수님과 유대교 사이에 발생한 충돌로 복음서가 가장 많이 언급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 판단했다는 사실이다. 마 5:17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 보았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셨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케 하려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들(메시야적 율법을 선포하고(예로, 마태복음 4-7장) 메시야적 구원을 실제로 보여주는 행위(예로, 마태복음 8-9장)과 삶이 유대인들의 눈으로는 율법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율법과 동등하게 권위를 부여했던 “구전 율법”인 할라카를 완강하게 거부하셨다. 할라카(Halakha, הֲלָכָה)는 “유대법”이라 불렸던 것으로 구약 성경 외에 성경법(613 계명)과 탈무드, 랍비법, 관습과 전통을 포함한 유대교의 종교법의 총칭이다. 유대인들은 이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도 불렀는데(마 15:2),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 믿었다. 
  할라카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은 절대적인 것으로 산헤드린에서 해석되고 반포된 할라카에 대해 문제를 삼는 자는 신 18:12을 근거로 사형을 당할 수 있었다(“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이는 할라카를 만들어 내는 현인들의 권위는 모세에게서 내려온 것으로 무제한적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할라카 준수에 목숨을 걸었던 대표적인 인물인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성문 율법을 받을 때, 구전 율법도 함께 수여받았다고 믿기도 했다 :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판을 수여하실 때, 장차 서기관들이 제정하게(성문화 하게 될) 될 모든 규정들도(구전 율법) 보여 주셨다”(탈무드,메길라 19b).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들을 모두 “사람의 유전”이라 명하고,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직격탄을 날리셨다(막 7:9-10). 그리고 유대 사회를 이끌던 대제사장,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장로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음식법, 정결법, 안식일 법 등을 대표적인 할라카를 의도적으로 어기는 행동들을 계속해서 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신들과 비교해서 예수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별명을 붙여 경멸했다(마 11:19, 눅 7:34).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접근한 이유가 시험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 유대인들과 동일한 입장이었다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학자들은 율법사의 입장에서 조망한 예수를 추측한다. 공인된 지도자였던 율법사는 예수를 갈릴리 촌뜨기로 정식적인 학력이 없는(막 6:3; 요 7:15) 떠돌이 선동꾼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 율법사는 성경을 필사하거나 율법의 전통을 보조하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신학도들을 가르치고 재판에서 법관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랍비로 이스라엘은 그를 "나의 주님"(My Lord)로 존경하는 지도급 인사였다. 그러므로 율법사의 시험은 예수가 율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거짓 교사”임을 드러내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비유 본문의 바로 앞의 본문인 눅 10:21-24과 연결되어서 자연스럽다. 여기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라 스스로 칭하는 자들에게 숨겨지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나온다. 이 가르침 뒤를 연이어서 비유 본문이 나오는 것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라 자부하는 율법사가 어린 아이 같이 보이는 예수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에게 접근한 실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영생을 얻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다(마 3:2; 4:17, 막 1:15; 눅 5:32). 이것은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었다. 율법사는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면 예수가 반드시 율법, 즉 할라카를 어기는 답을 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가능성이 아주 많은 추론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 첫 번째 단락의 병행 본문인 “가장 큰 계명 논쟁”(마 22:34-40//막 12:28-311//눅 10:25-28)이다. 누가복음의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본문을 보면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와서 이중 사랑의 계명을 논하게 된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첫 번째 단락과 아주 흡사하다. 마태복음이 누가복음과 다른 점은 율법사의 질문이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로 다르고 이중 사랑의 계명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질문(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과 누가복음의 질문(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답이 이중 사랑의 계명으로 같다. 이것은 영생에 대한 질문을 율법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크고 작은 것으로 나누지 않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율법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겼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사가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을 물은 것은 일종의 함정이다. 가장 큰 계명을 인정하는 것은 율법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는 행동으로 정죄의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인정하는 것들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계명이라 비난했던 할라카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사는 예수를 율법 파괴자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큰 율법과 작은 율법이라는 함정으로 시험을 감행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율법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은 예수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빌미로 고발 거리를 만들려 한 것이 분명하다. 



  3) 율법사의 질문으로 제기되는 또 하나의 질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율법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율법사는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 질문을 했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대답을 하셨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 구원론과 다른 구원론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을 행하라 명령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래전부터 해석적 문젯거리로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의외의 부분에서 발생한 오해와 율법사의 질문에 사용된 동사 하나에 대한 해석을 바로잡을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사용된 한 동사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에는 “얻다”라 번역된“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로 “물려받다, 상속받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율법사의 질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까?”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는 ‘유산’ 혹은 ‘유업’이라는 뜻의 “클레로노모스”(κληρονόμος)에서 파생된 동사로, 클레로노모스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판인 70인 역(LXX)에 나오는 히브리어 “분깃, 제비, 유산”의 뜻을 가진 “클레로스”(κλῆρος)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율법사가 사용한 영생을 “물려받다, 상속받다”라는 표현은 구약적 표현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땅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는 개념을 표현하는 전문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단순히 “얻다”로 번역하면 정당한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은 결국 종말론적인 땅인 천국에 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신약 교회의 유대인들은 “천국에 들어간다” 또는 “구원(천국)을 받는다(들어간다)”라는 표현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κληρονομέω)”라는 유대식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표현은 성경 저자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으므로 신약 성경 여기저기에서 사용되어 뚜렷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중 대표적인 구절이 사도 바울의 고전 6:9-10이다.

  고전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10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외에도 마 5:5; 19:27; 25:34, 고전 15:50(2회), 갈 4:30; 5:21; 히 1:4, 14; 6:12; 12:17; 벧전 3:9, 계 21:7에도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 받음이 많은 성경 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 사용되었다.


  문제는 이 단어가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와 함께 “상속받다”가 아니라 “얻다”로 번역되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말도 어감이 이상하고 교리적으로도 깨름찍하게 들린다. 하지만 “영생을 상속받는다”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의 언약 신학적 종말론이 기독교적 종말론 안으로 들어와 배척되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된 개념이기에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이는 “온 이스라엘이 장차 올 시대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미쉬나, 산헤드린 10.1)라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구원론이 야훼를 신실하게 섬겼던 구약 이스라엘의 보편적 소망이었고 동시에 사도들도 이어받아 함께 고백한 사도적 종말론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구약적 믿음을 율법주의라 단정하고 율법 준수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더 나아가서는 성경적인 구원론인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짐)를 반대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성경 학자들은 유대교 신학의 중심인 “토라 순종”은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는 전 과정으로서 “영생을 상속함”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때 토라(율법)는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을 유지하는 “언약적 율법”이라 보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자들은 구약의 토라를 순종하는 종말론과 신약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종말론이 서로 연결된 흔적이 신약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영생을 상속받다”라는 표현에 있다 입을 모은다. 그러므로 율법사의 질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받으리이까?”를 오늘 교회의 정황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신학적 정황에서 본다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이행득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율법사가 이신득의 믿음을 가졌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신득의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토라(율법)를 대체하고 완성한 구원의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으로 믿었지만, 그 율법이 메시야적 율법으로 인격화된 예수라 믿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믿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음은 유대교의 한계에서 멈추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음은 예수님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와 초대 교회에게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4) 예수님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은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하루에 두 번식 암송하는 쉐마(신 6:4-9 비교 m Ber 1 1-4)과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이다(10:26). 마 34:40을 보면, 두 계명은 예수님도 인정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 계명은 메시야적 율법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올바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옳도다”라 인정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마무리하셨다(10:28).

 이로서 율법사와 예수님의 첫 번째 대화가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살리라”(ζάω) 인클루지오로 이루어진 교차대조법으로 마무리 된다.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10:25)
    X. 사랑의 이중 계명(10:26-27)
  A'.  행하다”(포이에오, ποιέω) + 살리라(ζάω)(10:28)

 


  2-2. 율법사와 예수님의 두 번째 대화 1(10:28-29)

  예수님의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명령에 율법사에게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δικαιῶσαι ἑαυτὸν)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누가는 설명했다(10:29). 이 마음이 동기가 되어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군가를 물었다(10:29).

  1) 여기에 와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주제인 이웃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누가는 율법사가 사람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의롭다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이웃이 누군가라고 질문했다 설명했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먼저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웃 주제를 거론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것보다 자신이 이웃에 대한 문제를 잘 다루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웃 주제를 거론했다는 견해이다. 누가의 설명대로 율법사가 자기 자신은 이웃의 문제를 잘 다스리는 자라 드러내려는 마음이 우선되었다 보인다. 
  하지만 두 견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질문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두 가지 견해가 이 질문 안에 함께 병립되어 있다. 특히 이웃에 대한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해 맹렬하게 질타했던 문젯거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율법사는 자기 자신은 드러내려고 질문했지만 이 질문을 듣는 청중들은 얼마든지 이 질문이 예수는 쪼그라들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 인식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에 대한 문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상속 받음과 직결되는 할라카 준수와 원리와 실천이라는 관계로 직결된 주제이다. 유대인들은 장로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 율법을 모세의 율법과 같이 믿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나타나고 확인된다. 믿음을 실천하는 현장에는 누가 있는가? 이웃이 있다. 그러므로 할라카에 대한 믿음은 곧바로 이웃에 대한 할라카의 실천, 달리 표현하면 할라카가 요구하는 이웃의 경계(boundary)를 잘 유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특별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강조하여 예수님과 잦은 충돌의 불씨가 되었던 음식법, 정결법, 안식일 법 등은 모두 이웃의 경계(boundary)와 직결되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경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할라카의 눈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이웃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메시야적 율법의 눈으로 할라카가 죄인이라 정죄하는 사람들도 이웃으로 보고 교제하고 초대했다. 그러므로 율법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은 자신이 할라카인 율법을 잘 지킨다는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 되지만 동시에 할라카인 율법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예수의 불량함을 드러내는 도전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의 이웃에 대한 정의는 B.C. 180년경 제사장 겸 서기관이었던 벤 시라(Ben Sira)의 한 마디 명령으로 대변된다 : "네가 선한 일을 할 때, 누구에게 행할지를 알라. 그리고 죄인을 돕지 말라"(Sir 12:1-4).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야훼를 경외하고 토라(율법)을 준수하는 이스라엘로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토라는 할라카를 포함한 것이다. 그래서 음식법, 정결법, 안식일 법 등으로 관계를 맺는 이웃의 경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겐 토라를 준수하는 삶의 실천적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인 예로 식사법(dietary law)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단순한 친교의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 율법을 준수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들은 더러운 것과 함께하면 더러워지고 죄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된다 믿었기 때문에 죄인을 식사를 함께 나누는 이웃으로 두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극단적인 수준에 까지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한 랍비 문헌의 문구를 제시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식사법이 구원론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 "성전이 서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속한 것은 제단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식탁이 그를 구속한다"(B.Berakhoth 55a). 이 정도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겐 이웃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사안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고집하는 예수를 율법을 무시하는 방탕한 자로 판정하고 비난했던 것이다(눅 7:34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율법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이웃의 자격이나 대상을 묻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이웃의 경계는 율법 준수의 표지로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실천적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이웃과 이방인을 분명하게 구분해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이웃의 경계가 무너져 죄인들과 세리들과 교제하는 율법에 대해 불경건한 자가 분명했다. 

  2) 이로 본다면, 첫 번째 단락과 비유가 있는 두 번째 단락에는 주제적 연관성이 없다는 일부 학자들의 판단은 예수님 당시의 종교-사회 문화적 배경은 물론 신학적 배경을 무시한 성급한 결론이다. 이들은 영생에 대한 질문과 이웃에 대한 질문은 서로 다른 질문으로 누가는 서로 다른 두 개 주제를 동일한 구조 속에 집어넣은 것이라 주장한다. 특히 율법 교사의 첫 번째 질문인 영생에 관한 질문은 병행 본문인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모두 나오는 것에 비해 “내 이웃이 누구냐”는 두 번째 질문은 누가복음에만 유일하게 나오는 것이기에 누가가 두 이야기를 짜깁기하기 위해 첨가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영생에 대한 질문과 이웃에 대한 질문은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의 질문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과 이웃에 대한 경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원리와 실천으로 동일한 일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만 있는 이웃에 대한 질문은 오히려 누가가 두 단락의 주제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2-3.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30-37)

  율법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선포되었다. 이 부분에 대한 문학적 구조 분석은 앞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그것을 토대로 예수님 당시 사회-문화-종교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중요 포인트를 살펴본다. 

  1) 먼저,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략 이렇다. 
  가장 확실한 것은 비유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을 무조건 유대인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비유는 이것 외에 그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어 우리는 강도를 만난 자를 더 이상 추론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옷을 뺏기고 심히 얻어맞았다는 것은 그가 고급 옷을 입어 강도들이 옷을 빼앗을 가치가 있다 생각했고, 이 사람은 옷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강렬하게 거부하다 구타당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로서 강도 만난 사람은 모든 것을 전부 잃기 직전이다. 돈도 빼앗기고 옷을 빼앗겨 그의 신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목숨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사라질 위기 앞에 있다.



  2)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관찰 사항은 비유의 주인공인 “어떤 사마리아인”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종교-문화-사회적 관점에서 비유가 묘사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은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오늘 우리들과 정반대로 사마리아인을 비난하고 조롱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자로 보았을 것이라 말한다. 
  먼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들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증오와 갈등의 적대자로 보아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 말할 정도였다(m Seb 8:6).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로, 자신들만이 완전한 토라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신앙만이 모세의 참 가르침을 따른다 주장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을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변절자로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왕하 17:24-41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을 야훼 신앙을 빙자하는 이방인의 후손들로 여겼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신학적인 차이로 서로를 이단시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묘사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맘에 들지 않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10:33을 보면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이었다 한다. 예수님 당시 여행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극악한 경제 상황은 일반인들에겐 여행이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 사마리아인은 이방 지역에 짐승을 데리고 있었고, 당시 가장 많이 거래되었던 물품인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고, 강도 만나 자를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10:34). 이로 보면 그는 장사를 하는 부유한 상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또 비유를 보면 사마리아인과 주막 주인은 초면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는 대가로 부비가 더 들면 돌아와 갚으리라 약속한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10:35).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의 약속은 주인을 잘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당시 주막은 대부분이 매음굴로 주막의 주인은 선하고 신뢰성이 높은 자들이 아니었다. 만약 잘 알지 못하는 주막 주인에게 사마리아인이 했던 약속을 한다면 그들은 강도 만나 자를 죽이고 그가 죽어 비용이 더 많이 들었으니 돈을 더 달라 날강도 같은 요구를 할 것이라 추측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해 볼 때 사마리아인은 부유한 상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부정한 자들과 교제하고 부정한 곳에 일상적으로 거하는 자로 보인다. 그렇다면 비유의 주인공은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이웃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인이 당시 청중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은 비유 속에서 보여준 황당한 행위에 있다고 한다. 
  먼저,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에게 한 대우는 동향 사람이나 친족에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배타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 살았던 고대 근동인들의 문화로 보면 파격적이고 이례적이라 청중들에게 거부감이 생겼을 것이라 학자들은 평가한다. 유대인들이 이웃에 대한 배타적인 경계를 지켰듯이, 사마리아인들도 자기 친족이나 이웃을 타인들과 철저하게 구분하는 배타적 문화 안에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친족이나 이웃에게는 무척 관대했지만 타인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게다가 고대 근동 사회가 혈연과 지연의 공동체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특히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라면,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공동체의 규율을 넘는 비현실적인 자비로 지탄받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런 면에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취한 조치는 괴이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데리고 간 주막은 일반적으로 더럽고 시끄럽고 매춘부들이 거하는 장소로 환자를 돌보는 일에 매우 부적절한 장소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관 주인들은 창녀로 믿음과 신의를 보장할 수 없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선한 자비가 이루어지려면 여관 주인과 아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여관 주인은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선한 사람이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사미리아인의 대우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조치인 셈이다.



  이러한 문화-종교적 상황들을 통해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가 취한 행동에 얼마나 어려운 특별한 결단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그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 비상식적인 사람, 공동체의 상식과 규율을 깨치는 사람, 신뢰성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돈을 허비하는 미련한 사람으로 보이는 어려움을 수용했어야만 했다. 여기에 문학적 구조 분석을 통해 살펴본 그의 행동 패턴의 파격성을 더하면 그는 “불쌍히 여김”에서 나온 “자비를 만듦”을 위해 당시 사람들의 모든 행동 패턴을 깨치고 뒤바꾸는 파격을 감행한 것이다.

  3) 이외에 강도, 예루살렘과 여리고, 제사장과 레위인 등이 비유의 정황을 추측하는 데에 관찰이 필요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아무도 확증해줄 수 없는 것이기에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예수께서 이것들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은 이것들이 비유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그만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지나친 해석 방법이다.

  4) 서사적 관점에서 비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간 등장인물들의 개별적인 특징보다 이들의 등장으로 비유를 듣는 유대 청중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긴장감을 중점적으로 본다. 맨 처음 제사장이 등장하자 청중들은 그가 목숨이 위태한 사람을 구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가 그냥 지나가는 것을 듣고 실망하고, 두 번째로 레위인이 나타나자 다시 한 번 더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실망하고, 세 번째 인물로 사마리아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기대감은 절망감으로 바뀌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예상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앞의 두 인물과 똑같이 묘사되는 것으로 청중들의 마음에 절망적인 안타까움을 아주 짙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교차대조법의 중앙의 마지막 단락에 묘사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라는 말을 듣자 눈이 번쩍 뜨이는 대역전이 일어났다. 청중들은 사마리아인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고 거부감과 놀라움을 느끼면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의 마음인 불쌍히 여김의 의미를 아주 강렬하게 되새겼을 것이라 설명한다.

 


  2-4. 율법사와 예수님의 두 번째 대화 2(10:36-37)

  비유를 마친 후 주님께서는 율법사에게 이웃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 

  1)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으로 율법사가 제기한 질문과 주제가 동일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과 율법사의 질문에 나오는 이웃에 대한 관점이 달라 본문 해석에 이견들이 일어났다. 율법사는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로 이웃의 자격이나 대상에 대해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되어주는 주체에 대해 언급하셨다. 율법사의 질문대로 대답을 한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자가 너의 이웃이다”라 했어야 정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웃에 대한 두 질문은 율법사와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대화와 사마리아인 비유 두 단락이 엉성하게 이어진 것으로 보게 만든다. 그래서 누가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논쟁 기사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결합하기 위해서 어설픈 질문을 삽입했는데, 그것이 율법사의 이웃에 대한 질문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율법을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영생을 상속받는 방법과 이웃에 대한 질문은 모두 율법 준수에 대한 질문으로 동일한 주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혔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두 질문이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율법사의 질문인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는 율법사를 중심으로 이웃을 정의하는 물음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은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이웃을 정의하는 물음으로 분명히 다르다. 
  이에 대해 고대 수사학, 특히 고대 그리스-로마의 논술법에 정통한 학자들은 예수님의 화법에서 “관점의 패러다임 전이를 통한 일반화”와 “다시 물음의 산파술”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많이 사용된 수사학적 논증법으로 대화를 통해서 대화 상대방의 해석적 틀을 바뀌는 “패러다임의 전이”(paradigm shift)와 질문으로 답을 찾아가게 만드는 “산파술”로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의 기술이 이와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면서 이웃을 바라보는 관점을 율법사에게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로 패러다임의 전이(paradigm shift)를 만들었다.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비유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참 이웃이라 느끼게 된다. 분명히 비유의 시작은 율법사의 질문으로 누가 율법사의 이웃인가라는 관점이었다. 이 질문을 듣는 청중들은 율법사의 이웃은 자신들의 이웃이라 생각하고 비유를 듣게 된다. 하지만 비유를 들으면서 청중들, 특별히 율법사는 강도를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참 이웃을 이해하게 된다. 즉, 율법사는 비유를 들으면서 강도를 만난 자의 참 이웃은 그를 도와주어 생명을 살린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되어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페러다임의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예수님의 질문은 그가 가지게된 페러다임의 전이를 그의 입으로 표현하게 만드는 다시 물음의 산파술로 기능을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0:36의 예수님의 질문이 새롭게 보인다. “네 의견에는 ...”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의미이다. 그 자리에서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모두 이 질문에 율법사와 같이 대답을 했을 것이다(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므로 네 의견은 패러다임의 전이로 관점이 달라진 이웃에 대한 생각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비유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이웃에 대한 페러다임의 전이를 가지게 된다. 나의 이웃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의 이웃으로 말이다. 
  또한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율법사의 마음에 일어난 의견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반화하게 만드는 산파술적 기능을 발휘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 물었다. 그러나 율법사는 세 사람 중 한 인물을 집어 대답을 하지 않고 일반화된 원리인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로 대답했다(10:37). 이로서 율법사는 스스로의 입으로 참 이웃을 판단하는 원리 또는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율법사는 자기의 입으로 자신이 물었던 질문인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의 대답을 말해버린 것이다.
  이 견해는 예수님의 지혜롭고 뛰어난 화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과 함께 문제로 제기되었던 이웃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놀라운 논증법으로 이루어진 결과로 보도록 해주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 견해는 필자가 앞의 문학적 구조 분석에서 28절과 29절이 만드는 인클루지오의 “문학적 경첩”(literary hinge) 기능이 논지의 방향을 바꾸는 역전환적인(inverted) 성격을 가진 것이라 설명한 것을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해준다.

  2) 여기에 한 가지보다 근본적인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알려준 이웃에 대한 관점의 전이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실천적인 지혜라는 사실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유대교의 선생이었던 율법사가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몰랐던 것은 단지 그가 지혜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율법에 대한 해석적 태도가 예수님과 달랐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비유를 통해 나타난 이웃에 대한 관점의 전이는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의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동기의 최대의 원리”(Maximal principle of motivation)를 적용하셨다. 하지만 유대교는 율법에 대해 “행동의 최소의 원리”(the least principle of action)를 적용했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옛사람의 성경 해석과 예수님의 메시야적 성경 해석으로 비교되어 비판된 것으로 유대교가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예가 마 5:27-28절에 나오는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마 5:27-28“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을 마음의 동기 차원에서 판단하셨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으로 보면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간음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이미 간음을 한 것이다. 이것이 “동기의 최대의 원리”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행동의 최소의 원리”를 적용해서 간음 행위를 해야 간음을 저질렀다 판단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대조법으로 “동기의 최대의 원리”가 예수로 인해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율법, 즉 메시야적 율법의 특징적인 관점이라 말씀하셨다(5:21-22).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행동의 최소의 원리”는 옛 시대의 율법에 대한 태도이다. 하지만 새로운 율법에 대한 태도가 “동기의 최대의 원리”로 나타났다. 그것이 예수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야적 율법이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관점은 “황금률”(마 7:12)에 대한 해석에서도 당시 유명 랍비였던 힐렐의 태도와 단적으로 비교가 된다. AD 20년경에 살았던 랍비 힐렐(Hillel)에게 어느 이방인이 찾아와서 “내가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율법 전체를 한마디로 가르쳐 주면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했다. 그때 힐렐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내가 남에게서 대접을 받기 원하는 만큼 남에게 해주는 것”으로 정의했다(마 7:12). 힐렐의 해석의 관점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부정적 행동의 최소의 원리”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의 관점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주는”“긍정적 동기의 최대의 원리”에 있다. 이로 보면 힐렐의 황금율 해석은 율법사의 나를 위한 이웃을 찾는 관점과 같고, 예수님의 황금율 해석은 강도를 만난 자를 위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는 관점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은 하나님과 세상을 해석하는 프리즘과 같이 작동했다.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에 목숨을 걸었으므로 세상 모든 것을 율법의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세상을 바라본 율법이라는 렌즈는 “행동의 최소의 원리”로 착색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이웃을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는 행동의 최소의 원리로 대응해야 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용한 율법이라는 렌즈는 “긍정적 동기의 최대의 원리”로 착색되어 이웃을 위해 이타적인 동기를 최상의 수준으로 나타내는 자기 자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 이웃이 되어주는 자신을 집중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비유는 나를 위한 이웃을 정의하지 않는다. 예수의 이웃에는 자격이나 대상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민족적, 인종족, 종교적, 그 어떤 것도 경계선으로 작용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나를 비유로 묘사한 것이다. 비유는 현실적으로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한다 교훈한다. 비유가 강조하는 이웃됨의 유일한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불쌍히 여김”과 “자비를 만듦”뿐이다.
  
  3)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예수님의 행하라 명령으로 두 번째 행하라 인클루지오를 만들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로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다가온 율법사가 계속해서 예수님께 설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맘속에는 과연 이 율법사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았는지 매우 궁금해진다.

 


3. 요약과 마무리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비유의 특징을 살펴보고, 종교-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에 논쟁이 되는 부분들 위주로 관찰을 시도해서 비유 본분을 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결과물들을 얻을 수 있었다. 
  ① 먼저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본문 전체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구조를 제시하고, 이것으로 비유 본문 전체가 통합적이고 조직적으로 세밀하게 구성된 구조를 가졌음을 확인했다. 이로서 비유 본문이 누가의 어설픈 편집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히려 세밀하게 짜 맞추어진 3중 인클루지오로 이루어진 연속 교차대조법의 문학적 구조물임을 알 수 있었다. 
  ②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본문 자체 구조 분석을 통해서 문학적 구조가 사마리아인을 통해 만들어지는 세 개의 행동 패턴으로 플롯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③ 율법사의 두 가지 질문, 영생을 상속 받음과 이웃에 대한 문제를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의 질문으로 해석하여 두 질문이 별개의 질문이 아님과 함께 눅 10:25-37을 이루는 두 단락이 동일한 주제로 관통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④ 또한 “영생을 얻다”를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음”으로 보고, 이 질문을 언약적 율법주의적인 관점에서 조망했다. 이로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음”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다.
  ⑤ 그리고 이웃에 대한 관점의 전이를 그리스-로마의 수사학적 관점에서 보아 예수님의 화법의 탁월성으로 볼 수 있음을 제시했고, 이웃에 대한 관점의 전이는 궁극적으로 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살펴보았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그 의미를 풍성하게 볼 수 있는 말씀이다.
  먼저, 누가복음 10장의 문맥적 흐름에서 볼 때, 영생과 이웃의 문제를 예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참 계시임(10:21-25)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이는 비유 본문 바로 앞 단락에 나오는 하나님의 참 계시(10:21-25)와 연관된 접근 방법이다.
  두 번째는 비유 본문 전체를 주도하는 주제인 율법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두 인물인 예수님과 율법사가 랍비(선생님, διδάσκαλος)와 율법사로 대조되고, 관통하는 주제가 유대인의 율법관과 예수님의 율법관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예수가 영생의 상속은 물론 참된 이웃을 사랑을 알려주는 참 율법 교사임을 강조하는 것을 비유 본문의 전체의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만을 보는 방법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참된 이웃 사랑은 “불쌍히 여김”에서 나온 “자비를 만듦”이라 교훈을 해주어 우리의 시각을 예수님의 시각과 같이 바꾸어주는 관점의 전이를 경험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한 가지 메시지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한 해석 방법이 아니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 비유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최근 거론되는 비평적 해석 모두를 비판받을 수 있고 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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