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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할 수 있는 성경 해석 가이드

우리글과 성경의 논리 방식 차이점 알기

by 예다준 2023. 12. 8.

우리글과 성경의 논리 방식 차이점 알기

 
 

  TV나 영화를 아무 이상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책을 읽거나 글을 보는 데에 불편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이전보다 더 쉽고 재미있고 깊게 이해하고 해석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성경 해석 방법을 소개한다. 이제 네 번째 가이드를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나 글을 볼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내용’에 신경쓴다. 내용이 A를 말하면 그 이야기(글)가 말하는 것은 당연히 A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최대 효과와 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 마음은 글을 쓸 때도 발휘되어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로 내용만 전달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전달된 내용으로 최대의 감동이 일어나도록 다양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한다.
 
  중학교 땐가 김소월 님의 시“진달래 꽃”을 보고 이를 처음 깨달았다. 그때 시인이 사용한 말투 “말없이 고히 보내 드리우리다”,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생소한 말투지만 부드럽고 애절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시를 되새겼고, 그러다 시를 암기했다. 처음 본  “~우리다”라는 표현에서 한국인의 애절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 보았지만 금방 뜻을 알아챘고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잘 알아도 진달래 꽃과 같이 히브리인의 정서와 문학적 표현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김소월 시인이 "~우리다"같은 그림같은 문학적 표현을 만들어 한국인의 시적 감정을 가장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전달하듯이 성경 저자들도 히브리인들의 정서와 감정, 그 정서와 감정을 담은 논리와 문학적인 도구들을 성경에 아주 많이 사용했다.
 
  문제는 지금 우리들은 히브리인들의 정서와 감정은 물론 그들의 논리와 그들이 사용한 문학적 표현들 대부분을 모르기 때문에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한국말을 배워 일상 대화를 하게 된 외국인에게 진달래 꽃 시를 보여주며 “~우리다”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 배우지않은 표현이라 모른다 할테고, 의미를 설명을 해주어도 표현이 어렵다 말할 것이다.
  이 표현은 별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절묘하게 드러내도록 시인이 만든 문학적 표현이기에 뜻을 알았다 치더라도 가슴에 애절함으로 와닿는 감동은 금방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외국인이 한국인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인의 정서를 아직 모르니 글을 통해 한국적인 감동을 느끼는 일은 미래적 과제로 미루어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독특한 어법이나 표현 같은 문학적 도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들이 사용될 때 오해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2천 년 이전 히브리인들이 기록한 성경을 실수 없이 해석하는 방법도 같다. 이 작업을 생략하고 오늘 우리들의 논리와 표현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외국인이 우리 시를 보는 것 같은 무감각과 해석의 어려움은 물론 오해하는 일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문학적 도구들을 성경 본문에서 찾아 그것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은 성경 해석의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작업이 된다.
 
  이제 이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들을 차근차근 공부해 보자.
 
 

1. 현대인의 직선적(순차적) 논리와 고대 히브리인의 병렬적 논리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주의사항 1번은 고대 히브리인의 논리와 현대인의 논리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이해로부터 성경 저자 중심 성경 해석 방법들이 연이어 나오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성경 해석 작업이 된다.
 
  논리 방식이 다르다는 말은 생각하는 방법과 생각을 표현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논리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면 당연히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다르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피치못할 오해가 발생한다.

 

  나는 가끔 아재개그 베틀을 유튜브에서 찾아본다. 

 

  "아이스크림이 가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녹음 안돼니까"

  "닭에게 사이즈가 작은 옷을 입히면?" "꼭-끼오"

   "이탈리아의 날씨는?" "습하겠띠"

 

  이것들을 보면서 끼득끼득 웃으면 아이들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나에겐 아재 개그의 논리 방식이 개그 코드로 연결되는데 아이들의 논리 방식으로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대 우리들과 성경 저자들의 논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끼?


  오늘 현대인이 사용하는 사고방식과 말하고 글을 쓰는 방식은 '직선적 논리'이다. 이를 '순차적 논리'라고 달리 부른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A라는 주제를 다 마치고 B를 말하고, B주제가 끝나면 C를 말한다. A를 말하다가 B를 말하고 B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C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 평가되고 그의 말은 뒤죽박죽, 이리 가다 저리 가서 헷갈린다고 평가된다.
 
  현대인이 사용하는 직선적 논리, 순차적 논리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게 보이는 잠점을 가지고 있다. A라는 말을 마치고 B로 이어졌다는 의미는 A와 B 사이에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직선적 논리와 순차적 논리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지만 해학적이거나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 ‘아재 개그’라 좋게 보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말하기나 글짓기로 그렇게 하면 낙제가 된다.
 
  히브리인의 사고방식과 논리 방식은 직선적 논리가 아니라 병렬적 논리이다. 이 논리는 인과관계를 중요시하는 세계관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순환적인 세계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 한국인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조상 때부터 우리는 인과율적인 세계관보다 순환적 세계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서양인보다 강점을 가지고 있어 쉽다.
 
 

2. 병렬적 논리를 표현하는 방법 : 평행법

  순환적 세계관의 특징 중 기억할 것 하나는 인과율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관계가 형성되는 병렬적 논리와 병렬적 표현 방식이 발달했고, 이것들이 성경에 사용된 것이다.
 
  병렬적 논리는 두 개나 두 개 이상의 주제를 병렬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논리 방법이다. 현대인은 한 가지 주제로 진술을 진행한다. 그러다 앞의 주제가 끝나면 다른 주제를 이어가는 직선적인 논리를 사용한다. 그래서 순차적 논리(sequential logic) 중심이다. A주제를 말하다가 중간에 B주제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A주제를 말하다 B주제를 말하고, 다시 A주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C주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런 법칙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막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제들을 대조되는 짝(pair)으로 만들어 논리를 진행했다.
 
  이런 방식이다. a주제를 말하고, b주제를 말하고 c 주제를 말한 후, b주제를 말하고 또 a주제를 말하면서 a와 a'를 짝으로 만들고, b와 b', c와 c'를 짝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논리는 현대인에게는 황당한 반복, 유사 어조의 중복, 산만한 구성과 단락 구분이 안 되는 구조등으로 인식되어 거부감이 생긴다. 주제의 순차가 박살 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문맥이 부자연스럽고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 저자들은 이와 같은 병렬적 논리로 문학적인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물론 논리적 문학적인 그림을 그려준다.
 
  현대인의 직선적 논리를 도식화하면 이런 이미지이다.
 

a → b → c → d → e...

 
  이와 달리 히브리인들의 병렬적인 논리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은 다양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아래 세 가지 이미지는 가장 기본적인 모양으로 이것들을 “평행법”이라고 부른다.
 

성경에 가장 많이 사용된 평행법의 세 가지 기본적인 모양
성경에 가장 많이 사용된 평행법의 세 가지 기본적인 모양

 
 
  평행법은 말 그대로 평행되는 짝을 만드는 문학적 기법이다. 위 그림에서 a와 a’, b와 b’가 평행되는 짝이다. 이 평행되는 짝들의 모양과 기능에 따라 구분되지만 이 모든 평행법은 병렬적 논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아마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말을 할 수 있겠나 의문이 들 것이다. 우리는 병렬적 논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이 기록되었던 고대 근동 사람들은(히브리인은 물론 당시 로마인들도) 모두가 이 논리를 사용해서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병렬적 논리(평행법)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평행법의 가장 쉬운 형태인 ‘인클루지오’(inclusio)를 사용한다. 인클루지오는 비슷한 문장이나 문구를 삽입 문장이나 문구 앞과 뒤에 반복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긴말 필요 없이 예를 보자. 유치환 님의 시 “바위”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시인은 “바위가 되리라”라는 각오를 시의 앞과 뒤에 반복해서 가운데 삽입 부분을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인클루지오인데,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인클루지오는 이것보다 훨씬 더 용도가 다양하여 해석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3. 성경의 논리 방식과 표현 방식에 무지하므로 일어난 비극적 역사

  현대인의 글과 말은 직선적인 논리 중심이기 때문에 말(글)의 구조가 그다지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문학적 표현이 강하지 않은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서는 거의 지배적이라 글의 구조를 따지는 버릇이 우리에겐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병렬적인 논리 구조를 가진 저자들이 기록한 책이라 평행법이 아주 많이 사용되었고, 때론 글의 내용보다 구조가 해석에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의 병렬적 논리와 평행법을 이해하면 성경에 담긴 글의 내용과 구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학대학 구약개론 시간에 열 띄게 논쟁이 되었던 성경 한 부분을 보고 마무리한다. 그것은 창세기 1-2장으로 토론의 주제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1에 천지 창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느닷없이 2:4에 천지 창조에 대한 언급에 또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이 부분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쟁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얼마나 끔찍한 곳으로 급진전되었는지 들으면 일반 성도들은 놀랄 것이다. 성경 저자 중심의 문학적 해석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전 학자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기사를 서로 다른 기록자들의 흔적으로 보고 1:1-2:4 상반절은 '제사장 문서', 2:4 하반절-3:24은 '야위스트 문서'로 해석했다.
 
  이 이론은 창세기 저자는 모세가 아니라 후대의 '제사장이라는 일단의 그룹'과 '야위스트라는 다른 그룹'의 이름 모를 멤버라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고등비평'(역사비평)이라는 명칭으로 당시 성경해석 분야를 강타해서 이를 언급하지 않으면 박사 학위를 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학적인 이론을 뛰어넘어 엄청난 해악을 교회에 주고 말았다. 이 이론을 받아들인 학자들이 신학교의 강단을 차지하고 많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이 해석이 고등한 해석이라 가르쳤다.
 
  그 결과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후대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나 그룹의 기록물로 존재하다가 또 누군가에 의해서 편집되어 논리가 부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반복을 거듭하는 엉성한 형태의 창세기가 되었다 목회자들이 믿게 되었다.
 
  이 해석은 눈덩이가 구르면서 점점 커지듯이 엄청난 악영향을 만들어 냈다. 이 해석으로 창세기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상실해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고대인의 신화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뒤흔들어 마지막에는 서양 교회가 몰락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평가된다.
 
  이런 고등비평의 해악을 알게 된 학자들은 창 1:1과 2:4는 히브리인의 인클루지오라는 사실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 2:4 하반절-3:24의 창조 이야기는 1:1-2:4 상반절의 창조 이야기의 연속으로 포커스가 인간 창조로 집중된 문학적 기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는 이름 모를 어떤 사람이나 그룹이 기록하여 조각조각으로 존재하던 문서를 엉성하게 편집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통찰력과 문학적 소양과 재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기록한 말씀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간단한 성경 해석이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이 교회와 믿음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소도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교회 역사의 그늘이다. 그만큼 어떤 자세로 성경을 해석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상의 교회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성경을 나의 관점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서 보려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준다. 성경 해석은 결국 믿음의 근거로 작용하고, 이는 나의 믿음과 교회의 존망과 직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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