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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누가복음

한밤 중의 친구 비유(눅 11:5-8) : 문화-사회적 관점에서 보기

by 예다준 2022. 12. 28.

한밤 중의 친구 비유(눅 11:5-8) : 문화-사회적 관점에서 보기

 




  20여 년 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호기심으로 베두인 천막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전혀 일면식 없는 동양인이 아이들과 놀고 있다가 막무가내로 이야기 나누고 싶다 요청했는데 베두인 가장은 흔쾌히 나를 맞아주어 대접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큰아들(20대 초반 정도)은 잔돌들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옆에서 신맛이 나는 음료수(?)를 가지고 대기하면서 내가 차를 마시면 즉시로 잔을 채워주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밖으로 나가보니 그 가장의 자녀들(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정도의 아이들을 포함해서 아마 12명이었던 것 같다)과 아내들이 텐트 밖에서 손님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를 보고 함께 갔던 사람들 모두가 베두인 가장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손님 대접에 놀랬다.

 

  솔직히 내가 베두인이었다면 불쑥 찾아온 동양인을 무례하다 욕하면서 대충 인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밤 중 친구 비유는 읽을 때마다 베두인의 가장의 손님에 대한 적극적이고 후한 대접이 생각나는 비유이다. 

베두인의 천막 모습 출처=구글 이미지


1. 1세기 고대 근동의 손님 대접과 수치와 명예의 문화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 비유 해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문화-사회적 배경으로 고대 팔레스틴의 "손님 대접의 의무"와 이를 품고 있는 고대 지중해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라는 것에 일치한다. 1세기 고대 근동의 손님 대접의 문화는 오늘 우리들의 손님 대접의 문화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으로 비유를 보는 것은 매우 안일한 태도이다. 

 

  1) 이를 알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 비유의 결론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친구 됨"(벗 됨, εἶναι φίλον)과 "손님 대접의 의무"(강청함, ἀναίδειαν)를 비교하면서 손님 대접의 의무가 친구 됨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눅 11:8).

 

  이것은 오늘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이다. 친하지 않은데 우리 집 물건을 자기의 손님 대접을 위해 내놓으라 강청하면 우리는 또라이라 욕하면서 당장 경찰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또라이같은 주장을 예수님이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1세기 고대 근동에서 손님 대접에 대한 의무는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설사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 생각하는 것은 물론 명예를 존중하고 수치를 피하는 문화인으로서의 삶이라 해석되는 사안이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을 언급한 히 13:2이다("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천사인줄 몰랐지만 정성껏 나그네를 대접해서 큰 은혜를 받은 몇몇 사례들을 기억할 수 있다. 아브라함(창 18:1-15)과 그의 조카 롯(창 19:1-22),  사사 기드온(삿 6:11-23)과 사사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삿 13:2-20) 등 말이다.

 

  그래서 탈무드는 손님 대접을 성경이나 탈무드, 후기 히브리 문학을 공부하는 학교인 Beth Hamidrash에 가는 것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인 쉐키나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 가르칠 정도로 극찬했다. 

  "길손을 잘 대접하는 것은 Beth Hamidrash를 방문하는 것 만큼이나 위대한 일이다. 손접대를 잘하는 것은 쉐키나(영광)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위대하다"(b. Sabb. 127a(Soncino 2:632)).

  그러니 자연스럽게 고대 근동인들은 손님을 필요 이상으로 대접하려 했고, 손님은 대접받는 음식들을 모두 먹어야만 했다. 이때 중요한 문제는 음식 자체가 아니라  "경우에 알맞은 음식"(adequate food for the occasion)이었다 하는데, 여기에서 "경우"가 "수치와 명예의 문화"였다. 그래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제공할 수 있는 능력에 넘치도록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손님을 경우에 맞게 대접하기 위해 이웃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빌려달라 청하는 것을 무례하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늘 비유에서 우정보다 강청함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 빵을 주어야 하는 상황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2) 이런 생각은 수치와 명예의 문화 안에서 개인의 차원으로부터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이 형성된 1세기의 사회를 "고대 지중해 그레코-로마 세계"라 부르고 유대 사회는 그 일부분이다.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지중해 그레코-로마 세계"는 "명예와 수치의 가치"로 움직이던 사회였다.

 

  여기에서 "명예"는 타인으로부터 사회적 인정을 받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고, 수치는 명예의 반대 개념으로 공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종말론적인 운명에 수치와 명예를 언급하는 예수님의 말씀인 눅 9:26과 계 21:27을 들 수 있다.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asheme, ἐπαισχύνομαι)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asheme, ἐπαισχύνομαι)"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부끄럽거나, shamefull)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들뿐이라"

  현대인들은 믿음(믿지 않음)을 명예(수치스러워함이나 부끄러워함)과 직결시키지 않는다. 믿음의 반대는 믿지 않음일 뿐이다. 여기에 수치와 명예를 결부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 당대인들은 믿지 않음(또는 믿음)을 명예와 수치의 가치로 보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이라 표현했고, 종말론적 심판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불신앙적 일들을 부끄러운 것으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고대 지중해 그레코-로마 세계의 수치와 명예의 문화의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명예는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가치가 아닌 집단적인 가치(collective 혹은 corporate honour)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손님 대접 문화는 이것이 아주 잘 반영되어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자는 자신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의 일부로 본다. 그래서 그는 손님에게 "환영합니다, 당신은 우리 마을을(나 또는 내 가족이 아니라) 존중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손님은 대접을 받은 후 집을 떠나면서 "여기는 정말 친절한 마을이야!"라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손님 대접의 의무는 개인의 의무가 아니라 집단적인 의무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필요에 따라 손님 대접 의무가 이웃에게도 부과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이 모든 문화적 정황들이 모여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이 손님 대접의 의무를 이웃에게 부과하는 요청은  반드시 이루어질 확신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그가 마을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 것에 있다. 이로서 우리는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인 눅 11:8에서 "친구 됨"(벗 됨, εἶναι φίλον)보다 "손님 대접의 의무"(강청함, ἀναίδειαν)가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이러한 1세기 유대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은 현대인들이 오해할 수 있는 다른 표현들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① 눅 11:5-7의 수사의문문인 "너희 중에 누군가가(τίς ἐξ ὑμῶν) 벗이 있는데...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는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너희 중에 누가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라는 확정적인 사실을 강하게 피력하려는 반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손님 대접에 대한 고대 근동인들의 생각을 안다면 누구나 "아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지!"라는 반응이 전제된 의도적인 질문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② 우리는 이 비유를 주제로 보면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이라는 구조로 구성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한밤 중 친구 비유를 문학적 구조로 보면 두 개의 교차대조법으로 나누어진다. 이것들을 유대인들의 손님 대접 의무와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보면, 첫 번째 단락의 교차대조법은 수사의문문으로 당시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상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8절도 당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일어날 일"을 묘사한 부분이 된다. 

 

유대인들의 손님 대접 의무를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보면 구분되는 한밤 중 친구 비유의 교차대조법
유대인들의 손님 대접 의무를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보면 구분되는 한밤 중 친구 비유의 교차대조법

 

 

  이 이해는 비유를 문화-사회적 배경은 물론 비유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적 가이드 라인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③ 여기에 필자가 "한밤 중의 친구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눅 11:5-13) -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분석"이라는 글에서 비유의 뼈대가 되는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장치들에 대한 분석 결과를 추가하면 이 비유 해석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이면서 난제인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와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의 의미가 이중적인 것이라 결론지을 수도 있다. 

 


2. 한밤중 친구 비유의 문학적 구조 관찰과 설명 

  이제 이 비유의 문학적 구조를 보다 상세히 관찰하면서 문화-사회적 배경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한밤중의 친구 비유의 문학적 구조는 아래와 같다.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5a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a. 5b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b. 6a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c. 6b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c'. 7a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b'. 7b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a'. 7c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
  a. 8a 비록 그가 아무 것도 그에게 주지않을 지라도     
    b.  8b 일어나서    
      c.  8c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c'. 8d 그러나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b'. 8e 그가 일어나  
  a'. 8f 그 소용대로 주리라
  


  2-1. 11:5-7 : 일어나지 않을 일(What will not happen) 관찰과 해설

  5a절은 비유를 이끄는 도입 문구이고, 5b-7절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늦은 밤 이웃 친구 가정에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을 상정하면서 청중들의 대답을 유도하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교차대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비유에는 세 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한 친구는 한밤중에 친구의 집을 방문한 자로 거론만 되는 인물이다. 다른 친구는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친구를 대접해야 하는 친구로 빵을 빌려달라 뻔뻔하게 강청하는 자로 해석되는 인물이다.

 

  또 다른 친구는 온 식구가 잠을 자다가 손님 대접의 의무를 나누게 된 이웃집의 친구로 뻔뻔하게 빌려줄 수 없다고 대답을 하거나, 손님을 대접하는 이웃의 요청을 거부하므로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피하려는 자로 해석되는 인물이다. 누가 비유의 주인공이며, 각 인물의 역할이 무엇인가는 해석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들은 서로 친구로 관계가 맺어진 사이이다. 특히 빵을 달라 요구하는 자와 잠자다 일어나 빵을 주어야 하는 자가 친구라는 점이 비유에서 주목할 사항이다. 이들은 단순한 이웃이나 옆집 사람이 아니라 친구였다. 

 

  우리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친구를 "선택할 수 있는 가족"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친구와의 신의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예수님은 참 친구는 자기가 아는 것을 다 알게 하는 사이라 말씀하셨다(요 15:15). 친구가 비밀이나 숨기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라면 음식이나 식탁 교제를 함께 나누는 것은 친구를 판단하는 대표적인 표지였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탁 교제를 피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으셨다(마 11:9; 눅 7:34). 그러므로 명예로운 사람은 결코 친구를 돕는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것이 수치를 피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2) 그런데 친구 됨만으로는 거부될 가능성이 있는 손님 대접의 사례가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 설정해 놓은 상황이다.

  이는 눅 11:8의 예수님의 말씀 중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손님 대접을 위해 빵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벗 됨으로 인하여 거부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은 가지가지이다. 


  그중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이 5절의 “밤중에”라는 표현이다. 

 

  어떤 학자들은 밤중에 예고 없는 방문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아주 이례적인 경우라 거절이 될 수 있다 보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팔레스틴의 사막 지역에서는 사람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해 아침과 저녁에 여행을 했다는 것을 들어 이례적이지 않다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밤에 누가 찾아오는 것은 예측하지 못한 사고와 같은 급한 일일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 설명한다.

 

  이런 설명들은 본문 이해에 결정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정답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서, 즉 전혀 예상치 않은 밤 중에 대접할 음식은 하나도 없고, 옆집의 이웃은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어 일어나 물건을 주기 정말로 고통스러운 최악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렇다면 눅 11:8에 나오는 "친구 됨"(벗 됨, εἶναι φίλον)과 "손님 대접의 의무"(강청함, ἀναίδειαν)와의 비교는 "친구 됨"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손님 대접의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대조가 된다. 실제로 이 비유는 "친구 됨"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친구 됨" 주제는 "손님 대접의 의무"를 아주 인상 깊게 강조하기 위한 비교의 소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3) 눅 11:5-7의 의문문은 비유 이해에 있어 중요한 해석적 논쟁 사항이다. 눅 11:5-7의 수사의문문인 "너희 중에 누군가가(τίς ἐξ ὑμῶν) 벗이 있는데...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를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비유의 전반부 내용 이해가 완전히 달라진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평서문으로 번역하였다("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이다."). 그러면 비유의 내용은 이웃집 친구는 귀차니즘으로 빵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말이 된다. 

 

  하지만 이 구절을 수사의문문으로 이해하면(개역성경, 개역개정, 표준 새 번역, 표준 새 번역 개정판 등) 이웃집 친구는 절대로 7절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질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이 논쟁의 원인은 본문의 표현이 문법적으로 애매모호한 것에 있다. 11:5절에 사용된 "너희 중에 누군가가(τίς ἐξ ὑμῶν)는 신약성경에서 항상 정해진 답을 요하는 수사학적 질문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마 6:27; 눅 12:25; 마 7:9; 눅 11:11, 마 12:11; 눅 14:5; 14:28; 15:4; 17:7; 요 8:48). 그런데 이 경우들을 보면 모두가 예외 없이 "수사적 도입 질문"과 함께 "결론적인 질문"이 동반되는 수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의 한 예로 눅 12:25-26을 보면, 12:25은 수사적 도입 질문이고, 12:26은 결론적 질문이다.

  수사적 도입 질문(12:25)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결론적 질문(12:26) :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그런데 눅 11:5에는 결론적 질문이 없어 문법적으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애매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눅 11:5은 강력하게 확정된 부정적인 대답을 이끌기 위해 사용된 의문문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이들은 이 구절의 문법이 예외적으로 복잡하다 지적하면서 다른 해석을 찾는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을 "~라고 했다고 하자"로 번역되는 가정문으로 해석하면서 빵을 빌려주어야 하는 친구의 행동은 문맥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제삼의 주장을 한다.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나를 괴롭히지 말라.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라고 했다고 하자." 

  눅 11:5-7에 대한 해석적 논쟁을 정리하면 이런 표가 나온다.

 

눅 11:5-7의 수사의문문에 대한 해석 논쟁을 요약한 표
눅 11:5-7의 수사의문문에 대한 해석 논쟁을 요약한 표

 

 

  어떤 해석이 올바른 것일까? 전문적인 학자들도 해석에 의견이 갈리는 고대 헬라어의 문법적인 사항을 필자를 포함한 오늘날 성도들이 알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의견은 11:5-7에 대한 해석을 문맥에 맡김으로 문학적 구조와 그 구조가 보여주는 상관관계로 해석하는 방법에 힘을 보태준 것이라 볼 수 있다. 필자는 "한밤중의 친구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라는 글에서 이 비유의 애매모호한 문자적 문법적 의미는 11:5-13의 문학적 구조에서 유추할 수 있다 주장했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비유 본문인 11:5-8은 11:11-13과 주제와 구조가 동일하여 문학적 대조의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1:11-13의 내용으로 11:5-8의 애애모호한 곳을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 보는 것이다.

 


  그 글에서 제시한 문학적 구조는 11:5-7을 수사의문문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11:5-8과 11:11-13이 "일어나지 않을 일" + "일어날 일"이라는 공통 구조를 가진다 분석했다. 

  A. 한 밤중 친구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5-8)
    일어나지 않을 일(5-7) / 너희 중에 누가(Τίς ἐξ ὑμῶν) : 벗 됨(εἶναι φίλον)
    일어날 일(8) : 강청함(διά τὴν ἀναίδειαν)
  A'.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11-13)
    일어나지 않을 일(11-12) /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 : 악한(인간) 아버지(πονηρός πατήρ)
    일어날 일(13) : 하늘의 아버지(ὁ πατὴρ ὁ ἐξ οὐρανοῦ)

  

  그러면 11:5-7을 수사의문문이 아니라 가정문으로 해석하면 문학적 구조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11:5-7을 가정문으로 해석하면 11:5-7은 "부정적으로 가정된 일어날 일"로 분석된다. 하지만 비유의 중점적인 강조는 8절의 "일어날 일"에 있기 때문에 11:5-7이 "일어나지 않을 일"에서 "부정적으로 가정된 일어날 일"로 이해가 바뀌어도 전체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문학적 구조의 전체 구조는 변화되지 않고 대조사항만 아래와 같이 달라진다. 

  A. 한 밤중 친구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5-8)
    부정적으로 가정된 일어날 일(5-7) / 너희 중에 누가(Τίς ἐξ ὑμῶν) : 벗 됨(εἶναι φίλον)
    긍정적 일어날 일(8) : 강청함(διά τὴν ἀναίδειαν)
  A'.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 : 반드시 받게 된다(11:11-13)
    일어나지 않을 일(11-12) / 너희 중에(τίνα ἐξ ὑμῶν) : 악한(인간) 아버지(πονηρός πατήρ)
    일어날 일(13) : 하늘의 아버지(ὁ πατὴρ ὁ ἐξ οὐρανοῦ)

  "부정적으로 가정된 일어날 일"은 비유의 전반부의 결론인 "긍정적 일어날 일"을 중심으로 보면 결국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1세기 고대 근동의 손님 대접 의무와 수치와 명예의 문화로 보면 "부정적으로 가정된 일어날 일"의 가능성은 아주 적다. 

 

  하지만 빵을 빌려주어야 하는 이웃 친구가 명예에는 눈곱만 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귀찮으니 빵을 빌려줄 수 없다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가정법의 표현은 "극단적으로 강조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라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으로 강조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강청함으로 그 소용대로 빵을 빌려주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말씀하신 것으로 비유가 이해된다. 

 

  이렇게 본문을 이해하면 11:5-7을 수사의문문으로 해석하여 제시한 문학적 구조보다 가정법으로 해석한 문학적 구조의 대조사항이 한층 더 강조된 구조가 만들어진다. 

 

눅 11:5-7을 수사의문문으로 해석할 경우와 가정법으로 해석할 경우 비교
눅 11:5-7을 수사의문문으로 해석할 경우와 가정법으로 해석할 경우 비교

 

 

  눅 11:5-7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든 가정문으로 해석하든 문학적 구조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일" + "일어날 일"이라는 공통 구조는 "극단적으로 강조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 + "일어날 일"로 더 강조된다.


  결국 눅 11:5-7은 문법적인 애매모호함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비유를 이해하려면 이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든 비유의 결론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눅 11:5-7은 문법적인 애매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세 가지 해석 비교
눅 11:5-7은 문법적인 애매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세 가지 해석 비교

 

  4) 15절의 "빌리라"(키크레미,κίχρημι)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추후 보상을 전제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빵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예수님 당시 손님 대접의 의무와 명예와 수치의 문화를 아주 잘 보여주는 단어로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오해하기 쉬운 말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만 사용된 하팍스 레고메논(hapax legomenon)으로 학자들은 이 단어를 성경 외 다른 문서들을 통해서 상업적인 이해관계로 이자를 지불하고 물건을 빌리는 동사 "다베이조"(δανείζω)와 다르게 호의적인 관계로 이자 없이 빌리는 단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예수님 당시 손님 대접의 의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 당시 손님 대접의 의무는 개인의 의무가 아니라 공동체의 의무였다. 그리고 이 의무는 명예와 수치의 문화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명예를 유지하는 규칙과 같이 인식되고 실행되었다. 그 결과 손님 대접을 위해 이웃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빌리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되갚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되갚으려 한다면 그것으로 물건을 빌려준 이웃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차용인으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빌린 것이 아니라 손님 대접의 호스트로서 마을의 명예를 위해 물건들을 사용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용된 "빌리라"라는 말은 "달라"라는 의미로 빌린 물건을 되돌려 갚는다는 의미가 없는 말로 보아야 한다. 


  5) 7절의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라는 거절이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논란이 된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대답은 어느 정도 거부로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당시의 문화로 보면 자녀들이 깨는 것 때문에 떡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적절한 이유가 될 수 없는 궁색하고 수치스러운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손님 대접에 대한 당시의 문화로 본다면 이 변명은 단순한 변명을 넘어 명예를 저버리고 수치를 선택하는 뻔뻔함의 극치로, 친구를 배반하고 쉐키나(영광)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아마도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이 변명을 듣고 정신이 어디론가 마실 간 사람이 아닌가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변명을 사용하신 것은 절대로 그런 변명으로 손님 대접의 의무를 거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피력하는 설정 멘트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2. 11:8 :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 관찰과 해설 

  예수님의 비유는 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심으로 마무리된다. 이 결론은 손님 대접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을 정확하게 압축 요약한 것으로 당시 청중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결론이다. 


  이 단락의 교차대조법을 보면 정확하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a-c는 빵을 달라는 요청이 거부되는 이유를 말한 부분으로 "벗 됨"이 중심 주제이다. 그러나 8d-f는 빵을 달라는 요청이 허락받는 이유를 말한 부분으로 "그의 강청함"이 중심 주제이다. 그렇다면 두 단락은 벗 됨과 그의 강청함이 대조를 이루는 구조로 짜여 있다 할 수 있다.

 

11:8,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의 교차대조법
11:8, 일어날 일(What will happen)의 교차대조법

 

  a와 a'는 동사인 "주다"(δίδωμι)로 만들어진 대조사항이 "주지 않다"와 "주다"로 반의적으로 평행법의 짝을 이룬다. b와 b'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일어나다"(b는 아니스테미, ἀνίστημι, b'는 에게이로, ἐγείρω)로 대조의 짝을 만든다.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c와 c'는 "벗 됨"(εἶναι φίλον)과 "그의 강청함"(τὴν 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이 대조를 이루는 짝이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듯이 a와 b 단락의 짝들의 대조는 단어로 대비되기 때문에 대조상황이 아주 명확하다. 그 가운데에 c와 c'는 는 벗 됨과 그의 강청함이라는 주제로 대조된다. 


  1) 이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벗 됨과 대조되는 "그의 강청함(아나이데이아)"이라는 점에는 다른 이견이 없다. 예수님의 결론도 명백하게 이것을 말해준다. 

 

  비록 우정(벗 됨)으로는 집안에 있는 친구가 손님 대접을 위한 빵을 주지 않을 수 있더라도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 때문에 집 밖의 친구에게 거절하지 못하고 소용대로 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비유의 전체 의미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나이데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격렬한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가장 먼저 "강청함"의 원문 단어인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가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단어라는 점이다. 이에 지시 대상이 불명확한 대명사 "아우투"(그의, αὐτοῦ)가 결합한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가 비유의 의미를 좌우하는 결론적인 문구에 사용되어 해석에 이견이 더 커진다. 


  두 번째는 주기도문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맥으로 보면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는 암시적으로 기도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다가 이 비유와 눅 18:1-8의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가난한 과부의 탄식하는 기도 비유를 쌍둥이 비유로 해석하는 경향도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를 보다 더 기도에 대한 것으로 보도록 재촉한다. 

 

  이것들은 결국 집 밖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의 행위를 기도로 보게 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집 밖에서 "끈질기고, 담대하게" 요구하는 친구의 기도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해석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나이데이아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주 예외적이라는 점이다. 

 

  ἀναίδεια를 사전적으로 보면 "수치심"이라는 뜻을 가진 "αἰδώς"(아이오스)에 부정적 접두사인 ἀ를 붙여서 "수치심이 없음"(shamelessness) 또는 "뻔뻔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래서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간청함", "졸라대는 것", "귀찮게 졸라대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것(현재 발견된 대부분의 고대 헬라 문헌을 담고 있는 Thesaurus Linguae Graecae CD 검색을 보면 ἀναίδεια는 총 258번 나오는데 눅 11:8과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부들의 글을 제외하면 모두 부정적인 의미인 "수치심이 없음"(shamelessness)으로 사용되었다.)이어서 이 해석이 올바른지 논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결국 해석적 논쟁의 마지막 문제는 이렇게 집약된다 : "그의 아나이데이아"가 집 밖에서 빵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의 아나이데이아인가? 아니면 집 안에서 빵을 빌려주어야 할 친구의 아나이데이아인가? 

 

  비유의 주인공이 집 밖에서 빵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이고 "그의 아나이데이아"가 집 밖에서 빵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의 아나이데이아라면, 아나이데이아는 "끈질김"(importunity), "끈덕짐"(persistence), "담대함"(boldness)으로 해석된다(한글 개역 성경의 강청함이 이와 같은 해석이다).

 

  이와 달리 비유의 주인공을 집 안에서 빵을 빌려주어야 할 친구로 보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집 안에 있는 친구의 아나이데이아가 되어 아나이데이아의 의미는 사전적인 의미인 "뻔뻔함"(수치심이 없음, shamelessness)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해석적 난제를 문학적 구조로 살펴보면, 8절의 문학적 구조는 의외로 간단하고 명백하게 "그의 아나이데이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 놀랍다. 이 간단한 방법은 교차대조법에서 드러나는 행동의 주체를 살펴보는 방법이다. 행동의 주체를 중심으로 도식화한 8절의 문학적 구조는 아래와 같다.

 

교차대조법으로 행동의 주체를 비교하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교차대조법으로 행동의 주체를 비교하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8절과 위 도표를 비교해 보면 각 연에서 행동을 수행하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a와 a'의 행동의 주체는 집 안에 있는 친구가 분명하다. 이는 "주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비유에서 주는 자는 집 안에 있는 친구뿐이다.

 

  이런 정황은 b와 b'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똑같이 "일어나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일어나다"는 "주다"와 연동된 동사이다. 비유에서 일어나 주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집 안에서 잠을 자던 친구뿐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c와 c'의 행동의 주체는 누구로 보아야 하는가? 8a-b와 8e-f의 행동의 주체는 모두 집 안에 있는 친구이다. 그런 문맥의 중간인 8c-d에서 갑자기 행동의 주인공이 바뀐 것으로 보이는 단서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곧 8a에서부터 8f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행동의 주체가 바뀌는 부분이 없다. 

 

  그렇다면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빵을 주지 않을 수 있어도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빵을 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은 집 안에 있는 친구밖에 다른 인물이 없다. 그러므로 비유 본문 자체의 구조로 보면 비유의 결론인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집 안에 있는 친구의 아나이데이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집 안에 있는 친구의 부끄러움 없음"(shamelessness)으로 보는 것이 문학적 구조와 문맥에 가장 타당한 해석이다. 

  더군다나 8절과 비유 본문에는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우리가 이 부분을 기도로 이해하는 것은 기도로 해석할 수 있는 암시적인 표현인 "주다"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특히 8절은 집 안에서 빵을 주어야 하는 친구에게 단독 스폿 라이트가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스폿 라이트는 11:5-13안에서 보면, 자녀의 요구에 응답하시는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초점이 확장 이전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학적 구조로 보면 8절부터 13절의 누가의 시점은 "요구에 응답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데에 집중되었다는 말이다. 8절부터 13절에 이르기까지 누가는 비유에서는 집 안에 있는 친구에게 조명을 비추다가, 자녀의 요구에 좋은 것을 주는 사람 아버지를 조망하고, 곧이어 하늘의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조명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비유 자체의 구조는 물론 비유를 포함한 11:8-13의 구조를 보아도 "그의 아나이데이아"는 "집 안에 있는 친구의 뻔뻔함"이라 결론 내리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2) 하지만 이 비유에는 수사적 특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이 비유를 주기도문에서 시작하는 11:1-13안에서 보면, 집 밖에서 빵을 달라 요구하는 친구가 이차적으로 부각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밤중의 친구 비유와 좋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 비유"에서 자세하게 논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눅 11:1-13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와 성경을 읽을 때 자연적으로 작동되는 이해 방법인 순차적 논리에 의한 해석이 있다.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은 오늘 우리 대부분이 순차적 논리만을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병렬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를 병행해서 사용했다. 성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성경은 병렬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가 병행되어 사용되었다.

 

  누가는 누가복음 11장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에서 병렬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를 정교하게 병행 사용하여 이중적인 메시지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비유 자체로만 보면 집 안에서 명예를 위해(수치를 피하기 위해) 빵을 주는 친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면 집 밖에서 명예를 위해(수치를 피하기 위해) 빵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친구도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중적인 캐스팅이 시도된 것이다.


  이를 위해 누가는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애매모호한 단어인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사용했고, 이 단어를 순차적 논리와 병렬적 논리가 합쳐지고 전환되는 부분에 사용하므로 이중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 αὐτοῦ)는 비유로만 보면 집 안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에게 응답해야 하는 친구의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부차적으로 집 밖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의 "끈질김"(importunity), "끈덕짐"(persistence), "담대함"(boldness)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다.

 

  누가는 이러한 두 가지 논리의 병합 방식으로 주기도문을 필두로 기도하는 자의 끈질기고 담대한 자세와 기도에 응답하여 명예를 유지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3. 요약 및 결론

  성경을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관점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경이 지금 살펴본 한밤중의 친구 비유이다. 1세기 고대 유대 땅 시골 어딘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던 사회-문화적 정황은 이 비유 해석에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이 비유는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도구들을 통해서 보아야 할 필요성도 드러내는 비유라 할 수 있다. 문학적 구조와 수사적 도구들을 찾아 분석한 결과가 비유 이해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유에 묘사된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알게 된 실제 일화일지 모른다. 주님께서는 이 일화를 기도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아주 좋은 비유적 소재로 생각하셨다 상상해본다. 이는 이 비유가 밤에 찾아온 손님 대접 때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고 자다가 일어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도움을 들어주어야 하는 두 친구 간의 밀고 당기는 긴장감이 아주 인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화는 기도하는 자의 자세는 물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강조할 수 있는 예화로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 예수님께서 생각하셨을지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늘 상 두 가지 시험에 빠지곤 한다. 내가 지치지 않고 올바로 기도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내가 요구하는 때에 만족하게 응답하시지 않는가? 주님께서는 두 질문을 비유에서 집 밖에서 도움 요청을 하는 친구와 집 안에서 도움 요청을 들어주는 친구로 인물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수치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끈질기게 기도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하늘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위해 반드시 하늘의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신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가 이 비유를 마음속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서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가장 좋은 선물을 받는 기도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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