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창세기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창 4:8-26)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by 예다준 2023. 11. 26.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창 4:8-26)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앞의 글에서 가인의 제사 이야기는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의 범죄 이야기의 가인 버전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와 방법을 설명했다.

  오늘은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찾아 해석하는 방법을 살펴본다.
 
  가인의 에녹성 건설과 그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인류 문화의 발전하는 모습과 아담 이후 인간의 죄악이 점점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핵심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부족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창세기 저자는 가인을 아담과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라멕을 가인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궁극적으로는 아담의 에덴을 지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거부하고 제2의 에덴을 세웠고 가인의 후손 중 가장 걸출한 인물은 라멕도 그런 차원에서 기술되었다. 창세기 저자는 이에 해당하는 언급을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가인이 만든 풍요와 안녕이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려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이를 증명하고 해석의 포인트와 과정을 나누어본다.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창 4:8-26)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 해석의 포인트

  스토리 텔러인 성경 저자는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독자들의 눈에 인상 깊게 보이는 방법들을 동원해서 글을 썼다.

  창세기 저자가 사용한 방법 중 어떤 것들은 창세기의 저자와 우리 사이에 역사적 문화적 갭이 워낙 커서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것은 물론 상상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이 부분은 전문적인 성경 해석을 연구한 분들의 몫이다).

  하지만 스토리 텔러라는 입장은 같기 때문에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많다. 여기에서는 그런 방법들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 본다. 무엇보다도 스토리 텔러로서 성경 저자를 나와 동일시하여 성경 본문을 보면 성경 해석에 놀라운 진전이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가장 먼저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에서 창세기 저자가 스토리 속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을 소개한다.
 

  1) 연관된 단어나 개념, 이미지를 반복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창세기 저자는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서로 연관이 있는 단어, 개념, 이미지 등을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반복에는 설명이 추가된다. 설명의 추가에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독자들이 설명을 따라 성경 저자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을 추가되는 설명에 따라 해석하기를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반복된 요소들과 그 요소들에 추가되는 설명들을 마치 형사가 사건 현장의 조각 같은 단서들을 모아서 연관성을 알아내고 사건의 실체를 추리하듯이 짜 맞추면 성경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서서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은 오늘 본문에서는 에녹성이 자리 잡은 “에덴 동편”이라는 표현이나 “가인”과 가인의 후손 “두발가인” 등이 대표적인 예다.
 

  2) 연관된 요소들로 만들어진 문학적 프레임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성경 저자가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를 말하면서 사용한 두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방법을 한층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이다. 스토리 속에 반복 사용되는 요소들을 묶어서 문학적 프레임(구조틀)을 만들어 활용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문학적 프레임들을 대조 비교해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의미를 볼 수 있다.
 
  위 두 가지 방법은 창세기는 물론 성경 전체에서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다. 이것을 발견할 수 있으면 성경 해석에 급진적인 향상을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이 방법은 중요하다.
 
 

2. 가인의 에녹성 건설에 대해 창세기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아담의 범죄와 동일하게 선과 악을 다스리려 했던 가인은 결국 선을 행할 수도 악을 다스릴 수도 없는 자라는 것이 확인되고, 후에 악에 사로잡혀 동생을 살해하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일로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하여 에녹성을 세우고 그와 그의 자손들이 번성을 누리는 고대 도시 사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줄거리를 기초로 성경 저자는 위에 언급된 방법들을 사용해서 교훈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1) 에덴 동편 놋 땅에 세운 에녹성

  가장 먼저 4:16을 본다. 여기에 창세기 저자는 가인이 “에덴 동편 놋 땅”에 에녹성을 건설했다 말했다.

  창세기를 1장부터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성경 저자가 에녹성의 위치를 “에덴 동편”이라 설명한 부분에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2-3장 아담 이야기에서 에덴동산은 아주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현의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 표현은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의 정체를 규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가인이 정착한 “에덴 동편”은 아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인 3:24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추론하는 것이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에덴동산 동편’과 가인이 정착한 ‘에덴 동편 놋 땅’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인 관계는 알 수 없으니 두 곳을 현대의 지리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본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성경 저자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과 가인이 에놋성을 건설한 곳을 에덴 동편으로 연관되도록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생명나무로 다가가 영생할 것을 염려해서(창 3:22) 생명나무로 가는 길목에 천사들이 보초 서게 했다(창 3:24).

  이 설명은 우리에게 두 가지 추론을 하도록 해준다.
  먼저는 타락한 인간의 에덴에 대한 침투 내지 도전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이 생명나무에 다가가 영생을 얻으려는 시도에 대해 하나님은 염려하셨다. 그후에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에덴으로의 침투와 가인의 에녹성과의 모종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두번째는 에덴 동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이 복락원 에덴의 끝부분이고 아담과 그의 자손들은 그 밖으로 추방되어 살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에덴 동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에덴동산과 타락한 인류가 사는 곳이 맞닿은 경계로 볼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은 어디에 정착했을까?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은 에덴동산과 가장 가까운 곳, 게다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이 아닐까? 이것은 하나님의 염려, 즉 아담이 생명나무로 접근해서 영생을 취하려 하지 않을까라는 염려를 보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아담이 생명나무를 취하게 되면 범죄로 인해 받게 된 하나님의 형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가인은 아담을 떠나 어디에 정착했을까? 그도 아담과 같이 에덴동산과 가장 가까운 곳, 생명나무로 가는 길과 가장 근접한 곳에 정착하려 했을 것이다. 그곳이 에덴 동편 놋 땅이다.

  추방된 아담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에덴동산 동편에 살았는지는 추측의 영역이지만 가인은 에덴동산과 밀접한 에덴 동편 놋 땅에 살았다는 것은 창세기 저자의 기록이 있기에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가인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있는 곳에 최대한 근접한 곳에 정착지를 마련했고, 그곳이 에덴 동편 놋 땅의 에녹성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명확한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에 언급될 사항들을 모아보면 가인의 에녹성의 위치를 에덴 동편 놋 땅이라 명시한 의미가 점점 드러난다.
 

  2) 가인 – 에녹 – 라멕 vs 에녹 – 라멕 - 노아

  가인의 에녹성 건축이 에덴동산의 재현을 의미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두 번째 성경적 증거로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의 ‘가인 – 에녹 – 라멕 프레임’과 ‘에녹 – 라멕 – 노아 프레임’이 대조를 이루며 나타내는 의미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연관 있는 단어를 반복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보다 진일보 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세트로 묶어서 문학적 프레임을 만들고, 두 프레임을 비교하도록 유도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방법은 히브리인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문학적 기법이어서 창세기를 읽는 히브리인들에겐 아주 쉬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창세기의 첫 번째 독자들은 가인과 셋의 족보 속에 있는 동일한 이름의 프레임을 보고 다음과 같은 문학적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가인 – 에녹 – 라멕 프레임과 에녹 – 라멕 - 노아 프레임이 그려주는 문학적인 이미지
가인 - 에녹 - 라멕 프레임과 에녹 - 라멕 - 노아 프레임이 그려주는 문학적인 이미지

 
 
  가인은 노아와 대조되고, 가인의 에녹은 셋의 에녹과 대비된다. 마찬가지로 가인의 라멕은 셋의 라멕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위 6명의 인물의 이름이 소개되고 이름에 따른 설명이 첨가되어 있어 명백하게 눈에 띈다. 가인과 셋의 족보를 보면 이 사람들 외 다른 사람들에게는 “~를 낳고, ~을 향수하다 죽었더라”라는 동일한 패턴의 설명만 있지 이름에 첨가되는 부가 설명은 없다.
 
  가장 먼저, 가인과 노아는 다른 이름이지만 아담이 받은 저주로 보면 서로 상반된 인물로 대조가 된다. 가인은 아담이 받은 저주를 더 악화시켰다. 창 3:17을 보면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땅이 아담의 생업을 방해한다. 하지만 가인의 범죄는 아담이 받은 저주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어 땅이 가인을 저주하여 가인이 땅을 경작해도 소득을 전혀 주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가인은 땅을 피하여 방황하는 자가 된다(창 4:11-12).
 
  창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4:11-12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와 반대로 노아는 아담이 받은 저주의 고통을 해소해 준다.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가인과 노아의 대조는 아담을 중심으로 대칭되어 ‘유리’와 ‘안위’로 정반대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두 사람은 프레임의 시작과 마무리라는 위치적인 대조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프레임의 시작과 끝을 선명하게 그려준다.
 
  무엇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이러한 대조를 만들어 놓았을까? 그것은 가인(또한 노아도)을 아담과 비견되는 인물로 그리려는 것이다. 이것에 가인의 제사가 아담의 범죄와 맥을 같이 한다는 지난 포스팅의 결론을 추가하면 창세기 저자는 계속해서 가인을 아담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동명이인 에녹의 대조를 보자. 가인의 에녹은 가인이 만든 거짓 에덴 에녹성이 된다. 이 에덴은 아담의 에덴보다 더 유토피아적인 에덴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담과 가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를 무효화하고 불신과 교만, 악과 죽음으로 가득 찬 거짓 에덴이다.
 
  그러면 셋의 에녹은 어떻게 설명되었는가? 창세기 저자는 셋의 에녹은 아담이 살던 에덴의 궁극적 실체, 진짜 에덴인 하나님으로 연결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셋의 에녹이 에덴의 주인, 참 에덴인 하나님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에 비교되는 가인의 에녹(성)은 구조적으로 에덴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 에녹성의 위치를 “에덴 동편”이라는 해설한 것을 첨가하면 가인의 에녹성은 단순히 가인이 정착한 고대 도시가 아니라 에덴동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가인의 에덴, 에녹성은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는 악한 소망의 결정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라멕은 가인의 라멕과 셋의 라멕은 상반되는 고백과 결과로 대조된다. 가인의 라멕은 가인의 저주(아담의 저주도 포함)를 무효화하고 가인에게 저주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검가를 말했고 가인이 시작한 살인과 죽음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셋의 라멕은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를 해소하는 안위를 아들 노아에 대한 예언적인 고백으로 선언했고 홍수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노아를 낳았다.
 
  이러한 대조는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2-4장에 기록된 성경 저자의 표현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꿀팁이 된다. 가인, 에녹, 라멕, 노아라는 명칭의 반복과 문학적 프레임은 저자의 메시지를 품고 있는 문학적 도구이다. 이로서 창세기 저자는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가인을 아담과 에덴으로 연결하고 라멕을 가인과 그가 받은 저주와 연결하고 있다.
 
 

3. 가인의 에녹성의 번성에 대해 창세기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가인의 에녹성과 그 후손들의 번창에 대한 부분을 창세기에 대한 설교집이나 해설서 등을 보면 대부분이 고대 원역사를 창세기 저자가 기록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 당시 있었던 일을 기록했으니 이 평가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의 흐름으로 보면 맥락이 어울리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이루어 놓은 에녹성의 놀라운 발전상은 창세기 문맥으로 보면 당혹스럽다. 가인은 아담보다 더 심각한 저주를 받았다. 그는 더 이상 농사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어 방황하는 저주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에녹성을 건축해서 정착했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 도구의 발달과 예술 문화 부흥을 이루어 라멕의 경우 하나님의 무한 보호를 공언할 정도로 에덴동산에 버금가는 안녕을 누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형벌이 아무 소용이 없어진 것처럼 보여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1) 에녹성의 놀라운 발달 : 아담이 받은 저주의 무효화

  가인의 에녹성은 그의 후손들을 통해 놀라운 기술적 문화적 발달을 만들어냈다고 성경 저자는 기록했다. 언젠가 경제 전문가가 에녹성에 대한 성경 기록을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을 읽은 일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1차 산업인 농업을 뛰어넘은 2차 3차 산업에 이른 혁명 같은 발전으로 고대 도시 사회의 시초가 될 수 있다 평가했다.
 
  4:20은 가인의 후손인 야발을 통해 육축업이 생겨났다 말한다. 학자들은 이를 대량 가축 사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대량 가축 사육이 가능해지면 고기와 우유 등을 통한 대량의 단백질 공급이 가능해져 농업으로 식량을 삼았던 식생활에 일대 진전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사람들의 건강과 수명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본문의 '가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고팔 수 있는 가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야발과 야발의 후손들에 의해 가축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이로 에녹성에는 자산이 늘어날 것이고, 재산을 축척한 부유층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4:22는 두발가인을 통해서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가 생산되었다 말한다. 학자들은 두발가인을 대장장이로 본다. 그와 그의 자손들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 도구의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각양 날카로운 기계가 무엇인지에 따라 도구의 혁명은 에녹성의 모습을 완전히 달리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산업이나 농업용 기계라면 마치 산업 혁명과 비슷한 생산성의 발달이 있었을 것이고, 군수용 기계라면 에녹성은 군사력이 막강한 성으로 위세를 떨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에녹성에는 음악과 예술이 있었다. 4:21은 유발을 통해서 수금과 퉁소와 같은 악기를 통해서 오늘날로 말하면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발달했다고 말했다. 가인의 에녹성에는 식량과 돈이 넘치고 음악과 예술이 발달한 여흥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에녹성의 발달과 융성을 창세기 저자는 어떤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가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아담(가인)이 받은 저주의 무효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내려진 아담과 가인의 저주를 무시하고 능가하려 했다.
 
  이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증거로 아담과 가인에게 내려진 땅에 대한 저주가 에녹성에서는 다른 것으로 완전히 대치된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아담과 가인이 범죄로 받은 저주는 땅과 연관된 저주이다. 아담은 범죄로 인해 경작이 필요 없는 복락원 에덴에서 쫓겨나 땅의 방해로 땀을 흘려 땅의 소산을 먹고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고, 가인은 범죄로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아무 소산을 거둘 수 없게 되고 땅을 피해 유랑하면서 살해의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그런데 가인은 에녹성으로 땅과 땅의 소산과 관련이 없는 목축과 기계를 통해 풍요와 여흥을 발달시켜 아담의 땅에 대한 저주의 상징인 “종신토록 수고”(창 3:17)와 “땀”(창 3:19), 가인이 받은 땅에 대한 저주의 상징인 “방황”(창 4:12, 14)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창 4:14)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담의 범죄와 땅과 연관된 형벌, 그리고 가인의 범죄와 땅과 연관된 형벌이 이어진 후 곧바로 가인의 이미지가 강한 에녹성의 발달된 모습이 기록된 것은 가인의 에녹성이 놀라운 고대 도시로서 발달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에녹성의 건설로 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에 도전해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주목을 끄는 것은 에녹성의 번창 기여한 인물인 두발가인이다. 두발가인이라는 이름은 가인과 직접적으로 대비되는 이름으로 에녹성의 정체를 아주 잘 보여준다. 두발가인이란 이름은 ‘두발’(넘쳐흐르다, 번식하다, 달리다)과 ‘가인’의 합성어로 가인을 넘치도록 번성케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라멕과 함께 가인에게 내려진 형벌을 깨버리겠다는 의지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름이다.
 
  이것들은 가인이 건축한 에녹성의 경제적 문화적 발달, 음악과 예술적 즐거움은 아담은 물론 가인이 받은 저주를 완전히 무색게 한다. 에녹성의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마치 아담과 가인에게 내려진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효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녹성은 하나님의 에덴동산을 대체하는 풍요롭고 안전한 유토피아가 된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가는 길목에 인간이 만든 새로운 에덴이 생겼다 가인 당시인은 말했을지 모른다.
 

  2) 라멕의 검가 : 가인이 받은 저주의 무효화

  이제 라멕에게 초점을 맞출 때다. 라멕은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내려진 아담과 가인의 저주를 무시하고 능가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이기에 중요하다. 창세기 저자는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다. 창세기 저자에게 라멕은 에녹성의 실체를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 인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창세기 저자는 라멕을 어떤 인물로 그리고 있는가?
 
  4:24의 라멕의 검가의 전반부는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수의 약속(4:15)을 인용한 것이고 후반부는 가인이 받은 약속을 자신에게 무한대로 증폭한 버전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방랑자가 된 가인은 타인의 살해의 위협이 무서워 떨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신적인 보호의 복수 약속을 주셨다(4:14-15).
 
  라멕이 4:24에 외친 신적인 복수 선언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준 복수 약속을 훨씬 뛰어넘는 복수 선언이다. 참고로 히브리적 개념에서 칠십칠 배는 가인에게 주어진 복수의 수위인 7에 11배를 곱한 것이 아니라 무한대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자신을 해하려 하는 자에게 엄청난 신적인 복수가 가해질 것을 선언한 라멕의 검가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라멕이 그 선언으로 가인과 자신을 연결했고, 가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호의(?)를 자기 자신에게 극단적으로 부풀려서 적용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것으로 우리는 창세기 저자는 라멕을 가인과 연결 지었고, 이에 더 나아가 하나님을 빙자해서 교만의 극치를 나타낸 자로 묘사하려 했다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창세기 저자의 라멕에 대한 묘사는 한 마디로 가인에게 내려진 저주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에녹성 사람들에게 편만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라멕을 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보호해 주겠다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멕의 허풍은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엄중함을 무시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여 가인에게 내려진 저주를 희화화한 것이다. 그 결과 라멕은 살인으로 가인과 연결되고, 가인이 받은 하나님의 복수 약속과도 연결된다.
 

  3) 악과 죽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거짓 에덴 에녹성

  또한 라멕은 에녹성에 만들어진 에덴의 비참한 참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23-24에 기록된 “라멕의 검가”이다.
 
  창 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의 검가는 라멕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자랑삼아 떠드는 노래다. 라멕은 어떤 소년에게 창상을 입어 소년을 죽였다 자랑했다. 어른이 어린이를 창상(간단한 타박상이라 한다)에 대한 보복으로 살인을 했다. 어른과 어린이, 창상과 살인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어 라멕의 자랑이 얼마나 뻔뻔하고 끔찍한 것인가를 느끼도록 해준다.
 
  문제는 라멕이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을 자랑하고, 자기에게 대드는 자는 하늘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복수가 내릴 것이라 선언하면서 가인에게 주어진 복수의 약속으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라멕은 가인에게 내려진 형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가인이 받은 하나님의 복수 약속을 이용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했다.
 
  라멕은 당시인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에녹성 출신 인기인이었을 것이라 학자들은 본다. 그렇다면 라멕은 가인의 에녹성의 실제 정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에녹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과 교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처절하게 살인 복수하는 냉혹한 악이 다스리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이다.
 
  창세기 저자는 에녹성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정보를 준다. 에녹성에는 에덴 뺨치는 경제 문화적 발달과 융성함이 있다. 아담이 받은 저주는 물론 가인이 받은 저주가 무색할 정도로 에녹성은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범죄자를 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자신을 위해서는 무참히 사람을 죽여도 자랑스러운 극단적인 악이 지배했다.
 

4.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죽음 프레임

  가인 이야기를 아담 이야기와 연결해서 살펴보면 한 가지 중요한 프레임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 죽음’ 프레임이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것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반역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고 에덴을 상실한다. 가인도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만들려는 죄를 저지르고 결국 동생을 죽인다. 그러자 가인은 에덴보다 더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에녹성을 건축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을 자랑하는 라멕을 만들었다.
 
  이 프레임의 반복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위를 넓혀 전체 성경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경의 요약이라 가르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 하면 그 결과가 이웃을 대적하고 범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을 성경적인 원리에서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대적의 결말은 반드시 사람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내가 죽고 이웃이 죽는다.
 
 

5. 마무리

  가인의 에녹성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의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가인은 범죄 한 제2의 아담이다. 가인은 다양한 측면에서 아담의 범죄를 따라가고, 아담을 능가했다.
 
  그는 아담처럼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다 믿었고 행했다.
  그는 아담과 같이 땅과 연관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벌은 아담이 받은 형벌보다 강도가 세다.
  그는 아담과 같이 에덴을 지향했고, 아담이 시도하지 않은 자신만의 에덴을 건설했다.
  그는 아담과 같이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결과를 남겼다.
  아담은 하지 않았지만 그와 그의 후손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형벌에 도전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 이야기와 에녹성 건축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세기 저자의 메시지로 보인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노아의 홍수 전과 노아 홍수 이후 바밸탑 사건에서 또 나타난다.
 
  본 글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쓰였다. 그러니 세부적인 해석의 결과보다는 방법론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면 한다. TV 시청이나 영화 관람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사용된 성경 해석 방법을 모두 따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그저 내 맘대로 묵상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성경에 담긴 성경 저자가 기록해 놓은 원의미를 파악하는 데로 성경 읽기가 발전되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