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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누가복음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13-21)

by 예다준 2022. 11. 12.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13-21)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가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돈이라 말씀하신 일이 있다. 어릴 때는 그 말씀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돈을 사용하니 위생적으로 더럽다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돈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상상 이상으로 추해지는 것을 보고 아마 그런 말씀을 한 것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돈에는 두 얼굴이 있다. 먼저 돈은 개미지옥과 같다. 유명 목회자나 기세 등등한 정치인들이 빠져들어 몰락하는 두 함정 중 하나가 항상 돈 문제였다. 하지만 돈은 신과 같다. 내 주변에 무신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은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다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러면 결국 그들의 신은 돈인 것이다. 


  두 얼굴의 돈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여러 해전에 6천만원을 받기로 하고 청부살인을 했던 사람이 잡혔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6천만 원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놀랐고, 6천만 원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에서 또 한 번 놀랬었다. 돈이 무엇인지 사람의 가치가 무엇인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답을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돈은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고 영향력도 지대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단언하셨다(마 6:24). 이 말씀에는 돈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돈은 하나님과 라이벌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돈의 실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돈(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한다 말씀하셨는지 새롭게 궁금해진다. 이에 돈(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비유를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것이 눅 12:13-21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관련 삽화
어리석은 부자 비유 관련 삽화

1.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전체 상세 문학적 구조와 특징 관찰

  어리석은 부자 비유는 어떤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로 비유를 이끄는 도입(13-14절)과 도입적인 경구(15절), 그리고 비유(16-20절)와 비유의 결론인 경구(21절)라는 두 단계의 재미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입적인 경구와 비유의 경구는 주제에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도입적인 경구의 주제는 탐심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이고 비유의 결론적인 경구는 재물은 많이 쌓아두었지만 하나님께는 가난한 탐심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도입적인 경구를 적용한 결론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도입적인 대화 단락과 비유 본문 단락 간에는 평행법으로 대조되는 짝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 전체는 하나의 평행법을 구성하지 못하고 아래 그림과 같은 논리적인 구조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비유는 탐심과 관련된 경구로 앞과 뒤가 감싸인 모양을 가져서 마치 인클루지오와 같은 모양의 경구들이  비유를 강조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우선 이 비유의 전체 상세 구조를 본다. 분석 작업은 기본적으로 우리말 번역 성경을 따르지만 문학적 구조 분석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은 원문 성경의 단어와 어순을 따랐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과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도입적 대화(12:13-14)
a. 13a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b. 13b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c. 13c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a'. 14a 그가 이르시되 
  b'. 14b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세웠느냐 재판장이나
    c'. 14c 너희의 물건 나누는 자로

도입적 경구(12:15)
15a 저희에게 이르시되 
a. 15b 삼가하라 물리치라 
  b. 15c 모든 탐심을 
a'. 15d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 넉넉함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b'. 15e 그의 소유의 


비유(12:16-20)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χώρα)에 소출이 풍성하매

A. 부자의 어리석은 생각
a. 17a 심중에 깊이 생각하여 가로되(λέγω) 
  a) 17b 내가 어찌할꼬
    x) 17c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니
  a') 17d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을 

a'. 
  a) 18a 또 가로되(λέγω) 내가 이렇게 하리라 
    x) 
      a] 18b 내가 헐고
        b] 18c 내 곳간들을
        b'] 18d 더 큰 것들을
      a'] 18e 내가 지을 것이다
  a') 18f 내 모든 곡식과 좋은 것들 거기 쌓아 두리라

a". 19a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를 것이다(λέγω) 
  a) 19b 영혼아 너는 가지고 있다
    x) 19c 쌓아놓은 많은 물건들을 여러 해 쓸 
  a') 19d 네가 푹 쉬고 네가 먹고 네가 마시고 네가 즐겨라

B. 하나님의 경고
20a 하나님은 이르시되(λέγω) 어리석은 자여 
  a. 20b 이 밤에 그들이 네 영혼을 빚으로 돌려받으리니
    b. 20c 너에게서 
    b'. 20d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a'. 20e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결론적 경구(12:21)
21a 이와 같으니라
a. 21b 재물을 쌓아 두고
  b. 21c 자기를 위하여  
  b'. 21d 하나님께 대하여 
a'. 21e 부요치 못한 자가 

  위 구조는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 도입적 대화(12:13-14)는 어떤 사람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한 마디씩 동의적 평행법으로 구성되었다. 

  a와 a'는 "이르되"(에이펜, εἶπεν)으로 대조되고, b와 b'에서는 "선생님" + "명하다"가 "재판장"으로 대조되고, c와 c'에서는 "유업을 나누다"와 "물건 나누는 자"가 대조된다. 

  2) 대화는 곧이어 도입적 경구(12:15)로 이어진다. 

  아마도 형제와 유업을 나누도록 부탁한 사람의 마음에 탐심이 있다 주님께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탐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탐심에 대한 경구를 동의적 평행법으로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b와 b'의 대조를 보면 "탐심에 대한 경고"는 "소유에 대한 경고"로 포커스가 좁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비유에서 부자의 어리석은 생각이 세 개의 단락(a, a', a")으로 구성되어있고, 이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경고는 하나의 단락이다. 

  내용으로 보면 부자의 어리석은 세 개의 생각과 하나님의 경고는 서로 대조되지만 문학적 구조로 보면 특별한 평행법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의 어리석은 생각 세 개는 A라는 한 단락으로 구분하고 각각을 병렬적인 단락으로 구분해서 a, a', a"로 표기하고, 하나님의 경고는 B 단락으로 구분된다.


  재미있는 것은 네 단락이 모두 "가로되"(레고, λέγω)로 시작하고, 모두가 하부 구조로 교차대조법을 가지고 있어 교차대조법의 중앙에 핵심 메시지를 가진다는 점이다. 보통 이럴 때 교차대조법의 중앙부의 메시지만을 따로 떼어 연결해보면 각 단락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비유에서는 교차대조법의 중앙부의 메시지는 모두 부자의 생각들로, 이것들을 연결하면 부자의 생각이 어떤지를 파악할 수 있는데, 부자의 생각은 오직 자신의 소유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자의 생각들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소출을 저장할 창고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17c) - "(이미 있는) 내 곳간들을(헐어버리고)"(18c) "더 큰 것들을 짖고"(18d) - "(영혼이 푹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여러 해 쓸(물건들을 가지고 있다)"(19c).

  여기에 다가 부자의 어리석은 독백에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일인칭 단수 "내가"를 주어로 하는 동사가 8회,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이인칭 단수 "네가"가 5회,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속격 인칭대명사 "나의", "내"가 4회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와 같은 표현상의 특징은 부자가 무엇 때문에 어리석은 자로 판명되는지 알려준다. 그는 탐심에 매몰되어 그의 소유를 유지하는 데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종속시켜버렸다.  


  4) B 단락의 하나님의 심판 선언의 교차대조법의 특징은 주제의 전환이 한번 더 일어나는 것이다. 

  도입적 경구의 b와 b'에서 "탐심에 대한 경고"가 "소유에 대한 경고"로 주제의 전환이 있었다 말했다. 이 주제의 전환이  한 걸음 더 진보되어 B 단락에서는 "소유에 대한 경고"가 "생명과 소유의 상실에 대한 경고"로 바뀐다. 그래서 결국 탐심이 생명과 소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된다.


  이는 이 단락의 교차대조법이 b와 b'에서 "너에게서"와 "네가 예비한 것"이 서로 대조되면서 "너에게서"(b)는 "영혼의 상실"(a)로 "네가 예비한 것"(b')이 "다른 사람의 것"(a'의 뉘것), 곧 재물의 상실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탐심은 생명과 재물을 모두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으로 종결된다.


  5) 마지막으로, 결론적 경구(12:21)는 "재물을 쌓아둠"(a)과 "부요치 못함"(a')이, "자기를 위하여"(b)와 "하나님께 대하여"(b')가 반의적으로 대조되는 교차대조법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는 비유의 전체가 평행법으로 이루어졌다. 동의적 평행법이 2개, 교차대조법이 5개 발견된다. 동의적 평행법은 도입 내러티브에 몰려있고, 교차대조법은 비유에 몰려있다. 하지만 전체를 통합하는 거시적 구조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제 위에 제시된 문학적 구조와 이에 대한 관찰 사항들을 기초로 단락별로 문학적 구조와 문체적 특성을 간략하게 해설해 본다.

 


  1-1. 도입적 대화(12:13-1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형제가 유산을 분배하도록 도와달라 청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랍비와 같이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를 번역한 "선생님"(디아스칼로스, διδάσκαλος)이라 불렀다(12:13b). 당시 랍비는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율법적 판결을 제공하곤 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이런 권위를 사용해 달라 청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예수님께 유산 분배를 청한 이 사람의 상황을 대략 이렇게 추측한다. 이 사람은 부친의 유산(아마도 땅이나 밭)을 상속받았는데, 공동 상속자인 형제가 유산 분배를 실행하지 않은 상태이다. 어쩌면 이미 재산 분할에 대해 요청을 했지만 재산 분할은 법적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형제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재산 분할 요청을 이행하지 않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비유에 세팅된 배경을 근거로 보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자의 재산 분할 요구는 탐심에서 나온 것이라 학자들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중 기억할만한 가정은 만약에 재산 분할에 미온적인 형제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산 사용에 대한 미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재산 분할을 요구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함께 사는 것을 아름다운 일로 간주했다(참조. 시 133:1; 스불론의 유언 9.3-4; Josephus, War 2.122). 이것 때문에 그 사람의 형제가 재산 분할에 대해 미온적이었다면 재산 분할 논쟁은 결국 형제간의 우애가 파괴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일이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이렇게 보았을지 모른다 추측한다. 이는 주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고, 더 나아가 그의 요구가 탐심과 연관된 것으로 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형제간의 미덕을 파괴할지 모른다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곧바로 탐심에 대한 경구를 먼저 주고, 그다음에 탐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참한 결말을 비유로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과 이 사람의 질문과 대답은 대조사항이 정확하게 딱맞아 떨어지는 동의적 평행법이다. a와 a'는 "이르되"(에이펜, εἶπεν)으로 대조되고, b와 b'에서는 "선생님" + "명하다"가 "재판장"으로 대조되고, c와 c'에서는 "유업을 나누다"와 "물건 나누는 자"가 대조된다. 

a. 13a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에이펜, εἶπεν) 
  b. 13b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c. 13c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a'. 14a 그가 이르시되(에이펜, εἶπεν) 
  b'. 14b 이 사람아 누가 나를 세웠느냐 재판장이나
    c'. 14c 너희의 물건 나누는 자

  이 평행법을 예수님에게 기인된 부분(b-c와 b'-c')과 누가가 첨가한 부분(a와 a')으로 나누어 본다면, 특히 예수님은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것을 받아서 즉각적으로 평행법의 짝을 만들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주님께서는 재판장과 물건을 나누는 자가 되어 달라는 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셨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우리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2. 도입적 경구(12:15)

  도입적 경구는 "저희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한 것으로 보아 도움을 요청한 어떤 사람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무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입적 경구의 내용은 생명과 재물의 관계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이다.

  1) 내용으로 보면 문맥이 a-b로 이어지고, a'-b'로 이어진다. 하지만 문학적 구조로 보면 "모든 탐심"(b)과 "그의 소유"(b')가 대조되어 a의 "삼가하라 물리치라"라는 공통되는 경고적 명령이 되고, a'의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 넉넉함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가 경고적인 명령의 이유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동의적 평행법의 각 요소들을 대조하면,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탐심 주제"가 "소유의 주제"로 포커스가 전이되어 집중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a와 a'는 명령과 이유로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래서 탐심에서 소유로 비유의 주제가 비약되어도 b와 b'의 대조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후에 보겠지만 이 주제의 전이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경고를 하는 B에서 "소유 주제"에서 "모든 것의 상실 주제"로 한번 더 발전된다. 이로서 탐심은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 탐심의 대상인 소유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비참한 결과가 된다고 비유는 논지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 주제는 "탐심"(플레오넥시아스, πλεονεξία)이다. 탐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친 이유이다.

 

  탐심(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이"(플레이온, πλείων) "가지다"(에코, ἔχω)의 마음이다. 그래서 탐심은 단어의 의미로만 본다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가치중립적이다. 이 비유에서 탐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의 넉넉함"과 "생명"을 등가로 보는 사고방식에 있다. 주님께서는 이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 안에 있다"(ἐν τῷ περισσεύειν τινὶ ἡ ζωὴ αὐτοῦ ἐστιν)로 표현하셨다(12:15d).

 

  이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 안에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삶과 행동의 목적은 생명과 등가인 소유를 채우는 것에 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도달할 곳은 12:21에 나오는 뜻밖의 소유의 모순의 장소가 된다. 그곳은 자기를 위해서는 부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난한 곳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결국 탐심은 생명을 위해 열심히 채우고 모았지만 생명의 주관자를 향해서는 나 자신을 가장 빈곤하게 만드는 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사람은 행복을 위해 탐심을 고집한다. 하지만 탐심의 결말은 자기 상실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탐심의 정체이다. 

 


  1-3. 비유A : 부자의 어리석은 생각(12:17-19)

  이 부분은 세 개의 "가로되"(레고, λέγω)로 단락이 구분되는 부자의 세 가지 독백이다. 각 단락은 "사람의 생명이 넉넉함 안에 있다"고 믿고 있는 부자가 자기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문제제기"(12:17), 둘째는 "계획 설정"(12:18), 그리고 마지막은 "자기 위로" 또는 "자기 권면"(12:19)로 구분할 수 있다. 

  1) 비유의 시작인 16절은 비유의 배경을 설정한다. 비유의 주인공은 부자로 소출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지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이 사람이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설명한다. 이는 그가 소유한 밭이 단순한 땅이 아니라 "한 지역"이나 "영역"을 의미하는 코라(χώρα)이기 때문이다. 그는 엄청나게 넓은 대토지의 지주로 상상을 할 수 없이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되었다. 그에게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수확이 터졌는지 그는 이전에 있던 창고들을 모두 다 부수고 큰 창고들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고(12:18), 이것만을 가지고도 여러 해를 푹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도 괜찮다 생각할 정도였다(12:19).  


  2) 하지만 비유의 본론은 놀라운 소출에 대한 기쁨이나 감사가 아니라 놀라운 소출에서 기인한 "쌓아두다"(쩨사우리조,θησαυρίζω)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된다(12:17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그래서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은 생각을 묘사한 교차대조법의 중심에 걱정이 배치되어 있다. 

 

  부자는 이 걱정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자기 자신 안에 깊이 생각하여"라 묘사하셨다(12:17).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풍성한 소출을 자기 자신 안에 깊이 생각한 결과가 교차대조법의 중앙인 "내가 가지고 있지 않구나"(οὐκ ἔχω)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칼 하다. 여기에서 걱정으로 나타난 탐심의 증세는 부자를 더욱더 탐심의 늪속으로 빠지도록 만든다. 

  학자들은 이 단락에서 부자에 대한 표현을 중요하게 본다. 아래 교차대조법을 보면 부자에게는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는 현대인에게는 별 문제가 없는 모습일지 몰라도 고대 근동 지역의 공동체 문화에 비추어 볼 때 곡식 창고들을 모두 허물고 엄청나게 큰 새 창고를 건설하는 중대한 문제를 자기 혼자 궁리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행태라 말한다. 

  a. 17a 자기 자신 안에 깊이 생각하여 가로되
  a) 17b 내가 어찌할꼬
    x) 17c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니(οὐκ ἔχω)
  a') 17d 나의 곡식을 쌓아 둘 곳을 

  부자의 이러한 행태는 순간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자의 궁리를 12:20d에서 "네가 예비한 것들"이라 하나님께서 설명한 부분으로 추측 가능하다. "예비한 것들"(헤토이마사스, ἡτοίμασας)은 직설법 능동태로 그의 계획이 상상 속에 존재하는 계획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창고들을 모두 부수고 새로운 커다란 창고를 짓는 일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의 고민이 이루어지는 한동안 그는 계속해서 이 생각을 지속했을 것이다. 


  게다가 12:16절의 "소출이 풍성하매"(유포레센, εὐφόρησεν)는 부정 과거 직설법이다. 부정 과거 직설법은 풍년이 어느 일정 기간 동안 계속된 것으로 부자의 소출이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양이라는 점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리고 12:17의 "깊이 생각하다"(디에로기제토, διελογίζετο)는 미완료 직설법으로 반복적이거나 습관적으로 고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그의 계획은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완성되면 자기를 향해 하고픈 말을 미래형 "말하리라"(에포, ἐρῶ)로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렇다고 한다면 부자는 어느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해서 풍년을 맞아 소출이 엄청나게 풍성해지자 "내가 가지고 있지 않구나"(οὐκ ἔχω)라는 생각을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궁리하여 방안을 만들어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완성을 바라보면서 자기 영혼에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결국 부자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구나"(οὐκ ἔχω)의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세웠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계획을 이중 교차대조법으로 설명하셨다. 먼저는 1차 미시적 구조로 교차대조법의 중심은 이전의 곳간들을 전부 다 부수고 커다란 새 곳간을 세우는 일이다. a의 "이렇게 하리라"와 a'의 "거기 쌓아 두리라"는 서로 동의적으로 대조를 이루어 x를 보조한다. 

  a) 18a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x) 18b-e (커다란 새 곳간을 세우는 일)
  a') 18f 내 모든 곡식과 좋은 것들 거기 쌓아 두리라 

  교차대조법의 중심인 x는 2차 미시적 구조로 새 곳간을 세우는 일을 더 상세하게 묘사했다. 

      a] 18b 내가 헐고
        b] 18c 내 곳간들을
        b'] 18d 더 큰 것들을
      a'] 18e 내가 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의 두 번째 독백의 주제는 탐심을 방해하는 문제를 제거하기 위한 결심과 계획이다.


  4) 부자의 세 번째 자기 독백은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자기 위로의 말로 부자의 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는 그가 노력으로 이룬 결과를 설명한 것으로 "너는 가지고 있다"(ἔχεις)라는 명제이다. a'는 노력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삶으로 a'와 아주 잘 어울리는 대조의 짝이다. a와 a' 가운데인 교차대조법의 중심에는 부자가 가지게 된 것 그래서 그에게 이상적인 삶을 선사할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나온다. 그것은 여러 해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쌓아놓은 많은 물건들이다. 

  19a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를 것이다
  a) 19b 영혼아 너는 가지고 있다(ἔχεις) 
    x) 19c 쌓아놓은 많은 물건들을 여러 해 쓸 
  a') 19d 네가 푹 쉬고 네가 먹고 네가 마시고 네가 즐겨라

  먼저, 부자가 자기 영혼을 향해 한 말이 눈에 띈다. 그는 자기에게 "영혼아 너는 가지고 있다(ἔχεις)"라 말했다. 이 말은 12:17c의 첫 번째 독백인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니(οὐκ ἔχω)"와 연결된다. 부자의 첫 번째 독백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는 세 명령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즐겨 사용되는 삼중 표현으로(참조. 삿 19:6; 전 2:24-25; 3:13; 5:18; 8:15; 토비트 7:10)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덧없는 인생의 근시안적인 낙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부자의 표현은 이사야 22:12-14의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와 관련된 것으로 이교도적인 에피큐리언의 세계관이 배경이라 말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고전 15:32에서 사도 바울이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악한 것으로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한 것으로 보아 부자의 자기 위로는 그가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두지 않았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a와 a'에서 표현된 부자의 자신감과 낙천적인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모은 재물에 있었음을 부자가 만든 교차대조법의 중심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교차대조법의 중심에 그가 쌓아놓은 여러 해 쓸 많은 물건들을 두고, 이것으로 인해 "영혼아 너는 가지고 있다(ἔχεις)"라는 자부심(a)과 네가 푹 쉬고 네가 먹고 네가 마시고 네가 즐겨라라는 인생 철학(a')으로 교차대조법의 중심을 감쌌다.

 


  1-4. 비유B : 하나님의 경고(12:20)

  부자의 세 번의 독백이 끝나자 부자가 새까맣게 잊고 있어 부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던 하나님이 나타났다.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부자가 꿈꾸던 행복한 삶에 청천벽력과 같은 돌발변수가 된다. 

  1) 하나님은 나타나자마자 부자를 "이 어리석은 자여"(앞포론 타우테, Ἄφρων ταύτῃ)라 부르셨다. 

  아마도 청중들은 부자를 어리석다 선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시 14:1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그가 "영혼아 너는 가지고 있다(ἔχεις)"라고 만족스럽게 자랑한 것에서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οὐκ ἔχω)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생의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빈털터리였다. 


  2)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분이 얼마나 결정적인 위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주신다. 그것은 부자의 인생철학인 "사람의 생명이 그의 소유의 넉넉함 안에 있다"(12:15)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보면 다소 집요하고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20a 하나님은 이르시되(λέγω) 어리석은 자여 
  a. 20b 이 밤에 그들이 네 영혼을 빚으로 돌려받으리니
    b. 20c 너에게서 
    b'. 20d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a'. 20e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하나님은 부자가 의지한 재물을 부자에게서 제거하지 않고 부자의 생명을 부자에게서 제거하신다(a-b). 그러면 그가 예비한 재물은 모두 다른 자의 것이 된다(b'-a'). 결국 부자는 재물도 잃고(a') 자기 생명마저 잃어버리게 된다(a). 이는 부자의 문제는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상태, 탐심에 물든 그의 마음의 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재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강타하는 영혼의 상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의 문학적 구조인 교차대조법은 재물도 잃고 자기 목숨마저 잃어버리는 완전한 상실을 아래 모양과 같이 이중적으로 강조하는 모양이다.

 

3) 여기에서 본문의 가르침을 보다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몇 가지 논쟁 사항들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분야는 본 글의 범위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본문 이해에 다소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언급한다. 


  먼저 12:20의 우리 말에는 "도로 찾다"라고 번역된 "아파이투신"(ἀπαιτοῦσιν)은 "빚을 돌려받는다"는 뜻의 아파이테오(ἀπαιτέω)이다. 이 단어는 우리말 번역에는 없는 "그들이"와 결합해서 "이 밤에 그들이 네 영혼을 빚으로 돌려받으리니"라는 문장을 만드는데, 이 문장이 해석상의 논쟁거리가 된다.  "이 밤에 그들이 네 영혼을 빚으로 돌려받으리니"에서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학자는 그들을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하나님"으로 보고(우리말 성경의 번역에는 해석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학자들은 "천사"로 본다. 하지만 둘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말씀을 하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그들"이라 다른 존재처럼 부르는 것은 아주 어색하다. 그리고 그들을 천사로 보는 것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천사를 등장인물로 설정하는 것은 뜬금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 어떤 학자들은 그들을 부자에게 악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해석은 천사로 보는 것보다 더 뜬금없는 해석으로 비유를 중심으로 본다면 거의 예상하기 어려운 인물의 등장이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일단의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부자의 소유물을 지적한다. 비유 본문을 보면 부자와 소유물은 일체적이다.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면 부자의 생명은 소유물의 넉넉함 안에 있다(12:15d). 소유물이 부자를 소유하고 있다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므로 소유물이 부자의 생명을 빚으로 돌려받는다는 말은 비유 안에서 본다면 어색한 논리가 아니다.


  그러면 소유물이 소유주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예수님 당시인들이 생각했었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레위기 18:28이나 20:22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의 땅,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더럽히거나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순종치 않을 때 땅이 이스라엘을 "토해낼" 것이라고 경고된 것을 신학적 근거로 제시한다. 

  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레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이 견해는 아주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생각한다. 문제는 주님께서 "이 밤에 그들이 네 영혼을 빚으로 돌려받으리니"라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에 있다. 부자의 생명을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가"로 표현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소유물이 소유주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해석은 비유에서 소유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부자가 결국 소유로 인해 자기 자신마저 상실해 버리는 결론을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한 인상적인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명이 소유물의 넉넉함 안에 있다"고 믿었던 부자의 인생철학이 역설적으로 올바른 진리가 되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말이다.


  4) 부자는 여러 해를 푹 쉬고 네가 먹고 네가 마시고 네가 즐기자 다짐했는데(12:19), 그의 바램은 그날 밤에  사라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12:20b)은 극단적인 대조를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너에게서(b) 생명을 빚으로 돌려받고(a), 네가 예비한 것이(b') 알 수 없는 자의 소유가 될 것이라 대조하셨다(a').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최악의 가난뱅이가 되었다.

  5) 부자의 독백을 보면 그에게는 함께 상의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상속으로 물려줄 재산에 대한 문제는 상속자와 함께 나누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하지만 부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상속자가 없을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12:20e의 하나님의 질문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속에 담긴 부자의 비참한 결말은 더욱더 크게 강조된다. 부자는 그의 재물을 물려받을 후손이나 상속자도 없이 죽음으로 그가 자신을 온전히 바쳐 모은 재물들은 모두 안개와 같이 그에게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1-5. 결론적 경구(12:21)

  결론적 경구(12:21)는 "재물을 쌓아둠"(a)과 "부요치 못함"(a')이, "자기를 위하여"(b)와 "하나님께 대하여"(b')가 반의적으로 대조되는 교차대조법이다. 

  1) 비유의 결론적인 경구를 보면 우리는 부자를 두 가지 차원에서 정의하게 된다. 먼저는 자기를 위한 부자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부자이다. 

 

  하지만 경구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비교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부자와 하나님에 대해 가난한 자로 비교의 깊이를 더 확대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와 "하나님",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네 개의 요소를 가지고 가능한 비교의 논리를 만들면 ① 하나님에 대해 부자이고 자기에게도 부자, ② 하나님에 대해 부자이지만 자기에게는 가난한 자, ③ 하나님에 대해 가난하지만 자기에게는 부자, ④ 하나님에 대해 가난하고 자기에게도 가난한 자, 4가지 경우가 생긴다. 


  비유의 결론적인 경구는 세 번째 "하나님에 대해 가난하지만 자기에게는 부자"를 언급했다. 하지만 비유의 전체 내용을 보면 이 비유의 주인공은 실체는 최악의 상태인 "하나님에 대해 가난하고 자기에게도 가난한 자"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목숨을 잃고 아끼던 재물을 모두 빼앗겼다. 

 

  그래서 학자들은 결론적 경구는 재물을 쌓아두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는 데에 포커스를 둔 것으로 본다. 즉 부자의 잘못된 재물을 쌓아두는 방법을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자는 재물을 쌓아두는 방법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에서 최악의 결말을 맞이 한 것이다.


  2) 그러면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하게 되는 방법이 매우 궁금해진다. 비유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이 없다. 하지만 비유 이후에 나오는 말씀인 12:33을 보면 누가가 알려주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자가 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우리의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담는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드는 방법이다.

  어째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해지는 방법인가?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신다고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시 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그래서 잠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일을 하나님께 빌려주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이 한 구절에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응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세 가지 가르침이 함께 들어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강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자가 되는 성경적 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이에게 하나님의 상이 주어지게 되니 하나님에 대해 부요해지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도식이 성립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잠언 17:5을 보면,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돕기는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고 멸시하는 것이 되기에 하늘의 형벌이 주어진다. 달리 말해서 이 경우는 하나님에 대해 가난해지는 것이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이로 본다면 이 부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았을지 구체적으로 파악된다. 사람의 생명이 그의 소유의 넉넉함 안에 있다 믿는 마음은 부자를 자기 자신과 소유물만을 바라보는 근시안이 되게 했다. 탐심의 근시안이 된 부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권세까지도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실 때에만 등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부자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 가장 가난한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다. 

 


2. 요약과 마무리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읽으면 솔직히 두 가지 반대되는 생각이 함께 일어난다. 나에게도 부자에게 일어난 상상을 초월한 수입이 생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자처럼 허망한 인생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두 생각은 생애가 다할 때 까지 우리 맘에서 맴도는 모순적인 질문일지 모르겠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참 부자가 되는 지혜를 제시해주는 말씀이 어리석은 부자 비유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는 돈과 재물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알려주는 비유라 판단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참된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길원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참 부자에 대한 올바른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말씀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비유는 참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이 소유(돈과 재물)의 넉넉함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진리가 우리 맘에 정돈이 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탐심을 제어할 수 있는 참 제자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이 탐심에서 자유롭게 재물을 사용하는 이른바 깨끗한 부자인 "청부"(淸富) 또는 거룩한 부자인 "성부"(聖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 비유를 관찰하면서 소유와 관계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1)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유물이다. 하나님께서 부자의 생명을 거두어간다 선언하실 때 "이 밤에 너에게서 네 영혼을 빚으로 도로 찾으리"(12:20)라 하셨다. 우리의 생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빚으로 도로 찾으면 언제든지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의 중요함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얻고도 그의 마음에 생각난 것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니"였다(12:17). 그래서 그는 "나는 가지고 있다"(12:19)라 자부할 수 있을 때 까지 탐심의 노예로 살았다. 그는 만족할 줄 몰랐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3) 행복한 삶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다. 부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룬 후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네가 푹 쉬고 네가 먹고 네가 마시고 네가 즐겨라"(12:19). 이것이 어리석은 부자가 꿈꾸던 행복한 삶의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하나님이 오시면 산산조각 부서져 버린다. 이는 참 부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비유에는 이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해 롬 14:17을 말하고 싶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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