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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누가복음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by 예다준 2022. 11. 17.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이 비유를 읽거나 묵상하는 사람,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내용이 쉽고 극적이어서 재미있지만 비유를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진흙탕에 뛰어드는 것 같은 황당함과 난제들이 뒤엉킨 비유이다.

   평이하게 이 비유를 읽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훈을 배우거나 부자와 거지라는 극적으로 대조되는 두 인물의 종말이 완전 반대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고 내세에 대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또 나눔과 구제에 대한 교훈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이 비유를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훈보다 나눔과 구제를 이 비유의 교훈으로 본다. 이는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전체적인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에 이 결론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삽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대한 삽화, 출처=구글이미지

 


  하지만 이 비유는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과 설득력 있게 대답을 제기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비유 본문의 한계를 동시에 직면하게 만든다. 이런 질문들이다.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라 나오는데, 왜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을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인가 낙원인가?
스올은 지옥인가?
부자와 거지의 종말에 왜 믿음이 나오지 않는가?
큰 구렁으로 갈라진 스올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인가 사후 아브라함인가?

 


   이런 질문에 성경 학자들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질문들도 아주 많다. 아무튼 이 모든 질문들을 답한다 해도 궁극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비유의 메시지(교훈)는 무엇인가?"이다. 누가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을 찾기 위해 성경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 방법들을 동원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 방법은 솔직히 어렵고 따라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누군가가 그것들을 대충 정리해주고 쉽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생각되고 한국 교회 평신도들에게 알려진 성경 해석 방법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이면서 따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성경 해석 방법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성경의 문학적 구조와 문학적 도구들과 문체들을 중심으로 성경 저자(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분석할 수 있는 성경 해석 방법과 이에 대한 연습을 제시하고 그리고 논의가 되고 있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1.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전체 상세 문학적 구조 분석과 관찰

  이 비유는 얼핏보면 마치 현대인이 글을 쓴 것처럼 이야기체로 내용을 열거했기 때문에 히브리적 평행법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내용 대부분이 대화를 이루고 있어 어색함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내용으로 보아서 단락을 나누면 거지와 나사로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인 19-21절과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죽고 하데스(음부)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인 22-31절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특별히 구별되는 도입과 결론이 없이 비유가 종결되었다. 

  하지만 비유에는 세밀하게 짜여진 문학적 구조가 있고, 이 구조로 보면 단락 나눔이 달라진다. 비유는 두 부분인 9-23절과 24-31절로 나누어진다. 이는 9-23절이 a-b-c-c'-b'-a'의 교차대조법으로 아주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a의 부자의 호화로이 연락하는 삶은 a'의 아브라함의 품에 있어 안락함을 누리는 거지의 모습으로 극명하게 대조되어 9-23절을 문학적으로 구성된 완전한 한 단락으로 구별해 준다. 

  그리고 b//b' 레이아웃과 c//c' 레이아웃은 아래 표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 대조의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 나머지 16:24-31은 장면 2로 구분되는 부자와 아브라함과의 두 차례 대화 단락이다.

  이 단락의 특징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πέμπω)는 두 차례의 청원이 동의적 평행법으로 구성되어있는 점이다. 부자는 자신의 소원을 위해 나사로를 자신(스올)과 형제들(세상)에게로 보내달라 청한다. 아브라함은 이 청원이 불가능함을 아래 도표와 같이 세 가지 이유로 답하여 거절했다. 


  이제 이 비유의 전체 상세 구조 분석을 보고, 이에 대한 관찰을 실시해 본다.

장면 1 : 부자와 거지의 삶과 죽음(16:19-23)
a. 부자의 호화로이 연락하는 삶
a) 19a 한 부자가 있어 
  b) 19b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b') 19c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b. 거지의 고통 당하는 삶 
  a) 20a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b) 20b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x) 21a 배불리려 하매 
    b') 21b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a') 21c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c.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 거지 
    a) 22a 이에 그 거지가 죽어 들어가고 
      x) 22b 천사들에게 받들려 
    a') 22c 아브라함의 품에 

    c'. 죽어 장사된 부자
    a) 22d 부자도 죽어 
    a') 22e 장사되매

  b'.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
  a) 23a 음부에서
    b) 23b 저가 눈을 들어
  a') 23c 고통 중에 
    b') 23d 멀리 보고

a'.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거지
a) 23e 아브라함과 
  x) 23f 나사로를
a') 23g 그의 품에 있는


장면 2 (16:24-31)
  장면 2 : 대화 1
a. 부자의 요구 1, 2 
24a 불러 가로되 
a) 24b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b) 24c 나사로를 보내어
  b') 24d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a') 24e 왜냐하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나이다

  b. 부자의 요구 2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25a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것을 기억하라 
  a) 25b 너는 너의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b) 25c 나사로는 똑같이 악한 것을 받았으니 
    b') 25d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a') 25e 너는 고통을 당하느니라

  b'. 부자의 요구 1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26a 이뿐 아니라 
  a) 26b 우리와 너희 사이에 
    b) 26c 큰 구렁이 굳게 고정되어있어 
  a') 26d 건너가고자 하는 자들 여기서 너희에게로
    b') 26e 할 수 없고
    b") 26f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a") 26g 거기에서 우리에게 

  장면 2 : 대화 2
a'. 부자의 요구 3 
27a 그러면 가로되 아버지여 당신에게 구하노니 
a) 27b 보내소서 나사로를
  b) 27c 내 아버지의 집에 
    x) 28a 왜냐하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a') 28b 저희로 오지 않게 하소서
  b') 28c 이 고통받는 곳에

  b". 부자의 요구 3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29a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a) 29b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b) 30a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c) 30b 회개하리이다
  a') 31a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b') 31b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c') 31c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1. 장면 1 : 부자와 거지의 삶과 죽음(16:19-23)

  이 부분은 a-b-c-c'-b'-a'의 교차대조법을 만드는 6 단락이다. 내용은 부자와 거지의 삶에 대한 간략한 묘사와 그들의 죽음 이후에 대한 간략한 묘사이다.

  앞에서 소개한 장면 1의 구조를 참조하면 부자에 대한 단락이 3개, 거지에 대한 단락이 3개로 같다. 그러나 부자에 대한 단락 중 2개가 부정적인 내용이고 1개가 긍정적인 내용이다.

  이와 반대로 거지에 대한 설명은 2개가 긍정적이고 1개가 부정적인 내용으로 대조되는 짝들의 상관관계는 애매하지 않고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a//a' 레이아웃은 부자가 호화로이 연락하는 모습(a)과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아브라함의 자손의 지복을 누리는 거지의 사후 모습(a')이 반의적으로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b//b' 레이아웃은 거지로 고통을 당하는 나사로의 비참한 모습(b)이 사후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부자의 모습(b')으로 반의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a-b와 a'-b'를 비교해 보면 이생에서의 부자와 거지의 모습이 내세에서 역전된 상황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는 음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자가 되었고, 부자의 집 밖에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도 먹지 못했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누린다.

  c//c 레이아웃은 무엇 때문에 부자와 거지 사이에 놀라운 역전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결정적인 사건을 알려준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역전된 상황이다. 거지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 것이고(c), 부자는 죽어 하데스(음부)에 간 것이다(c').

  1) a 단락은 비유의 주인공인 부자가 어떤 사람인지 교차대조법으로 설명해준다. 

  a) 19a 한 부자가 있어 
    x) 19b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a') 19c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그는 부자였고(a), 또 그는 "날마나 호화롭게 즐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a').

   "연락하다"라는 번역은 잔치를 벌여 즐기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원문 성경의 표현은 잔치라는 말은 없는 "즐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유프라이노"(εὐφραίνω)로 부자가 잔치를 즐긴 것인지, 아니면 권세를 즐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부유하고 호화로움의 즐거움을 즐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교차대조법의 중앙으로 문학적 구조가 강조하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것이다(x).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예수님 당시 부유층들이 입었던 옷이다. 
  학자들은 이중 특별히 부자가 "자색 옷"(πορφύραν)을 입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헬라 문화권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색"이 최고 권력층이 독점적으로 사용한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자색은 아름다운 색깔이었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염색 과정이 어렵고 복잡했으며, 염색 기술이 독점되었기 때문에 아무나 만들 수 없었다 한다.

   게다가 자색의 염료가 되는 뿔고동이 아주 귀해서 고가였고, 양질의 1파운드의 자색 염료 가격은 무려 1,000데나리온(오늘날 화폐 가치로 대략 1억원 정도)이라는 고가였기 때문에 자색 겉옷은 왕 외에는 아무나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일반인들의 "자색"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고, 유대 왕가에서는 헤롯 가문의 사람들만이 자색 옷을 입었다 한다.

  그렇다면 비유의 부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권력층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인물로 권력과 금력이 모두 갖추어진 인물로 설정되었다 이해된다. 


  
  2) 두 번째 단락인 b 단락에는 조연으로 볼 수 있는 거지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비유는 나사로를 "가난한 자"(프토코스, πτωχὸς)라 표현했다.  그래서 그가 거지였는지 가난으로 길거리로 내몰린 자인지 의견이 갈린다.

  그는 부자와 다르게 이름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도우셨다"(God has helped)는 의미의 나사로이다.

  이로서 비유는 나사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를 주지않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전제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완전 빈털털이 였던 것이다.

  문학적 구조는 나사로에 대해 두 가지를 강조하는 모양이다. 먼저는 a와 a'에 공통적으로 나와서 대조되는 짝이 되는 "헌데"(종기) 환자라는 사실이다.

   부자 집의 대문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전염병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종기를 가지게 된 사람으로 보인다.

   a'의 설명을 보면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았다 했다. 이는 그의 종기가 겉으로 드러났거나 그의 종기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나사로의 외모의 일부는 종기로 흉측한 모습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어쨋든 그는 종기 환자로 부자 집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연명하게된 노숙자였다(x).

  x를 수식하는 b//b'는 부자에게서 연명하는 나사로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a) 20a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b) 20b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x) 21a 배불리려 하매 
    b') 21b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a') 21c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그는 부자의 집 대문에 누워서(b)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 했다 한다(b').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은 막 7:27을 보면 "개들"(τοῖς κυναρίοις)의 일로 나사로가 빌어먹는 상황이 개와 비교될 정도로 대단히 비루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에 누워"있었다. 이 표현은 그가 정상적으로 거동이 어려운 환자이고, 그러기 때문에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도 찾아먹지 못하는 처지임을 암시해준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개들보다 못한 처지로 보인다. 개들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을 먹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갈망하는 사람이었다(x).

   16:21의 "배불리려 하매"는 애매한 번역이다. 이 부분의 직역은 "배부르기를 갈망하는"(ἐπιθυμῶν χορτασθῆναι)이다. 이 구절에서 "에피쓔메오"(ἐπιθυμέω)는 바라다, 동경하다, 간절히 열망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사로가 배가 너무나 고파 배부르게 되기를 갈망했다는 말이다.

  그가 정상적으로 거동이
어려운 환자였다 가정하면 나사로의 갈망은 결국은 부자가 그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셈이 된다.   

  또한 a'를 보면, 그를 반기는 존재는 개들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개들과 경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들이 와서"라는 표현은 나사로가 죽은 후 "천사들에게 받들려"라는 표현(16:22)과 극적인 대조로 상응한다고 보면 경쟁관계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 하다. 

  개들은 나사로를 반기는 행위로 그를 핥았다고 한다. 하지만 개들은 나사로의 종기를 핥았고, 이것은 나사로의 모습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서 나사로는 대문에 누워 부자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개들은 부자의 집에 출입한 상황 설명으로 이 비유에서 대문이 상징하는 "경계선(boundary marker) 모티브"에 주목한다.

  부자는 대문을 경계선으로 삼고 경계선 밖에 있는 나사로를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can not) 만들고 자기 자신도 접근하지 않아(did not) 개만도 못한 삶을 살도록 방치했다.

  이러한 모티브로 비유를 전개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경계선을 만들고 이스라엘을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든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적인 의도를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부자의 대문이라는 경계선 모티브는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 역전되어 이어져 나타난다. 부자는 음부에서 마치 대문 앞의 나사로처럼 물 한 방울로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하고싶다는 고통의 갈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앉긴 나사로에게 가지 못하고(can not) 나사로도 가지 못해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는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만드신 "큰 구렁텅이"(χάσμα μέγα)라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16:26).

  이렇게 경계선 모티브는 부자와 나사로의 생전과 사후에 사용되고 비유 말미에 부자의 형제들에 대한 설명에서또 한번 더 사용되어 비유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로 작동한다 설명한다.



  3) 장면 1의 중심부에 가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대역전이 일어나는 순간을 스케치해준다.
  죽음을 통해서 이들이 존재하는 비유의 배경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비유의 설명은 간단하지만 극적이다.

  먼저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 극적이다. 개보다 못했던 거지는 "천사에게 인도되어" "아브라함의 가슴 안으로"(εἰς τὸν κόλπον Ἀβραάμ) 갔지만 부자는 그냥 "매장되었다"(싸푸토, θάπτω).

  이것이 장면 1의 교차대조법의 중심 부분인 c//c'이다. 

    c.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 거지 
    a) 22a 이에 그 거지가 죽어 들어가고 
      x) 22b 천사들에게 받들려 
    a') 22c 아브라함의 품에 

    c'. 죽어 장사된 부자
    a) 22d 부자도 죽어 
    a') 22e 장사되매

  c 단락과 c' 단락을 비교해 보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는 부자에 대한 설명에는 없는 x, 즉 죽은 나사로에게 찾아온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16:21절에서 거지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그에게 찾아온 인물이 개로 표현된 것을 생각나게 하여 나사로의 처지가 완전히 새로와 진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죽은 부자에게는 찾아온 존재가 없다. 그래서 죽은 자를 찾아온 인물에 대한 언급 단락인 x가 생략되어 교차대조법이 깨지는 것으로 더 눈에 띈다. 

  이 효과는 전개되는 내용을 통해 강화된다. 병들어 대문 앞에 쓰러져 있던 거지의 시체는 장례는 아예 엄두도 못네고 쓰레기처럼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이다. 이와 반면에 최상위 권력자요 부자의 죽음에는 엄청나게 성대한 장례식이 치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부자는 죽어 그냥 매장되었다 표현하셨다. 부자가 매장된 것은 표현 자체로 보면 긍정적인 표현도 부정적인 표현도 아닌 중립적이다. 하지만 나사로에게 사용된 "천사에게 인도되어" "아브라함의 가슴 안으로"라는 표현과 대조해 보면 부자의 죽음은 대단히 초라하고 비루한 것이 된다.

  하지만 부자의 죽음의 비참함은 그 이상이다. 부자는 죽어 하데스(음부, ᾅδης)에서 고통을 당한다(16:23). 부자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그의 혀를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물 한 방울을 고민할 정도로 심한 불 속의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16:24).



  4)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후 상태에 대한 해석은 끊임없는 신학적 논쟁의 화두이다.
   음부(하데스)는 유대인들에게는 스올로 알려진 곳으로 "하데스"는 히브리어 "스올"을 칠십인경에서 번역한 단어이다.

  사 14:13을 보면, 음부는 하늘과 수직적으로 대조되는 공간적 장소이다. 이곳은 죽은 자들이 거하는 땅 속 깊은 곳,  땅 아래쪽 세계(지하 세계)로 모든 죽은 자들이 거하는 장소이다.

  특히 음부는 악인의 운명과 관계된 지하 세계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래서 음부는 악인에 대한 형벌의 장소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데스가 어떤 지하 세계, 특히 죽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거하는 세계인 하데스에서 의인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 논쟁거리이다. 이 논쟁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품"과 연결된다.

  이는 비유의 표현을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거지가 함께 있는 아브라함의 품은 부자가 있는 음부(하데스)와 공간적으로 연결된 한 공간이지만 구별되는 곳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두 공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먼저 인식이 가능하여 볼 수 있고(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서로 교통이 가능하다(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더 나아가 비록 큰 구렁이 굳게 고정되어있어 왕래가 불가능하지만 나사로와 부자가 있는 곳은 천국과 지옥처럼 완전히 구분되어 서로 격리된 장소가 아니라 "여기"(ἔνθεν)와 "거기"(ἐκεῖθεν)로 연관성이 있는 공간으로 나온다. 

  그래서 이제는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해석을 따르는 학자들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일부 학자들은 나사로와 부자가 거하는 아브라함의 품과 부자가 있는 하데스(스올)에 대해 새로운 견해들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품"은 스올(하데스)에서 의로운 자들이 죽은 뒤 부활의 때까지 머무는 장소이며, 부자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카레트, כָּרַת, cut off) 자"의 한 경우로 아브라함의 품과 구별되는 악인들이 고통받는 하데스에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부자와 나사로 모두 음부(하데스)에 있지만, 나사로는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조상(대표적으로 아브라함)들에게 간 경우이고, 부자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져서 음부의 고통스러운 영역에 머물게 된 경우라 본다.

  그러면서 부자의 집 대문에 있는 "경계선 모티브"를 나사로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과 부자가 있는 하데스 사이에 존재하는 구렁텅이(Chasm)와 연결하여 부자와 나사로의 경계선 상태가 180도 완전히 전복되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이 비유를 기록한 누가의 서사적 의도였다 설명한다.

  이 해석은 교부 시대 히폴리투스(약 170-236)에게서도 발견되는 유례 깊은 해석이기에 흥미롭고 참고할만한 가치가 많은 주장으로 보인다.
 


  1-2. 장면 2 : 대화 1

  24절에 와서 비유의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대화 1과 대화 2는 음부에서 고통으로 괴로워 하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로 전혀 다른 내용이 전개된다. 

  장면 2의 구조적 특징은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는 두 차례 부자의 요구인 "보내다"(πέμπω)로 이끌어지는 동의적 평행법이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달라"(πέμπω) 요청하고 아브라함은 이 요청을 거부하는 대답을 동의적 평행법으로 두 차례 했다. 동의적 평행법의 각 단락의 하부는 모두 교차대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다. 


  1) 이 단락에는 신학적으로 가장 논쟁이 뜨거운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은 부자가 사후에 하데스에 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간 이유에 대한 해석이다.

  나사로가 간 아브라함의 품이나 부자가 간 하데스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 이견이 많아 일치되는 해석이 없더라도 나사로는 종말론적 축복의 장소에 부자는 종말론적 저주의 장소에 갔다는 해석에는 모두가 일치한다.

  그러면 저들의 영원한 종말론적 운명이 무엇을 근거로 결정되었느냐는 질문은 이 비유를 볼 때마다 항상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유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정보는 오직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 우리에게 해석적 문제가 된다.

  그것은 16:25 말씀으로 부자는 이생에서 부자였다는 이유로 다음 생애에 고통을 받고, 거지 나사로는 이생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다음 생애에 축복을 받았다 사실이다.

  이 결론은 모든 해석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어 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이 생애에서 누리던 것에 의해서 다음 생애의 복과 화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설명할만한 신학적인 아이디어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은 공히 어떤 사람의 종말론적 결판은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달렸다 가르친다. 이것 말고 사람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짓는 다른 조건은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구원론의 기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전혀 다른 구원론을 말씀하시니 그렇게 보이는 눈이, 그렇게 이해되는 머리가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밖에 있는 비유의 결론은 오히려 비유가 가지고 있는 교훈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생에서 부자였다는 이유로 다음 생애에 고통을 받고, 이생에서 가난했기 때문에 다음 생애에 축복을 받는다는 아브라함의 경천동지할 설명은 비유 본문에 조직되어 있는 문학적 구조를 보면 25절 한 절만이 아니라 비유 전체의 핵심적인 메세지라는 사실을 더 확고하게 만든다.

   25절은 부자가 고통스러운 하데스에 간 이유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한 단락이다. 이 단락을 분석해서 얻어낸 문학적 구조로 장면 1을 보면 동일한 문학적 구조를 뽑아낼 수 있다.

  장면 1은 나사로와 부자의 이생에서의 삶과 죽음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 부분이 두 인물의 종말론적 운명이 결정된 설명과 구조가 같다면, 장면 1의 설명들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이들의 영원한 운명을 미리 예견해서 구조적으로 선별된 설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16:25절과 장면 1인 16:19-23을 따로 떼어서 16:25절을 중심으로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이 도출될 수 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단락의 구조와 구조를 조성하는 하부 단락들의 주제들이 같다. 비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삶과 죽음(16:19-23)을 부자와 나사로의 종말론적 판결 이유를 언급하는 16:25b-25e의 관점에서 진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16:19-23은 6:25b-25e의 결론을 두 인물의 삶과 죽음으로 묘사한 확장판이고, 6:25b-25e은 16:19-23의 종말론적 결론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이 두 인물의 종말론적 운명을 언급하는 성경은 비유의 2/3로 비유 전반이 아브라함이 말한 구원론을 지지한다.

  그리고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종말론적 운명이 결정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성경을 이곳 외에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많은 함의들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들라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의 불평등은 하나님에 도우심에 의해서(나사로의 이름의 의미) 다음 세상에서 역 불평등으로 대체되어 반드시 불평등이 보상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 메세지요 구원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모든 시도들을 통제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꼽고 싶다. 필자는 이것이 이 비유를 문학적 구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유 해석의 가이드라인이라 생각한다. 



  2)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인정하기 어려운 황당한 구원론을 핵심 메세지로 채웠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해결 방안으로 필자는 앞에서 사용한 비유를 비유가 속해 있는 내러티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말하고 싶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시작하는 내러티브 안의 비유 시리즈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다.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닫힌 세계이다. 그래서 내러티브의 부분을 구성하는 단락들은 단락들을 내포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맥락 가운데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충분한 해석 방법이다.

  만약에 내러티브의 맥락을 무시하고 비유만을 따로 떼어서 비유를 이해하면 비유가 나타내는 메시지가 불충분하고 이상하고 편벽되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비유는 내러티브 안에서 다른 단락들이 나타내는 메시지와 연동되어 전체적인 메시지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더 나아가서는 거부감이 일어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전체 내러티브 안에서 그 비유에게 할당된 메세지임을 알게된다.

   여기에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만의 독특한 메세지가 이해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는 눅 15:1절에서 시작되는 비유 시리즈(눅 15:1-16:31)의 마지막 비유이다. 이는 이 비유는 독립적으로 메시지를 나타내는 비유가 아니라 비유 시리즈를 관통하는 맥락 안에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비유 시리즈가 선포된 동기는 첫 번째 비유가 시작되기 바로 전인 15:1-3절에 제시되고 있고, 세 번의 도입 부분들은 비유의 수신자들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위 도표는 누가복음 15-16장의 내러티브의 전개 상황을 도입과 비유로 요약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비유 시리즈를 관통하는 맥락은 물론 수신자의 상황이 한눈에 보인다. 

  도입1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 시리즈가 시작된 상황을 알려준다. 그것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게 가까이 나아온 것이다(15:1).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천국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셨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눈에는 죄인들을 영접하고 모세의 율법과 같이 지켜오던 바리새인들의 정결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망과 배척 거리가 되었다(15:2).

  이에 주님께서는 비유 1, 2, 3, 4를 말씀하셨다. 비유 1, 2, 3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주제이다.

  그리고 비유 4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불의의 재물로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라는 말씀이다.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비유 4를 듣고서 비웃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였기 때문이다(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유 1, 2, 3에 나타난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물론 재물로 천국을 준비하라는 말씀을 비웃음 거리로 무시하고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라고 경고했다(16:15).


  이러한 문맥을 통해서 누가는 바리새인들을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먼저 그들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다가가지 않고 죄인들을 지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재물을 천국을 준비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정체를 폭로한 후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 비유를 선포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다.

  우리는 누가복음 15-16장을 관통하는 이와 같은 문맥의 흐름을 보고 무엇 때문에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경계선 모티브"와 "재물로 인해 영원한 안식과 고통이 결판나는 심판의 말씀"이 핵심 신학적 논지로 내용으로 담겨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는 참란한 자들이지만 스스로를 옳다 여기고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고발하신 것이다.

   먼저는 부자가 경계선을 만들어 나사로를 방치하여 비참하게 죽게 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이 천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만들어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부자가 마치 왕과 같은 권력과 부유함에 취해 종말을 준비하지 않고 살았던 것과 같이 지금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해서 재물로 천국을 예비하는 구원의 방도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이런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16장을 관통하는 두 가지 신학적 모티브(죄인을 영접함과 거부함, 재물로 천국을 준비함과 돈을 사랑해서 천국을 준비하기를 거부함)를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주도하는 두 개의 모티브로 삼고, 바리새인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자를 예수님께 나아온 죄인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사로를 설정하여 비유를 만들었다.

  그리고 비유의 내용을 바리새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과 부유함의 말로를 극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비되는 두 인물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드라마틱하게 설정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불평등한 권세와 부유함의 즐거움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음 세상에서 역 불평등으로 대체되어 반드시 벌로 보상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구제나 선행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비유의 메시지에서 두세 걸음 멀어진 방법이다. 이와 비슷하게 비유를 사람의 사후 상태에서 해석하려 하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도 원의미에서 벗어난 해석이다.

   그래서 이 방법들은 이제까지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없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비유를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이 비유를 볼 때 제기되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본문 중심의 대답의 가이드라인을 잡을 수 있게 된다.  



  3) 부자 요구 첫 번째는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과 두 번째는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어 음부에 오지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두 요청은 19절에 나오는 부자의 생전 삶이었던 "날마나 호화롭게 즐겼다"는 표현을 생각나게 해 준다. 부자의 요청은 호화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있는 두 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요청, 곧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요청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음부에서 부자의 삶은 생전의 삶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비롯된 부자의 자기를 즐겁게 하려는 삶의 대 역전적 파국은 그의 두 요청을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

  아브라함은 먼저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들어 그를 괴롭히는 고통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 선언했다. 아브라함의 선언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 생전에 좋은 것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고통을 당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나사로를 중심으로 하는 교차대조법으로 설명되었다.

  25a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것을 기억하라 
  a) 25b 너는 너의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b) 25c 나사로는 똑같이 악한 것을 받았으니 
    b') 25d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a') 25e 너는 고통을 당하느니라

  누가복음 15-16장 내러티브의 문맥에서 보면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비유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부자가 누렸던 좋은 것은 16:15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바리새인들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여기고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므로 누렸던 권세와 부유함을 빗댄 것이다.

  비유들이 선포되는 정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청중들에겐 이를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유는 부자의 특징을 설명해주는 두 개의 모티브에만 집중해서 부자를 묘사하고, 그에게 내려진 종말론적 심판인 생전에 좋은 것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고통을 당한다는 법칙만을 설명했다 판단된다.

  하지만 하나의 내러티브를 닫힌 세계로 삼고 성경을 해석하는 수사학적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자와 나사로에게 내려진 종말론적 심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와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게 된다.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언급이 없는데 어떻게 천국에 가지 못하고 또 어떻게 갈 수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묻혀 비유의 메세지를 보지 못하게 된다. 



  4) 첫 번째 부자의 요청을 그가 고통을 받는 이유로 설명하여 거부한 아브라함은 두번째로 그에게 나사로를 보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이 부분은 교차대조법이 두 번 연속으로 이어져 겹친 모양으로 동일한 내용을 가진 a, a', a"와 b, b', b"가 각각 세 번 반복되어 크게 강조되었다.

  26a 이뿐 아니라 
  a) 26b 우리와 너희 사이에 
    b) 26c 큰 구렁이 굳게 고정되어있어 
  a') 26d 건너가고자 하는 자들 여기서 너희에게로
    b') 26e 할 수 없고
    b") 26f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a") 26g 거기에서 우리에게 

  a 레이아웃은 "우리"와 "너희", 또는 "여기"와 "저기"라는 표현을 반복한다. 이 표현은 부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 아브라함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부자는 이 표현대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인 저기에서 자신이 있는 여기로 왕래가 가능하다 보았다. 하지만 이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이는 b 레이아웃 때문이다.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는 큰 구렁이 굳게 고정되어있어(b), 여기에서 건너가고자 할 수 없고(b'), 저기에서 여기로 건너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b").
   이로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있는 하데스와 나사로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의 공간적 불연속성을 아주 많이 강조하여 설명해주었다. 

  오늘날 우리들과는 달리 하데스에 있는 죽은 자들의 상태, 특히 악인과 의인으로 하데스에서 존재하는 자들의 상태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비유의 1차 청자들에게 a 레이아웃과 b 레이아웃의 두 가지 강조사항은 한 가지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마음에 각인되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사로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자가 생전에 만들어 놓은 대문이라는 경계선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경계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1-3. 장면 2 : 대화 2

  부자의 요청을 보면 부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하데스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지 않은 첫 번째 요청을 했고 하나님의 심판 원리에 따라 거부를 당했다. 
  그러나 부자는 두 번째 요청을 했다. 부자의 두 번째 요청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회개하도록 하여 자신이 있는 고통의 장소에 오지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1) 부자가 두 번째 요청을 하는 단락은 반의적 평행법과 교차대조법이 혼합된 복합적 평행법이다. 
  그래서 a-b와 a'-b'가 서로 대조되고, a-b와 a'-b'는 같이 중앙인 x를 보조하는 기능을 한다.

 a의 "보내다"는 a'의 "오다"와 반의적으로 대조되고, b의 "아버지의 집"은 b'의 "고통받는 곳"과 반의적으로 대조된다. 

  x에는 우리말 번역에는 없는 "왜냐하면 ~ 때문에"라는 의미를 가진 가르(γὰρ)가 있다. a-b와 a'-b'를 결과와 원인으로 문맥을 이어갔다.
  
  27a 그러면 가로되 아버지여 당신에게 구하노니 
  a) 27b 보내소서 나사로를 
    b) 27c 내 아버지의 집에 
      x) 28a 왜냐하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a') 28b 저희로 오지 않게 하소서
    b') 28c 이 고통받는 곳에

  경계선 모티브의 관점에서 보면 부자의 다섯 형제는 부자가 만든 경계선 안쪽에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부자의 즐거움과 부자의 식탁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허용된 자들이었다.

  다소 비약적인 생각이지만 이들도 부자가 만들어 놓은 대문이라는 경계선을 옹호함으로 나사로를 비참하게 죽도록 만든 부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부자는 그들을 위해 죽은 나사로를 보내는 하데스의 경계선의 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이로 보면 부자의 두 차례의 요청은 모두 나사로를 보내는 하데스의 개방을 요구하는 요청으로 본질이 같다. 그러면 비유를 듣는 청자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거지에게 경계선을 열어주지 않았던 모습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2) 부자가 이런 요청을 한 이유는 단순하다.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16:30). 
  하데스가 경계선을 개방하여 죽은 자를 보여주면 그의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자는 이 생각으로 아브라함과 일종의 공방을 벌였다. 비유는 이 상황을 동의적 평행법으로 묘사했다. 

  29a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a) 29b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b) 30a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c) 30b 회개하리이다
  a') 31a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b') 31b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c') 31c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아브라함을 향한 부자의 공방은 그의 생각이 확고한 것임을 보여준다. 부자가 생전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자는 스올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지금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그의 말과 같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부자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부자의 두 번째 요청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과 다른 것이므로 거부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이다(16:31).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 안에 있는 불신앙의 경계선을 허무는 회개자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는 법칙이다(16:30). 

아브라함은 이 법칙을 a와 a'로 두 번 반복하여 강조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증언을 한다 해도 그의 형제들은 회개할 만큼(c) 권함을 받지(납득되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c'). 
결국 아브라함의 지적은 부자의 형제들이 부자와 같이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스스로 "납득시키는 것"(페이쏘, πειθώ) 뿐이다.

 이것은 부자의 형제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부자 자신의 문제였다. 마음에 있는 불신앙의 경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무는 것이다. 

  3) 예전 일부 학자들은 부자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아브라함의 가르침(16:29-31)과 부자가 하데스에 가게된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침(16:25) 사이의 차이 때문에 대화 1과 대화 2는 서로 다른 내용의 결합이라 주장했다.

비유는 부자가 하데스에 가게 된 이유를 생전에 좋은 것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고통을 당한다는 법칙으로 설명했는데, 부자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설명하여 두 설명을 두 개의 다른 구원론이 피력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문제를 부자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이 비유의 메인 메시지이고 부자에 대한 가르침은 부차적인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부자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 이상하거나 잘못되었지만 부자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올바르다 판단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비유가 속해있는 누가복음 15-16장의 문맥을 무시하고 비유만을 보면 이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부자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 올바른 것이고 성경 본문이 의도한 메시지라는 점, 더 나아가서는 두 가지 구원론이 서로 같은 것임을 증명하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비유가 나오게된 배경 말씀으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지적한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라 지적했다(16:15). 이 마음에 이스라엘 최상의 하이라키에 속한 권력과 재력을 가졌으니 이들의 스스로를 옳다 여기는 생각은 아무도 허물 수 없는 견고한 진, 자기 자신을 가두어 옳아버리는 심판의 경계선을 만들어 버린 것으로, 이것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배경이 되었다. 

  계속해서 16:15을 보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다소 엉뚱하게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말씀을 연이은 것을 볼 수 있다(16:16).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이어져 나온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러한 논지의 전개 방법에는 누가의 전략이 담겨져 있다. 아주 간단하게 요점만 정리하면 16:16의 "율법과 선지자"는 아브라함이 부자의 형제들의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언급한 "모세와 선지자들"과 동의어로 누가는 두 문구를 연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누가의 논지 전개 방법의 핵심 전략이다.

  누가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즉 모세와 선지자)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예수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대치 완성되었다 설명한 것이다(16:16).

  그러므로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언급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이라는 조건문(16:31)은 단순히 구약 성경 말씀을 잘 믿고 순종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천국으로 침입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선포된 누가복음 15-16장의 배경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잘못은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는 것을 방해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예수로 인해 확정된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행위이고, 비유의 주인공인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상징하여 동일한 잘못을 거지 나사로에게 저질러 심판을 받았다.

  16:28을 보면 부자는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부자는 형제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과 동일 부류의 사람으로 판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부자와 그의 형제들은 동일하게 바리새인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부자의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순종을 요구한 예수로 인해 최종적으로 완성된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가장 누가복음적인 해석이 된다.

  부자의 형제들이 고통의 하데스에 오지 않는 방법은 하나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로 침입하는 자들이 되는 것 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15-16장의 문맥과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연계해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자를 심판하신 원리와 부자의 형제들을 심판하는 원리는 같다. 두 개의 구원론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4)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는 눈에 띄는 결론이 없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위의 관찰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부자와 나사로에게 실행된 심판의 원리가 동일하게 부자의 형제들에게 실행될 심판의 원리로 반복 강조됨으로 임팩트있는 결론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2. 요약과 마무리

  개인적으로 이 비유는 약 30년전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설교한 이후 성인들에게 한 번도 설교하지 않은 성경임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이 비유를 읽으면 읽을수록 메시지가 분명하게 잡히지 않아 기피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이 비유로 나의 잔학무식한 성경 해석 능력을 또 보았다. 다행히 전문가들의 조언으로 비유를 이해하는 하나의 돌파구를 찾았다 생각한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전통적인 해석과 같이 구제와 나눔의 관점에서, 또는 사후 세계와 사람의 사후 상태에 대한 관점에서, 이와는 달리 경제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문학적 구조와 수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비유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드러내는데에 부족한 방법이라 판단된다.

  비유 본문은 아주 절제된 정보들이 세밀하게 짜여진 문학적 구조의 틀 안에서 설명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에 근거한 해석을 지향해야 한다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이미 전문적인 성서신학자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문학적 구조와 내러티브 중심의 분석법을 사용해서 비유를 관찰했다.

  그리고 비유의 중심 메시지는 물론, 비유를 해석할 때 제기되는 질문들, 의문점들은 비유가 속한 누가복음 15-16장 안에서 찾아보았다.

  이 비유는 죄인들을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를 자신들이 옳다 여기고 미워하고 방해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신 가르침으로 죄인들의 구원을 가로막으면서도 이스라엘 사회 최상의 하이라키에 앉아 권력과 부력을 누리는 바리새인들의 종말론적 대역전을 선언하신 비유이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이면서 예언적인 심판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주인공 거지 나사로를 그의 집 대문 앞에서 개보다 못한 삶을 살다 죽도록 방치한 최상의 권력층이요 부자로 설정한 것이다. 결국 그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제거된 악인으로 판명되어 하데스의 큰 구렁에 막혀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대역전적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와 반면에 부자의 무관심으로 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복락을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은 스토리의 전개는 우리 눈에는 다른 것 같이 보이는 두 개의 구원론을 말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두 개의 구원론은 같은 것으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꼬집는 심판 주 하나님의 판단인 것이다.

  눅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면 오늘날에는 누가 바리새인일까 생각하게 된다. 누가복음 15-16장에 나온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따라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경계선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도 자신들은 올바른 일을 한다 생각하는 자들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삶을 살면서도 높은 권위와 부유를 누리는 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향해 이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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