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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범죄(창 3:1-7)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by 예다준 2023. 12. 18.

아담과 하와의 범죄(창 3:1-7)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들라 하면 대부분이 아담의 범죄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론적 심판 세 가지를 들 것이다.

  그중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모든 인류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을 가져온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모두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복락의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론적 심판도 일어날 필요가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범죄로 에덴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
범죄로 에덴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건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를 죄가 지배하게 되었다. 죄가 모든 사람을 다스려 인간의 문화가 아루리 발달해도 그 안에는 죽음의 그늘인 고통과 괴로움이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정확하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정확하게 아담의 범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본다.
 
  이 포스팅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한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아담의 범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분석하는 방법을 공유하는 것에  포커스를 둔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이제껏 아담의 범죄에 대한 설명은 많이 들었지만 성경 저자가 아담의 범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이를 시도해 본다.
 

 
 

1. 창 3:1-7에 창세기 저자가 만들어 놓은 문학적 구조 알아보기

  아담의 범죄에 대해 알아보려면 창세기 저자가 창세기 3장에 만들어 놓은 문학적 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건물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벽돌이나 시멘트로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기 전에 철근으로 집의 뼈대를 든든하게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같다. 글에는 벽돌과 같은 스토리(내용)과 철근 기둥과 같은 글의 구조가 있다. 특히 고대 히브리인들의 글 쓰는 방법은 오늘 우리들의 경우와는 다르게 글의 내용은 물론 글의 구조가 눈에 띄게 발달했고, 어떤 경우에는 글의 구조가 성경 이해에 결정적일 때가 있다.
 
  오늘 우리들의 글쓰기는 글의 구조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 글의 구조를 무시하고 글의 내용에만 집중해서 글의 내용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한 글의 구조가 주는 메시지(구조적 메시지)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설사 글의 내용을 잘 파악했다 하더라도 글의 구조로 표현된 메시지(구조적 메시지)를 놓치면 결국 성경 저자가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교훈의 많은 부분에 결함이 생기는 해석을 하게 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기록한 창세기 3장도 그런 성경에 해당된다. 이제 창세기 3장에 사용된 성경 저자의 글의 구조와 글의 내용을 통합적으로 살펴보자.
 

  1) 창 3:1-7을 현대적 구조 구분으로 이해하기

  글의 구조를 파악하는 방법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방법이 문단나누기이다. 문단나누기는 문맥이 끊기는 곳을 찾아서 단락을 설정하고 단락별로 주제를 찾는다. 그리고 단락별 주제를 하나로 모아 글의 흐름, 문맥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성경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글의 구조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글의 구조를 순차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차적으로 글 속에 이어지는 문맥을 찾기 때문에 직선적 읽기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성경 저자들은 이 방법 외에 병렬적 쓰기(읽기)를 병행 사용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종합해 보아야만 한다.
 
  먼저 우리들이 많이 사용하는 직선적(순차적) 개념의 문단나누기를 해본다.
 
  우선 본문은 가장 간단하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5절은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고, 6-7은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다. 그러면 아래와 같이 단락이 나누어진다.
 
  1. 뱀의 유혹(3:1-5)
  2. 아담과 하와의 범죄(3:6-7)
 
  이것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문단나누기이다. 이것이 맘에 흡족하지 않으면 보다 세분화된 단락나누기를 할 수 있다. 예로 1번 단락을 뱀과 하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는 방법이다. 2번 단락도 두 부분으로 나누기가 가능하다. 먼저는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고 다음은 선악과를 타먹은 결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문단나누기가 된다.
 
  1. 뱀의 유혹(3:1-5)
    1) 뱀의 질문(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하와의 대답(2-3) “먹을 수 있으나”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3) 뱀의 대답(4-5)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2. 아담과 하와의 범죄(3:6-7)
    1)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타먹음(6)
    2)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타먹은 결과(7)
 
  문단나누기를 보면 성경의 스토리가 한눈에 볼 수 있게 깔끔하게 정리된다. 물론 개인마다 문단나누기가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문단나누기를 한다.
 

  2) 창 3:1-7을 히브리적 구조 구분으로 이해하기

  그러면 성경 저자가 사용한 병렬적 논리를 중심으로 문단나누기를 하면 어떤 모양이 될까? 아래와 같은 동의적 평행법이다.
 
a. 간교하더라(영리한, 영악한, 간교한 : 아룸) / 먹지 말라 하더냐?(먹다 : 아칼)(1)
  b.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죽다 : 무트)(2-4)
    c. 너희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5a)
      d.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알다 : 야다)(5b)
a’.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 먹은지라(먹다 : 아칼)(6)
  b’. 없음
    c’.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7a)
      d’. 자기들이 벗은 줄(아룸밈) 알고(알다 : 야다)(7b)
 
  우선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나누어진 각 단락이 내용보다 특정 개념이나 단어 중심인 것이 매우 생소하다.  이 방법으로 문단을 나무면 때로는 단락의 범위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문단나누기를 할 수 있는지 설명해 보겠다.
 
  ① 가장 먼저, 1절에서 7절은 창세기 저자가 하나의 문단으로 구조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단은 내용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로 구분한 것이다. 글의 구조를 보면 a-b-c-d와 a’-b’-c’-d’가 서로 평행을 이루는 평행법이다.
 
  평행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성경 저자가 평행법을 하나의 문학적 단락으로 지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즉 평행법은 성경 저자의 마음속에 있었던 문학적 단락이다. 그래서 평행법을 가지고 1-7절을 한 단락이라 결론 내리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나 보기에 편한 대로 단락을 나누면 그때부터 해석의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② 게다가 성경 저자는 a와 a’에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를 배치해서 일종의 재담(wordplay)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간교한’의 ‘아룸’과 ‘벗은 줄’의 ‘아룸밈’이다.
  ‘아룸’과 ‘아룸밈’이라는 비슷한 음을 가지면서 내용이 역설적으로 보완되는 단어를 창세기 저자는 배치해서 “아룸을 따른 결과가 아룸밈이 되었다”는 구조적인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간교한의 ‘아룸’은 우리말 성경이 번역한 “간교한”외에 “지혜로운”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뱀이 아룸 하다는 것을 ‘간교한’ 말고 ‘지혜로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말 성경은 아룸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 단어가 wordplay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아룸에 대한 번역을 달리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이 ‘아룸’(지혜롭) 하기 때문에 뱀의 유혹을 따르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믿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정작 가지게 된 결과는 아룸밈(벌거벗음)이 되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역설적 결과를 wordplay로 말한 것이다.
 
  어쨌든 이 wordplay는 1-7절이 하나의 단락이라는 또 하나의 구조적 증거가 된다. wordplay로 1절에서 7절이 하나로 묶인 단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③ 창세기 저자는 각 단락마다 동일한 단어를 대조적인 자리에 반복해서 배치해서 평행법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그 단어를 통해서 서로 대조되는 평행법의 짝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a와 a’에는 ‘먹다’(아칼)가 대조되는 평행법의 짝이다. c와 c’에는 ‘열다’(파카흐)가 대조되는 짝이 되고, d와 d’에는 ‘알다’(야다)가 대조되는 자리에 배치되어 짝이 된다.
 
  우리말로도 동일한 단어나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대조되는 위치에 반복되어 있으면 눈에 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는데 법칙이 없어 마구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동의적 평행법의 모양을 만드는 자리에 배치했다.
 
  그러면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은 반복된 단어들을 보고 머릿속에 a-b-c-d와 a’-b’-c’-d’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동의적 평행법을 상상하게 된다.
 
  ④ 그러면 동일한 단어만 반복한 것인가? 아니다. 동일한 단어가 반복된 단락들을 짝을 지어 연결해 보면 반복 강조, 동의적이나 반의적 수식, 상호 보충 등과 같은 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창세기 저자가 평행법이라는 글의 구조를 만들어서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여주는 메시지와 구분되니까 ‘구조적인 메시지’라 부른다.
 
  c와 c’를 보면 눈이 “열린다”는 표현이 서로 대조된다. c의 눈이 열림은 하나님처럼 되는 열림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진짜로 눈이 열렸다(c).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열린 눈 c’는 완전히 엉뚱한 것이다. 무엇인가? d’가 알려준 ‘벌거벗음’을 보게 되는 열림이다.
  
  이것은 d와 d’의 대조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d와 d’는 “알다”라는 단어로 짝을 이룬다. d의 알다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것이지만 d’의 알다는 벌거벗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반의적으로 대조가 된다.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벌거벗음의 정체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c-d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친근했다. 그런데 c‘-d’에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음을 알고 하나님이 무서워 숨었다. 이로서 아담과 하와에게 열린 눈은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 죄로 인해 하나님이 무섭게된 비참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눈이다.
 
  c와 c’의 대조의 짝과 d와 d’의 대조의 짝을 연결해 보면 하나님처럼 되는 눈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감하게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정작 벌거벗음, 곧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눈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마치 드라마를 보듯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것이 성경 저자가 평행법의 짝을 만들어 성경에 사용한 이유이다.
 
 

2. 창세기 저자는 창 3:1-7에서 아담의 범죄를 어떤 것이라 말하고 있는가?

  창 3:1-7의 구조를 알아보았으니 이제 구조를 기초로 창세기 저자가 아담의 범죄를 어떤 차원으로 설명하는지를 살펴본다.
 

  1) 창세기 저자가 만들어 놓은 선악과에 대한 금지 명령은 [먹다-죽다] 프레임이다. 창세기 저자는 죄의 시작을 이 프레임을 변조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금지 명령은 먹다와 죽다가 주요 동사로 사용되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와도 뱀의 유혹에 대해 (첨가된 표현이 있지만) 그 핵심은 먹다와 죽다로 대답을 했다.
 
  창 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다 – 죽다] 프레임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뱀은 아담이 받은 금단의 명령의 [먹다 – 죽다] 프레임에 “너희 눈이 밝아(열리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먹다 - 열다”(open, 파카흐)를 선악과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일치시켰다.
 
  보다 자세히 보면 뱀은 하나님이 만든 선악과에 대한 프레임을 교묘하게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뱀은 죽다를 반대인 “죽지 않는다”로 바꾸었고, “먹다”를 “열다”로 바꾸었다. 뱀은 하나님의 금단의 명령 “죽다”를 “죽지 않는다”로 바꾸어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먹다”를 금지된 행동이 아니라 도전적인 행동을 발동하게 하는 “열다”로 바꾸었다.
 
  이로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과감하게 범한 것에는 죽지 않는다는 안전감과 눈이 열린다는 도전감이 원인이 되었다 판단할 수 있다.
 

  2) 뱀의 프레임 전환은 신속하게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뱀은 “열다”의 궁극적 결과를 “하나님처럼 되다”라 설명했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선과 악을 아는 것”이라 설명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저자가 만든 [먹다 – 죽다] 프레임과 뱀의 [열다 - (안)죽다] 프레임
창세기 저자가 만든 [먹다 - 죽다] 프레임과 뱀의 [열다 - (안)죽다] 프레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열린다는 설명이 파격적인데, 눈이 열려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프레임 전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열어주었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이 표현으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에 대한 금단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오히려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되도록 해주는 ‘존재의 상승’을 가져다줄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면 창세기 저자는 아담의 범죄의 정체를 무엇으로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존재의 상승이다. 피조물이 창조주같이 되려 한 것이다.
 
  선과 악을 아는 눈이 열림이 무슨 뜻인지 논쟁이 많다. 하지만 성경 본문을 통해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선악을 하는 눈이 열림은 “하나님처럼 됨”과 직결된 것이라는 점이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의 범죄의 정체에 대해 더 이상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무리다. 하지만 창세기 저자가 그리고 있는 아담의 범죄의 정체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죄의 동기와 죄의 행동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창세기 저자는 wordplay를 더 사용했다.

우선 눈이 '열리다'와 비슷한 '보다'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했다 설명하면서 "보다"를 사용했다(3:6). 창세기 저자는 사용한 “보다”(라아)는 뱀의 유혹에 사용된 “열다”와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이다.
 
  또한 눈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보니 선악과가 “좋고, 즐겁고 지혜롭게 만들 수 있어 탐스럽게” 인식되었고 표현하여 뱀을 설명할 때 사용된 "지혜로운"(아룸)과 음은 다루지만 동일한 의미를 가진 이음동의어 "지혜로운"(싸칼)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아룸한(지헤로운) 뱀의 말을 따랐더니 선악과가 지혜롭게(싸칼) 만들어줄 수 있게 보였다는 말이 된다.

  뱀의 표현과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표현이 비슷하다. 창세기 저자는  말재간(wordplay)을 통해서 지혜로운 뱀의 말을 들었더니 지혜가 실제로 느껴졌다는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표현 방법을 무엇이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설교를 통해서 별로 들어본 일이 없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금단의 열매에 부여한 [먹다 – 죽다] 프레임을 [열다 - (안) 죽다] 프레임으로 바꾸어 생각하자 아담에게 뱀의 악한 지혜가 아담에게 실제 인식으로 느껴졌다고 말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는 뱀의 유혹적인 문구 “눈이 열림”의 최초 증상이다. 죄의 행동 이전 단계인 죄의 욕구(공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면 이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죄에 오염되어 죄의 욕구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해석이 타당성 하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행동을 중심으로 죄를 정의하는 해석 방법은 충분한 해석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 죄의 동기와 죄의 행동이 아담의 범죄에 각각 몇 % 씩 분량을 차지하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아담과 하와는 죄에 대한 동기가 열리는 눈을 체험했고, 죄를 범한 후 죄의 세력에 종이 되어 하나님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된 비참해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눈 또한 열린 것이다.
 

  4) 재미있는 것은 죄의 동기(소원)와 죄의 행동을 구분해서 보는 창세기 3장의 관점은 창세기 4장 가인 이야기에서 반복된다.

  가인 이야기에서 가인은 제사로 하나님께 선을 행할 수 있다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태도와 연관된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한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의 선을 거부한 하나님께 반감을 표시한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죄의 동기(소원)를 다스려서 죄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경고의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경험하게 된 (죄의) 눈이 열림의 두 단계 변화와 아주 흡사하다. 만약에 이 해석이 옳다면 창세기 저자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아담을 시작으로 가인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면서 하나님처럼 됨의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추론할 수 있다.
 

 
 
  이 해석이 맞다면 뱀이 유혹으로 제시한 3:5의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앎”은 선과 악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 저자는 선과 악을 결정하는 권세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권세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권세로 창조 질서를 세우셨고, 하나님의 창조 무대에 인간을 배치해서 마치 하나님과 같이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만들어진 규칙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악을 결정하는 통치에 다스림을 받는 다스리는 자로 사는 삶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한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담은 뱀의 유혹에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결정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범죄 하게 된 것이다.
 
 

3. 창세기 저자는 창 3:1-7에서 아담의 범죄의 결과를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1) 아담의 범죄로 뱀이 해준 말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진짜로 아담에게 새 눈이 열렸다. 하지만 이 눈은 뱀이 알려준 눈과 완전히 정반대의 눈이다. 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의 눈,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려워 바라볼 수 없는 눈이 열렸다.
 
  이것을 c-d와 c‘-d’가 평행법으로 그림같이 보여준다.
 
  c. 너희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5a)
    d.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알다 : 야다)(5b)
    -------------------------------------------------
  c’.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7a)
    d’. 자기들이 벗은 줄(아룸밈) 알고(알다 : 야다)(7b)
 
  이것이 창세기 저자가 알려주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게 실존하는 눈이다. 범죄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게 된 아담의 실존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바울의 롬 3:32이다.
 
  롬 3:32를 창세기 3장 아담의 범죄로 보면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의 범죄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의 실존이 서로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히브리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눈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미달되었다 말했다. 하나님의 성품에 미달된 자는 하나님의 성품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두렵게 된다.
 
  아담은 범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아담의 심판자가 되었기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뱀의 유혹을 듣고 상상한 눈의 열림과 완전히 다른 절망과 고통의 눈이 열린 것이다.
 

  2) 재미있는 것은 창세기 저자는 죄의 결과 중 핵심적인 부분인 죽음에 대해 열린 구조를 만들었다.

  본문의 평행법을 보면 b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죽다)는 대조되는 b’ 단락이 없다. 창세기 저자는 b와 대조되는 b’를 언급하지 않고 생략해 버렸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곧바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 범죄의 결과로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누리든 아담은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형벌로 살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창세기를 읽는 독자들은 아담의 범죄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형벌이 어떻게 되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하지만 아담은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범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린다. 이를 보는 독자들은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형벌이 인간이 무엇을 이루거나 행하든 범죄와 심판이라는 프레임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종말론적으로 수렴하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으로 연결된다. 창세기 저자는 이를 비유적인 하나님의 저주 선언으로 나타내서 아주 아득하고 희미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계속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창 3:14-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의 유혹의 말을 따르는 뱀의 후손들은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박살 나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박살 내는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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