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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창세기

가인의 제사 이야기(창 4:1-7)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by 예다준 2023. 11. 23.

가인의 제사 이야기(창 4:1-7)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성경에 기록된 바 그대로 알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필자도 그런 소망으로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연구해 왔다. 오늘은 창세기 중 해석이 어렵기로 유명한 창세기 전반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법을 소개한다. 그중 첫걸음으로 가인의 제사 이야기를 통해 성경 저자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께 나누고 생각해 본다.

 

 

 

 

  종종 이전에는 몰랐고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발상, 새로운 눈이 생기는 일이 있다. 최근 오랜만에 창세기를 읽다가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해 방법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필자는 신약 성경을 문학적이고 구조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이 방법에 근거해서 창세기를 이전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이 보였다는 말이다.

 

  이 이해는 아담에서 노아와 바벨탑 사건에 이르는 창세기 2-11장에 이르는 부분을 배워 알고 있던 바와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었다. 그 전체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가장 언급하기 쉬운 가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해 본다.

 

 

 

1. 가인의 제사 이야기에서 창세기 저자가 진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인 해석은 가인의 제사 이야기의 키포인트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를 알아내는 데에 성경 연구가 집중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인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가인의 살인, 가인의 에녹성 건설, 가인 후손의 모습)은 가인의 제사와 직결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럴까? 이것이 창세기 저자가 가인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일까? 그렇게 볼 수 없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단순한 원리 때문이다. 말을 하건 글을 쓰건 화자나 필자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강조하게 된다. 이와 비례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 것들은 가능하면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비결 중 하나이다.

 

  이런 전제로 가인 이야기를 보면 가인의 제사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허술한데 반해 제사가 실패한 것에 대한 가인의 반응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 비판이 강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저자가 가인의 제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통해서 듣게 되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내용이 굉장히 단순해서 놀라게 된다.

  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다(창 4:3).

  ②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않았다(창 4:5)

 

  창세기 저자는 우리가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에게 열납 되지 않은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창세기 저자가 가인의 제사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 것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창세기 저자는 가인의 제사의 잘못된 점과 아벨의 제사의 잘된 점을 말하고 싶었는데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지나쳐 버렸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고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저자의 글쓰기 능력을 신뢰할 수 없고 그가 기록한 창세기를 통해 교훈받기도 어렵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성경 연구나 설교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았던 자신의 제물이 거부를 당한 것에 대한 가인의 분노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과 설명은 상대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성경에 할당된 분량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내용은 3절 분량이고,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과 비판도 동일하게 3절 분량으로 동등하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전통적 해석이 주로 언급하는 주제들(믿음의 제사 또는 양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 등)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고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엉뚱한 것이 언급된다.

 

  창 4:6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자 가인은 마음에 분노를 품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말한다. 가인은 분해서 낯빛이 변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한 것에 대해 “선을 행함”으로 분석하셨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에서 “선”을 곧바로 “믿음”과 연결하는 것은 창세기 본문에 입각한 해석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해석은 해석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려는 일종의 억해이다. 왜 그런가? 창세기 저자는 이미 2-3장에 선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4장에서 선은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결정하는 신적인 결정권을 의미한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아는 분이다. 이 말은 선과 악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최종 권위자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선과 악에 대한 자유 결정권을 가진 분이 아담 이야기로부터 가인 이야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특징이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은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권세를 탐할 때 일어났다.

 

  그 후 4장의 가인의 제사 이야기에 “선”에 대한 것이 또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지적한 선은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아담이 시도했던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세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창세기 문맥 흐름에 가장 적합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가인의 제사 실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가인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인 4:7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린다. 본문을 본문 그대로 보면, 하나님의 분석은 가인이 드린 제물의 문제점에도 있지 않고 그가 믿음이 없음에도 있지 않다. 다만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에 대한 가인의 분노와 그 분노의 실체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정황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가인은 하나님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제물을 드렸다. 곧 자신이 하나님께 선을 행하여 드릴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가인이 선이라 생각한 제물은 거절당하고 가인의 선은 선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이 선이라 생각한 것을 거부한 하나님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에 대해 반감이 들었고, 이것이 낯빛이 변하는 분노로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이러한 반응의 정체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셨다.

  ① 너는 나에게 선을 행하여 줄 수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낯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② 하나님께 선을 행하여 드릴 수 없다면 문 앞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죄를 다스릴 수도 없을 것이다. 죄를 다스려 선을 행할 수 있지는 증명해 보아라.

 

  하지만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아우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고 중한 죄에 대한 벌로 두려움에 떠는 자가 되었다(4:13).

 

  이렇게 가인 이야기를 보면 가인 이야기는 제사에 대한 것도 아니고 믿음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가인 이야기는 가인이 하나님께 선을 만들어 드릴 수도 없고 죄를 다스릴 수도 없는 자였지만 아담과 비슷하게 선을 행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행동했다는 사실, 아담의 죄를 반복해서 시도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내러티브로 보인다.

 

 

2. 가인 제사 이야기는 아담의 타락 이야기의 가인 버전이다.

  이상의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면, 가인 이야기는 아담의 타락 이야기와 주제가 동일한 가인 버전이 된다. 동일한 맥락이다. 아담의 타락은 단순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금지 행동을 어긴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아담의 타락의 실체는 선과 악을 결정하는(아는) 하나님의 신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자신도 선과 악을 아는 자가 되어 선악을 결정지으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성경은 이를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 설명했다(창 3:5).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아담의 반역 행위가 타락의 실체였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와 같은 아담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가인에게서 반복되었다는 것이 가인 이야기의 진짜 스토리로 보인다. 가인은 자신이 만든 선이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곧 가인은 아담과 같이 선을 만들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여긴 것이다. 하지만 가인이 만든 선은 거부되고 오히려 가인의 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소원을 드러내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소원을 다스려보라고 충고하셨지만 가인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이로서 가인은 선을 만들 수도 죄를 다스릴 수도 없는 선과 악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 무지한 자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3. 가인의 제사 이야기 이후 계속되는 가인의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

  이와 같은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가인의 제사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을 동일한 맥락으로 설명하면 아주 자연스럽다는 연결된다는 사실로 확증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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