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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누가복음

한밤 중의 친구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눅 11:5-13)

by 예다준 2022. 12. 17.

한밤 중의 친구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눅 11:5-13)
-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분석

 



  성도들 대부분은 교회에서 설교 말씀을 듣거나 성경에 대해 설명해 주는 간단한 참고 도서로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유지한다. 여기에서 조금 더 열심이 생기면 교회의 성경 연구 모임에 참석하거나 목회자들의 경우 전문적인 성경 연구 기관에서 수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이수해도 해결되지 않는 난이도 극강의 성경이 몇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성경이 이 비유이다.

 

한 밤중의 친구 비유 삽화
한 밤중의 친구 비유 삽화, 출처=구글이미지


  이 비유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런데 황당무계해서 당혹스럽다. 늦은 밤에 친구가 방문했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다고 이웃 친구 가족의 단잠을 깨우면서 음식을 강청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정이 급하고 아주 친한 친구라면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벗 됨(= 우정)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強請, 무리하게 억지로 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는 예수님의 설명은 앞뒤가 뒤바뀐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오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우정 때문에 잠자다 일어나 필요한 물건을 준다. 친분이 없는 사람이 우리 것을 무조건 달라고 떼를 쓰면 경찰에 신고해버린다.

 

  이 비유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끈질기게 억지를 부리라 가르치는 것으로 보여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비유는 전문적인 성경 학자들의 도움이 절실한 말씀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비유는 성경 해석에서 합의 사항보다 문제 사항이 더 많고 복잡하다.

 


1. 비유 해석에서 거론되는 논쟁점들

  최근 우리나라 신약 성경 신학자들에 의해서 거론되었던 이 비유에 대한 해석적 논쟁거리들을 정리하는 것은 비유 이해 이전에 비유를 해석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가장 크게 논쟁이 되는 문제들을 열거하면 이렇다.

  1) 가장 크게 논쟁이 되는 문제는 11:8에 나오는 단어인 "강청함"의 원문 단어인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의 의미이다. 

  "아나이데이아"는 "하팍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이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한 번만 말해진", 곧 성경에 딱 한 번만 사용된 단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아내는 가장 쉬우면서도 신뢰성이 높은 방법은 그 단어의 다른 용례들을 살펴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한 번만 사용된 것이기에 그 의미를 단정 짓기 곤란하다.

 

  현재 이 단어는 두 가지 해석으로 갈려 논쟁되고 있다. 먼저는 사전적으로 "뻔뻔함"(shamelessness)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맥을 고려해서 "끈질김"(importunity), "끈덕짐"(persistence), "담대함"(boldness)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2) 두 번째는 "아나이데이안"에 불명확한 대명사 "아우투"(그의, αὐτοῦ)가 붙어서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로 나오는 부분이 해석에 문제가 된다. 

  의미가 명백하지 않은 단어에 지시 대상이 불명확한 대명사가 결합되어 이것이 누구의 아나이데이아를 말하는 것인지 더 애매모호해진 것이다.

 

  본문에서 ἀναίδεια의 의미가 "끈질김"이라 한다면 끈질기게 졸라대는 이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친구가 되어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끈질김으로 해석되지만(전통적 해석), 만일 "뻔뻔함"이라면 이 뻔뻔함은 한 밤 중에 빵을 빌리러 온 친구의 뻔뻔함도 되고 귀찮아서 빵을 주기를 거절하는 집주인의 뻔뻔함도 가능해진다(수치와 명예의 관점). 그러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의 주인공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3) 또 7절이 질문형인가 혹은 서술형인가 하는 점도 논란이 된다.

  7절을 수사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서문 가정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7절을 수사 의문문으로 보면 아무도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의미(개역성경의 경우)가 되고, 평서문으로 보면 오히려 집주인이 그 청을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보게 되어(공동번역의 경우) 결론이 정반대로 뒤집힌다. 


  4) 이러한 해석적 난제들이 모이면 결국 이 비유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 비유는 집 밖에서 떡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가 주인공이고, 간청하는 기도를 장려하는 비유인가? 그렇지 않고 집 안에서 떡을 빌려주는 친구가 주인공이고, 이로서 기도에 기꺼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대한 비유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이외에도 보다 더 전문적인 영역에서 제기되는 여러 해석적 문제들이 있지만, 이 정도가 비유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해결해야 할 수준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진다. 

  위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필자는 난제들을 야기하는 문제 사항들을 살펴보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난제가 모두 성경 본문에 표현된 단어나 문구, 문장의 뜻에 대한 논쟁이라는 점이다. 

 

  이 비유의 해석은 물론 비유의 의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는  "하팍스 레고메논"이기에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단어의 뜻을 보편타당하게 확정할 수 없다. 연동된 표현인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도 지칭하는 바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마찬가지이다. 이 비유는 본문 자체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단어나 문구의 의미를 따지는 그 어떤 성경 해석 방법을 사용해도 비유에 내재된 불확실함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보안 방안으로 고대 근동의 문화와 정치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본문을 해석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이 방법은 성경 시대인 고대 팔레스타인 문화를 고려하여 본문의 표현들을 해석하는 것이기에 좋은 연구 결과들을 많이 만든 유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본문에 적용하는 1세기 고대 근동의 문화가 해석하는 학자들마다 다르고 제 각각이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11:5의 "떡 세 덩이"를 들어본다. 무엇 때문에 친구 한 명을 대접하는데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 했을까? 먼저는 빵이 작기 때문에 세 덩이가 한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라 설명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손님을 대접할 때 큰 아들이 함께 배석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예법이기에 떡이 세 덩어리가 필요하다 설명하는 이도 있다. 또 떡 한 덩이는 천사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런 반면에 떡의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떡 자체에 대한 설명도 다르다. 어떤 이는 고대 팔레스틴의 떡은 작고 딱딱한 돌 같은 빵이었다 주장하고, 또 다른 해석은 팔레스틴의 떡은 크고 넓어 숟가락 대신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엇이 정답일까? 


  이 예는 고대 근동의 문화와 정치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단어나 문구,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는 방법은 보조적인 도움은 줄 수 있지만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방법도 불명확한 본문의 단어나 문구의 의미를 불명확한 문화-경제적 추론으로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난제들은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1세기 고대 근동의 문화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시 난제가 되어 성경 해석의 결과를 엎치락 뒷치락 좌우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성경의 단어나 문구 중심의 해석 방법에서 벗어난 다른 연구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단어나 문구 중심의 해석 방법에서 벗어나 있지만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성경 연구 방법,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물들과 연동이 가능한 성경 해석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여기에서 필자는 성경 저자들은 히브리적 병렬법의 문학적 구조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적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현대인의 책들과 달리 성경은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도구들이 주요하게 더 나아가서는 결정적으로 작동하도록 짜여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방법의 중요성은 더 크다 할 수 있다.

 

  이것을 찾아 검토해보면 문제가 되는 단어의 의미를 역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유의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사안들을 검토해 보고, 여기에 예수님 당시의 사회-문화적 정황들을 감안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추리하는 것은 특히 이 비유의 경우에는 필수적인 성경 해석 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유를 포함한 앞과 뒤의 단락들을 살펴보면 비유 이해에 큰 도움을 주는 문학적 구조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연결된 단락을 통해 비유를 관찰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처음 방법은 비유와 비유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인 11:5-13을 먼저 살펴본다. 그런 후에 비유의 바로 앞 단락인 주기도문을 시작으로 11:1-13을 살펴본다. 이는 11:5-13이 문학적 구조로 짜여져 있고, 11:1-13은 수사적 모티프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 11:5-13에서 문학적 구조 관찰과 비유 보기

  11:5-13에는 이미 많은 학자들을 통해서 소개되고 토론된 문학적 구조들이 있다. 그래서 이것들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지침이다.

 

  학자들은 이 문학적 구조들을 통해서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11:5-8)는 이어지는 두 단락(11:9-10, 11-13)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이것들을 살펴보고 복기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개발할 수 있는 해석적 제안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논의된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제안은 비유 본문(11:5-8)과 비유와 연이어 이어지는 두 개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11:9-10, 11-13) 사이에 문학적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때문에 비유를 포함한 11:5-13을 한 단락으로 구별해서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비유 본문인 11:5-8은 11:11-13과 주제와 구조가 동일하여 문학적 대조의 짝을 이루고, 두 단락은 가운데 단락(11:9-10)과 연결되어 교차대조법을 완성한다. 그래서 비유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문학적 구조로 연관된 다른 본문도 반드시 함께 보아야만 한다. 비유만을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가장 먼저 비유를 포함한 눅 11:5-8의 문학적 구조를 제시하고 이를 상세하게 분석 관찰해본다. 눅 11:5-8의 문학적 구조는 아래 그림과 같다.


A.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5-8)
5a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a. 5b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b. 6a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c. 6b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c'. 7a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b'. 7b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a'. 7c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a. 8a 비록 그가 아무 것도 그에게 주지 않을 지라도     
  b.  8b 일어나서 
    c.  8c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c'. 8d 그러나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b'. 8e 그가 일어나
a'. 8f 그 소용대로 주리라

  X.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 해야만 하고 일어날 일(11:9-10)
  9a 그리고 내가 말하는데.......
  a. 9b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9c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c. 9d 노크하면 열릴 것이다
  a'. 10a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는다
    b'. 10b 그리고 찾는 자는 찾는다
      c'. 10c 그리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다

A’. 구하는 아들에 대한 두 아버지의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11-13)
a. 11a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a'. (마 7:10 돌을 주겠느냐?) 
b. 11b 생선 대신에
  b'. 11c 뱀장어(뱀)을 주겠느냐?
c. 12a 알을 달라 하면
  c'. 12b 전갈을 주겠느냐?  
13a 만약 일지라도
a. 13b 너희가 악할 
  b. 13c 좋은 선물들을 알거든
    c. 13d 자식에게 줄 줄 
a'. 13e 하물며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
  b'. 13f 하늘로부터 성령을 
    c'. 13g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1)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유 본문을 포함한 눅 11:5-8은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 교차대조법이라는 사실이다. 

 

  A 단락은 우리의 관심 대상인 비유 본문으로, 두 개의 교차대조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A 단락과 대조를 이루는 A' 단락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11:11-12)와 3연의 동의적 평행법 시(11:13)로 각각 두 개의 동의적 평행법이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를 주제로 하는 3연의 동의적 평행법 시가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가 된다. 


  이것은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된다. 순차적 직선적 논리를 위주로 사용하는 현대인은 내용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든다. 그래서 내용이 내러티브의 단락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즉 내용이 시작되고 마치는 부분을 한 단락으로 본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은 병렬적 논리를 사용했다. 병렬적 논리는 순차적 논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 중심이 아니라 병렬적 논리를 표현하는 문학적 구조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이어나간다. 그 결과 성경은 내용보다 병렬적 논리가 만든 구조들이 단락을 구분하는 주요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이유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많은 학자들이 11:5-8의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를 문학적 구조로 연구하고 비유와 연관된 11:9-13도 문학적 구조로 분석해서 서로 연관성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연구들은 모두 11:5-8과 11:9-13을 하나로 묶어 통합적으로 문학적 구조 분석하지 않았다. 이는 비유와 이어지는 11:9-13을 문학적 구조로 연결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지 않고 단지 문맥과 누가의 신학적 의도만이 이어진 성경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경을 역사비평의 눈으로 보아 성경 저자의 문학적 구조화 작업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집필 행위로 보지 않고 어설픈 인간적인 편집 행위로 인식한 결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적 구조에서 보면 눅 11:5-8은 하나의 단위로 묶인 문학적 단락이다. 


  어쨌든 한글 성경을 보면 그저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리없이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눅 11:5-8은 여러 개의 문학적 구조들과 시가 혼합된 구조물이라는 점이 놀랍다. 이를 가장 쉽게 보여주는 것이 누가가 11:5-13을 비유 – 시 – 비유 – 시라는 장르를 통해서 병렬법적 구조를 만들어 배치한 사실이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눅 11:5-13은 두 개의 "비유"와 두 개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poem)"가 번갈아 배치된 모양으로 조직되었다. 

  비유 : 한밤 중의 친구 비유(11:5-8)
  3연의 동의적 평행법 시(11:9-10)
  비유 :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11:11-12)
  3연의 동의적 평행법 시(11:13)

  이것은 누가는 눅 11:5-13을 단순히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그저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장르적인 리듬을 고려해서 만든 하나의 문학적 구조물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놀라운 것은 누가의 문학적 수사적 작업은 훨씬 더 복잡하고 세련된 구조물들과 장치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2) 누가가 만든 장르적인 리듬은 11:5-13에서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모티프들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이다.

  두 개의 비유와 두 개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가 반복되면서 표현하는 주제들과 모티브들을 종합해 보면 눅 11:5-13은 하나의 네러티브이고, 이 내러티브는 아래의 그림과 같이 세 개의 단락을 통해서 만들어진 교차대조법이라는 문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눅 11:5-13의 문학적 구조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케네스 베일리의 관찰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그는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의 두 교차대조법을 첫 번째 교차대조법은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에 대한 교훈으로 그리고 두 번째 교차대조법은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에 대한 교훈으로 압축 요약하면서 문학적 구조를 아래와 같이 탁월하게 정리해주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5a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a. 5b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b. 6a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c. 6b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c'. 7a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b'. 7b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a'. 7c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
  a. 8a 비록 그가 아무 것도 그에게 주지않을 지라도     
    b.  8b 일어나서    
      c.  8c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c'. 8d 그러나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b'. 8e 그가 일어나  
  a'. 8f 그 소용대로 주리라

  위 분석은 한 밤중 친구 비유의 문학적 구조는 물론 구조의 핵심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준다.

 

  비유는 두 개의 교차대조법으로 조직되어 있다. "너희 중에 누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교차대조법은 유대적 손님 대접에 대한 일화를 네러티브의 소재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교차대조법은 반대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설명한다.

 

  각 교차대조법은 동일하게 여섯 개의 연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 평행법을 이룬다. 평행법의 짝들은 아래와 같은 주제로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 밤중 친구 비유의 두 단락의 문학적 구조와 비교

  일어나지 않을 일을 말하는 a와 a'는 요구와 거부된 요구로 주제가 대조되어 교차대조법의 레이아웃을 만든다. b와 b'는 요구의 이유와 거부의 이유로 대조되는 짝이 되어 다른 레이아웃을 만든다. a-b를 통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필요한 빵을 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a'-b'를 통해 요구가 거절되는 상황이 가상적으로 묘사되었다.

 

  일어날 일을 말하는 오른쪽의 교차대조법도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a-b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빵 요구를 거부하는 행위를, a'-b'는 빵 요구를 허락하는 행위로 대조된다. 이러한 각 단락의 대조와 대조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차대조법의 문학적 짝들이 서로 어울려 문학적 메시지를 만든다. 


  이 문학적 구조는 한 밤중 친구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두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c와 c'에 있고, 그것은 "의무에 대한 호소"와 "명예"를 위한 "강청함" 또는 "수치심 회피"(avoidance of shame)라 보여준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강청함"(ἀναίδεια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학적 구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래서 연구를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비유의 왼쪽 교차대조법은 손님 대접의 의무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말하는 것이고, 오른쪽 교차대조법은 명예를 위해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다. 


  3) 하지만 케네스 베일리는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이 비유에 곧바로 이어지는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 역시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과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에 대한 교훈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단락은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와 핵심 주제는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 + "일어날 일"이라는 하부 주제의 구성이 동일해서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와 동일하게 문학적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a. 11a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αἰτέω)
    a'. (마 7:10 돌을 주겠느냐?) 
  b. 11b 생선 대신에
    b'. 11c 뱀장어(뱀)을 주겠느냐(ἐπιδίδωμι)?
  c. 12a 알을 달라 하면(αἰτέω)
    c'. 12b 전갈을 주겠느냐(ἐπιδίδωμι)?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
  13a 만약 일지라도
  a. 13b 너희가 악할 
    b. 13c 좋은 선물들을 알거든
      c. 13d 자식에게 줄(δίδωμι) 줄 
  a'. 13e 하물며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
    b'. 13f 하늘로부터 성령을 
      c'. 13g 구하는(αἰτέω) 자에게 주시지(δίδωμι) 않겠느냐?
 
  ① 먼저, 11절에서 시작하는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를 보면, 시작 문구가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의 시작 문구와 같은 의미와 용도이고,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을 언급하는 것도 같다.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의 시작인 5a는 "너희 중에 누가"(Τίς ἐξ ὑμῶν)라는 수사 의문문으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의 시작인 11a도 비슷한 문구인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로 시작된다. 두 문구는 모두 수사적 질문으로 "너희 중에 누가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으로, "아니, 아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를 듣는 이들에게 동일한 모양과 동일한 내용을 강조하는 질문을 두 번 반복해서 듣게 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수사적 질문이 의미하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아주 인상 깊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의 "너희 중에 누가"(Τίς ἐξ ὑμῶν)는 예수님 당시 문화를 고려해 보면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로 인해 이웃 집에게 무지막지한 실례를 범하는 것 같은 요구는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도 아버지의 보편적인 성품을 빗대어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아버지가 생선 대신 돌을 주거나 뱀을 주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두 비유의 시작은 모두 "일어나지 않을 일"을 분명히 강조하는 것으로 같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비유의 두 번째 단락은 반드시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같다.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의 두 번째 교차대조법의 중앙은 이웃이 벗 됨으로는 요구한 것들을 주지 않을지라도 강청함으로는 줄 것이라 말했다(c와 c'). 이와 같이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는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것과 같이 하늘의 아버지는 더 좋은 것을 주신다 결론 내린다.

 

  결국 우리는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는 핵심 주제는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 + "일어날 일"이라는 하부 주제의 구성이 동일하다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② 두 번째로 두 단락은 "일어나지 않을 일"과 "일어날 일"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등장 인물들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감 또는 의무를 수행하고 하는 인격적 성품을 다룬다는 점으로 같다. 

 

  A 비유에서는 "벗 됨"(친구이다, εἶναι φίλον)이 "일어나지 않을 일"의 조건으로 나오고 "친구 대접의 의무감에 대한 강청"이 "일어날 일"의 조건으로 나온다. A'에서는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의 조건은 "(땅의) 아버지의 아버지 됨"과 "(땅의 악한 아비보다 더 높은) 하늘의 아버지의 아버지 됨"이다. 이 조건들은 모두 의무감이라는 측면에서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을 일이 결정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손님 대접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명예와 연관된 문제였으므로 늦은 밤손님 대접을 도와달라는 요구는 벗 됨으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수치와 명예에 대한 강청으로는 의무감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비가 자녀를 먹이고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는 일은 아버지 됨에서 비롯되는 의무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아무리 악한 아비라 해도 자녀에게 나쁜 것을 주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선하고 자비가 넘치는 하늘의 아버지는 어떠신가? 그분의 아버지 됨에서 나오는 자녀에 대한 배려는 상상 이상의 하늘의 좋은 것을 주신다.

 

  두 비유를 듣는 청중들, 특히 손님 대접과 자녀를 양육하는 아비 됨에 대한 유대적 의무감을 아주 잘 아는 청중들에게는 두 비유가 묘사하는 의무감과 이에 대한 응답을 동일한 메시지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비유는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 구조로 같다.

  A. 한 밤중 친구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5-8)
    일어나지 않을 일(5-7) / 너희 중에 누가(Τίς ἐξ ὑμῶν) : 벗 됨(εἶναι φίλον)
    일어날 일(8) : 강청함(διά τὴν ἀναίδειαν)
  A'.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11-13)
    일어나지 않을 일(11-12) /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 : 악한(인간) 아버지(πονηρός πατήρ)
    일어날 일(13) : 하늘의 아버지(ὁ πατὴρ ὁ ἐξ οὐρανοῦ)

  ③ 세 번째로 두 비유는 모두 요구하고 받는 모티프를 강조하는 것으로 같다. 

  한 밤중 친구의 강청 비유는 요구하는 표현이 2번(빌리다, 강청함) 나오고, 받는 표현이 3번(주다, δίδωμι) 나온다.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는 요구하는 표현이 2번(요구하다, αἰτέω) 나오고, 받는 표현이 2번(주다, ἐπιδίδωμι) 나온다. "빌리다"와 "강청함"은 "요구하다"와 비슷한 단어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다"(δίδωμι)와 "주다"(ἐπιδίδωμι)도 같은 동사이다. 

  이상의 3가지 사항들을 보면,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 + "일어날 일"이라는 하부 주제를 한 밤중 친구 비유와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비유는 핵심 메시지도 같다. 그렇다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동일한 주제를 가진 두 비유를 반복해서 들어 강조된 메시지를 받았다 이해했을 것이다. 


  4) A 단락인 11:5-8과 A' 단락인 11:11-13이 서로 대조되는 짝이 되어 평행법을 조성하면 가운데에 있는 11:9-10은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X는 주제가 "해야만 하고 일어날 일"(What has to be done and what will happen)로 "반드시 받게 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A와 A'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조성한다.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의 특징은 A와 A'에 나오는 요구하고 받는 모티프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점이다. 구하다(αἰτέω), 찾다(ζητέω), 두드다(κρούω)가 두 번씩 반복되어 요구하는 행동이 6회 나오고, 받음을 의미하는 동사 "주다"(δίδωμι, 1회), "받다"(λαμβάνω, 1회), "찾다"(εὑρίσκω, 2회), "열리다"(ἀνοίγω, 2회)가 모두 6회 나온다.


  여기에는 앞과 뒤의 두 비유에 나오는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을 상정한 수사 의문문과 "일어나지 않을 일"과 "일어날 일"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던 어떤 인물의 인격적 성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가정과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과 일어나지 않을 것을 좌우하는 조건도 모두 사라지고 해야 할 행동과 이로 인해 일어날 결과만이 집중적으로 조명된 것이다. 


  현대인의 순차적 논리로 보면 이 단락은 A와 A' 단락 뒤에 나와야 합당하다. 그래야 논리 진전에 무리가 없이 이해된다. 이와달리  A와 A' 단락 사이에 이 단락이 있으면 A'는 이미 한 말을 다시 한번 더 하는 것 같아서 불필요하게 보인다. 이는 누가복음 11장이 현대식 순차적 논리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병렬적 논리로 기록되어 평행법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A와 A' 단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을 상정한 수사 의문문과 "일어나지 않을 일"과 "일어날 일"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던 어떤 인물의 인격적 성품 등이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X에서는 무엇 때문에 모두 생략되었는지를 알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X는 A와 A'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관찰 결과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11:5-13 전체를 아래와 같은 교차대조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A. 한 밤중 친구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5-8)
    일어나지 않을 일(5-7)
    일어날 일(8)


    X.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해야만 하고 일어날 일(11:9-10)

 

  A'.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11-13)
    일어나지 않을 일(11-12)
    일어날 일(13)

  5) 이 구조가 성경 본문과 어울리는 합리적인 분석이라면 몇 가지 주요한 해석적 가이드라인을 획득하게 된다.


  ① 가장 먼저 한 밤중 친구 비유만을 따로 떼어 이해하는 해석 방법은 누가의 저작 경향에 알맞은 방법이 아니라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누가가 한 밤중 친구 비유를 11:5-13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한 단락으로 여기고 다른 단락들과 연동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② 특히 한 밤중 친구 비유 해석에서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연이어 나오는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로 이루어진 11:11-13의 숨겨졌던 가치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11:11-13은 한 밤중 친구 비유와 핵심 주제(반드시 받게 된다)가 같고, 이 핵심 주제를 나타내기 위해 설정된 하부 주제들의 구조가 같다. 게다가 비유를 시작하는 수사학적 도구인 질문도 같다.

 

  이것은 분명히 청자들에게 동일한 교훈을 표현만 다르게 한 것으로 들려 강조하는 것이라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밤중 친구 비유에서 그간 논란이 되었던 단어나 문구들을 해석하는 아주 유용한 방향 지시등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③ 특히 해석 논쟁의 핵심인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가 어떤 의미인지를 결정할 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한 밤중 친구 비유가 주제는 물론 하부 구조에서도 일치하는 것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논쟁이 되는 한 밤중 친구 비유를 의미가 분명한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6)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의 관점에서 한 밤중 친구 비유를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가 기도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하기 때문에 밤중 친구 비유도 친구의 강청에 응답하는 친구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 관점으로 한 밤중 친구 비유를 보면 비유의 주인공은 집 안에서 도움의 의무를 실행해야 하는 친구이고,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는 명예를 위해서(수치를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응답을 해주어야 하는 친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때 학자들 대부분이 언급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명예와 수치의 문화로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손님 대접과 관련해서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명예와 수치의 문화가 지배하던 고대 팔레스틴은 손님 대접을 개인의 일로 보지 않고 마을의 명예로 보았다. 그러므로 손님은 개인의 손님이 아니라 마을의 손님이고, 그를 잘 대접하는 것은 마을의 영광이고, 반대는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마을의 수치로 여겼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인들은 손님 대접을 위해서 온 마을이 언제든지 필요한 것들을 빌려주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손님 대접을 위해 밤늦게 이웃집 물건들을 강청하는 행위와 이를 의무적으로 들어주어야 하는 상황은 결코 무례하고 황당한 상황이 아니고, 비유의 결론인 11:8이 이상한 말이 아니라 아주 당연한 말이라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손님을 대접하는 가정의 이웃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집과 설사 친하지 않더라도 마을의 명예가 걸린 대접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하게 되는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물건들을 제공해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도움 요청을 받은 사람은 11:7의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라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음을 되물어 강조하는 수사 의문문으로 말씀하신 것이다(11:5-6). 당연한 예상과는 달리 만약에 손님 대접을 위해 음식을 빌려주기를 거절한다면 그 사람은 수치심을 모르는 뻔뻔한 자가 되어 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관계를 상실할 수 있다. 


  한 밤중 친구 비유에서 수치심을 피하고 명예를 귀하게 여겨 이웃의 손님 대접 간청에 응하는 사람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 아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아버지와 동의적으로 대조된다. 

 

  마을에 온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명예를 위한 의무이듯이 자녀의 요구에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요 의무를 실천하기 위한 기본 성품이다. 한 밤중 친구 비유에서 집 안에 있는 친구는 이웃 대접의 의무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는 악한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 아버지는 다른 일에는 악한데 자식에게는 선한 의무를 담당하려 한다. 이런 면에서 두 인물은 동의적으로 대조된다. 이 비유에서는 아버지는 선과 악을 초월해서 자녀의 요구에 응답하려는 아버지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악한 인간 아버지보다 훨씬 더 선하고 뛰어난 하늘의 아버지의 성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분은 인간 아버지의 좋은 것들(생선과 알) 보다 더 좋은 것, 하늘의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응답으로 주신다. 

  이러한 논지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에 아래와 같은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다.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의 두 단락의 문학적 구조와 비교

 

  두 비유는 이야기의 소재가 다를 뿐 동일한 것을 강조한다. 집 안에 있는 친구는 손님 대접의 명예를 이루기 위해 집 밖에서 강청하는 친구의 요구에 반드시 응답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아버지로서의 성품 때문에 자녀의 요구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이상이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를 통해서 한 밤중 친구 비유를 해석한 결과이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과 결론이 다르다. 기도자의 끈질긴(뻔뻔한) 기도보다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끈질긴 기도보다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가 강조된다.

 

  문학적 구조가 두 비유를 평행법의 동의적인 짝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의미가 명확한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를 통해서 의미가 불명확한 밤중 친구 비유를 비추어 보면 이렇게 해석된다. 누가는 이를 인식하도록 문학적 구조틀로 명백하게 고정해 놓았다 판단된다. 

 

3. 11:1-13에서 문학적 구조 관찰과 비유 보기

  한 밤중 친구 비유를 11:5-13에서만 분석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이는 이 비유가 누가복음 11장에서 기도를 주제로 하는 단락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9:51-19:48의 '여행 이야기'(The Travel Narrative)중에서 기도 주제를 가진 11:1-13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온전하게 분석하려면 비유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 이어지는 단락들을 통합적으로 보아야만 한다. 앞에서는 문학적 구조에 따라 비유와 뒤에 이어지는 단락들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비유 앞에 있는 11:1-4과의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비유를 관찰해 본다. 

  11:1-4은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다. 학자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구분하기 위해서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 밤중 친구 비유는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에 연이어 나온다. 

 

  누가복음판 주기도문의 문학적 구조는 두 단락으로 구분된다. 먼저는 11:1-2a 주기도문의 도입부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하는 단락이고, 두 번째 단락이 11:2b-4의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답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의 문학적 구조는 3연으로 이루어진 교차대조법으로 교차대조법의 중심이 "빵"(ἄρτος)에 대한 간구이다. 

  도입부(11:1-2a)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주기도문(11:2b-4)
  a. 2b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b. 2c 나라이 임하옵시며
      x.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ἄρτος)을 주옵시고
    b'. 4a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a'. 4b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의 특징을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의 축약판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청원 일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실생활에 더 가까운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이 더 강하게 어필된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청원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와 우리에 대한 청원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없다. 이로서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하늘의 뜻이라는 거시적인 관점과 악에서의 구원이라는 영적인 관점이 약화되고,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가 더 눈에 돋보이는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1) 누가복음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강조가 한층 더 눈에 띄는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이어지는 11:5-13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순차적 논리로 이어지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11:5-13이 순차적 논리보다 병렬적 논리로 만들어진 교차대조법이 우세하게 본문을 장악하고 있는 것과 다른 상황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이어지는 11:5-13과 문학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없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1:5-13은 자체에 정교하게 자여진 문학적 구조틀들이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는 자체의 문학적 구조인 교차대조법은 있지만 이후 등장하는 본문에 영향을 끼칠만한 다른 문학적 도구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모티프들이 이어지는 11:5-13에 계속해서 나타나다 11-13절에 몰려있는 수사적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아버지", "빵", "주다"라는 세 개의 모티브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반복되고, "기도"는 다양하게 표현된 요청하고 받는 동사들을 통해서 암시적으로 반복된다.

 

  주기도문에서 강조되는 모티프들이 이어지는 단락들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수사적 형태는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순차적 논리와 구조가 일치한다. 그래서 문학적 구조를 따질 필요 없이 이어지는 단락들을 자연스럽게 주기도문의 모티프들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런 효과로 인해 주기도문에 연이어 한 밤중 친구 비유가 나오기 때문에 전통적 해석은 자연스럽게 비유에 나오는 "강청함"(ἀναίδεια)을 기도에 대한 강청으로 보게 되고, 비유 해석에서 가장 난해한 문젯거리가 되는 강청함의 헬라어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본래 사전적 의미에는 없는 "간청함", "졸라대는 것", "귀찮게 졸라대는 것"으로 번역하도록 만든다. 


  수사적 반복이 순차적 논리를 통해서 일으키는 해석은 이렇게 전개된다. 

 

  눅 11:1-13은 주기도문(1~4절),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5~8절),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와 기도에 대한 권고(9~13절)로 이어지고, 이 세 단락은‘기도’라는 공통 주제 안에서 '아버지'(2, 11, 13절), '주다'(3, 7, 8, 9, 11, 12, 13절), 그리고 '빵'(3, 5절)이라는 주제들로 반복적으로 나타나 상호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11:2-13은 1절에 나온 제자들의 물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해석된다. 그 첫 번째 답이 주기도문으로 빵에 대한 청원이 있다(11:3). 빵 주제는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 나타나고(11:5), 11-12절에서는 비슷한 음식인 생선과 알로 반복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일용할 빵에 대한 간구가 연속되는 것으로 보이기 된다. 


  아버지 주제 역시 비슷한 연속성으로 보인다.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대상이 아버지라면 당연히 기도하는 자들은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주기도문의 아버지는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 자녀의 요청에 성령을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로 다시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집 안에 있는 친구와 연관된 것이 암시적으로 나온다. 


  게다가 주기도문에서 "기도하다"(11:2)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전체 본문에 흩어져있다. 먼저, 기도를 연상시키는 단어들로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서는 "강청함"으로 1번,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는 "구하다"(αἰτέω)가 4번 나오고,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9-10절에는 "구하다"(αἰτέω)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찾다"(εὑρίσκω), "두드리다"(κρούω)가 각각 2번씩 모두 6번 나온다. 여기에 기도에 대한 응답을 의미하는 "주다"(δίδωμι)라는 동사가 1-13절 전체에 8번 나타나고, 주다와 의미가 비슷한 "찾다"(εὑρίσκω), "열리다"(ἀνοίγω), "받다"(λαμβάνω)가 합쳐 5번 나와 모두 합치면 13번이나 나온다. 


  이러한 기도를 연상시키는 주제들의 이중 삼중적인 반복은 본문을 순차적으로 읽어 내려가는(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차적으로 듣는) 동안 자연스럽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도록 만들어 준다. 이러한 순차적 문맥 흐름 안에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가 끼어있으니 기도, 특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기도의 방법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2) 하지만 앞의 설명은 모호한 설명이다. 연속되는 주제들의 분포를 도식화하면 주기도문의 주제들과 유사성이 많은 단락과 그렇지 않은 단락이 구별된다. 이로 특히 주목할 두 단락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반복되는 주제들의 밀도가 1-4절의 주기도문과 13절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에서는 크지만, 9-10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에서는 밀도가 가장 적고, 그다음으로 적은 부분이 5-8절의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이다. 

눅 11:1-13에서 주기도문의 네 가지 모티프들의 분포도

 

  위의 도표를 보면, 주기도문을 주도하는 4개의 주요 모티프가 다른 단락과 달리 11-13절에 가장 명시적이고  가장 많이 몰려있다. 그중 13절의 평행법 시에는 모든 모티프가 다 있다.

 

  표현을 보면 13절의 평행법 시의 표현이 주기도문 보다 더 영적인 기도를 의미하는 경향이 짙다. 주기도문의 아버지는 암시적인 하늘의 아버지이지만, 13절에는 하늘의 아버지라 명시적으로 나온다. 주기도문의 빵은 13절에서는 성령으로 더 영적인 경향이 강하게 표현되었다.

 

  기도 모티프도 주기도문에는 기도라 단순하게 나오지만, 13절에는 하늘 아버지께 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기도라는 의미가 가장 강하다. 


  하지만 9-10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에는 반복되는 주제가 명시적인 것은 "주다" 하나뿐이고, 기도 주제는 암시적이어서 주기도문과의 유사성이 가장 약하다. 5-8절의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빵"과 "주다"는 명시적으로 같지만 정작 기도 주제라 확정할 수 있는 "아버지"와 "기도"에 대한 표현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고 애매모호하고 암시적이다. 

  결론적으로 주기도문과의 유사성이 강한 단락을 순서대로 보면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 2"(13절) ⇨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11-12절) ⇨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5-8절) ⇨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 1"(9-10절)이다.


  3) 이런 수사적 특징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① 주기도문과 13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가 서로 거의 비슷하여 마치 인클루지오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면 1-14절 전체를 기도를 강조하는 단락으로 보게 된다.


  ② 그 결과 주기도문과 13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 중간에 배치된 세 단락을 모두 기도와 연관된 단락으로 보도록 해석의 눈을 열어주어, 의미가 불분명한 추상적인 표현들을 기도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도록 만든다. 

 

  이에 가장 큰 예가 "강청"이라고 번역하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이다. ἀναίδεια를 사전적으로 보면 "수치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αἰδώς"(아이오스)에 부정적 접두사인 ἀ를 붙여서 "수치심이 없음"(shamelessness) 또는 "뻔뻔함"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간청함", "졸라대는 것", "귀찮게 졸라대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다. 하지만 수사적인 특징들이 이어져 만들어내는 문맥을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③ 결국 독자들은 누가복음 11장 처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단락들을 보다가 마지막 13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에 이르게 되면 누가가 누가복음 11장에 만들어 놓은 하나의 순차적인 문맥을 마음속에 그리게 된다. 

 

  이런 문맥으로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형을 제시해주셨다. 제자들은 기도의 모형의 중앙에 하루의 양식에 대한 기도가 있어 양식에 대한 간구가 중요하고 해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 갑작스러운 친구의 방문으로 야기된 빵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나왔다. 이 비유에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집 밖의 친구가 집 안에 있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떡을 요청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이런 상황을 설정하고는 당시 사회-문화적 관점을 통해 보편화된 명예와 수치의 문화가 만들어낸 당연한 법칙을 강조하셨다. 그것은 친구 관계 때문에 떡을 주지 않을 수 있다 하더라도 손님을 대접하여 수치를 당하기 싫은 명예심 때문에 반드시 떡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계속적인 기도를 강조하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을 하셨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얻고 찾고 문이 열리게 된다(11:9-10). 그러면 무엇 때문에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아버지의 성품, 더욱이 하늘의 아버지의 성품을 향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기도문의 하늘 아버지와 땅의 자녀의 관계가 다시 언급된다. 기도를 들어주는 하나님은 땅의 아버지보다 더 큰 하늘의 아버지이다. 땅의 아버지 중에서도 악한 아버지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인 성령까지도 주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된다.

 


4. 눅 11:5-10의 문학적 수사적 특징 : 순차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가 겹쳐 전환되는 단락

  중간 정리를 해본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앞에 배치된 주기도문과 연관 지어 이해하면, 주기도문의 주요 주제인 네 가지 모티프(아버지, 빵, 주다, 기도)들이 누가복음 11:1-13 전체에 반복되어서 모든 단락이 순차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모티프들의 분포는 처음 단락인 주기도문과 마지막 단락인 13절의 동의적 평행법 시에 가장 크게 몰려있어 마치 인클루지오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1-13절을 기도를 주제로 한 하나의 단락으로 보게 되고,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표현들을 모두 기도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도록 안내를 받는다. 

 

  이 결과는 11:5-13에 발견된 문학적 구조 중심으로 본문을 관찰한 결과와 반드시 비교를 해야만 한다.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11:1-13을 보면 단락 전체가 순차적인 논리로 기도자(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되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도 기도하는 방법(즉 끈질긴 기도)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11:5-13을 중심으로 비유를 이해하면 문학적 구조를 중심으로 보게되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기도에 응답하는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로 이해된다.

 

  이것은 결국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이중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로 다소 당황스러운 결과이다. 하지만 성경 본문에 존재하는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표현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판단되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으로 분석했을 때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결론이 나는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제까지 별로 언급되지 않은 눅 11:5-10의 문학적 수사적 특징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눅 11:5-10의 문학적 수사적 특징을 가진 단락이다. 특히 이 안에 포함된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문학적 수사적 특징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에서 본문에 사용된 애매모호한 표현들의 의미와 이중적 해석의 가능성이 비롯된다. 


  1)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 첫 번째 동의적 평행법 시로 구성된 눅 11:5-10은 11:1-13 사이에 끼어서 문학적 수사적 연결고리와 같은 특징을 발휘하는 단락이다. 

 

  이 단락은 주기도문에서부터 내려가는 순차적 논리와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로부터 시작되는 병렬적 논리가 겹쳐지는 지점이다. 특히 11:5-8의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순차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가 겹쳐지는 연결고리의 시작이 되고,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인 11:9-10은 연결고리적 성격이 가장 강한 지점으로 순차적 논리가 병렬적 논리로 바뀌는 부분으로 보인다. 


  순차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가 겹치면서 바뀌는 현상은 병렬적 논리를 표현한 문학적 구조와 문학적 구조 안에서 순차적 논리를 위해 사용되는 모티프가 병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활한 논리의 전환을 위해 구조와 모티프 모두가 간단하고 애매모호하게 나타나는 결과를 만든다. 

 

  이때 복잡한 병렬적 문학적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애매모호하게 모티브를 표현한 것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11:5-8)이고, 문학적 구조가 아주 간단해지고 모티프 표현 또한 더 애매모호해진 것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이다(11:9-10). 


  2) 이 가설은 앞에서 발견한 문학적 수사적 분석 결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① 가장 먼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11:9-10)가 11:5-13이 만드는 교차대조법의 중앙(A-X-A'의 X)이면서 주기도문으로부터 이어지는 네 가지 주요 주제가 가장 적은 단락으로 겹치는 것을 들 수 있다. 

 

  11:9-10이 교차대조법의 중심이라는 것은 병렬적 논리가 가장 크게 작동하는 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 부분은 주기도문을 구성하는 주요 주제가 가장 적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병렬적 논리적 경향이 가장 크고, 순차적 논리적 경향이 가장 작은 부분이다. 이는 이 부분에서 순차적 논리가 병렬적 논리로 바뀌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부분의 특징에 대해 확인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3연으로 이루어진 동의적 평행법 시에서 논리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르게 방식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11:9-10(동의적 평행법 시)의 앞과 뒤에 있는 두 비유에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두 비유의 배경과 강조점이 바뀌었음을 지적하면서 두 비유는 별개의 두 자료라 했다. 대표적으로 케네스 베일리의 분석을 인용해 본다(시인과 농부, 여수룬, 263쪽). 기울인 글씨체 부분은 필자의 참고이다.

  앞의 비유(11:5-8의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를 말한다)를 뒤에 나오는 비유/시(11:9-13의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를 말한다)와 구별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1:5-8과 11:9-13간의 배경과 강조점의 바뀜에 있다. 네 개나 되는 구체적인 바뀌어짐이 눈에 띈다.


  1. 비유에서는 이웃과 이의 관계를 다루며, 시에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2. 비에서는 선한 것을 구했는데 나쁜 것을 받는 사람이 없으나, 시에서는 이것이 상상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3. 비유에서는 강청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주인공은 오직 한 번 간구한다. 시에서는 여러 동사들의 현재형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동사가 암시된다.
  4. 비유에서는 친구가 자기 이웃의 이름을 부르지만, 시에서는 두드린다는 말로 도입이 되고 있다.

  베일리의 주장을 요약하면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 비해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 비유는 전반적으로 기도 주제를 강조하는 쪽으로 배경과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기도에 대한 표현이 암시적으로 약하지만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 비유는 기도를 아주 강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동일한 비유로 볼 수 없다. 

 

  이 차이는 11:9-10의 동의적 평행법 시에서 기도의 방법을 강조하는 논리(순차적 논리가 강조하는 주제)에서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논리(병렬적 논리가 강조하는 주제)로 논리의 전환이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필자의 주장과 맥이 같다. 다만 필자는 두 비유의 배경과 강조점의 바뀜을 별개의 두 자료로는 보지 않고 논리의 전환으로 만들어진 차이라 본다. 

  ②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11:5-8)의 이례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은 논리 전환의 결과, 또는 논리 전환을 의도한 누가의 기획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누가는 불확실한 표현들을 가진 비유를 순차적 논리가 병렬적 논리로 바뀌는 위치에 배치하므로 논리의 전환으로 야기되는 거부감을 최대한 줄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본다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11:5-8)의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은 누가의 논리 전개에 제격이다. 달리 말하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11:5-8)의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은 이중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누가가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8절에 두 단계의 모티프가 있다는 사실로 설명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은 비유의 결론인 8절에는 "친구 모티프"와 "한 밤중 모티프" 두 가지 모티프가 서로 긴장 관계로 배치되었다 주장한다.

 

  이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8절은 친구 모티프와 한 밤중 모티프로 교차대조법을 만들어 서로 대치된다. 

눅 11:8의 친구 모티프와 한밤중 모티프의 대조

                  
  이 구조는 ἀναίδεια가 성경 외 다른 문헌들에서 사용될 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문헌들을 보면 ἀναίδεια가 두 가지 모티프로 대조될 때, ἀναίδεια에는 "선한 행동"과 "그 반대의 행동"으로 나누어져 내용이 구성되는데, 누가복음 11:8의 ἀναίδεια도 동일하게 "선한 행동"(벗됨을 인하여서)과 "그에 대한 반대의 행동"(강청함을 인하여)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럴 때 ἀναίδεια는 본래의 의미인 "몰염치" 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외에 다른 의미인 "고집스러움", "뻔뻔함"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한다. 

  ἀναίδεια의 이중적 의미는 비유를 듣는 청중들의 감정이입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설명해준다. ἀναίδεια가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비유의 전반부(5-7절)에서는 집 밖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후반부(8절)에서는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방 안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감정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어, 결국 비유를 다 듣고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을 객관적인 3자의 입장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비유를 들으면서 먼저,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즉시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이중적인 감정이입(double empathy)속에 빠진다.

 

  이 현상은 또 다른 난해 표현인 "그의 ἀναίδεια"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그의 ἀναίδεια"를 두 인물의 입장에서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이중적 감정이입이 주기도문에서 시작되는 순차적 논리를 병렬적 논리로 바꾸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순차적 논리로 보면 누가복음 11장은 기도하는 자가 중심이기 때문에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주인공은 집 밖에서 떡을 달라 요청하는 자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는 집 밖에서 떡을 요구하는 친구의 "간청함", "졸라대는 것", "귀찮게 졸라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계속적인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행동으로 응답을 받아내는 기도(자)로 이어진다(11:9-10). 

 

  하지만 병렬적 논리로 보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주인공은 집 안에서 떡을 주는 친구가 된다. 그러면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는 "수치심이 없음"(shamelessness)을 피하기 위해서 떡을 제공해 주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 하늘의 아버지의 성품으로 이어진다(11:11-13). 


  이런 점에서 보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두 주인공을 모두 조망하는 이중 시각이 있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두 가지 교훈(또는 두 가지 시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애모호함(deliberate ambiguity)으로 중의적 표현이 가능한 단어와 문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 이중적 의미를 가진 애매모호한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③ 11:13의 두 번째 동의적 평행법 시가 주제의 분포로 보면 주기도문(1-4절)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문학적 구조로 보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과 동일하게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도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을 의미하는 단락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순차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가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두 가지 논리가 함께 끝마치는 부분이다. 그래서 주기도문과 가장 비슷해서 마치 인클루지오와 같이 기능하면서, 일어날 일을 의미하는 단락으로 사용되어 두 비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차대조법을 완성한다. 

  3) 이상의 사항들을 종합하여 누가복음 11장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순차적 논리로 보면, 11:1-4은 기도의 원리이자 내용을 알려주는 단락이고,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11:5-8)는 기도자의 자세와 기도에 응답하는 자의 의무, 두 가지 주제를 알려주고, 이 두 가지 주제는 이어지는 단락들에 나누어져 11:9-10은 반드시 응답되는 계속적이고 끈질긴 기도를 강조하는 단락으로, 11:11-13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는 단락으로 마무리 된다. 
  여기에 병렬적 논리의 교차대조법(A-X-A')이 합쳐져 눅 11:1-13의 두 가지 논리 구조는 아래의 도표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눅 11:1-13의 두 가지 논리 구조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도자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믿음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자에게 필요한 조건이고, 땅의 아들들이 기도할 때 가장 좋은 하늘의 성령으로 반드시 응답하는 것은 기도의 응답자인 하나님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누가는 두 가지 모두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누가는 주기도문으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라고 기도의 원리(내용)를 알려준 후, 기도의 주요 조건인 기도자와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모두 언급하는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판단된다. 

 

  이 비유에서 누가는 기도자와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모두 소개해야 하므로 순차적 논리와 함께 병렬적 논리를 병행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이를 위해 주기도문에 사용된 주요 모티프들을 반복하면서 교차대조법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병렬적 논리의 중심이자 교차대조법의 중심에 기도자의 태도(또는 기도의 방법)를 가장 크게 강조하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시를 말씀하시고,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가장 강조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 당시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이중적 의미를 가진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는 누가의 언어적 창작물로 누가의 뛰어난 수사적 도구라 이해할 수 있다. 

  누가가 하나의 단어로 이중적 의미를 드러낸 사례로 눅 9:48과 18:16-17에 사용된 "아이"를 거론할 수 있다. 18:16-17에서 아이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9:48에서 아이는 "천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용된다.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이는 헬라어 "아이 같이"(ὡς παιδίον)는 중성 명사로 주격과 대격으로 이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 예수님께서 사용한 것이다. 

  비유에는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적 전제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비유가 두 가지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 또는 논리의 충돌로 보았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중의적인 비유이다. 비유 자체의 표현은 물론 비유와 연관된 앞과 뒤의 단락들을 보면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특징이 겹치는 것으로 이중적 의미가 가능하다 말해준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이중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주장하는 학자들이 다수는 아니지만 생겨나고 있는 추세이다. 필자는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특징 연구 결과를 통해서 이들과 동일한 결론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고, 그 해석의 타당성에 대해 논의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5. 결론과 마무리

  시원한 해결책이 나올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단어나 문구의 의미 해석에 집중하는 성경 연구 방법에서 벗어나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특징을 중심으로 난해 성경으로 유명한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살펴보았고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1)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가 속한 11:1-13에서 교차대조법(11:5-13)과 주기도문의 주제들이 반복되는 수사적 기법(11:1-13)을 발견했다. 교차대조법은 병렬적 논리를 수사적 기법은 순차적 논리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두 논리가 병합되어 11:1-13의 구조적 논리적 뼈대가 짜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2) 특히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 바로 이어지는 3연의 동의적 평행법 시(11:9-10)는 병렬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가 병합되고 전환되는 중간 지역적 특징을 가진 단락이다. 이 단락은 두 가지 논리가 병합되는 특색 때문에  병렬적 논리의 구조는 단순하게 되고 순차적 논리의 주제 반복이 애매모호하게 약화되는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 있다. 


  3) 이것은 어떻게 해서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에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와 같은 "하팍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이 채택되어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는지를 설명해주는 구조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의 애애모호한 표현들은 누가의 의도적인 선택일 수 있다. 누가는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기도(자)에 대한 가르침과 기도를 응답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함께 나타내기를 원했다. 이에 그는 병렬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가 병합되고 전환되는 위치에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사용해서 본래 사전적 의미와 다른 제2의 의미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을 하기에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논란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중적 의미를 드러내도록 기획된 누가의 탁월한 문학적 수사적 결과물로 보인다. 


  4) 그렇다면 우리는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이중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워드 먀샬(I. Howard Marshall)의 지적과 같이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는 하나로 연결된 두 가지 교훈(해석)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Marshall, The Gospel of Luke, 463.).

  이 세상 삶은 어렵다.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중앙에 빵에 대한 청원을 넣은 것은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친히 경험하셨기에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기도란 생명이 달린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존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기도를 해야하는지를 계속 되묻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고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동시에 기도에 응답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강조하여 가르쳐주셨다. 이를 위해 사용된 1+1 비유 세트가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 좋은 것을 주는 아버지 비유이다.

 

  이를 통해 기도에 응답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바램이 더욱 커지고, 어렵고 힘들어도 기도의 강청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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