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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이 만들고 싶어지는 성경 해석 연습/창세기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창 9:20-29)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①

by 예다준 2024. 1. 14.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창 9:20-29)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①

 
 

  대홍수 심판 전 당대의 완전한 자 의인이었던 노아가 포도주로 만취하여 벌거벗은 이야기는 성경에 익숙한 사람에게도 당혹스러운 스토리이다. 게다가 노아가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말한 아들을 저주한 것은 노아의 정신세계를 의심할 만큼 현대인들에게는 기괴한 일로 보인다.
 
  노아가 보통사람이나 악인이었다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의인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블랙홀은 4,50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도전해 본다.
 

17세기경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공방에 그려진 술에 취한 노아
17세기경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공방에 그려진 술에 취한 노아

 
 

1. 창세기 저자의 스토리 진술 방식의 특징

  필자는 이전 글에서 창세기 저자가 성경 이야기들을 진술하고 구성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고, 이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의 첫 번째 과정이라 주장하면서 창세기 3-6장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해석들을 제시했다.
 
  창세기 저자가 글을 진술하는 방법의 특징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창세기 저자는 특정 ‘단어’(명사나 동사, 형용사 등)를 이어지는 스토리마다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개념적 연관성을 독자들이 발견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연관성을 발견하면 독자는 성경에 기록된 스토리와는 별개의 또 다른 교훈을 볼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창 3:1-7의 아담 이야기에서 사용된 ‘간교한’(아룸)과 ‘벗은’(아룸밈)과 ‘열다’와 ‘알다’의 wordplay이다.
 
  ‘아룸’과 ‘아룸밈’은 발음이 비슷하여 서로 연관된다. ‘아룸’을 현재 우리말 성경의 번역인 ‘간교한’이 아니라 ‘지혜로운’으로 번역하면 우리말로도 ‘아룸’과 ‘아룸밈’ 사이에 연관성이 눈에 띈다. 아담은 ‘아룸’(지혜로운)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은 지식, 곧 지혜를 얻으려 시도했다가 결국 ‘아룸밈’(벌거벗음)을 얻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교훈이 보인다.
 
  여기에 동사인 ‘열다’와 ‘알다’를 추가해서 보면 창세기 저자가 이야기를 진술하면서 넣어둔 이야기 배후에 있는 문학적인 연관성을 더 심도 있게 찾아볼 수 있다.
 

 

  2) 두 번째는 ‘개념’의 반복으로 연관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필자는 가인의 범죄와 저주받음은 단지 가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담과 깊이 연관된 것이라 강조했다. 이는 그의 범죄의 유형이 하와를 닮았고, 그가 받은 저주가 아담의 땅에 대한 저주와 밀접한 것으로 보도록 창세기 저자가 기록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비슷한 관계는 가인의 에녹성과 가인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가인이 에녹성을 건설한 것과 가인의 에녹성에 대한 창세기 저자의 설명은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에녹성을 통해 아담과 가인이 받은 저주에 반항하고 실낙원을 회복하려 했다는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논리는 노아시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래서 노아시대의 타락상을 전통적인 해석인 성적인 타락으로 보기보다는 아담의 범죄와 일맥상통한 다스림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해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는 창세기 저자가 연관된 개념을 아담의 이야기와 가인의 이야기, 더 나아가 노아 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하여 각기 스토리들을 읽는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연관된 문맥으로 인식되도록 만들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3) 세 번째는 한 단계 진일보하여 단어와 개념 등이 합쳐져 ‘정형화된 프레임’을 만들고 이 정형화된 프레임이 이어지는 스토리에서 반복되어 연관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례가 가인과 가인의 후손의 계보를 아담의 아들인 셋의 계보와 비교할 때 보이는 ‘가인 – 에녹 – 라멕’ 프레임과 ‘에녹 – 라멕 – 노아’ 프레임이다. 두 계보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은 대조사항이 보이고 이를 통해 구조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인 - 에녹 -라멕 프레임과 에녹 - 라멕 - 노아 프레임이 그려주는 문학적인 이미지
가인-에녹-라멕 프레임과 에녹-라멕 - 노아 프레임이 그려주는 문학적인 이미지

 

 
  그러니까 창세기 저자는 단순히 가인과 셋의 족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족보 속에 만들어놓은 문학적 프레임을 독자들이 발견하기를 원했다 볼 수 있다. 이것이 창세기에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하면서 창세기 저자가 드러내고 싶은 메시지요 창세기에 문학적 프레임을 만들어 놓은 동기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우리는 당연히 창세기를 볼 때 이 메시지를 찾아야만 한다.
 

  4) 마지막으로 창세기 저자는 위 1-3의 방법을 통합하여 문학적 구조를 성경 안에 만들어 놓았다.

 
  창세기 저자는 위 1-3의 기법들을 법칙 없이 아무렇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연관된 단어, 개념, 프레임들을 고대 히브리인의 논리 방식인 병렬적 논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총집결해서 구조화했다. 그 방법이 1-3을 서로 대조가 되는 위치에 두어서 대조되는 짝을 만드는 평행법이다.
 
  이에 대해서 아담 이야기(창 3:1-7)의 문학적 구조를 설명할 때 아래와 같은 모양이 아담 이야기 속에 조성된 평행법이라 언급했다.
 
a. 간교하더라(영리한, 영악한, 간교한 : 아룸) / 먹지 말라 하더냐?(먹다 : 아칼)(1)
  b.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죽다 : 무트)(2-4)
    c. 너희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5a)
      d.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알다 : 야다)(5b)
a’.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 먹은 지라(먹다 : 아칼)(6)
  b’. 없음
    c’.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열다 : 파카흐)(7a)
      d’. 자기들이 벗은 줄(아룸밈) 알고(알다 : 야다)(7b)
 
  창세기 저자가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창세기를 기록했다면 성경 해석자는 창세기 저자가 본문 속에 넣어둔 방식들을 파악하여 해석의 도구로 삼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전략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된다. 필자가 제시한 글들은 이 방식을 따라 연구한 결과들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 방법은 구약 성경의 난해구절 중 난해구절로 유명한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의 본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준다. 이 시간에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한다.
 
 

2.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창세기 저자의 문학적 도구 1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성경 저자가 창세기안에 만들어놓은 문학적 도구들이 오늘의 본문에는 어떤 모양으로 담겨있을까?
 

  1) 아담이 받은 저주에 안식을 주는 노아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창세기 저자가 노아를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에 대해 명확한 관점이 있으면 온갖 잡스러운 해석으로 성경 본문을 헷갈리게 만드는 주장들을 가려낼 수 있다.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아담이 받은 저주를 해소하고 안식을 주는 자로 본다. 이것이 창세기 저자가 노아를 언급할 때 계속해서 유지했던 저자의 관점이다. 이는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성경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창 5:29를 보면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여호와께서 내린 땅의 저주에서 쉼(안식)을 주는 자라 설명했다.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기에 나오는 ‘땅의 저주’는 아담의 타락으로 아담과 땅 사이에 생긴 저주적 상관관계를 말한다(창 3:17-18).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했다. 그러자 땅은 아담의 생존을 좌우하는 먹고사는 수고에 순응하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방해를 한다. 이에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의 삶을 살다가 종국에는 땅으로 돌아가게 되는 저주받은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창세기 5장에 노아에게 언급된 땅의 저주이다.
 
  창세기 저자는 아담이 받게 된 저주를 ‘안위’(쉼)로 바꾸는 것이 노아의 특징이라 설명하여 노아를 아담과 연결시켰다. 그러기에 노아에 대한 이 이해로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은 성경 본문은 물론 성경 저자의 의도에 따라 성경을 보는 방법이 된다.
 

  2) 땅의 사람인 노아

  이제 문제의 본문을 본다.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9:20에 창세기 저자는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은 노아가 ‘땅의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우리말 성경은 원문 성경의 어색하게 보이는 문장을 의역했다. 본래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문장이 된다.
 
  직역 - “노아는 땅의 사람이 되기 시작했고, 포도원을 심었다.”
  우리말 성경의 의역 -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세기 저자가 노아를 어떤 인물로 전망했는가를 알고 있다면 직역이 본문 해석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은 에덴에서 추방되고 농사꾼, 즉 타락 이후 땅의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땅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게 만들었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고난을 받았다.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아담과 달리 땅의 저주에서 자유로운 육식이라는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 농사를 통한 채소의 섭취는 물론 아담에게는 없었던 육식을 허락했다(창 9:2-3). 이로서 노아는 아담에게 내려진 땅의 저주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지는 선택적인 은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아담과 같이 땅의 사람,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면 아담을 괴롭혔던 땅의 저주가 셈의 족보에 설명된 노아에 대한 설명(창 5:29)과 오버랩되면서 노아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성취될지 주목을 끌게 된다.
 
  창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는 아담을 괴롭혔던 땅의 저주를 해소하는 자로 예언되었고, 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노아는 땅의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노아가 땅의 사람으로 이루어 놓은 결과는 예언된 바와 같이 아담의 형벌인 수고와 땀이 해결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추측으로 보면 노아가 땅의 소산인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주로 만취한 일은 아담을 괴롭혔던 땅의 저주의 형벌이 사라진 안식의 이미지로 볼만한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벌거벗은 아담과 벌거벗은 노아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에서 현재 논쟁이 가장 활발한 부분이 노아의 벌거벗음과 이로 인해 비롯된 가나안에 대한 저주를 동성애 또는 성적인 범죄와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해석도 많지만 이것들은 대부분이 노아의 벌거벗음은 일단 부정적인 개념으로 전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반드시 집고 넘어 가야하는 질문이 있다. 무엇으로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음을 부장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가이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게 해석할 증거가 본문에 있는가이다.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음을 성경 저자가 부정적으로 표현했으면 문제가 없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우리의 선입관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노아가 벌거벗음을 성경 저자는 부정적인 의미로 기록했을까? 포도주에 만취하여 벌거벗은 것은 노아의 타락이나 성적인 부도덕을 의미하는 것으로 창세기 저자는 보았을까?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를 살펴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것을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노아의 벌거벗음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가나안의 아비 함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음을 무작정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해석자로서 정당한 자세가 아니다.
 
  그러면 창세기 저자의 전망에서 볼 때 ‘벌거벗음’이 중요한 주제로 사용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은 좋은 해석 방법이다. 무엇이 있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이다. 범죄 전후 아담과 하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벌거벗음’이다(창 2:25, 3:7, 10, 21).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와 비슷하게 노아의 벌거벗음도 가나안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노아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땅의 소산물인 포도 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마시고 안위를 누리고 있는 노아의 모습은 수고와 고통 없이 하나님이 만들어준 풍요 속에 살았던 아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노아 이야기에서 벌거벗음을 ‘보고 알려준 행위’(창 9:22)는 저주로 ‘보지 않고 가린 행위’는 축복으로 갈라진다는 점에서 아담 이야기에서 아담의 벌거벗음을 알려준 뱀과 아담의 두려움의 벌거벗음을 가죽 옷으로 가려준 하나님을 연상케 한다.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알리다. 입증하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가리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통해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여주려 했다 추론할 수 있다. 노아를 통해 에덴의 아담과 범죄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담을 보호했던 하나님의 모습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에덴의 안식을 실현한 제2의 아담이다.
 
  실제로 대홍수 심판으로 세상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홍수 이전 타락한 세상과 연속적인 것은 노아와 그의 식구들 뿐이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의인이었고 아담을 괴롭혔던 땅의 저주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식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직후였으므로 노아가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을 때는 역사상 아담의 에덴과 가장 흡사한 의롭고 풍요로운 시기라 말할 수 있다.
 
  현대 우리는 술 취함을 자기 절제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벌거벗음 타인에게 노출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래서 노아의 포도주 이야기를 보면 자동적으로 현대적인 필터가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창세기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 벌거벗음이 저주와 축복으로 이어지는 결말의 공통성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이 전통적인 해석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문제를 내포한 부정적 행동이 아니었다면, 그다음으로 중요게 주목되는 것이 벌거벗음이 결국 두려움과 저주로 변해버린 아담과 노아 이야기의 공통된 결말이다.
 
  뱀의 개입으로 아담의 벌거벗음은 두려움으로 변했고, 가나안의 아비 함의 개입으로 노아의 벌거벗음이 저주로 변하고 이와 상응해서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고 가려줌으로 축복을 받는 셈과 야벳의 결말은 아담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의 연관성을 더욱더 짙게 해 준다.
 
  벌거벗은 아담에게 뱀이 개입하여 아담의 평화가 깨진 것과 같이 두 번째 아담인 노아의 안위도 함의 개입으로 깨져 아담이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 잠시 존재했던 가장 의롭고 풍요로왔던 노아의 안위의 동산도 사라졌다.
 
  벌거벗음을 알려주고 말해준 뱀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아비 노아의 벌거벗음을 알려주고 발설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 이와 반대로 노아의 나머지 두 아들의 행동, 아비 노아의 나체를 보지 않았고 가려준 것은 마치 벌거벗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입혀준 하나님의 모습과 연결된다.
 

  5) 중간 결론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모아보면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아담의 그늘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노아의 술취함과 벌거벗은 이야기는 노아를 제2의 아담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 저자의 의도는 물론 성경 본문의 문맥에 가장 충실한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우선 창세기 저자는 셋의 족보를 통해서 노아를 아담의 저주를 해소한 자로 묘사해서 노아와 아담의 연관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보면 땅의 사람으로 포도를 생산해서 마음껏 마시고 벌거벗은 노아의 모습은 에덴에서 만족과 자유를 누리던 아담을 회복한 그림으로 보인다. 게다가 노아의 벌거벗음이 제3의 인물의 출현으로 깨지면서 저주를 만들어 내는 것도 타락한 아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해석은 아마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성경 학자들의 차원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논의되고 있는 해석이다. 이 해석이 오늘 우리의 생각과 이슈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성경 본문과 성경 저자의 의도를 따라 해석할 때 가장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 포스팅에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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